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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지성래목사  | 칼럼
자유롭게 하는 진리(2) 20170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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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7-03-26 20:24 조회 13,128 댓글 0
 
자유롭게 하는 진리(2)


  진리란 옳고 바른 상태이다. 하나님의 천지 창조는 완전하고 좋은 창조였다. 더군다나 하나님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하나님처럼 완전하고 심히 좋게 지으셨다. 영어 성경에 보면 그 심히 좋은 창조의 상태를 “It was very good.”이라고 했다. 시공을 초월하여 존재하시는 하나님은 언제나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게 함께 하셨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인간에게 크나큰 복을 주셨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1:28) 이것을 문화명령이라고 한다. 
  인간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복과 부여된 자유는 하나님 안에서 무한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임받은 통치권을 거부하고 사단의 속임수에 빠져 들고 말았다. 사단은 하와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같이 되라.”(창3:5)고 유혹하였다. 하와와 아담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사단의 말에 순종하였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처럼 되기는커녕 하나님의 통치에서 벗어나 버린 채로 사단의 조종을 받게 되고 말았다. 진리이신 하나님 안에서 누리던 자유를 일순간에 잃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 인간은 스스로의 힘과 지혜로 살아 보려 하였다. 이것이 교만(驕慢)의 시작이다. 인간이 자신의 힘으로 평안과 행복을 지켜나가려는 교만은 점점 하나님께 등을 돌리는 행위요 하나님이 부여해 주신 복된 관계를 단절하는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다. 인간은 하나님을 떠나서 스스로의 힘으로 살아가려고 하면 할수록 그 스스로의 탐심의 감옥에 더욱 깊숙이 갇히고 만다. 그러므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에서 벗어나서 ‘나’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그 상태가 죄(罪)이다. 사도 바울은 그것을 하나님이 “내 버려두신” 심판이라고 세 번이나 반복하여 설명하였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롬1:24),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 버려두셨으니...”(롬1:26),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롬1:28). 성경이 말씀하는 ‘의’(義)란 하나님을 의지하고 순종하는 올바른 관계를 말한다. 그러므로 진리란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유지하는 상태이다. 
  인간은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 안에 있어야만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다. 그러나 타락한 인간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떠나 스스로 유한한 삶을 선택하고 말았다. 이것이 예수께서 말씀하신 “잃은 아들을 되찾은 아버지의 비유”이다. 아버지의 곁에 있을 때에는 아버지의 모든 것이 아들의 것이었다. 그러나 먼 나라에 가서 허랑 방탕하게 살아가는 동안에 아버지의 유산이 바닥나고 거지가 되었다. 늘 풍성할 것 같던 그 나라에도 흉년이 들었고 궁핍한 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렵게 어떤 집에 취직이 되었는데 주인은 그를 들판으로 보내서 돼지를 치게 하였다. 그는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조차도 배불리 먹을 수가 없었다. 이 둘째 아들은 아버지의 집을 떠난 순간 이미 자유가 사라져가기 시작한 것이다. 이것이 진리를 떠나 죄에 빠진 인간의 실상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사단인 뱀을 가까이 했던 아담과 하와의 모습과도 같다. 
  둘째 아들은 들판의 돼지 떼 곁에서 탄식하며 아버지의 집에서 일하고 있는 품꾼들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로 돌아가고 싶어 하였다. 아버지의 곁에 있던 날들을 그리워하며 지난날을 후회하는 마음으로 속으로 말하였다.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눅15:18-19) 그는 용기를 내서 아버지의 나라로 돌아갔다. 아직도 아버지의 집에서 거리가 먼데 마을 입구에 나타난 아들을 아버지가 먼저 알아보았다. 거지 행색을 한 아들을 불쌍히 여긴 아버지는 달려가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그 때에 당황한 아들은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하고 말하였다. 자기는 더 이상 아버지의 아들이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아들을 꼭 끌어안은 아버지는 아들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얼마 후 아버지가 종들에게 말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눅15:22-24) 잠시 후 아버지의 집은 송아지를 굽는 구수한 향기와 풍악을 울리며 춤추고 잔치하는 소리로 가득 찼다. 
  진리이신 아버지의 품 안으로 돌아 온 자가 누리는 은혜란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난 인간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알아 나가는 것이 믿음 생활이다. 죄를 뉘우치고 회개하면 용서 받은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게 된다. 아버지의 집을 떠나면 둘째 아들처럼 고난과 고생과 결핍과 궁핍과 불행과 불안과 두려움과 갈등과 번민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방황하게 마련이다. 죄의 끝은 사망이며 죄 사함은 영생의 시작이다. 물론 허랑 방탕 할 때의 쾌감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날들은 절대로 영원하지 않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젊음도 없고 영원한 육체의 아름다움도 없다. 이 땅에는 영원한 재물도 없고 영원한 인기도 없고 영원한 권력도 없고 영원한 명예도 없는 법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이란 없다. 오직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한 것이다. 그 진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만이 참되고 영원한 것이다. 그러므로 진리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이 누구이신지를 아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가 내게 있어서 어떤 분이신지를 아는 생태이다. 진리이신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말씀하셨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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