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을 수 있다는 것
올 여름(2014. 7. 24) 깊은 밤중에 충북 괴산 경찰서에 사람을 찾는 전화가 걸려 왔다. 02-107 전화로 “여기는 서울 손말이음센터인데 신고자가 청각장애가 있어서 휴대폰문자접수내용으로 신고를 대신한다.”고 했다. 듣지 못하는 청각 장애를 가진 부모와 두 아들이 사는 네 가족 중에 58살의 어머니가 괴산읍내 시장에 갔는데 밤이 깊도록 돌아오지 않는다고 27살 된 둘째 아들이 실종 신고를 한 것이다. 경찰은 신고자의 집에 방문하였으나 아무도 대화가 안 되니 종이 위에 필담으로 신고 내용을 확인하였다. 괴산 읍내를 향하여 서치라이트를 켜고 어머니를 찾아 나선 경찰차의 불빛에 어머니의 모습이 들어 왔다. 그 때는 밤 12시가 거의 다 된 시간이었다. 막차를 놓친 어머니는 20여km를 약 여덟 시간 동안 걸어서 시골에 있는 자기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말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글도 모르는 어머니는 그날 핸드폰도 잃어버린 채 걷다가 지쳐서 비가 내리는 길가의 풀숲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던 것이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 때에도 청각 장애를 가진 환자들이 예수를 통하여 고침을 받은 일화가 소개 된다. 저들은 한 결 같이 듣지 못하니 말하지도 못하는 안타까운 삶을 살아가던 이들이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나는 들을 수 있고 말 할 수 있으니 남의 이야기라고 여기면 안 될 것이다. 통계 자료로는 남한에만도 15만 명의 청각장애인이 있다. 중국에는 2천만 명, 세계에는 약 1억 3천 만 명의 농아인이 있다. 이는 곁에서 농아인 교회를 사역하는 이웃 목회자에게서 건네받은 자료이다. 그 자신도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신학을 마치고 목회자의 길을 가고 있다. 그의 아내 또한 듣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한다. 저들의 두 아들은 건청인이다. 건청인(健聽人)이란 듣는 기능이 건강한 사람들을 표현하는 말이다. 신체의 그 어떤 기능이든 건강하게 태어나서 건강하게 살고 싶지 않은 사람이 그 누가 있겠는가. 그러나 주변을 둘러보면 심신(心身)에 장애를 가진 이웃들이 적지 않다. 그 중에 하나가 듣지 못한다는 답답함과 안타까움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하면 육체적인 청각 기능의 장애를 가진 것 이상으로 심각한 영적 질병이 영으로 듣지 못한다는 것이다. 성경 신구약 66권은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듣는 문제를 주제로 쓰인 기독교의 경전이다. 창세기 3장 8절에 보면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장면이 소개되어 있다. 에덴동산에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최초로 지음 받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과 대화하는 관계였다. 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과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로 창조된 축복된 인류의 선조이다. 그런 아담의 아내인 하와가 하나님께 들은 말씀대로 살아가지 못하고 에덴동산에서 만난 뱀의 속삭임을 듣게 되면서 인간에게 타락이 들어 왔다. 창세기 3장 1절에 보면, “뱀은 여호와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하니라.”고 하였다. 여기서 언급하는 뱀은 그냥 뱀이 아니라 사탄이다. 항상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살아가야 할 인간이 하나님 대신에 뱀의 말을 듣게 되면서 인간에게 타락이 들어 왔다. 남편 아담까지 함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따 먹게 하고 타락한 저들 부부는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었다. 그 날 동산에는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 때에 아담과 하와는 동산을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게 되었다. 하나님의 소리를 들은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두려움 가운데 동산 나무 사이에 숨어 버렸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부르시자 아담은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여기 이 장면에 보면, 하와와 아담이 진작 하나님의 소리를 들었더라면 이와 같이 뱀의 간계한 유혹에 빠지지는 않았을 것인데 하는 씁쓸한 생각을 갖게 한다. 그렇다. 영적으로 들려야 하는 창조자의 음성이 들려야 할 때에 들리는 것이 은혜이며 축복이다. 진리를 들어야 할 때에 진리를 들을 수 있는 것은 그 얼마나 크나큰 축복의 시작인가 말이다. 공자는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라고 말했다고 하지 않나.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좋다”는 말이다. 그러나 천지 창조의 때에 하나님이 만드신 완전한 동산이었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으면서도 정작은 하나님 안에서 그 완전한 도를 깨닫지 못하고 살다가 불행한 결과를 자초한 어리석은 인간의 선조가 되고 말았다. 그러므로 제대로 듣는 것이 인생 행복의 시작이다. 하나님 자신도 듣는 분이시다. 창세기 16장에 보면, 하나님은 여주인 사라에게 내어 쫓겨 광야에서 배회하며 고통스러운 순간을 지내던 이스마엘을 임신한 상태의 하갈에게 여호와의 사자를 통하여 “여호와께서 네 고통을 들으셨다”고 위로해 주셨다. 출애굽기 2장 24절에도 보면, 하나님은 애굽에서 고난당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셨다. 이처럼 하나님은 인간의 고통과 신음 소리 뿐 만 아니라 감사와 찬양 소리를 들으시는 여호와이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영의 귀가 활짝 열려져 있기를 기대하시는 구속(救贖)의 주님이시다. 믿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데서 시작되는 것이다.(롬10:17) 성경은 하나님께서 부르시는 소리를 듣고 그 부르심에 응답한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노아, 아브라함, 모세, 기드온, 드보라, 사무엘, 다윗, 이사야, 에스더, 예레미야, 베드로를 비롯한 12제자와 사도 바울을 비롯한 신구약의 인물들을 보라. 여기에서 엘리야, 엘리사, 다니엘, 에스라, 느헤미야, 학개, 스가랴, 세례 요한 등을 빼어 놓으면 저들이 얼마나 섭섭해 할까. 신앙생활은 듣는 생활이다. 하나님은 광야 길에 나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모세를 통하여 이처럼 말씀하신 바가 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출19:5-6) 이때는 출애굽한지 삼 개월이 지났고 저들은 시내 광야에 도착해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산 위로 불러 올리셔서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고 말씀하셨다. 전하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듣게 하라는 말씀이 아닌가. 듣는 다는 것은 순종하고 복종하고 따른다는 의미이다. 단지 듣는 것만으로 듣는 것이 아니다. 신명기 11장에 보면 하나님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고 듣지 아니하고 알지 못하는 다른 신들을 따르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하셨다.(신11:27-28) 잠언 1장 33절에 보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평안이 살 것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도 ‘들으라’(사1:10)고 하셨고, 예레미야를 통해서도 마찬가지 말씀을 해 주셨다.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렘7:23) 그리고 이어서 “너희는 내가 명령한 모든 길로 걸어가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는 말씀을 해 주셨다. 그렇다. 듣는 다는 것은 순종하는 것이요 하나님의 명령하신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진리의 말씀을 듣고 따르면 그 인생이 복되게 되어 있다. 그래서 삼중고의 여인 헬렌 켈러가 위대한 역사적 인물인 것이다. ‘을’을 향한 ‘갑’의 횡포가 점점 심각하여 가는 이 세상에서 인륜(人倫)이 상식이 되는 경천애인(敬天愛人)의 삶을 더불어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시민운동인가. “너 내가 누군 줄 알아” 이런 식의 엄포나 거만이 사라지는 세상 말이다. 이 땅에 섬김을 받으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남을 섬기기 위해서 오신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추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마7:24-25)라고 하셨다. 들을 귀가 있다는 것이야 말로 축복의 시작이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