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살아가라
데살로니가 전서의 바탕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을 기다리는 재림 신앙이다. 그 당시에 가는 곳곳마다 환난과 핍박이 극심하였음으로 바울 사도 자신에게 그런 신앙이 더욱 컸을 것이 분명하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성도들이라면 어떤 신앙 태도를 갖고 살아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첫째, 서로 존중하며 화목하라.
데살로니가전서 5장 13절 끝에 보면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고 하였다. 12절에서는“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라고 권하고 있다. 여기서 사용하는 ‘수고’라는 말은 1장 3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사랑의 수고”를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한 수고 중에 다스림과 권면이 포함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수고를 많이 한 사도였다. 갈라디아서 4장 11절에 보면 “내가 너희를 위하여 수고한 것이 헛될까 두려워하노라”고 하였다. 골로새서 1장 29절에서는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기꺼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내 몸으로 채우고 있습니다.”(골1:24/공동번역)라고 고백하였다.
사역자의 수고를 누구보다 더 잘 아는 인물이 사도 바울이었다. 그런 면에서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에게 “그들의 수고와 다스림과 권면을 알아서 사랑 안에서 귀히 여기며 서로 화목하라.”고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목회자들의 수고와 사역자들의 수고와 다스림과 권면을 알아 주라는 것이다. ‘알아 주라’는 말은 ‘그 수고의 가치를 인정하라’는 뜻이다.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고 존중하며 서로 화목하게 살아가라는 것이다.
둘째, 서로를 선하게 대하라.
신앙생활은 서로를 선하게 대하는 것이다. 누가 내게 악을 행할지라도 그 악을 악으로 갚으면 안된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이렇게 갚으면 누구 눈이 남아나고 누구 치아가 남아나겠는가. 예수께서는 끊임없는 용서를 교훈해 주셨다. 일흔 번씩 일곱 번만이 아니라 끊임없이 용서하고 또 용서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사도 바울의 권면도 마찬가지이다. 삼가서 누구든지 서로를 악으로 대하지 말고 모든 사람을 항상 선하게 대하라고 교훈하였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7-18절에서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고 가르쳐 주었다. 주님은 바울 사도를 통하여 “악에게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롬12:21)고 교훈해 주셨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4절에, “모든 사람에게”라는 그 대상에 예외가 없다. 누구를 대하든지 그렇게 하라는 말씀이다. 사도 바울은 몇 가지의 예를 든다.
“게으른 자들”이란 <새번역 성경>에 보면 “무질서하게 사는 사람들”이라고 했다. <현대인의 성경>에 보면 “제 멋대로 사는 사람들”이라고 번역하였다. 우리가 오래도록 보던 <개역 한글>에는 “규모 없는 자들”이라고 번역하였다. 원래의 단어인 ‘아타크투스’(ατάχτους)는 “군대의 대열에서 이탈한 병사”를 일컫는 용어이다. 교회로 적용하면 “교회의 질서와 규율을 깨트리고 혼란스럽게 하는 자들”을 지목해서 언급한 말이다. 그 당시 데살로니가 교회가 좋은 교회로 소문나고 본이 되는 교회로 알려진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더러 그렇지 못한 이들이 교회 안에 섞여 있었다. 데살로니가 후서의 내용을 보면 당시의 실상을 익히 알 수 있다. 첫 편지에서 그러한 자들을 권계하라고 하였는데 나중 편지에서 “그러한 자들을 멀리하라”고 한 것을 보면 그런 자들로 인한 교회와 성도들이 겪는 폐해가 심각했던 것을 짐작 할 수 있다.
또한 “마음이 약한 자들을 격려하고”라고 하였다. ‘마음이 약한 자들’이란 ‘소심한 자들, 쉽게 낙담하는 자들’을 일컫는 말이다. 이러한 언급의 근거는 그 당시 예수 믿는 이들에게 있어서 적지 않은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신앙에 대하여 불분명하였기 때문이다. 데살로니가 전서 4장 13절에 보면 그런 정황을 이해할 수 있다.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하지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 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살전4:13) 오늘날 나는 어떤 신앙인가. 지금 나의 신앙의 현주소는 어떤가. 나에게 과연 천국 신앙, 재림 신앙이 분명한가. 아니면 “사람이 죽으면 끝이지 무슨 천국은 천국, 지옥은 무슨 지옥”그러면서 그냥 교회가 좋아서 다니고 있지는 않은가.
그 당시에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사도 바울이 예언한대로 환난과 핍박이 적지 않았다. 데살로니가 전서 1장 6절에 보면 “또 너희가 많은 환난 가운데서”라고 언급한 것을 보면 적지 않은 환난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살로니가 교회의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과 재림에 대한 분명한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더러 그런 믿음에 대하여 불분명한 상태로 마음이 약한 자들이 있었다. 그래서 환난 중에 슬퍼한 것이다. 바울은 그런 저들에 대하여 “격려하라, 위로하라”고 한 것이다.
그리고 “힘이 없는 자들을 붙들어 주며”라고 하였다. 여기서 힘이 없는 자들이란 몸이 병들어 힘이 없는 자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으로나 영적으로 자신의 신앙을 지탱할 만한 분명한 신앙의 의지가 불확실한 자들”을 언급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이단과 사이비에 빠져 버리고 배교하는 이들이 있다. 사탄의 시험에 넘어지는 자들이 있었다. “시험하는 자가 너희를 시험하여 우리 수고를 헛되게 할까 함이니”(살전3:5)라고 하였다.
예수 믿는다고 하면서 세상의 유혹과 시험과 욕망에 이끌려서 육체의 욕망의 노예로 전락해 버리는 불쌍한 이들이 있다. 그런 경우에 가정을 떠나기도 한다. 아내를 버리기도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하나님을 모르는 이방인과 같이 색욕을 따르지 말고”(살전4:5)라고 언급하였다. 거룩함과 존귀함으로 가정을 지키라고 명령한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형편의 모든 사람들에 대하여 오래 참으라고 하였다. 함부로 비판하거나 판단하지 말고 오래 오래 참아 주라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누가 나에게 악하게 대할 지라도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였다. 모든 사람에 대하여 항상 선을 따르라고 하였다. 여기 ‘따르라’는 단어는 ‘디오코’(διώκω)는 “사냥감을 추격하는 사냥꾼의 집요함”을 뜻하는 단어이다. 선으로 악을 대하다가 쉽게 포기하지 말고 주께 모든 상황을 맞기고 선으로 악을 대하여 이기라는 말씀이다.
셋째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살아가라.
그 유명한 말씀이 오늘 본문에 나온다.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그리고 이어서 “이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살아가는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길일까.
어떻게 사람이 항상 기뻐할 수 있을까. 살아가다 보면 기쁜 일도 더러 있기는 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고난과 시련과 역경과 고통과 슬픔와 아픔을 견뎌 내며 살아야 하는가. 사도 바울 자신이 그러하지 않았나. 그가 복음을 이방 땅에 전하는 사도로서 얼마나 많은 어려움을 겪으며 살았나. 그런데 어떻게 이렇게 쉽게 말할 수 있는 걸까.
그러면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살아가는 성도된 나는 과연 무엇을 기뻐하며 살아가야 하나.
언제 어떤 상황에서 기뻐하여야 하나.
무슨 일에 대하여 기뻐해야 하나.
누구에 대하여 기뻐해야 하나.
더 궁극적인 질문을 해 보자면 “왜 기뻐하며 살아가야 하나”의 문제이다.
고린도 후서 11장 23절부터 30절까지에 나오는 사도 바울의 고난에 대한 간증을 대하다 보면 바울에게 과연 기쁨이 있었을까 하고 질문하게 된다. 그렇지 않나. 극심한 고난 속에서 어떻게 기쁨을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강조한다. “항상 기뻐하라...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고 말이다.
기쁨은 고난 중에서도 바람처럼 매 순간마다 스쳐 지나가는 은혜의 선물임이 분명하다. 그 순간의 기쁨을 감사함으로 누리고 기도 가운데 감사하며 다시 또 기쁨의 이유와 그 근원을 찾으며 살아가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분명하게 교훈하고 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울면서도 기뻐하고, 슬퍼하면서도 기뻐하고, 괴로워하면서도 기쁨의 이유를 찾아 나서고, 앞이 캄캄하여 더 이상 기도할 수 없을 때에라도 여전히 우리는 쉬지 말고 기도하여야만 한다. 그리고 다시 또 감사의 이유, 감사의 조건, 감사의 분량을 찾아보고 감사해야만 한다. 감사하며 살아가야 한다. 내가 지금 사는 것은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계신 주님께서 나와 더불어 살아가고 계신 것이니 말이다.
-위 내용은 2020. 11. 8. 주일 설교문을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