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李相和, 901-1943)의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는 1926년 <개벽>에 실렸다. 그의 나이 25살 때의 일이다. 일제에 국권을 빼앗긴 후 세월이 흘러가며 독립의 기운이 점점 희미해져 가던 때의 일이다. 시의 전문을 외우는 이들이 많지는 않겠으나 그 시작은 이렇다.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내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아주 여러 해 만에 그의 시 전문을 다 읽어 보았다.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끝난다.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띄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명이 지폈나보다.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그는 191년, 대구에서 아버지 이시우 어머니 김신자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일곱 살 때에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큰 아버지 슬하에서 교육을 받았다. 18살에 경성중앙학교를 수료하고 강원도 일대를 방랑했다. 그 해에 3·1운동이 일어나자 대구학생운동에 참여하고 백기만과 함께 거사하려다 사전에 발각되어 서울에 피신했다. 이태 후에 현진건의 추천으로 〈백조〉 동인에서 활동을 시작하였다. 프랑스 유학을 목적으로 도쿄로 건너가 아테네 프랑세에서 프랑스 문학을 공부하다 관동대지진으로 귀국했다. 박영희, 김기진 등과 함께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KAPF)에 참여했다. 1927년에 대구에서 지내는 동안에 여러 번 가택수색을 당했다. 의열단 이종암 사건에 말려들어 구금된 적도 했다. <조선일보〉 경상북도총국을 경영했으나 실패하였다. 1937년 중국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친형인 이상정 장군을 만난 이유로 5개월 정도 옥살이했다. 그 이후에 대구로 가서 교남학교에서 영어와 작문을 가르쳤다. 이때 "피압박 민족은 주먹이라도 굵어야 한다”고 학생들에게 권면하여 권투부를 신설했다. 몇 해 후에 학교를 그만두고 독서와 연구에 몰두하며 〈춘향전〉을 영역하고 〈국문학사〉,〈불란서 시 평석〉 등을 기획하던 중에 위암으로 투병하다 42살에 눈을 감았다. 해방 이듬해에 경상북도 대구 달성공원에 상화시비가 세워졌다. 그는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에서 국권을 잃어버린 울분과 회복에의 염원을 강렬하게 표현하였다.
2018년 4월 27일에 북한의 최고 권력자인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판문점의 군사 분계선을 넘어 와서 남북 정상 회담을 가졌다. 분단 이후로 북한의 최고 책임자가 남한 땅을 밟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오전에 시작하여 만찬을 끝으로 밤중에 마치는 하루 일정의 시간이었다. 이번 남북 회담의 주제는 “평화, 새로운 시작”이었다. 그야말로 평화를 향하여 한 걸음 더 앞으로 나아가는 시작일 뿐이다. 오전과 오후에 이어진 두 정상 간의 회담 후에 발표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 통일을 위한 판문점 선언”의 내용을 보면 그야말로 선언일 뿐이지 아직 확정된 것은 없다. 기대와 염원을 선언문에 담았을 뿐 그 내용들이 이행되려면 아직 산 넘어 산이다. 미국과 북한과의 정상 회담이 남아 있지만 비핵화를 실현하고 종전선언과 영구적인 평화 협정으로 나아가려면 해결해야 할 숙제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원로 역사학자인 이인호 교수는 회담 하루 전날에 대통령에게 “온 세계가 지켜보는 앞에서 대한민국이 정치적 자살을 하는 역사적 ‘쇼’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내용이 담긴 공개서한을 보냈다고 한다. 북한은“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이란 이름으로 체제를 유지해 왔다. 남한과 북한은 1991년에 유엔에 동시 가입된 관계이다. 무슨 말인가. 그 당시 북한과의 유엔 동시 가입은 북한의 정권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받아 들여져서는 않된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그러나 남한과 북한의 유엔동시가입은 남북이 평화롭게 통일되어야 하지만 한반도에 2개의 국가가 실재하는 현실을 반영한 일이었다. 이를 통해 적대적 대립관계를 완화하는 계기를 삼으려 했으나 그 후에도 북한은 대륙간 탄도 미사일 개발과 핵 개발 등의 호전적인 태도를 계속해 왔다.
판문점에서 보여 준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모습만을 보고 평화를 쉽게 생각해서는 안 될 것이다. 저들은 체제 유지를 위해 발버둥 치며 국제무대 앞에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어쩔 수 없이 마음에도 없는 힘겨운 발걸음을 옮기는 것뿐이니 말이다. 2000년의 6. 15 선언 이후 2007년의 10.4 선언은 “ 6·15공동 선언의 적극 구현, 상호 존중과 신뢰의 남북 관계로의 전환, 군사적 적대 관계 종식, 한반도 핵(核) 문제 해결을 위한 3자 또는 4자 정상회담 추진, 남북 경제협력 사업의 적극 활성화,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와 협력, 이산가족 상봉 확대” 등을 그 내용으로 선언 하였으나 여전히 천안함 폭침이나 연평도 해전 등의 호전성을 드러내 온 것이 저들의 본 모습이 아닌가. 물론 극악해져만 가던 일본이 두 손을 들고 해방의 날이 꿈처럼 찾아 온 것처럼 이 땅에 그런 평화의 날이 다시 꿈처럼 다가오기를 염원하는 것은 너무 순진한 생각을 가져서일까.
이 땅에 영구적인 평화가 임하기를 원하지 않는 이들은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념과 사상과 신념이 서로 다르며 자기 체제 유지와 권력의 지속적인 승계를 위해서라면 굶은 승냥이처럼 달려드는 정치와 힘으로 대답하여야 하는 삭막한 외교 현장에서 평화를 유지하며 살아남는 길이란 무엇일까. 사우디아라비아가 주도하는 연합군이 지난 4월 22일, 예멘 북부 결혼식 피로연장을 폭격해 신부를 포함해 최소 20명이 숨지고 수 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평화가 깨어지는 순간은 그렇게 찾아오고 마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에 죽으시기 며칠 전에 예루살렘 성을 가까이 바라다 보시며 우시며 말씀하셨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 숨겨졌도다 날이 이를지라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으로 가두고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눅19:42-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