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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  지성래목사  | 칼럼
자유롭게 하는 진리(1) 20170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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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17-03-19 21:57 조회 12,878 댓글 0
 

자유롭게 하는 진리(1)

 

 

진리(眞理)는 영원히 변하지 않아야 한다. 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상대적인 그 무엇에 의해서 영향을 받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국어사전에 보면 진리란 참된 이치라고 설명해 놓았다. 법이 진리여야 할 것 같으나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그렇지 못한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래서 나온 말이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아닐까. 우리는 소크라테스가 그렇게 말했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사망 당시에 죽으라고 하면 죽겠다. 이 더러운 세상.”이라는 유언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은 로마의 법률 격언인 법은 엄하지만 그래도 법”(Dura lex, sed lex)이라는 라틴어에서 왔다고 한다. 우리는 상식적으로 법이 곧 진리로 통하는 세상을 기대하지만 그렇지 못한 것이 분명하다. 요즘 세상에는 법꾸라지라는 신종어가 생길 정도로 법망을 잘도 빠져 나가는 미꾸라지인생들이 얼마나 많은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8:32)는 말씀을 선포하신 예수께서는 진리를 미워하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의 결탁에 의하여 십자가에서 처형을 받으셨다. 예수는 진리가 아닌 거짓된 세력에 의하여 죽임을 당하셨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때로는 답답해하고 오해하기도 하며 억울해 하기도 하고 울부짖기도 하며 혹은 분노하거나 탄식하거나 깊은 슬픔이나 실망에 빠지기도 한다. 예수께서 죽임을 당하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지 못하셨다면 이 땅에 기독교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진리는 아름답고 숭고한 명제이지만 진리대로 살아가기란 결코 만만치 않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악이 선을 이기고, 거짓이 진실을 눈멀게 하고, 불의가 정의를 짓밟는 경우를 얼마나 자주 대하는가. 하나님은 의()와 진()과 선()의 근본이시기에 언제 어디에서나 역사의 현장에 개입하셔서 그 역사의 불의를 단죄하고 하나님의 공공선(公共善)을 분명하게 드러내 주시기를 소원한다. 그러나 많은 경우 하나님은 침묵하실 뿐이다. 하와가 뱀의 유혹 앞에서 판단이 흐려지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려 할 때에 왜 하나님은 침묵하고 계셨을까. 아담마저 아내 하와의 말을 듣고 선악과를 따 먹으러 나설 때에 왜 하나님은 아담의 행동을 말리지 않으셨을까. 하나님은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나타나셨다. 그 시간은 이미 아담과 하와의 눈이 밝아져서 자기들이 벗은 것을 알고 무화과나무 잎을 엮어 치마를 해 입은 후였다.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심으로 용서와 구원의 은총을 베푸셨다. 이처럼 구원은 진리를 떠나 자유를 잃어버린 자에게 베풀어 주시는 주님의 은혜이다. 가인과 아벨의 때에도 똑 같은 일이 벌어졌다. 가인이 동생 아벨을 들판에서 쳐 죽일 때에 그 시간에 하나님은 무엇하고 계셨을까. 그 상황을 아셨다면 하나님은 형이 동생을 죽이는 그 현장에 왜 나타나지 않으셨을까. 그러나 히브리서는 이렇게 전한다. “그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지금도 말하느니라.”(11:4) 형 가인은 진리를 떠나서 죄를 행함으로 자유를 빼앗긴 불행한 인생이 되고 말았다.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를 빼앗아 데리고 살던 헤롯왕의 불의를 고발한 세례 요한은 결국 헤롯의 칼에 목이 잘려 죽임을 당했다. 우리는 공의의 하나님께서 왜 그 악한 헤롯의 칼 앞에서 역사적인 인물인 세례 요한을 보호 해 주지 않으셨을까.”하고 질문하게 된다. 헤롯은 초대교회의 야고보도 칼로 쳐 죽였다. 초대 교회의 부흥과 성령의 현장을 못 마땅하게 여기고 있던 유대인들이 헤롯의 하는 일을 좋아하자 베드로도 죽이려고 하였다. 결국 베드로는 붙잡혔고 옥에 갇혔다. 때는 무교절 기간이었다. 베드로 사도가 갇힌 소식을 전해들은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헤롯이 베드로를 처단하려고 정한 그 전날 밤에 베드로는 두 군인의 쇠사슬에 함께 묶인 채로 잠이 들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서 잠든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서 깨웠다. 그리고는 급히 일어나라.”고 말할 때에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졌다. 베드로는 그 상황이 생시인지 환상을 보는 것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그 때에 천사는 띠를 띠고 신을 신으라.”, “겉 옷을 입고 따라 오라.”고 말하며 급하게 첫째와 둘째 파수를 지나 시내로 통하는 쇠문 앞에까지 베드로를 안내하였다. 쇠문 앞에 이르자 그 문이 자동문처럼 저절로 열렸다. 천사는 베드로를 이끌고 한 거리를 더 지난 후에 곧 떠나가고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악하게 행동하며 예수 믿는 이들을 핍박하던 헤롯의 권세도 영원하지는 못하였다. 헤롯에게도 죽음의 순간이 찾아 왔다. 성경은 헤롯의 죽음을 이렇게 기록해 놓았다.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아니하므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벌레에게 먹혀 죽으니라.”(12:23)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말씀은 흥왕하여 더하여 갔다.”(12:24) 사도행전의 기록자인 누가는 초대 교회의 핍박자 헤롯의 죽음과 박해 가운데서도 여전히 왕성하게 부흥해 가던 초대교회의 모습을 대비하여 기록하였다. 우리는 창세기 1장과 2장에서 인간이 타락하던 원죄(元罪)의 현장과 인간에게 무한한 복을 약속하신 원복(元福)의 내용을 골고루 대하게 된다. “생육하라,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와 하늘과 땅의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는 명령은 하나님이 인간에 게 복을 주시며하신 원복(元福)의 말씀이시다.(1:28) 진리의 추구란 인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의 원 뜻과 원 기대대로 회복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벗고 있었으나 부끄러움을 모르던 동산이 에덴이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인 진리 안에서의 자유로움이다. 점점 왜곡되어가는 진리의 변질 앞에 교회와 성도들은 진리 안에서 자유를 누리며 진리의 파수꾼다운 삶을 살아가야만 하겠다.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루즈벨트는 1941, 의회에 보낸 <연두교서>에서 표현, 예배, 궁핍, 공포로 부터의 자유네 가지 자유”(Four Freedoms)를 언급하였다. 그리고 그는 세계 어디에서나”(Everywhere in the world)를 매번 강조하였다. 그렇다. 진리 안에서의 자유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주어져야만 한다. 소련의 압제에서 벗어난 헝가리의 부다페스트에는 더 이상 칼 마르크스 대학교는 없었다. 이미 대학 이름을 자유 대학교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자유가 칼 마르크스를 이긴 것이다. 그야말로 자유롭게 하는 진리의 힘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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