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일을 창조하시는 여호와
예레미야 31장 22절에 보면 “여호와가 새 일을 세상에 창조하였나니”라고 말씀하셨다. 주전 722년에 북 왕국 이스라엘이 앗수르에 망했다. 남 유다의 백성들이 바벨론의 침략을 받아 망한 것은 주전 586년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의 입을 통해서 장차 겪을 포로 생활에 대하여 경고하고 또 경고하셨다. 그런 중에서도 70년간의 포로 생활 이후에 회복될 은혜와 안식의 날에 대해 약속하셨다. 그러면 하나님이 세상에 창조하신 새 일이란 무엇인가.
첫째, 살던 성읍으로 돌아오게 하신다고 하셨다.
21절의‘이정표를 세우고 푯말을 만들라’는 말씀은 바벨론으로 끌려 갈 때에 그렇게 하라는 가르침이시다. 지금은 비록 끌려가고 있지만 때가 되면 울며 끌려갔던 그 길로 다시 되돌아 올 날이 분명히 있으리라는 분명한 약속의 말씀을 하신 것이다. 되돌아 올 때에 필요하니 이정표도 세우고 푯말도 만들어 두라고 하셨다.
예레미야 29장 11절에 보면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려는 것이니라.”
하나님은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언약 민족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처럼 우상 숭배에 빠지고 하나님의 진노를 자초해서 멸망 받는 백성이 되길 원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의 기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우상 숭배를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리하여 돌아온 백성들이 하나님 안에서 장래의 소망을 품고 재앙을 딛고 평안과 안식의 날로 새롭게 나아가는 것이다. 이것을 본문에서는“여호와께서 세상에서 창조하시는 새 일”이라고 말씀하셨다. 맞다. 하나님은 허물어 버리기도 하고 다시 세우시도 하신다. 흩어 버리기도 하고 불러 모으기도 하신다. 미워하기도 하시고 사랑하기도 하신다.
2,600여년 전의 삶이란 오죽했을까. 그런 여건에서 더군다나 남의 나라에 포로로 끌려가서 지내는 그 형편이 얼마나 고통과 고난과 슬픔과 처절한 비극의 날이었겠는가. 포로 생활이란 것이 자유를 빼앗긴 채 살아가는 여건이니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약속하셨다. “너희들이 예루살렘과 유다의 살던 성읍으로 되돌아오는 날이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예레미야 31장 8-9절의‘북쪽 땅’이란 바벨론을 말한다. 지금은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신세이지만 때가 되어 하나님의 용서가 선포되는 그 날이 되면 이런 회복의 날을 주겠다고 약속하셨다.
올 2020년은 농사로 하면 흉년이다. 때가 되어 월급을 받는 직장인이 아니라면 자영업자나 대기업이나 중소기업가나 영세한 상인들의 경우에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울상이다. 나오는게 한숨 뿐이다. 앞이 보이질 않는다. 경제 상황이 안개 속이다. 언제까지 이러한 형편이 계속될지 아무도 예측할 수조차 없다. 세계의 그 어느 나라를 보나 별 차이가 없다.
그런 나날을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오늘 묵상하는 예레미야서에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23절에 보면, 하나님이 “그 사로잡힌 자를 돌아오게 할 때가 있다”고 하셨다. 장차 유다 땅과 자신들이 살던 성읍들로 돌아가서 그 곳을,“의로운 처소여 거룩한 산이여 여호와께서 네게 복 주시기를 원하노라”고 말하게 될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에 끌려가서야 주의 은혜를 절감하였다. 절기때마다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제사하던 날이 얼마나 귀한 날이었는지를 실감하게 되었다. 인간의 어리석음과 우상숭배와 죄악으로 인하여 책망하고 벌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택한 백성들로 하여금 다시 은혜를 입게 하시며 안식을 누리게 하신다. 영원한 사랑과 인자로 이끌림을 받게 하신다. 하나님이 세우시면 세워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즐거워하게 하시면 소고(小鼓)를 들고 즐거워하며 함께 춤을 추며 나아오게 되는 것이다.
둘째, 심령을 상쾌하고 만족하게 하신다고 하셨다.
요즘 너나 나나 웃을 일이 별로 없다. 쉬어도 쉬는 것 같지를 않다. 여름이 다 가고 서늘한 바람이 불도록 날마다 텅 비어 있는 예배당을 지키면서 새벽 기도하며 하루 하루를 지내는 것이 일과이다.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요즘 우리는 코로나19와의 전쟁을 치루고 있다. 사업을 이어가기는커녕 아예 사업장 문을 닫은 교우들 가정을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해진다. 빈 가게를 지키고 손님의 발길이 끊긴 가게에서 버티기를 하는 교우들 생각을 하면 눈물이 핑 돈다. 교회도 그렇다. 한 가정 한 가정 부흥해도 시원치 않을텐데 올해는 새가족은 커녕 우리끼리 조차도 모여서 예배드리지 못한지가 한 달이 되어 가니 머리가 띵하고 앞이 캄캄해 진다.
그런데 성경을 읽어 내려가다 보니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25절을 보라.
“내가 너희 피곤한 심령을 상쾌하게 하였다.
내가 너희 모든 연약한 심령을 만족하게 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실 수 있고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24절을 보라. 목가적(牧歌的)이지 않나. 그 모든 성읍마다 농부가 평화롭게 농사를 짓는다. 양 떼를 모는 목동과 목자들이 평화롭게 농부들과 더불어 들판과 산허리를 덮는 양떼를 인도한다. 이러한 장면을 상상하면 그림과 같은 평화로움이 전해진다. 그런데 이러한 생생한 음성을 듣고 깨어 보니 꿈이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분명한 회복의 약속을 예레미야의 꿈을 통해 말씀하셨고 때가 되어 이룩하신 것이다.
셋째, 깨어서 세우고 심으신다고 하셨다.
예레미야가 깨어 보니 꿈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예레미야로 하여금 꿈을 꾸게 하셨고 그 꿈에 말씀하신 약속의 말씀을 때가 되어 일일이 다 이루셨다. 하나님은 언약하시고 때가 되면 성취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약속의 말씀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예레미야야게 무슨 말씀을 더 하셨는가. 26절, 단 꿈에서 깨어난 예레미야에게 여호와의 말씀이 계속하여 임하였다. 장차 하나님께서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이스라엘과 유다 집에 뿌리실 날이 이를 것이라고 하셨다. 번성하게 해 주시겠다는 약속이다.
하나님은 장차 고난 중에 버려진 자처럼 살아가던 바벨론 포로의 땅의 백성들을 세우시고 심으시리라고 약속해 주셨다. 맞다. 하나님은 무너트리시고 뽑아 버리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랑 받는 백성들이 열방 백성들 가운데 우뚝 세워지길 원하신다. 예레미야 31장 4절에 보면 “내가 다시 너를 세우리니 네가 세움을 입을 것이요”라고 약속해 주셨다. 여호와께서 심으시고 번성하게 하시면 뽑아낼 대적이란 없다.
하나님이 세워 주셔야 한다. 하나님이 심어 주셔야 한다. 그래야 견고하고 그래야 강성하고 그래야 번성하고 그래야 왕성할 수 있다. 힘으로도 능으로도 못하나 오직 여호와의 신(神)으로 되는 것이다. 개인도 가정도 교회도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요즘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는 이들이 많다.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으니까 자꾸만 디저트를 찾게 된다. 그러다 보니 단거(DANGER)를 너무 많이 먹게 되고 그러니까 그게 건강을 해치는 위험(DANGER)한 상황이 반복된다.
인류가 설탕을 정제해서 먹기 시작한 지는 500년 전이다. 그 당시에는 설탕이 금값처럼 비쌌다. 어느 정신신경과 교수가 강의 중에 영어로 이런 조크를 하였다.
STRESSED 스트레스
DESSERTS 디저트
DANGER 단거
DANGER 댄저
스트레스를 단거로 풀려 하지 말고 하나님께 가지고 나아와야 한다. 주께 직고하여야 한다. 그래야 생의 위험에서 벗어 날 수 있다. 예레미야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때가 되어 이루신 하나님이 우리들의 범사를 다스려 소원의 항구로 인도해 주기를 소원한다.
-위 내용은 2020. 9. 13. 주일 설교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