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라이프
영어 단어 중에 ‘Still Life’란 미술의 정물화(靜物畵)를 뜻한다. 과일이나 꽃 혹은 화병 따위의 스스로 움직이지 못하는 물체들을 놓고 그린 그림을 일컫는 말로 인상파 이후 서양화의 한 분야로 정착되었다.
우베르토 파솔리니 감독은 그의 영화 제목을 <스틸 라이프>(Still Life, 2013)라고 정하였다. 베니스 영화제에서 감독상을 비롯하여 네 가지 상을 탄 작품이다. 최근에 우연히 이 영화의 줄거리를 접하게 되었다. 10여분 정도 분량의 요약된 내용의 영화도 보았다. 영화는 거의 말 없이 진행되고 이미지도 잔잔하지만 영화의 느낌은 강렬하다.
주인공 존 메이는 런던 캐닝턴 구청 소속 22년차 공무원이다. 그는 홀로 외롭게 지내다가 고독사한 사람의 추도문을 작성하고 장례를 지내고 장례식에 참석할 가까운 이를 찾는 일을 전담으로 한다. 그는 혼자 산다. 매일 같은 옷, 같은 출퇴근 길, 같은 식탁 앞에 앉는다. 참치캔 하나를 따 놓고, 토스트 한 쪽 구워 놓고, 커피 한 잔을 준비해서 혼자 앉아 식사를 한다. 단조롭기 그지없고 심히 외로워 보이는 일상이다. 그런 그의 맞은 편 아파트에 살던 빌리 스토크라는 노인이 죽은 채 발견된다. 그 같은 날 그는 정리 해고를 당하고 만다. 그는 평소에 상관이 그를 보기에 굳이 화장하고 끝내면 될 일에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을 들이는 무능한 공무원으로 여겨졌다. 그러나 그는 빌리 스토크의 과거를 수소문하면서 장례를 준비한다. 그는 빌리 스토크의 유품 중에서 발견한 앨범 속의 딸 켈리를 찾아 나섰다. 빌리 스토크의 딸 켈리는 아버지의 장례를 인연으로 해서 존 메이에게 데이트를 신청하였다. 존 메이는 켈리에서 선물할 예쁜 커피 머그 잔을 사 들고 버스를 타기 위해 서둘러 길을 건너려다가 교통사고를 당하여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빌리 스토크의 장례식 날 주인공 존 메이는 외롭게 길가에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장례식 내내 존 메이를 기다리던 켈리는 존의 이와 같은 안타까운 죽음의 소식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왜 그에게는 평범한 일상의 행복이 주어지지 않는 것일까”하는 질문을 하게 된다. 그는 늘 무표정한 나날을 보냈다. 모처럼 이성에 관심을 갖고 새로운 세계를 경험하려던 그에게 갑자기 죽음이 찾아오고 말았다. 잔인하리만큼 그에게는 누군가와 마음을 나누며 더불어 즐겁게 살아가는 행복이 허락되지 않았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그의 쓸쓸한 묘지 주변에 그의 손길을 거쳐서 장례가 치루어졌던 이전에 고독사한 사람들의 영혼들이 하나둘 모여든다. 그리고 그 많은 사람들의 영혼이 빼곡하게 그의 묘지 주변을 감싼다.
기독교는 부활(復活)의 종교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지 사흘 만에 부활하였다. 아니, 하나님이 그를 무덤에서 살려내셨다. 예수는 부활 후 사십일을 이 땅에서 지내고 승천하였다. 부활 신앙이 없다면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없다. 기독교는 사람다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를 교훈하는 정도의 도덕, 윤리, 수양 그 이상의 그 무엇이다. 예수가 공자, 맹자, 노자, 석가모니, 모하메드와 다른 점이 이것이다.
영혼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 이 영화는 허무맹랑한 내용으로 끝나는 것처럼 비칠 것이다. 평소에 존 메이의 상관은 늘 그에게 강조하여 질문하였다. 그리고 어느 날 그를 갑자기 해고하였다. “장례식이란 산 자를 위한 것인데 아무도 원치 않는 고독사한 주인공의 장례를 위해 애쓰는 것이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하고 말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 성경은 영혼과 영생에 대하여 무엇을 말씀하고 있는가. 예수는 모든 교훈을 비유로 증거하였다. 그 비유의 주제는 한가지였다. 가령 마태복음 13장 44절부터 50절까지에 보면“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라고 세 번이나 반복해서 천국을 주제로 한 비유가 실려 있다.
그러면 왜 예수께서는 일관되게 모든 비유의 주제를 ‘천국’(天國) 즉 ‘하나님의 나라’로 다루고 있을까. 이는 천국은 가상의 개념적인 세계가 아니라 실존의 세계임을 교훈하시려는 의도가 아닐까.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로 제목 붙여지는 예수의 천국과 지옥 비유도 그러하다. 천국이 실존의 세계이듯이 지옥도 실존의 세계이다.
예수의 생애가 보여 주는 성경의 기록 또한 그러하다. 성경의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서가 증언하는 예수의 탄생, 생애, 마지막 일주일, 죽음, 장례, 부활, 승천의 과정은 무엇을 말씀하는가. 예수의 생애에 대한 성경의 기록 중에 사실이 아닌 거짓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다면 성경은 진리의 책이 아니다.
이 세상에 자신의 죽음을 앞당기기를 원하는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물론 자신의 목숨을 스스로 끊는 이들이 없지는 않지만 말이다. 인간의 잉태와 탄생이 신비이듯이 이 세상을 살아가던 한 사람이 생을 다하는 죽음도 신비의 세계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임사체험을 경험한 이들의 글이나 영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죽음을 미리 경험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책 중에 서울의대 소화기 내과 교수인 정현채(1955- ) 교수의 <우리는 왜 죽음을 두려워 할 필요 없는가>라는 책이 있다. 그는 책에서 죽음을 종교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과학과 의학의 차원에서 접근하고 있다. 그는 암 투병 때문에 정년을 2년 앞당겼다. 그는 자신의 죽음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연구실 비품이나 자료를 학교의 의학역사문화원에 기증하였다. 매년 다섯 번의 헌혈을 하고 원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강의 노트를 복사해 준다. 장기기증서약서와 유언장을 미리 써 놓았다. 자신이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되면 기도삽관이나 연명의료를 하지 말라는 내용의 사전연명의료의향서도 작성하였다. 자신의 장례식에 쓸 음악도 미리 정해 두었다. 시신은 수의 대신 무명옷을 입히고 화장하여 바다에 뿌려 달라는 사전장례의향서도 작성하였다. 책에서 그는 가능하면 언젠가는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직시하여 자신만의 죽음에 대한 태도를 가지라고 권유한다. 맞다. 죽음의 순간은 누구에게나 찾아 온다. 누구인들 그런 생의 마지막을 선택하겠는가 말이지만 그는 중환자실에서 인공호흡기에 의지하며 쓸쓸하게 삶의 길이를 연장하기보다 삶을 잘 마무리하는 자세가 필요함을 강조한다.
임종 연구의 개척자로 불리는 엘리자베스 퀴블러 로스(Elisabeth Kübler-Ross, 1924-2004)의 여러 책 중에 <죽음과 죽어감에 답하다>라는 책이 있다. 저자는 1926년에 스위스 취리히에서 세 쌍둥이 중 첫째로 태어났다. 그녀는 자신과 똑같은 모습의 다른 두 자매를 바라보며 일찍부터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였다. 그녀는 “진정한 나는 누구인가? 인생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존재인가?”라는 질문을 계속해 왔다. 스위스 시골에서 자란 그녀는 아버지의 친구가 나무에서 떨어져 죽은 것을 보면서 죽음에 대해 일찍부터 심각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그녀는 취리히 대학에서 정신 의학을 공부하고 미국인 의사와 결혼하면서 뉴욕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뉴욕과 시카고 등지의 병원에서 죽음을 앞둔 수 많은 환자들의 정신과 진료와 상담을 경험하였다. 그녀는 죽어가는 이들과의 수 많은 대화를 통해 “어떻게 죽느냐”는 삶을 의미 있게 완성하는 중요한 과제라는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당신은 죽음과 그 이후의 세계에 대하여 어떤 믿음과 지식을 갖고 있는가.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1장 25-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