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품과 유사품
여러 해 전에 목회자 일행과 함께 중국의 삼자 교회 현장을 몇 곳 방문하고 현지 한족 교회 지도자들의 세미나에서 말씀을 전할 기회를 가졌다. 삼자 교회들 중에는 그 규모가 엄청난 곳들이 한 두 곳이 아니다. 사역을 마쳐 갈 즈음의 어느 오후에 소문으로만 듣던 짝퉁 시장을 구경하였다. 평소에 만년필에 관심이 많던 나는 몽블랑 만년필을 한 자루 샀다. 너무 싸게 팔기에 그 값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였다. 문제는 한국으로 돌아 온 후에 일어났다. 만년필의 몸체를 분리해서 잉크를 넣으려고 하니 잉크가 들어가질 않는 것이었다. 겉만 번지르르 할 뿐 그야말로 짝퉁이었다. 물론 중국은 우주선을 개발할 정도의 첨단과학의 수준이 세계 정상을 달리는 G-2 국가로서 미국과 여러 가지 분야에서 경쟁할 정도의 대단한 나라로 급부상하고 있다. 그러나 짝퉁은 짝퉁일 뿐이었다. 짝퉁이란 단어 자체도 국어사전에 들어 있는 표준말 표현이 아니지만 그런 물건을 설명할 때에는 ‘짝퉁’이란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제대로 표현하려면‘유사품’이라고 하여야 할 것이다. 진짜냐 가짜냐의 문제이다. 예수의 표현을 빌리면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는 말씀에 근거한다. 예수의 열 두 제자들 가운데 가롯 유다는 제자다운 제자가 아니었다. 제자들 중의 하나로 부르심을 받기는 하였으나 그는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신 삼년 동안 제자화가 되지를 못했다. 그는 나중에 불행한 길을 가고 말았다. 그는 제자의 신분으로 예수의 마지막 식탁인 최후의 만찬 석상에서 주님의 맞은편에 앉아 겸상하고 예수와 같은 그릇의 떡을 집어 먹던 자였다. 그는 예수께서 떡 한 조각을 적셔다가 주시는 그 것까지 다 받아먹고도 회개 하지 않았다.(요1326) 이미 그 전에 주님께서 말씀하신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말씀을 다른 제자들과 함께 듣고도 시치미를 떼었다. 베드로를 비롯한 다른 제자들이 주님의 이 말씀을 화제 삼고 도대체 제자들 중에서 누가 그런 못된 짓을 한단 말이냐고 흥분했지만 가롯 유다는 끝까지 자기의 심경을 숨겼다. 베드로는 머리 짓을 하면서 주님께 “말씀하신 자가 누구인지 말씀해 주세요.”하고 다그쳤으나 그런 당황스러운 현장에서도 가롯 유다는 마지막까지 입을 다물었다. 요한복음은 예수께서 가롯 유다에게 젖은 떡을 한 조각 건넨 후에 사탄이 그 속에 들어갔다고 당시의 역사를 기록하였다.(요13:27) 가을이 깊어 가고 있다. 이 계절은 알곡과 쭉정이가 구별되는 계절이다. 어렸을 적에 시골에서 할머니나 어머니가 키질하시는 것을 본 기억이 난다. 콩, 팥, 녹두, 참깨 등을 키질하면 잘 성글게 열매 맺은 알곡들은 주인 품으로 모여들고 쭉정이와 잔 돌들과 불순물을 비롯한 흙먼지들은 주인의 품에서 키 밖으로 멀리 멀리 사라져 간다. 시편 1편은 이런 장면을 인생들에게 비유하여 “악인들은 그렇지 아니함이여 오직 바람에 나는 겨와 같도다.(시1:4)고 하였다. 그러면 무엇이 그렇지 아니하단 말씀인가.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과 그 생각이 다르고 도모하는 바가 다를 뿐만 아니라 죄인들의 길에 서지도 않고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도 않는다고 하였다. 복 있는 사람은 오직 여호와의 말씀을 즐거워하고 그 말씀을 밤낮으로 묵상하는 자들이다. 그런 인생들은 마치도 시냇가에 심은 나무와 같아서 철을 따라 열매를 맺고 그 잎사귀도 마르지 않을 정도로 청청(靑靑)한 은혜와 축복을 받게 된다. 그런 인생들의 하는 모든 일은 다 형통하게 된다. 형통하게 된다는 표현을 영어 성경에서는 번영하다는 뜻의 ‘prosper'라고 했다. 인공으로 만든 조화(造花)는 향기가 없다. 그러므로 벌이나 나비도 날아들지 않는다. 뿌리나 줄기로부터 가지만 잘라낸 절화(折花)도 당장 보기에는 화려하고 그럴싸하지만 열흘 가기가 어렵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이라고 하지 않나. <유사 그리스도인>(The Almost Christian Discovered)이란 책이 있다. 참 좋은 책이다. 좋다는 표현보다는 깊이가 있고 예리하고 심도 있게 그리스도인의 신앙 양태를 분석하고 교훈하는 영성이 깊은 기독교 고전 중에서 강력히 추천할 만한 양서(良書)이다. 저자인 매튜 미드(Matthew Mead, 1626-1699)목사는 17세기에 활동하던 영국 국교회의 목사였다. 그가 36살 때이던 1662년에 영국 국교회는 공적 예배의 기도를 기도문으로 통일하는 법령을 공포하였다. 이를 거부한 그를 비롯한 2천여 명의 성직자들이 국교회에서 추방되었다. 그는 국교회로부터 일 년 치 생활비도 몰수당하였다. 그러나 그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복음을 위한 좁은 길을 선택하였고 평생토록 진리를 연구하고 묵상하며 복음을 복음 되도록 증거 하는 일에 매진하였다. 그는 주님 앞으로 돌아가던 해 10월 어느 날, “사명을 마쳤으니 집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하고 크게 외치고 숨을 거두었다. 오늘 날, 기독교인이라고 불리어지는 성도된 이들은 그 누구라고 할지라도 이 질문 앞에 정직하게 대답하는 시간을 가져야만 할 것이다. “나는 과연 참된 그리스도인인가 아니면 유사한 그리스도인인가.”매튜 미드 목사가 활동하던 당시의 영국은 종교 개혁 이후 가장 극심한 핍박기를 거친 후에 최고의 영적 부흥기를 맞고 있었다. 탁월한 목사들의 명 설교가 넘쳐 났고 깊이 있는 진리의 해석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다. 그야말로 복음이 무르익어 가는 것 같던 당시에 매튜 미드 목사의 “당신은 혹시 유사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질문은 많은 사람들을 당혹하게 하였다. 물론 우리 곁에서“당신은 구원 받았습니까”라는 식의 질문을 하며 다가오는 사이비와 이단의 지류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매튜 미드 목사의 질문은 그런 미혹과 혼돈에 빠지게 하는 질문이 아니다. 그의 책을 읽기 시작하면 불과 몇 페이지를 넘기지 않아서 경건한 두려움이 엄습해 오는 것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자신의 신체를 구석구석 전문 의료진들에게 노출시키지 않고는 종합검사가 불가능한 것처럼 우리는 350년 전에 이 땅에서 살다가 주께로 돌아간 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정직한 영적 고뇌와 진솔한 씨름을 만나게 된다. 그는 이렇게 도전한다. “저는 이 책이‘경건의 모양’을 꾸미는데 바쁘고, ‘경건의 능력’에는 낯선 ‘살았다 하는 이름은 가졌으나 실상은 죽은’사람들의 손에 들려 읽혀지기를 바랍니다.”그가 35살 때에 이와 같은 심도 있는 말씀을 묵상하여 당시의 회중들에게 선포하며 그리스도를 본 받는 삶을 살고자 하였다는 것은 마치도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던 사도 바울의 모습을 만나는 것과 같아 마음을 엄숙하게 한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고전11:1)고 편지하던 사도 바울이 당시의 영국 교회 회중들 가운데 다시 살았던 것만 같다. 그렇다. 당장 내 배가 고프다는 이유로 아브라함의 후손의 존귀한 언약 자손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동생 야곱에게 넘겨 버렸던 형 에서의 불행을 번복해서야 되겠는가. 천년이 가고 다시 또 천년이 흘러가도 복음은 복음이고 진리는 진리일 뿐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마7:14),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13:24) 과거에도 그러하였지만 그 어느 때보다 더욱 심각하게 이단과 사이비 세력의 미혹이 심각한 이 때에 “시험이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26:41)고 분부하신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하신 기도의 분부에 응답하는 기도자의 경건을 지켜 나가야 할 것이다. 과연 누가 진짜이고 누가 가짜일까. “너희 중 하나가 나를 팔리라.”는 말씀을 들은 제자들 중에 가장 어렸던 제자 요한은 여전히 주님 품에 안겨서 물었다. “주여 누구니이까”그러나 가롯 유다는 그 현장에서 뛰쳐나가 주를 팔았다. 그리고 어두운 밤이 왔다.(요13: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