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제의 예물로 드리는 감사
레위기에 소개되는 제사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를 불에 태워서 드리는 화제(火祭)이고 다른 하나는 보리나 밀의 열매를 드리는 소제(素祭)이다. 화제 중의 하나가 번제이다. 번제란 양이나 염소나 송아지를 불에 태워서 드리는 제사이다. ‘번’(燔)자가 ‘태운다’는 뜻이다. 번제나 화목제(和睦祭)는 스스로 자원하여 드리는 자원제(自願祭)이다. 자원제 중에 또 하나가 레위기 2장에 소개된 소제이다.
소제는 누구든지 드릴 수 있다. 레위기 2장 1절에 “누구든지”라는 말씀이 그런 의미이다. 하나님을 믿고 섬기는 백성이면 누구든지 하나님 앞에 소제를 드릴 수 있다. 소제를 예물로 드리는 감사 신앙에 대하여 알아보고 교훈을 삼자.
첫째, 처음 익은 것으로 드려야 한다.
12절에 보면, 소제는 보리의 첫 이삭으로 드리는 것이다. 보리는 매년 첫 번째 나오는 열매이다. 이는 예수 안에서 새롭게 거듭난 성도의 모습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예배는 아무나 드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거듭난 성도들만이 하나님께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 드릴 수 있다. 이는 예배자의 의무이며 권리이다. 그래서 첫 열매로 드리라는 것이다. 주일 예배 신앙이 그러하여야 한다. 그러므로 예배를 경홀히 여기는 것은 아직 스스로 주 안에 거듭난 신자가 아니라는 증거일 수 있다. 예배를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것이다.
둘째, 볶아서 찧은 것으로 드려야 한다.
14절에 보면, “첫 이삭을 볶아 찧은 것으로 네 소제를 삼되”라고 말씀하셨다. 볶아 찧어서 고운 가루를 만들어야 한다. 1, 2, 4, 5, 7절에 보면 반복적으로 나오는 강조가 ‘고운 가루로’예물을 삼으라는 것이다. 고운 가루를 만들려면 볶아야 하고 찧어야 한다. 이는 우리의 이성이나 주장이나 고집이나 편견이나 불완전한 지식이 깨지고 부수어져야 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고집이나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사탄이 가장 건드리기 좋아한다. 사탄·마귀· 귀신이 인간의 불신안으로 인한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건드려서 화가 생기게 하고 불화를 일으키게 한다. 로마서 2장 5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만 네 고집과 회개하지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에 하나님의 의로우신 심판이 나타난다”고 하였다.
볶아서 찧은 고운 가루가 아니면 반죽이 되질 않는다. 뭉쳐지질 않는다. 볶으려면 불을 통과해야 하고 화덕에 굽거나 번철에 부치는 것도 뜨거운 불을 통과하여야 한다. 불과 같은 시험을 통과해야 소제로 드려질 수 있는 것이다. 신앙적으로 적용해 보면 우리 각 사람의 삶이 그러하다. 고난, 시련, 역경, 질병, 사고, 실패, 환난, 우환이 전혀 없이 날마다 따뜻한 봄날과 같은 순탄한 삶을 살아 온 이들 중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존귀하게 쓰임 받은 신앙의 선진들이란 없다.
세례 요한, 예수 그리스도, 예수의 제자들과 사도 바울의 생을 보라. 저들은 한결같이 불과 같은 시험을 견뎌 내고 철판 위와 같은 고난을 감당해 낸 신앙의 선진들이었다. 그 중에 으뜸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 고난이 아닌가. 그러므로 고난이 없이 향기 나는 제물 인생이 된 성경의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셋째, 기름을 부어야 한다.
1절에 보면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이 그 위에 기름을 붓고”라고 했다. 4절에도 보면“기름을 섞어 만든 무교병이나 기름을 바른 무교전병을 드릴 것이요”라고 하였다. 기름은 성령을 상징한다. 고운 가루에 기름을 붓거나 섞는 것은 곱게 깨어진 고운 가루와 같은 마음에 성령의 기름 부음이 있어야 함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진정한 예물 인생이 되려면 깨어진 마음만으로는 부족하고 그 위에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아야 한다. 기름 부음 즉 성령 충만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예물 즉 제물 인생이 될 수 없다. 기름 부음이 없는 상태에서는 연기만 나고 새카맣게 타고 만다.
넷째, 화덕에 굽거나 철판에 부친 것으로 드려야 한다.
화덕이나 철판의 특징은 뜨거운 불이 있다는 점이다. 팔레스틴 사람들의 화덕이란 둥그렇게 만든 화덕의 안쪽 벽에 반죽에 기름을 발라서 던져 넣어 굽는다. 이는 신앙 생활의 연단과 시험을 말한다. 창세기의 요셉은 애굽의 노예 생활 13년이 화덕과 철판과 같은 곳이었다. 다윗에게는 사울 왕의 칼과 창을 피해 지내야 했던 엔게디 광야와 막벨라의 동굴 생활이 화덕과 번철과 같은 시험과 연단의 나날이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히 해야할 점이 있다. 화덕이나 철판과 같은 불 같은 시험을 받기 전에 먼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어야만 한다. 그래야만 환난과 시험을 당할 때에 새카맣게 타 버리지 않고 정금처럼 오히려 더 빛나는 믿음의 사람으로 세워지게 되는 법이다. 가령 다윗은 사울 왕으로부터 미움을 받고 시기를 받아 죽음의 위기를 수 없이 넘기기 훨씬 전에 이미 성신의 충만함을 받았다. 사무엘 상 16장 13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나온다.
“사무엘이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그의 형제 중에서 그에게 부었더니 이 날 이후로 다윗이 여호와의 영에게 크게 감동되니라 사무엘이 떠나서 라마로 가니라.”
다섯째, 조각을 나누어 드려라.
5절과 6절에 보면 화덕에 구운 무교병이나 무교전병을 다시 철판에 기름을 섞어 부친다. 그것을 조각 조각 부수어서 그 위에 기름을 붓는 것이 소제다. 조각 조각 부수어서 드리는 것은 온전한 희생과 헌신이다. 볶은 고운 가루로 드리는 것이 희생과 헌신의 시작이라면 화덕과 철판을 거치게 한 후에 다시 조각 조각 부수어 드리는 것은 완전한 희생과 헌신의 마지막 모습으로 말한다. 이는 자기의 원래의 모습을 자랑하지 않고 부수어지고 나누어지고 뒤 섞이고 하나 되어 향기로운 냄새로 드려지는 화제의 절정이다. 이렇게 소제를 드리는 성막과 성전에는 소제의 무교병과 무교전병을 구워 봉헌하는 구수하고 향기로운 냄새로 진동하게 된다.
제사장은 그것을 받아다가 여호와께 화제로 불태워 드린다. 이것이 화제인데 ‘향기로운 냄새’(레2:9)라고 하였다. 그렇게 드린 소제물 중에서 남은 것을 제사장인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몫으로 돌렸다. 10절에 보면 이는 “여호와의 화제물 중에서 지극히 거룩한 것이니라”고 하였다.
여섯째, 유향을 더하여야 한다.
기름을 붓고 유향을 더하되 두 가지를 금해야 한다. 11절에 보면 누룩이나 꿀을 넣지 말라고 했다. 누룩을 넣지 말라는 것은 부패와 분열과 위선을 경계하신 것이다. 꿀을 넣지 말라는 것은 쾌락과 유혹을 주의하라는 교훈이다.
12절에 보면 예외가 있다. 처음 익은 열매로 소제를 드릴 때에 그것이 하나님께 태워 드려지는 소제가 아니라 제사장이 먹을 분량의 소제인 경우에는 누룩과 꿀을 섞어도 무방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를 올려 드리는 소제물로는 적합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누룩이나 꿀은 불이 닿으면 변질되기 때문이다.
1절에도 보면, 소제의 예물은 고운 가루로 예물을 삼고 그 위에 기름을 붓고 또 그 위에 유향을 놓으라고 하셨다. 15절에 보면, 하나님은 소제물을 준비할 때에 누룩이나 꿀을 섞지 말고 유향을 더하라고 하셨다. 유향은 히브리어로‘레보나’(לבונה)라고 해서 유향나무에서 축출한 고급 향료이다. 이는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물로 드려지는 성도의 찬양과 기도생활을 상징한다. 그러므로 예배시간에만 찬송하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생활 중에서 날마다 순간마다 찬송하고 기도하여야 한다. 그것이 향기로운 냄새요 유향을 더하는 신앙이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2장 15절에서 믿음의 사람들은 구원 받는 성도들에게나 세상의 망하는 자들에게나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의 향기”라고 하였다. 어떤 사람에게서는 사망에 이르는 냄새가 나고 어떤 사람에게서는 생명이 이르는 냄새가 난다고 하였다.
일곱째, 소금을 쳐야 한다.
13절에 보면,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고 하였다. 소금은 부패와 변질을 방지한다. 소금은 음식물의 고유한 맛을 유지하게 해 준다. 소금이란 변하지 않고 영원한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고대 근동에서는 어떤 계약을 성사할 때 현장에서 서로가 떡과 소금을 함께 먹었다. 이는 계약을 파기하지 않고 끝까지 지켜나가겠다는 약속의 상징이다. 고운 가루에 소금을 쳐서 화덕에 굽고 철판에 다시 구워서 곱게 조각 낸 정성스러운 소제를 향기나는 냄새로 여호와께 드리기를 원하신다.
13절에 보면 이것을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지니”라고 하셨다. 맞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세워진 언약은 그 누구도 파기할 수 없다. 영원 불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금 언약’인 것이다. 이 소금 언약이란 말씀이 역대하에도 나온다.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께서 소금 언약으로 이스라엘 나라를 영원히 다윗과 그의 자손에게 주신 것을 너희가 알 것 아니냐.”(대하13:5)
그렇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다. 그 언약은 영원 불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금 언약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산상 수훈에서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니”(마5:13)라는 교훈을 강조해 주셨다. 소금의 맛은 변하지 않아야 한다. 소제에 소금을 치는 것은 변하는 않아야 하는 것을 상징적으로 교훈하는 것이다. 마가복음 9장 50절에서는 “소금은 좋은 것이다.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너희 말을 항상 은혜 가운데서 소금으로 맛을 냄과 같이 하라”(골4:6)고 교훈하였다. 그 어느 누구나 소제의 예물로 드려지는 인생이어야 향기 나는 제물이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