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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과 그 역사의 현장 24 2016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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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6-09-18 19:31 조회 13,817 댓글 0
 

성경과 그 역사의 현장-24

 

 

다윗의 죽음과 그의 묘

 

세계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이스라엘, 특히 예루살렘을 방문할 때에 가장 의미 있게 여기는 곳이 두 곳이라고 한다. 그 중의 한 곳은 통곡의 벽이고 또 하나는 다윗의 묘라고 정해 놓은 다윗의 가묘이다. ‘가묘’(假墓)라고 하는 이유는 그곳이 사실은 다윗의 묘가 아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다윗의 묘가 어디인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가 요세푸스 플라비우스(Josephus Flavius, AD 37-100)의 기록에 의하면 헤롯왕이 다윗의 무덤을 도굴하고자 했으나 내실까지 도굴하지는 못했다고 한다. 다윗 왕의 무덤은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의 통치에 반대하는 유대인의 바 코흐바(Bar Kokhba, AD 132-135)반란 당시 파괴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유대인들이 다윗을 너무나도 존경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그곳에 가묘를 설치해 놓았다. 그 이유는 사도행전 2장의 성령 받은 베드로의 설교 중에 형제들아 내가 조상 다윗에 대하여 담대히 말할 수 있노니 다윗이 죽어 장사되어 그 묘가 오늘까지 우리 중에 있도다.”(2:29)는 말씀에 근거한다. 우리 일행은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간을 가진 후에 아래층에 있는 다윗의 가묘에도 방문하였다. 다윗(David, BC 1042-972)은 삼십에 왕이 되었고 칠십에 죽었다. 그곳 묘실(墓室)에는 젊은이들과 연세가 지긋한 유대인 남성들이 연신 몸을 앞뒤로 흔들며 커다란 히브리어 성경을 읽고 있었다. 다윗의 가묘 안에는 길이 2m, 1m의 석관이 놓여 있다. 그 위에 두껍고 푸른색의 우단으로 덮었고 이스라엘의 왕 다윗이 살아서 여기 있다.”는 히브리어가 황금색으로 새겨져 있다. 그리고 백합화 꽃 장식 두 개와 다윗이 즐겨 타던 수금과 즐겨 불던 양각 나팔 역시 황금색으로 새겨져 있다. 그 곳 안에 들어가는 입구는 남녀 따로 구분되어 있다. 여자들은 머리에 스카프 같은 것을 쓰고 들어가게 되어 있고 남자들은 머리의 정수리를 가리는 키파를 얹고 들어가야만 한다. 성경에 따르면(삼하5:7, 왕상 2:10) 다윗 왕은 다른 유대 왕들과 함께 다윗성 안에 안장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상 42명의 임금의 묘들 중에 역사에 보존되어 전해 오는 곳은 단 한곳도 없다고 한다. 최근의 뉴스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묘는 이천만기나 넘는다. 그 중에서 무연고인 묘의 수가 이백만기에 이른다고 한다. 이처럼 세월이 흐르면서 후손들 중에서 그 누구도 나서서 돌아보지 않는 그런 묘들 이 늘어나고 있다. 이와 같이 세월 속에 잊혀지는 조상들의 흔적인데 왜 유대인들은 30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그렇게 다윗과 다윗의 묘에 관심을 가질까. 하나님께서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삼상13:14, 13:22)는 극찬의 말씀을 해 주신 주인공이 바로 다윗이다. 그런 다윗도 죽었고 이 세상에 더 이상 없다. 이 세상에 죽음을 보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물론 창세기의 에녹이나 열왕기하에 소개된 북 왕국의 선지자 엘리야는 예외로 하고 말이다. 저들 두 사람은 죽음을 겪지 않고 하나님 곁으로 돌아간 인생들이 아닌가. 천지창조의 내용을 장엄하게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된 창세기도 마지막 49장과 50장은 아버지 야곱과 아들 요셉의 죽음에 대한 내용을 짧지 않게 다루고 있다. 창세기 5장에는 아담에게서 시작하여 노아의 세 아들인 셈과 함과 야벳까지의 족보가 나온다. 그러나 그 문맥은 누가 몇 살에 누구를 낳고 살다가 몇 살에 죽었더라.”는 형식의 반복으로 되어 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처럼 죽는다. 노아, 아브라함, 이삭, 야곱 모두 다 죽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죽음이 무엇인가. 120년을 살면서 동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의 노예 현장에서 출애굽 시킨 하나님의 사람 모세는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90:10)고 고백하였다. 모세는 120, 여호수아는 110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헤브론 지역 점령의 선봉장으로 나섰던 갈렙은 그 당시의 나이가 85살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년과 같은 건강과 패기를 드러냈던 그였지만 지금 그도 이 땅에 없다. 이 세상에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31년을 더 살면 천세수를 누렸을 무드셀라도 이젠 이 세상에 없다. 사람은 때가 되면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야 한다.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헤롯 왕의 불의한 생활을 지적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오실 길을 예비하던 세례 요한은 삼십대 초반에 헤롯의 칼에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순교자가 되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33세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 창조의 근본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영원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보내심을 받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와서 사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고난과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구속 사역의 완성 그 자체이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채찍에 맞고 못에 박히고 창에 찔려 죽임을 당하시는 그런 제한적이고 약한 육체에 갇히어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리스도는 죄나 죽음이 이길 수 없는 생명이시다. 고린도 전서에 소개된 사도 바울의 선언처럼 생명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이 땅 그 어디에도 없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15:55-56) 누구에게나 부활은 신비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은 부활에 대하여 너무나 쉽고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농부가 밭에 뿌리는 씨앗은 밀이나 보리와 같은 열매를 종자로 뿌리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또 네가 뿌리는 것은 장래의 형체를 뿌리는 것이 아니요 다만 밀이나 다른 것의 알맹이 뿐이로되 하나님이 그 뜻대로 그에게 형체를 주시되 각 종자에게 그 형체를 주시느니라.”(고전15:37-38)고 했다. 그리고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고전15:42-44)는 설득력 있는 설명으로 부활을 설명하였다. 죽음을 이기는 대답은 주 안에 있는 부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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