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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월을 아끼라 0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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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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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2-08-11 18:38 조회 17,051 댓글 0
 
“미래를 신뢰하지 마라, 죽은 과거는 묻어버려라. 그리고 살아 있는 현재에 행동하라.”이는 시인 롱펠로가 남긴 말이다.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시인의 시상(詩想) 하나도 떠오르는 바로 그 순간에 기록으로 남겨야 역사적인 작품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대단한 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시골에 계신 어머님께 문안 전화를 드렸더니“팔십 평생 이렇게 더운 여름은 처음인 것 같다”고 하셨다. 참으로 무더운 찜통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요즘 한강과 금강 등지의 식수원에 녹조(綠藻) 현상이 심각하여 큰 어려움이 있다는 소식도 접하게 된다. 흘러가는 물조차도 기온의 상승 앞에서는 병이 들고 만다. 이처럼 세계 처처에서 일어나는 자연 현상의 변화에도 큰 이변이 속출하는 환경 불균형의 생태 위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한 낮에는 바깥 기온이 체온보다 더 높으니 어찌 쉽게 이 더위를 견딜 수 있으랴. 땡볕이 내려 쪼이는 들과 산과 바다와 산업 생산 시설에서 일하고, 건설 현장에서 일하는 모든 이웃들의 건강과 안전을 위한 기도가 절로 나오는 계절이다. 그러나 때가 되면 이런 폭염의 날들도 다 지나가고 선선한 가을바람이 부는 계절을 맞게 될 것이다.

우리는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로 구분한다. 과거는 지나간 시간이요, 미래는 다가올 시간이요, 현재만이 지금 나에게 주어져 있는 시간이다. 역사는 미래로부터 매 순간 다가오고 멈추어 주지 않고 흘러가 버리는‘현재’(現在)라는 순간을 통해서 이루어져 간다. 그러므로 에센 바흐의“시간을 지배할 줄 아는 사람은 인생을 지배할 사람이다.”라는 말은 참으로 옳은 말이다. 사실 엄격하게 구분하면 현재라는 시간은 미래의 시간으로부터 다가와서 과거라는 시간으로 순식간에 사라져 가는 붙잡아 둘 수 없는 순간(瞬間)일 뿐이다. 우리와 동시대를 살다가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 같은 이는 인류의 긴긴 역사 속에 숨겨져 있던 과학의 비밀을 집대성해서‘i’시리즈의 작품을 만들어 냈다. 그리고 그것들을 통해서 온 세계를 개인의 손바닥 위에 얹어 놓고 동시간대에 정보를 공유할 수 있는 '월드와이드웹’(www.)시대의 큰 문을 열어 놓은 역사적인 첨단 과학자의 생을 살다가 갔다. 우리는 시간을 설명할 때에 쏜 화살과 같다든지 혹은 흐르는 물 즉‘유수’(流水)와 같다고 하지 않는가. 참으로 세월과 시간이 쏜 화살이 날아가듯이 빠르게 지나간다. 모세의 기도인 성경, 시편 90편 10절에 보면,“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라고 했다. 그렇다. 칠팔십년 세월이라도 화살이 날아가듯이 순식간에 다 지나가고 만다. 역사를 보라. 권력과 명예와 힘과 재물과 청춘과 미모를 자랑하던 영웅호걸 절세가인들이 다 어디로 갔는가. 칼 막스, 레닌, 스탈린, 히틀러, 모택동, 김일성, 김정일, 나폴레옹, 알렉산더...저들은 왜 지금 보이지 않는가 말이다. 한일역사에 그렇게 큰 아픔을 주었던 일본의 천황들은 다 어디로 갔는가. 역사와 세월과 시간은 다 그렇게 흘러가 버리는 것이다. 이처럼 흘러가는 세월과 지나가는 시간을 막을 수 있는 힘이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 세월과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간다.‘순식간’(瞬息間)이란 눈을 한번 깜빡하는 순간을 표현한 말이 아닌가. 참으로 세월이 빠르다. 이처럼 세월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부인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시간’(時間)은 이 세상 그 어느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지는 창조주의 선물이다. 임금의 하루나 평민의 하루에 차이가 없다. 작가 게오르규가 표현한 <25시>를 살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문제는 그 하루를 어떻게 쓰며 살아가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시간은 초분시일월년(初分時日月年)으로 구분한다. 시간 구분의 기초 단위는‘초’(初)이다. 세계가 공통으로 과학적인 근거에 의해서 초의 기준을 제정한 것은 1967년이다.‘국제도량형국’이 지구촌 공통의‘1초’표준을 정하여 발표하였다.“세슘 원자가 91억 9263만 1770번 진동할 때 걸리는 시간”이‘1초’이다. 금번 2012년, 런던 올림픽의 메달 유망 후보였던 여자 펜싱의 신아람 선수는 그‘1초’판정의 오류로 인하여 역사적인 메달 수상의 기회를 놓쳤다. 참으로 안타깝고 아쉬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그나마 요즘의 스포츠 심판은 육안으로만 하지 않고 최첨단 영상 기기와 광학기기를 동원하기 때문에 0. 1초의 오차도 허용하질 않는다. 그런데도 문제가 발생한 것이다. 1초라는 시간이 얼마나 귀하고 긴 시간인가. 새들 중에 날개를 가장 빠르게 움직이는 새는 벌새인데 1초에 90번의 날개 동작을 하는 것으로 관측되었다. 우주 공학과 군사 과학을 비롯한 최첨단의 모든 과학은 시간을 세분하고 또 세분한다. 심지어는 10억 분의 1초인 나노초로 까지 구분하는 세상에서 우리가 살아가고 있다. 그런 스포츠 과학은 이미 1996년의 미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1,000분의 1초를 구분할 수 있는 카메라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금번 런던 올림픽에서는 1초에 2,000장의 사진을 찍는 카메라가 등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아람 선수와 같은 억울한 판정을 받아야 하는 답답한 심판결과가 일어나고 말았다. 심판이 전광판의 0초를 1초로 되돌리는 바람에 벌어진 일이다. 그 1초와 2초 사이의 시간인 1.56초 동안에 독일의 하이데만 선수가 선제공격하여 얻은 득점의 결과를 가지고 역사적인‘1초 오심’(誤審)의 억울한 결과를 발표했고 판정 결과를 번복할 수 없다는 주장 때문에 벌어진 사건이다. 1초라는 시간의 비중을 실감하게 하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에 그 날 그 언덕에는 좌우편에 또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십자가 처형을 받고 있었다. 그 좌편 강도는 그 역사적인 순간에 구원의 기회를 잃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님 우편의 한 강도는 생애 마지막 순간에 자신의 마음속에 밀려드는 구원의 빛을 놓치지 않았다.“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기억하소서.”(눅23:42)라는 순간의 고백이 사형 언도를 받은 강도의 운명을 영생의 길로 초청 받게 한 것이다. 이는 올림픽의 금메달과 비교 할 수 없는 참으로 값진 순간의 선택이 아닐 수 없다. 그 때 예수께서 선언해 주셨다.“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23:43) 우편 강도는 순간의 한 마디 고백으로 인하여 천국에 입성하는 사죄와 영생의 은총을 누리게 되었다. 헬라사람들은 시간을 카이로스(kairos)의 시간과 크로노스(kronos)의 시간으로 구분한다. 카이로스의 시간이란 일상적으로 흘러가는 평상적인 시간을 말한다. 그러나 크로노스의 시간이란 역사적인 시간이요 잊을 수 없는 사건의 시간을 일컫는 말이다. 가령 우리나라로 하면‘3.1, 8.15, 6.25, 4.19, 10.26, 12.12’이처럼 그 날짜의 숫자만 들어도 언제 일어났던 무슨 사건을 말하는 지 알 수 있는 그런 날들과 그런 시간들이 바로 크로노스의 시간인 것이다. 이는 개인적으로는 평생에 기억할 만한 희로애락의 특별한 날과 그런 순간들을 언급할 때 사용하는 표현이다. 각 사람을 향하신 창조주 하나님의 뜻과 섭리와 기대하심을 깨달아 그 부르심과 택하심을 따라서 존귀한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이 시대적인 사명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 첫 출발이 시간과 세월을 아껴 쓰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교회에 편지하면서“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엡5:16)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신 이후에 애굽 피난길과 나사렛의 성장기를 거쳐서 요단강에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이후 사십일 간의 광야 금식을 시작으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오직 보내심을 받은‘하나님이신 그리스도’(God's Messiah)의 사명을 온전히 다 하신 그리스도 예수시다. 그는 철저히 사명자로서의 시간 중심의 한 생을 사셨다.“아직 내 때가 아니다.”혹은“ 내 때가 이르렀느니라.”는 그의 말씀이 이를 입증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그 무엇으로 대신 할 수 없는 금은보다 귀한 시간이 자꾸만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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