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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이순신인가 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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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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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3-06-22 18:50 조회 16,386 댓글 0
 
어렸을 적, 초등학교 때에 이순신 장군에 관한 책을 단 한권도 읽지 않고 자란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시골 초등학교의 얼마 안 되는 도서실 책꽂이에 마련된 책들 중에서 눈에 띄는“위인전집”중에 빠질 수 없는 인물이 이순신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선조들은 주로 문관벼슬을 이어온 양반계급의 집안이었으나 조부인 백록(百祿)이 기묘사화(己卯士禍)의 참변을 겪게 된 뒤 아버지 정(貞)도 관직의 뜻을 버리고 평민으로 넉넉하지 못하게 지냈다. 인조 제 1년이던 1545년 3월 8일(음)에 당시 한양에서 셋째 아들로 태어나 어머니의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성장했다. 22살 때부터 무예를 배우기 시작하여 28살 때인 1572년(선조 5)에 훈련원별과(訓鍊院別科)에 응시했으나 달리던 말이 넘어지며 낙마하여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을 입어 등과에 실패하였다. 가까이에 있는 버드나무 껍질을 벗겨 부상당한 환부를 묶어서 스스로 응급처치를 하였다는 일화는 어렸을 적에 읽은 위인 전집의 내용으로 기억에 새롭다. 4년 후인 1576년 봄, 서른두 살 때에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12월 귀양지로 여기던 함경도 동구비보(童仇非堡)의 권관(權管)으로 부임한 것을 시작으로 온갖 시기와 질투와 중상과 모함을 극복하며 53살에 전사하기까지 오직 북방 오랑캐의 침입과 일본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일에 매진하던 애국충정에 불타는 시대적인 탁월한 무관이었다. 그런 그는 전쟁 중에도 날마다 꼼꼼하게 전쟁 일기를 기록하였다. 찾아오는 막하 장령들과 공사를 논의하며 새벽 닭 우는 소리를 들었고, 출전하지 않는 날에는 동헌에 나가 집무했으며, 틈을 내어 막료들과 활을 쏠 때가 많았다. 그는 이러한 진중생활 속에서도 한 잔 술로 마음을 달래가며 시가(詩歌)를 읊었고 특히 달 밝은 밤이면 감상에 젖어 잠 못 이루는 때가 많았다. 또 가야금의 줄을 매었고 음악 감상에 심취하기도 했다.
 
그의 <난중일기〉는 거리낌 없는 사실의 기록과 당일의 날씨와 꿈자리의 음미와 어머니를 그리는 회포와 달밤의 감상과 투병생활과 또 애끓는 정의감과 울분과 박해와 수난으로 점철된 7년 전란의 진중일기이다. 그 기록내용이 지니는 사료학적 가치는 물론 일기 문학으로서도 극치를 이룬다. 이순신은 아쉽게도 당대에 그려진 초상화가 없기 때문에 그의 풍모를 짐작할 수가 없으며 오늘 날 그려진 초상화들은 모두가 다 상상에 의한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광화문에 마련된 그의 동상도 상상에 근거한 것일 수 있다. 유성룡은〈징비록>에서“이순신은 말과 웃음이 적은 사람이었고 그의 바르고 단정한 용모는 수업 근신하는 선비와 같았으나 내면으로는 담력이 넘쳤다"는 기록을 통해 그의 인품과 용모를 전해 주고 있다. 한편 이순신의 진(陣)에 함께 삼가현감으로 머문 일이 있는 고상안(高尙顔)이 그의 말과 글과 지혜로움에 탄복한 글들이 오늘 날까지 전해진다. 그러나 그의 용모에서‘복을 갖추지 못한 장수'(非福將也)로 느낀 것을 보면 외모가 뛰어나지는 못하였던 것 같다. 여러 달 동안 진(陣)을 같이했던 진린은“이순신은 천지를 주무르는 재주와 나라를 바로잡은 공이 있다”(李舜臣有 經天緯地之才 補天浴日之功)고 극찬하였다. 그 충무공(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의 <난중일기>가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2013. 6. 18) 그 내용은 임진왜란 때에 진중(陣中)에서 적은 7년 여 간의 전쟁일기이다. 조선 선조 25년인 AD 1592년 5월 1일부터 선조 31년인 1598년 9월 17일까지의 일을 한문으로 쓴 것이다. 필사본(筆寫本)으로 7책 205장으로 엮어져 있고 오늘 날 충남 현충사에 보관되어 있는 국보 제76호이다. 이순신이 남긴 글들 중에 이런 내용이 전해진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2월에 진도군수에 임명되었으나 부임 전에 다시 전라좌도수군절도사로 임명되었다. 2월 13일에 정읍을 떠나 지금의 여수인 전라좌수영(全羅左水營)에 부임했다.

부임 후 왜구의 내침을 염려하여 바로 영내 각 진의 군비를 점검하는 한편 후일 철갑선(鐵甲船)의 세계적 선구(先驅)로 평가될 거북선(龜船)의 건조에 착수했다. 이듬해인 1592년 3-4월경에는 새로 건조한 거북선에서 지자포(地字砲)와 현자포(玄字砲)를 쏘는 것을 시험하고 있었다. 같은 해 4월 13일에 일본군 20여만 명이 조선을 침략하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경상도 부산포를 중심으로 침략하는 왜선 350여척의 침공으로 당황해 하는 경상우수사 원균(元均)과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의 구원 요청을 받아들이고 전라도에서 출정하여 이순신 함대는 경상도 해역에 전후 4차의 출동을 감행하여 크고 작은 10여 회의 잇따른 해전에서 연전연승했다. 1597년 10월 14일 셋째 아들 면(葂)이 아산에서 왜적과 싸우다 전사했다는 부고가 온 뒤로부터는 이순신의 심신은 점점 쇠약해져 갔고 자주 병을 앓게 되었다. 1598년 2월 18일에 고금도(古今島)를 본거지로 선정하여 진영을 건설하고 피난민들의 정착과 생업을 도왔다. 7월 16일에는 명나라 수군도독 진린(陳璘)이 수군 5,000명을 거느리고 와 조선수군과 합세했다. 8월 19일에 일본군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왜군은 일제히 철군을 시작했다. 순천에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진린과 이순신에게 뇌물을 보내며 퇴각로의 보장을 애걸했으나 이순신은‘조각배도 돌려보내지 않겠다’(片帆不返)는 결연한 태도로 제안을 거절하였다. 조선과 명나라의 연합함대는 11월 18일 밤 10시쯤 노량으로 진격하여 다음날 새벽 2시경 500여 척의 왜선(倭船)과 혼전난투의 접근전을 벌였다. 치열한 야간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날이 밝기 시작했다. 이 마지막 결전이 고비에 이른 11월 19일(양력 12월 16일) 새벽에 이순신은 왼쪽 가슴에 왜적의 탄환을 맞고 전사했다.“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내가 죽은 것을 알리지 말라"고 당부하며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그의 묘는 충남 아산의 음봉면 어라산(於羅山) 자락에 있다. 그는 이런 글도 남겼다.
 
집안이 나쁘다 탓하지 마라. 나는 역적으로 몰락한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탓에 외갓집에서 자랐다./ 머리가 나쁘다 탓하지 마라. 나는 과거에 거듭 낙방하고 서른둘 늦은 나이에야 무과시험에 겨우 급제하였다./ 좋은 직위가 아니라 불평하지 마라. 나는 십 사년 동안 변방오지에서 말단 수비 장교로 세월을 허송하였다./ 윗사람의 지시라 어쩔 수 없다고 말하지 마라. 나는 불의한 직속상관과의 불화로 수차례나 파면과 좌천을 거듭하였다./ 몸이 약하다 고민하지 마라. 나는 평생토록 고질병인 위장병과 전염병으로 병앓이를 하였다./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 불평하지 마라. 나는 왜적의 침입으로 나라가 위태로워진 후 마흔 일곱에야 겨우 지휘관이 될 수 있었다.
 
이순신, 그가 당시에 하나님과 예수님을 알았다면 다윗처럼 신심(信心)이 뛰어 났을 인물이다. 블레셋의 골리앗을 이긴 믿음의 소년 다윗은 이런 고백을 남겼다.“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오 나의 요새시니 나를 위하여 나를 건지시는 자시오...내 원수들에게서 구원을 받으리로다.”(삼하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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