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사람들
기독교 신앙의 바탕은 동행하는 것이다. 더 엄밀하게 말하면 그 분이 내게 다가 오셔서 동행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을 기독교 용어로는 ‘임재’(臨齋)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아브람을 찾아 오셨다. 그를 부르셨다. 그에게 일방적으로 말씀하셨다. 아브람이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그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였기 때문에 그가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에녹, 노아 모두 마찬가지이다. 물론 하나님을 따르려는 인간의 의지가 있어야 하지만 하나님의 절대적인 부르심과 성신의 임재가 먼저다. 그렇게 쓰임 받은 인물이 창세기의 요셉이다. 사사기의 기드온이다. 사사요 제사장이요 선지자로 부름 받고 존귀하게 쓰임 받은 사무엘이다. 다윗도 하나님이 사무엘을 그의 집에 보내셔서 그에게 기름을 붓게 하셨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이다. 그 후에 다윗은 우여곡절을 많이 겪었다. 그러나 그 모든 연단과 시련의 배후에는 동행하시는 하나님의 임재가 늘 있었다.
신앙생활은 그래야 한다. 내가 하나님을 믿어 보려고 발버둥치는 것으로는 아쉬움이 남는다.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 오셔서 동행해 주셔야 한다. 이것이 은혜요 은총이요 긍휼히 여기심이요 복 주심이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들도 다 마찬가지이다. 예수께서 베드로, 안드레, 야고보, 요한 등 제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부르셔서 제자 삼으신 것이다. 주님이 부르셔서 늘 함께 데리고 다니신 것이다. 동행해 주신 것이다. 승천하신 후에 성령을 부어 주셔서 사명의 사도가 되게 해 주신 것이다. 이는 사도 바울도 마찬가지이다. 핍박자 사울의 본 모습으로는 도저히 예수를 주로 섬길만한 그릇이 못된다. 그런데 부활 예수께서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박해하느냐”고 물으시며 주의 부활 복음을 이방 땅에 전파할 사도로 쓰시려고 부르신 것이다.
자, 그러면 하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성령님과 동행하는 신앙생활이 지속되려면 어떤 신앙생활을 하여야할까.
첫째는 말씀의 동행이다.
신앙생활을 하는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하는 생활이다. 성경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의 책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예수님과 동행하고, 성령님이 내게 임재하셔서 떠나지 아니하시는 동행의 은혜를 체험하며 살아가려면 당연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대하는 생활을 지속하여야만 한다.
그렇지 않나.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 날 오후에 글로바와 또 다른 한 제자가 함께 엠마오로 가고 있었다. 누가복음 24장 17절에 보면 두 제자는 슬픈 빛을 띠고 있었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그날 저들을 꽉 누르고 있는 감정은 “근심(눅24:4) 두려움(눅24:5), 슬픔(눅24:17), 놀라움과 무서움(눅24:37)”등이었다. 오늘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근심, 걱정, 염려, 불안, 초조, 두려움, 슬픈, 무서움, 우울, 낙심 등의 어두운 감정들이 거미줄처럼 우리 영혼을 얽어 매고 있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의 신앙생활은 부활에 근거하는 것이다. 이점이 불교와 다르다. 부활 신앙은 유교나 이슬람이나 힌두교와도 비교할 수 없다. 우리의 신앙의 바탕은 사람답게 사는 법을 가르치는 “윤리, 도덕, 철학, 신념 혹은 그 어떤 옳다 하는 가르침”의 차원을 뛰어넘는 것이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임당하고 부활 승천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예수 스스로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다.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이 예수를 어두운 무덤에서 일으켜 세우신 것이다. 생명의 근본이신 하나님이 예수를 부활의 첫 열매 되게 하신 것이다.
누가복음 24장 32절에 보면 엠마오를 향하던 글로바와 또 다른 한 제자는 예수께서 모세와 모든 선지자들의 말씀을 비롯해서 예수 자신에 관한 메시아 예언의 말씀을 자세하게 풀어 설명해 주실 때에 그들의 마음이 뜨거워지는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올 한해 날마다 순간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말씀을 가까이 묵상하고 실천해 가는 중에 마음이 뜨거워지는 열정(熱情)의 사람들로 살아 갈 수 있기를 소원한다.
둘째는 식탁의 동행이다.
예수님과 두 제자가 엠마오 마을에 도착할 즈음에 해가 뉘엿뉘엿 지고 있었다. 예수는 그 마을에서 묵어가지 않고 가야 할 길이 아직 먼 것처럼 반응하였다. 그러자 글로바와 또 한 제자는 예수께“때가 저물어 가고 날이 이미 기울었는데 이 마을에서 함께 주무시자”고 강권하였다. 두 제자의 제안을 받아 들이신 예수께서 한 집에 들어가셨다. 그들과 함께 식탁에 둘러앉아서 음식을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고 감사 기도를 드리셨다. 그리고 떼어 그들에게 주셨다. 성경의 이런 장면을 묵상하다 보면 예수께서 돌아가시기 전날 밤에 12제자들과 함께 유월절 만찬을 잡수시던 장면이 생각난다.
예수는 늘 가시는 곳 마다 만나는 사람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것을 즐겨 하셨다. 장소와 상대를 차별하지 않으셨다. 그래서 예수를 비난하는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예수의 제자들에게 “너희 선생은 어찌하여 늘 먹고 마시느냐”고 비난하였다. 그렇다. 맞다. 예수는 창기나 세리를 구분하지 않으셨다. 누구라도 차등으로 대하지 않으셨다. 모든 각색 병자들을 골고루 고쳐 주셨다. 귀신 들린 자를 만나면 그 귀신을 내어 쫓아서 온전하게, 건강하게 고쳐 주셨다. 예수님은 누구라도 만나 주셨고 누구와도 함께 둘러 앉어 먹고 마시며 하나님의 나라에 대하여 이야기를 나누셨다.
식탁의 동행이란 그런 것이다. 세 천사를 대접한 아브라함, 타국에서 홀로된 시어머니 나오미와 겸상하며 불운한 운명을 개척해 가던 룻, 자기 집에 머물러 가기를 원하신 예수와 그의 제자들을 집안에 영접한 여리고 성의 삭개오 등 저들은 한결 같이 식탁 동행의 은혜와 복을 누린 성경의 주인공들이다. 아브라함은 일년 후에 언약의 아들 이삭을 낳았다. 룻은 베들레헴의 대지주 보아스의 아내가 되었고 다윗의 증조모가 되었다. 여리고 성의 삭개오는 회심을 통한 온전한 구원의 선물을 받았다.
어디 까지나 성도와 성도는 성도의 신분으로 만나고 성도와 성도로 헤어지는 식탁의 거룩함이 있어야 한다. 먹을 것이 없어서 함께 먹자는 것이 아니다. 성도 간에 만나 먹고 마셨으면 그 뒤에 은혜가 남고 간증이 남고 유익이 남고 뿌듯함이 남고 푸근함이 남고 잔잔한 그 무엇인가의 감동이 남아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식탁에 둘러앉으면 안 된다. 그건 가롯 유다가 예수와 마주 앉아 같은 떡 그릇에 손을 넣었지만 그 밤에 유월절 잔치 자리에서 나가서 예수를 팔아 버린 것처럼 사탄의 꼬임에 넘어갈 위험이 커진다. 은혜로운 식탁의 동행이 이어지길 소망한다.
셋째는 기도의 동행이다.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기도는 우상 앞에 비는 독백이 아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으신다. 예수는 이 땅에 계신 동안에 늘 기도하셨다. 제자들에게 어떻게 기도하여야 할지를 가르쳐 주셨다. 그것이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 즉 ‘주기도문’이다. 신앙생활은 기도 생활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동행과 기도의 동행 이것이 신앙생활의 두 기둥이다.
예수께서 교훈하신 기도의 교훈이 무엇인가. “구하라. 그러면 받을 것이다. 찾아라. 그러면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누구든지 구하는 사람은 받을 것이며 찾는 사람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사람에게는 열릴 것이다.”(마7:7-8) 이것은 <현대인의 성경>에서 대하는 예수님의 기도에 관한 가르치심이다. 지난 해와 별 차이가 없을 이 어려운 시련의 때에 기도의 능력을 덧입고 살아가자. 매 순간 주님께 간구하여 부활하신 주님, 내 곁에 찾아오셔서 동행하여 주시는 예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되어야 할 것이다.
넷째는 전도의 동행이다.
글로바와 또 다른 한 제자는 엠마오 마을의 한 집의 식탁에 예수님과 둘러 앉았다. 예수께서 감사 기도를 드리셨다. 그리고 떡을 떼어 두 제자들에게 주셨다. 그 때에 그들의 눈이 밝아졌다. 자기들의 맞은편에 앉으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신 것을 그 때에야 알아 보게 되었다. 그런데 예수는 더 이상 그 자리에 함께 계시지 않고 훌쩍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셨다.
한나절 엠마오로 향해 걸어오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들을 때에 마음이 뜨거워진 글로바와 또 한 제자는 그 분이 부활 예수이신 것을 알고 곧 일어나 어두운 밤 중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다시 돌아갔다. 누가복음 24장 33절에 보면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고 하였다. 여기 ‘곧’이란 시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글로바와 또 한 제자는 망설일 겨를이 없이 그 깜깜해진 밤에 예루살렘을 향하여 되돌아 갔다. 그리고 깊은 밤중에 11제자와 몇 사람들이 숨어 있던 곳을 찾아 갔다 . 그리고 저들에게 말하였다.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다.”(눅24:34)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사람들의 일상이 어떠하여야 할까를 교훈하는 장면이다. 맞다. 예수 부활의 복음을 믿는 우리들이라고 하면 우리는 직장, 사업, 상업, 학업의 그 모든 현장에서 지체하지 말고 할 수만 있으면 예수 부활의 복음을 전하고 또 전하여야만 할 것이다. 밝아 온 2021년 새해. 나에게 찾아 오셔서 동행하시는 예수님의 사람들답게 살아가자. 나와 함께 걸으시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나누시며 함께 식탁에 마주 앉으시고 함께 감사 기도하시는 예수님과 일상생활의 출입을 늘 함께 더불어 같이 하는 동행의 은총이 날마다 풍성하게 임하기를 소망한다.
-위 내용은 2021. 1. 3. 주일 설교문을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