역사의 이치는 때와 시기에 근거한다. 때란 시간이요, 시기(時期)란 날짜를 말한다. 영어 성경에도 때는 ‘time'으로, 시기는 ’date'로 표현하였다. 이 땅을 다녀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이스라엘의 회복의 때가 언제인지를 묻는 제자들의 질문에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바 아니요”(행1:7)라고 대답하셨다. 그 유명한 지혜서인 전도서 3장 1절에도 보면,“범사에 기한이 있고 천하만사가 다 때가 있나니”라고 했다. 시간과 세월과 역사라는 것이 시분초로 이루어진 낮과 밤과 날짜와 계절의 변화 속에서 달이 가고 해가 바뀌어 세월을 이루고 역사가 변천해 가는 것이다. 성경은 때에 관한 기록인 ‘태초에’라는 말씀으로 창세기의 기록을 시작하였고 마지막 책인 요한 계시록의 끝도“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라는 재림의 때를 소망하는 기도의 형식으로 마무리 되어 있다. 그렇다. 사람이 살아가는 한 생이 때와 시기의 창조자요 주관자이신 그 분 안에 있는 것이다. 개인의 생로병사(生老病死)와 역사의 흥망성쇠(興亡盛衰)와 삶의 희로애락(喜怒哀樂)이 그 분의 손 안에 있다. 이와 같은 때와 시기를 잘 깨달아 아는 것이 삶의 이치인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조 때부터‘철나자 죽는다.’는 말을 해 왔다. 철이 든다는 말은 한 해를 살아가면서 이십 사 절기의 때를 알아야 하듯이 때와 시기의 소중함을 깨달아 아는 것처럼 소중한 것이 없음을 강조하는 말이다. 흔히 인생을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에 비유하고는 한다. 소년기는 봄이요 청년기는 여름이요 장년기는 가을이요 노년기는 겨울이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개인에 따라서는 봄에 지는 꽃도 있고 여름에 떨어지는 열매도 있다. 가을이 깊어 가도록 꽃도 시들하고 열매는 더욱이나 찾기 어려운 나무와 같은 인생도 있다. 경우에 따라서는 언제 봄과 여름과 가을이 다 지나가고 벌써 인생의 겨울이 다가 왔나 하고 아쉬움 속에 회한을 곱씹는 인생도 없지 않다.
전도서 3장 2절에서 8절까지에 보면 열네 가지 경우의 때를 통한 인생의 교훈을 시적으로 말씀해 주고 있다. 묵상해 보면 그 어느 한 때도 놓쳐서는 안 되는 때와 시기에 대한 가르침이다.
“날 때가 있고 죽을 때가 있으며
심을 때가 있고 심은 것을 뽑을 때가 있으며
죽일 때가 있고 치료할 때가 있으며
헐 때가 있고 세울 때가 있으며
울 때가 있고 웃을 때가 있으며
슬퍼할 때가 있고 춤출 때가 있으며
돌을 던져 버릴 때가 있고 돌을 거둘 때가 있으며
안을 때가 있고 안는 일을 멀리 할 때가 있으며
찾을 때가 있고 잃을 때가 있으며
지킬 때가 있고 버릴 때가 있으며
찢을 때가 있고 꿰맬 때가 있으며
잠잠할 때가 있고 말할 때가 있으며
사랑할 때가 있고 미워할 때가 있으며
전쟁할 때가 있고 평화할 때가 있느니라.”
그 모든 때에 대한 교훈 속에 우리 각 사람의 한 생이 다 담겨 있는 듯하다. 그러므로 사람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아갈 수 있는 존재처럼 살아서는 안 된다.
요한복음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철저하게 자신의 삶을 이 ‘때’에 근거해서 살아가신 구주이신 것을 드러내고 있다. 그는 세상 창조 이 전의 때인 태초로부터 말씀으로 하나님 곁에 계셨다. 그는 때가 되니 예언의 말씀을 따라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 예수께서 빌립과 나다니엘을 차례대로 부르시던 때에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내리락 하는 것을 볼 수 있는 때가 올 것이라고 예언해 주신 적도 있다.(요1:43-51) 그리고 가나의 혼인 잔치 집에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표적의 현장에서 예수는 때에 관한 자신의 입장을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씀한 적이 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요2:4) 포도주가 떨어진 잔치 집에서 무엇인가 역할을 해 주기를 기대하신 어머니 앞에 예수는 아직 그의 때가 이르지 아니하였다는 단호한 대답을 하신 것이다. 그리고 잠시 후에 하인들을 시켜서 물을 떠다가 빈 항아리에 채우게 하시고 그 물을 연회장에게 떠다 주게 하였을 때에 극상품 포도주를 만들어 내는 기적을 행하신 것이다. 때로 하면 잠시 전과 잠시 후인데 그 상황은 전혀 극에서 극으로 바뀐 것이다.
이것이 때의 교훈이다. 그 모든 것이 때의 주인이신 창조주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누군가가 그 때와 시간을 주관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 때와 시기로 이어지는 역사 속에 나그네처럼 잠시 살다가 역사 속에 사라져 가는 것이다. 사람이 이 세상에 살아가면서 소유에 집착하며 살아가지만 소유의 개념으로 붙들어 둘 수 있는 것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최근에 TV 드라마인 ‘뿌리 깊은 나무’로 다시 생각해 보게 하는 인물인 세종대왕(A..D. 1397-1450)도 53년의 그리 길지 않은 생을 살았다. 광화문 큰 길의 앞뒤로 자리하여 앉아 있는 세종대왕이나 서 있는 이순신(A. D. 1545-1598) 장군이나 두 인물 다 같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저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며 남긴 것은 업적이지 소유가 절대로 아니다. 인간이 세상을 소유에 집착하며 살아가다보면 그보다 초라한 것이 없다. 왜 그 많은 유명인들이 중간에 무너지거나 넘어지는가. 결국은 소유에 집착하기 때문이 아닌가. 이 세상에는 물질이든 사람이든 소유의 대상으로 상대하면 그 관계가 병들고 냄새 나고 타락할 수밖에 없는 법이다.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5장 26절에서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를 말씀하셨다. 그리고 16장에서는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만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요16:2)고 하셨다. 그리고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너희로 그 때를 당하면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 처음부터 이 말을 하지 아니한 것은 내가 너희와 함께 있었음이라.”(요16:4)고 여전히 때에 관한 교훈을 중심으로 주님 자신이 메시아로서 어떤 일들을 겪으실 것인가를 언급해 주셨다. 때가 되니 예수는 칼과 몽치를 든 자들에게 붙잡히셨고 가야바와 안나스와 빌라도에 의하여 온갖 고난과 심문을 받으신 후에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다. 그리고 장사된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시므로 부활의 주님이 되신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때와 시기를 주관하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손 안에서 이루어진 구속(救贖)의 역사(歷史)이다.
얼마 전에 운전 중에 케루비니(Luigi Cherubini, A. D. 1760-1842)의 진혼곡인 교회 음악, 레퀴엠(requiem)을 들은 적이 있다. 이탈리아에서 태어나고 프랑스에서 활동한 교회 음악의 거장인 그에게서 지대한 영향을 받은 인물이 베토벤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 케루비니의 레퀴엠을 듣고 있노라면 때와 시기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손길이 절로 느껴지는 장엄함을 느끼게 한다. 세상은 성탄의 때가 다가 오는 것을 상업적으로 들떠서 알리는 이와 같은 송년의 때에 이 땅에 평화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의 진정한 의미와 그 교훈을 다시금 간직하며 소망과 기쁨 중에 절망과 우울을 이기고 참된 삶의 평화를 은총으로 공급받는 때를 살아가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 끝 날까지 성도들의 곁에서 항상 함께 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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