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자의 가는 길
프랑스의 신학자요 종교 개혁가인 장 칼뱅(Jean Calvin, 1509-1564)은 “인간의 모든 직업은 하나님의 부름에 의한 거룩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것을 ‘직업소명설’이라고 한다. 나쁜 일이 아니라면 직업은 높고 낮음도 없고 귀하고 천한 것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레미야의 곁에서 받아 기록한 서기관의 이름이 바룩이다. 그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동역자요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대필자였다. 그러므로 선지자 예레미야도 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 적은 바룩의 역할도 참으로 귀하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감동을 받아서 말하고 그 곁에서 그 말한 내용을 꼼꼼하게 받아 적는 대필자가 있었다. 그의 이름이 ‘더디오’이다. 로마서 16장 22절에 보면 “이 편지를 기록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라고 하였다.
예레미야나 사도 바울만 사명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대필하던 기록자인 바룩이나 더디오도 사명자이다. 오늘날 우리 각 사람도 마찬가지이다. 가정과 직장과 일터와 사회의 곳곳과 교회에서 각 사람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분부와 기대와 섭리를 깨닫고 살아간다면 우리는 누구나 다 사명자이다.
첫째, 사명자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깨달아 알아야 한다.
인간의 생사화복과 흥망성쇠가 하나님의 손 안에 있다. 사람이 노력하고 수고하며 성실하게 사는 것이 필요하지만 하나님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물론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은 “하나님의 섭리” 운운하면 “그런게 말이 되느냐”고 비판하고 나설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보면 우주 삼라만상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 있고 각 사람을 향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다.
가령 아브라함이 나이 75세에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떠났다. 그에게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것이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그런 생의 변화가 그의 곁에서 함께 살아가던 동족들에게는 쉽게 받아들여 질 수 없는 사건이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그의 아내 사라를 통해서 하시려는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이루어 가셨다. 그 절대 주권의 약속은 아들 이삭과 손자 야곱을 통하여 이어져 갔다. 하나님은 흥하게도 하시고 망하게도 하신다. 하나님은 세우기도 하시고 헐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심기도 하시고 뽑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의 힘만 의지하고 사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둘째, 사명자도 평범한 일상의 복을 누릴 줄 알아야 한다.
예레미야 45장 5절의 ‘큰일’이란 ‘게돌로트’는 분수에 지나친 욕망을 뜻한다. 성경은 바룩이 꿈꾸었던 큰일에 대하여 자세하게 말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하나님이 바룩에게 “네가 너를 위하여 큰 일을 찾느냐”고 책망하신 것을 보면 아마도 바룩이 어떤 허망한 야망을 갖고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그것을 아신 하나님이 바룩에게 “큰 일을 찾지 말라”고 책망하셨다.
우리가 소망을 갖고 살고 꿈을 품고 그 꿈을 이룩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은 필요하고 좋은 것이다. 그러나 허망한 꿈에 사로잡히거나 지나친 욕망에 사로잡혀서 물불 가리지 않고 목표만 향해 달려가는 것은 지극히 위험한 일이다. 일본 개화기에 일본 북해도 농과대학에서 서양의 선진 농업 기술과 성경과 신학을 가르치던 교수 윌리엄 클락((William Smith clark, 1826-1886)은 “소년들이여 야망을 품으라”(Boys, be Ambitious.)는 말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정작 그 자신은 미국으로 돌아간 후 얼마의 세월이 흐른 나중에 허름한 여인숙에서 초라한 나날을 지내다가 매우 불행하게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노아는 세상 사람들이 그를 손가락질하고 비난했지만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였다. 분수를 지켰다. 방주 건설을 평생 사명으로 알았다. 그리고 시작된 홍수 심판 때에 온 가족이 구원을 받았다.
바룩처럼 허망한 큰 꿈에 사로 잡혀 날뛰면 하나님이 아시고 책망하신다. 분복(分福)이란 말이 있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자신이 누리며 살만한 분복을 나누어 주셨다. 그것을 감사함으로 누리며 사는 것이 행복의 길이다. 상대적으로 남만 부러워하고 탐심을 갖고 지나친 경쟁심을 갖는 것은 불행과 화(禍)의 시작이다.
전도서 5장 12절에 보면“노동자는 먹는 것이 많든지 적든지 잠을 달게 자거니와 부자는 그 부요함 때문에 자지 못하느니라.”고 했다. 새번역 성경은 전도서 5장 20절을 이렇게 번역하였다. “하나님은 이처럼, 사람이 행복하게 살기를 바라시니, 덧없는 인생살이에 크게 마음 쓸 일이 없다.”우리 각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마음을 알게 하는 내용이다.
삼청동에“서울에서 둘째로 잘하는 집”이라는 단팥죽 집이 있다. 그 주인 김은숙 여사는 올해 81세다. 1976년부터 44년을 그 자리의 좁은 공간에서 단팥죽을 끓여 팔았다. 그렇게 번 돈으로 12억을 남에게 좋은 일을 하며 살았다. 남편과 주택 부금 부어 마련해서 살다가 남편이 남겨 놓고 세상을 떠난 아파트도 처분해서 9억을 고스란히 ‘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기탁했다. 고등학교 3학년 때 딸이 조현병을 앓기 시작했는데 그 딸이 이젠 60살을 넘었다. 평생 짐으로 여기며 살지만 그래서 어려운 이웃을 대할 때에 남의 일 같이 보이질 않는다고 했다. 2억원은 딸이 하루가 멀다 하고 다니는 은평 병원에 따로 지정 기탁하였다. “형편이 어려워 제때에 치료 혜택을 받지 못하는 이웃들에게 나누어 써 달라고 기탁한 것이다”라고 말했다. 지나친 욕심을 부리다가 불행의 늪에 빠지지 말고 하루 하루 주님 안에서 감사하며 행복하게, 즐겁게,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 딸의 모습이어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생명 보전의 약속이다.
그 당시에는 전쟁으로 인해서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사람이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갔다. 유다 땅에 남은 자들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언제 내 목숨이 달아날지 예측할 수가 없었다. 더군다나 대적자가 우굴대던 환경에서 예레미야의 일상을 곁에서 지켜 보던 말씀의 대필자 바룩의 마음이 평안할 리가 없었다. 자신도 언제 목숨이 달아날지 모르는 신세였다. 그런데 하나님은 특별히 바룩을 지정하셔서 말씀하셨다. 그의 생명을 지켜 주시겠다고 하셨다.
<라이언 일병 구하기>라는 영화가 있다. 그 내용이 무엇인가. 생명의 숭고한 가치를 교훈하지 않는가. 생명이란 그런 것이다. 내 생명이 귀하듯이 남의 생명도 귀한 것이다. 내 목숨이 아깝듯이 남의 목숨도 소중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바룩에게 격려하고 소망을 주고 계시다. 바룩의 생명을 마치도 노략물을 주듯하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생명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하나님이 허락하지 않으시면 참새 한 마리도 저절로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시리온에 팔려 가는 그 배후에도 하나님의 뜻과 섭리가 있으시다. 하나님은 삼라만상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생명의 주인이시다.
사고와 사건이 많은 세상에서 경거망동하지 말고 침착하게 서두르지 말며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사람다운 삶을 가꾸어 가자. 주님이 동행하여 주심을 믿고 살자. 하나님은 택한 자녀의 범사에 섬세한 손길로 간섭하시고 인도하실 것이다. 주님과 더불어 승리하는 나날, 감사하는 나날, 기쁨과 즐거움으로 슬픔과 낙담과 우울과 절망을 극복하며 살아가는 주의 자녀들이 모두 다 되어야만 할 것이다.
-위 내용은 2020. 10. 11. 주일 설교문을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