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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 2014. 7.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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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4-07-13 16:03 조회 15,558 댓글 0
 
용서
 
이 세상에 ‘용서’(容恕)를 경험하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사람은 그 어느 누구나 크고 작은 일에 있어서 그 누군가를 용서하거나 혹은 누군가에게서 용서를 받거나 하면서 살아간다. 이 세상에 영원한 ‘갑’은 없는 법이다. 최근에 법조계의 원로격인 중년의 판사 출신인 모 변호사가 새파란 후배 판사 앞에 피고인 신분으로 법정에 서는 일이 있었다. 인간은 이처럼 살다보면 내가 ‘갑’이 될 수도 있고, 반대로 내가 ‘을’이 될 수도 있다. 물론 혹자는 “나는 이날까지 평생을 ‘을’의 신세로만 살아 왔다.”고 볼 멘 소리로 항변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나는 출생환경부터 시작해서 학창 시절과 사회생활의 평생을 ‘갑’의 자리에서 벗어나 본 적이 없다.”고 어깨에 힘을 주는 이도 있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인류는 오래 전부터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의 이중 구조 속에서 씨름하며 생존해 왔다. 살다 보면 서운한 일도 생기고, 억울한 일도 겪게 되고, 보복하고 싶을 만큼의 복수심에 붙잡힐 때도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무조건 ‘이를 이로 갚고, 눈을 눈으로 갚는’ 보복의 관계로 나가면 세상은 언제나 피가 튀는 싸움판이요 전쟁터가 되고 말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너도 죽고 나도 죽는 불행을 초래할 수도 있지 않을까. 평생을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하던 삼중고(三重苦)의 여인, 헬렌 켈러는 “교육의 최고의 성과는 관용이다.”라는 말로 너그러움과 용서의 숭고한 가치를 학습해야 할 것을 교훈해 주었다. 동서양의 유명인사들 중에는 ‘용서’에 관련하여 명언을 남긴 이들이 참으로 많다. 인도의 마하트마 간디는 “약한 자는 결코 용서할 수 없다. 용서하는 마음은 강한 자만이 가질 수 있는 특성이다.”라고 말했다. 마크 트웨인은 역시 작가답게 이런 명언을 남겼다. “용서는 제비꽃이 자기를 밟아 뭉갠 발꿈치에 남기는 향기이다.” 채근담에는 이런 말이 있다. “남의 허물은 용서해야 하지만 자기의 허물은 용서해서는 안 될 것이요, 자기의 곤욕은 마땅히 참을 것이지만 남의 곤욕에 대해서는 방관해서는 안 된다.” 스트라빈스키는 “죄는 취소될 수 없다. 용서될 뿐이다.”는 멋진 말을 남겼다. 남의 말의 인용은 이 정도로 멈추고 좀 더 깊이 생각해 보자. 성경 안에 등장하는 인류의 역사를 보라. 하나님의 용서가 아니었다면 어찌 아담과 하와가 부부의 자리를 지켜 갈 수 있었겠으며 가정의 제도를 이어 갈수 있었겠는가. 아담의 두 아들이었던 동생 아벨을 죽인 형 가인에게 하나님의 용서가 임하지 않았다면 어찌 가인이 이 땅에서 남은 생명을 부지하고 살 수 있었겠는가. 이런 방향에서 묵상하기 시작하면 성경은 창세기로부터 요한 계시록까지 용서에 관한 사건과 내용으로 가득한 ‘용서의 경전’이다. 사실 신구약 성경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구속(救贖) 신앙의 큰 강줄기는 “인간을 그 지은 죄로부터 용서하시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 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십자가 사랑의 이야기”가 아닌가. 예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제자들이 주께 배운 기도인 ‘주기도문’의 여러 기도 주제 중의 하나가 ‘용서’에 관한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마6:12)라고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다. 그러한 기도의 가르침 후에 곧 이어서 다시 한 번 반복하여 강조해 주신 교훈이 ‘용서’에 관한 내용이다.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마6:14-15)고 하셨다. 그렇다. 누군가를 용서하는 것은 나 자신이 하나님 아버지의 끝없는 사랑과 용서를 체험하는 출발이다. 인간의 크고 작은 죄를 용서하시고 용납하시며 너그럽게 눈 감아 주시고 새로운 삶의 기회를 제공하시는 하나님의 언약적인 사랑과 용서가 아니었다면 이 세상에 생명을 존속하며 고개를 떳떳이 들고 살아갈 위인이 과연 누구이겠는가.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장인 라반의 집에 장가 든 처가살이 이십여 년 만에 아버지 ‘이삭’의 고향으로 귀향하기 위하여 먼 길을 가고 있었다. 야곱이 부모 곁을 떠날 때에는 지팡이 끝에 봇짐 하나 매어 달고 출발했던 빈 털털이가 아니었나. 그런 그는 두 부인과 두 여종들을 통하여 낳은 열 한 아들과 외동 딸 디나를 비롯하여 수를 헤아리기 조차 벅찬 남 녀 종들과 어마어마한 양떼와 염소와 소와 나귀와 약대 떼를 이끌고 고향을 향하고 있었다. 창세기 32장에 나오는 장면이다. 그의 가는 길을 막아서서 400명의 자객을 동원하여 동생 야곱을 죽이겠다고 달려드는 세력이 있었으니 그는 어머니 리브가의 복중에서 열 달을 함께 자라난 쌍둥이 형 ‘에서’였다. 그 때에 형 ‘에서’와의 화해와 용서가 없었다면 아브라함에게서 시작된 언약의 후손인 야곱은 세일 땅 에돔 들판의 한 귀퉁이에서 비참한 돌무덤의 주인공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야곱은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려 한다는 소식을 듣고 형의 마음이 녹아지도록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야곱은 그 밤에 얍복 강 저편에 혼자 남았다. 아내들과 아들딸과 종과 짐승을 두 떼로 나누어서 강을 건너게 한 후에 홀로 강 저편에 남아 밤을 새어 가며 기도하였다. 하나님은 그 밤에 천사를 보내셔서 야곱과 함께 씨름하며 기도하도록 하셨다. 야곱은 그 밤에 혼자였다. 성경은 그 역사적인 밤의 장면을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창32:24)라고 했다. 그 고독한 밤의 야곱의 기도는 천사와 씨름하여 이기는 체험과 함께 '이스라엘'이란 새 이름도 받았다. 천사의 이름을 궁금해 하는 야곱에게 하나님의 사자는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고 말하며 야곱을 축복하였다. 야곱은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고 새로 지었다. ‘브니엘’이란 ‘하나님의 얼굴’이란 뜻이다. 그 이른 아침에 바라다 보이는 태양 빛은 남달랐다. 그제야 야곱은 허벅다리에 심한 통증을 느끼며 새아침을 맞았다. 야곱은 무슨 생각이 들었던지 저 만치 400명의 무장한 장정들이 둘러선 그 한 가운데 있는 형 ‘에서’를 향하여 나아가더니 일곱 번이나 땅에 몸을 굽혀서 절을 하였다. 그런데 이 어찌 된 일인지 동생을 죽인다고 달려 왔던 형의 마음이 봄눈처럼 녹아내린 것이다. 땅에 엎드린 야곱을 알아 본 형 ‘에서’는 달려 와서 야곱을 맞이하고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울기 시작하였다. 상상할 수 없는 은혜로운 화해와 용서의 자리가 펼쳐 진 것이다. ‘용서’는 형이상학적이고 감상적인 단어가 아니다. 히틀러의 학정으로 희생된 유대인 600만 명의 살아남은 아내나 남편이나 부모 자녀에게 히틀러를 용서하라고 권면한다면 어떤 반응이겠는가. 일본의 만행으로 전쟁의 성 노예로 끌려 다니던 ‘정신대’ 할머니들에게 용서에 대하여 대화하면 그 분들은 어떻게 반응할까. 그러므로 ‘용서’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다. 용서하고 용서 받는 그 모든 관계의 중심에 ‘나’ 자신이 있기 때문이다. <용서 없이 미래 없다>(No Future Without Forgiveness)라는 책을 쓴 데즈먼드 투투 주교는 “가해자와 피해자로 나뉘어 상처 입은 공동체에 진정한 정의가 회복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은 용서뿐이다.”라고 했다. 자끄 뷔솔드는 그의 책, <완전한 자유, 용서>에서 “그리스도인이라도 ‘용서의 위기’에 빠질 수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기가 막히고 억울하다고 해서 가해자를 죽이기로 결심하는 자포자기에 빠져서는 결코 안 된다.”고 설명하며 왜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며 살아가야 하는지를 성경의 말씀에 근거해서 차근차근 풀어 나가고 있다. 성격이 불처럼 급하고 다혈질이었던 베드로는 예수께서 붙잡히시던 그 새벽에 대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기 칼로 베어 낸 적이 있다. 그 베드로에게 주님은 일찍이 ‘용서’에 대하여 깨우쳐 주신 적이 있다. “일곱 뻔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마18:22) ‘용서!’ 이는 주님의 마음을 닮아가는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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