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게 하는 진리(3)
새는 땅과 공중에서 살아가며 주어진 자유를 누린다. 예수께서는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마6:26)고 교훈하셨다. 이 말씀은 인간이 무엇을 먹고 마시고 입고 살까를 염려하는 모습을 보고 하신 가르침이시다. 하나님은 이 땅의 만물을 창조해 주시고 공중과 땅과 물속의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다. “다스리는 것”이 정치이다. ‘정치’(政治)라는 용어의 ‘정’(政)자는 “부정(不正)을 바로 잡다”는 의미이며 ‘치’(治)자는 “관리하다, 바로 잡다, 평정하다, 수리하다, 고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정치란 옳고 그름을 분별하여 바르고 평정하게 고쳐 나가는 일”을 말한다. 사람이 자연의 이치를 거슬리면 그 누구라도 불행해지고 만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는 말은 유교의 ‘사서삼경’ 중 ‘대학’에 나오는 말이다. “자신의 몸과 마음을 바르게 한 사람만이 가정을 다스릴 수 있고, 가정을 다스릴 수 있는 자만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으며,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 자만이 천하를 평화롭게 다스릴 수 있다.”는 뜻이다. 그렇지 않나. 임금이든 평민이든 자신을 먼저 다스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자신에게 자유가 주어지고 가정과 나라와 열방에도 평안과 안녕이 주어진다. 자기 자신이 사사로운 욕망에 갇히고 말면 주변의 모든 인간관계가 불행해지고 만다. 사회인류학적으로 보면 인간이 좀 더 나은 의식주를 위해서 땀 흘리고 노력하다 보니 오늘 날과 같은 문명 생활을 하게 된 것은 사실이다. 인간은 무엇 때문에 자유를 잃어버리게 될까. 그 뿌리는 탐심(貪心)이다. 탐심이 들어오면 자유가 사라진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는 성경의 말씀은 진리이다. 인간이 욕심의 노예가 되면 그 탐심으로 인하여 죄를 범하게 되고 죄의 끝은 멸망에 이르고 만다. 요즘 세상 돌아가는 국가적인 사건들이 교훈하는 바가 그러하지 않나. 인간은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 대로 인류 역사는 오랜 기간 동안 그러하지 못하였다. 어느 민족 어느 나라에나 오래도록 주종(主從)관계가 있어 왔다. 유럽이나 북 아메리카의 역사에 노예(奴隸) 제도는 쉽게 해결 되지 않는 숙제였다. 오늘 날도 인도의 카스트 제도는 여전히 흑막에 싸여 있다. 소위 불가촉천민(不可觸賤民)으로 분류되어 인간 이하의 차별을 받는 이들의 수가 2억 명에 이른다. 이러한 모든 제도나 대인 관계를 붙잡고 있는 것이 창조의 근본 원리를 거역하는 죄(罪)이다. 인간의 마음속에 죄가 들어오면 바이러스처럼 인간을 무너트린다. 그러므로 죄를 별 것 아닌 것으로 여기면 안 된다. 진리란 상식이다. 모세의 십계명을 보라. 하나님은 하나님 이외의 그 어떤 피조물에도 신적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바탕이 예배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우상을 숭배하지 말고 하나님께만 예배하며 살아 갈 줄 알아야 한다. 또한 인간관계의 근본은 부모 공경이다. 살인, 간음, 도둑질, 거짓 증거, 탐심을 금지하는 계명들을 일일이 묵상해 보라. 이 열 가지 계명의 틀 가운데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공급하기를 원하시는 진리 안에서의 모든 자유가 다 담겨 있다. 그러므로 계명이 진리이다. 열 가지 계명의 근본을 이루는 것이 사랑이다. 사랑이란 두 가지로 나누인다. 하나님 사람과 이웃 사랑이다. 변질되거나 왜곡된 사랑이 아닌 건강한 사랑에 기초한다면 불행해 질 이유가 없고 자유를 빼앗길 리가 없다. ‘질병’(疾病)을 영어로는 ‘disease’라고 한다. ‘disease’란 단어는 ‘아니다’라는 뜻의 ‘dis’와 ‘편하다’는 뜻의 ‘ease’라는 단어의 합성어이다. 그렇다. 질병이란 이처럼 몸과 마음의 어느 부위가 편하지 못한 상태이다. 이와 같이 인간이 사탄의 지배를 받고 마음속에 죄가 들어오면 진리이신 하나님과의 관계가 불편해지고 두려움에 휩싸이고 만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실 때에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 것이다. 진리란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인간을 인도하신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아브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살던 아브람이 그 곳의 기근을 피하여 애굽으로 내려 간 것은 하나님의 기대를 벗어난 자기 스스로의 판단과 결정이었다. 애굽으로 내려간 아브람은 아내를 누이라고 속였고 결국은 아내 사래를 애굽 왕 바로에게 빼앗기고 말았다. 하마터면 하나님이 불러내신 언약의 조상이 될 아브람의 가정이 애굽에서 그렇게 무너지고 말 위기에 봉착한 것이다. 바로는 사래를 아내로 취하는 대가로 많은 양과 소와 노비와 암수 나귀와 낙타를 아브람에게 주었다. 이 상황은 아브람을 말씀으로 불러내신 하나님의 계획과 전혀 상관이 없는 아브람의 불신앙적인 행동이었다. 그 때 하나님이 침묵하셨다면 아브람은 믿음의 조상이 되기는커녕 성경의 역사에서 부끄러운 한 사람의 이야기를 남기고 사라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 위기의 순간에 하나님이 바로에게 개입하셨다. 하나님은 바로와 그의 집에 큰 재앙을 내리셨다. 성경은 그 큰 재앙의 내용이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언급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 때 그 상황에 하나님이 개입하지 않으셨다면 아브람의 비겁하고 나약한 처세의 끝이 어떻게 되었겠는가. 진리 안에서 누리는 자유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며 살아가는 일상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의 비유에 등장하는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이야기 중에 부자는 죽어 지옥으로 갔다. 진리 안에서 살아가지 않은 자의 끝은 부자라도 지옥이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런 사건들을 이미 보며 살지 않나. 이 세상에도 지옥 같은 곳이 있고 지옥에 던져 지듯 심판 받은 질곡(桎梏)의 삶이 있다. 단테의 신곡(神曲)의 교훈처럼 진리 안에서 자유를 잃어버린 자가 희망이 없이 가는 곳이 지옥이다. 단테는 신곡의 지옥(地獄) 편에서 이렇게 썼다.
“여기 들어 온 자 모든 희망을 버려라.”
(All hope abandon, ye who enter h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