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의 방문
이삭이란 이름을 가진 중년 남자가 교회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병색이 짙은 남루한 복장의 허약해 보이는 첫 인상이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물 한잔만 마실 수 있나요.”라고 물어 왔다. 온수를 조금 섞어 따뜻한 물을 대접했다. 그는 강화도의 전등사가 위치한 정족산 자락의 고아원에서 자라났다고 했다. 온수교회에 다닌다고 했다. 서울에 아는 친구네 집에 한 달쯤 머물 계획이라고 했다. 자기는 심장병이 있어서 일도 할 수 없다고 했다. 얼굴의 혈색이 창백하고 건강해 보이질 않았다. 마른 체구와 무기력해 보이는 표정을 대하니 불쌍한 생각이 들었다. 혼자 산다고 했다. 심장이 약하니 자기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했다. 기도가 끝나기가 무섭게 꾸뻑 꾸뻑 인사를 하고는 떠나가 버렸다. 이름이 이삭이라고 했다. 어렸을 적에 고아원에서 지어 준 이름이라고 했다.
이삭은 창세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닌가. 꿈처럼 짧은 시간에 ‘이삭’이란 이름을 가진 중년 남자가 천사의 방문처럼 잠시 잠간 머물고 시야에서 사라졌다. 세상에는 권세가 높고 부가 대단하며 유능하고 잘나고 남다르며 앞서가는 1%의 사람들도 적지 않지만 고단한 생을 힘겹게 살아가는 질경이와 같은 연약한 인생들도 참으로 많다.
창세기의 이삭이 그런 인물이다. 성경은 그의 이름이 포함된 3대를 거론하며 ‘아브라함과 이삭와 야곱의 하나님’이란 표현을 자주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가 아는대로 이삭의 생애는 그리 돋보이는 삶은 못된다. 이삭은 아브라함의 나이 100세에 90세 된 아내 사라를 통하여 하나님이 증표로 주신 언약의 아들이다.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고 땅의 모래와 같은 후손을 약속하신 하나님이셨다. 그렇게 귀한 아들 이삭인데 하나님은 그 아들을 모리아 산꼭대기에 데려다가 번제물로 바치라고 요구하셨다. 어찌된 일인지 아들 이삭은 자신을 붙잡아 결박하여 제단 위에 번재물로 얹기 까지 거역하거나 저항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성경의 그 정황을 읽다 보면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장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삭의 편에서 보면 참 한심한 아버지를 만난 것이다. 100세 노인이 아들 낳아 키우더니 어느 날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면서 자기 아들을 잡아 번제물로 드리려고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명령하신 대로 준행하는 아브라함의 신앙의 중심을 보셨다. 하나님은 천사를 동원하여 아브라함의 칼을 잡고 치켜 든 손을 멈추셨다. 그리고는 번제단 가까이에 있는 수풀에 뿔이 결려 있던 숫양을 가져다가 아들 이삭을 대신하여 번제를 드리게 하셨다. 아브라함은 그 곳 지명을 ‘여호와 이레’라고 지어 부르기 시작했다. “여호와께서 준비하셨다.”는 뜻이다. 그 날 하나님은 다시 천사를 보내셔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하셨다. “내가 나를 가리켜 맹세하노니 네가 이같이 행하여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가 크게 번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받으리니 이는 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니라.”(창22:16-18)
그 후 세월이 흘러갔다. 이삭이 37살 되던 해에 어머니 사라가 127세를 끝으로 눈을 감았다. 아브라함은 헷 족속의 땅들 중에서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이 있는 지역을 은 400세겔을 주고 장지로 마련하였다. 아브라함은 슬픈 마음으로 아내의 죽음을 애통해 하며 마련한 땅에 장례하였다. 아들 이삭은 어머니 사라가 돌아가신 삼년 후인 40살에 장가들었다. 이삭이 아내 리브가를 통해서 쌍둥이 아들인 에서와 야곱을 낳을 때의 나이는 60살이었다. 아브라함의 연세 160세 때에 쌍둥이 손자들이 태어난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 후 15년을 더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히브리서 11장에 보면 아브라함과 사라와 이삭의 믿음에 대한 설명이 자세하게 나온다. “그에게 이미 말씀하시기를 네 자손이라 칭할 자는 이삭으로 말미암으리라 하셨으니 그가 하나님이 능히 이삭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한지라 비유컨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도로 받은 것이니라.”(히11:18-19) 그렇다. 이삭은 번제물로 사라질 불운한 운명 가운데 그를 향한 하나님의 섭리로 ‘다시 살리심’을 받은 제 2의 삶을 살았다. 이삭은 아버지 아브라함의 언약을 계승해 쌍둥이를 낳았다. 히브리서는 이삭의 그런 면을 짧게 다루고 지나간다. “믿음으로 이삭은 장차 있을 일에 대하여 야곱과 에서에게 축복하였으며”(히11:20)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과 이삭의 언약의 대를 이은 아들 야곱의 이름을 형 에서보다 앞에 표기함으로 하나님의 언약이 누구에게로 계승되었는지를 주목하게 하고 있다. 그렇게 대를 이은 야곱의 12아들들 중에서 총애 받던 라헬의 아들 요셉이 애굽에 노예로 팔려 가고 말았다. 그 고난의 세월은 자그마치 430년 후에야 출애굽의 날을 맞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 시대의 광야 40년도 고생과 연단의 연속이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들은 그 후에도 바벨론 포로 70년의 인고의 날들을 겪어야만 했다. 하나님은 그렇게 풍전등화와 같은 약하고 약한 모습으로 명맥을 이어 가던 아브라함의 혈통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주셨다.
종려 주일이다. 고난 주간을 끝으로 부활 주일이 다가오고 있다. 이삭처럼 힘없게 결박당하여 십자가에 매어 달리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장사 지낸지 사흘 만에 아리마대 사람 요셉의 무덤에서 부활하셨다. 하나님께서 예수를 다시 살리신 것이다. 십자가의 고난이 없이는 영광스러운 부활의 면류관도 없다. ‘No Cross No Crown' 혹은‘Know Cross Know Crown' 이란 표현은 진리이다. 예수께서는 이삭처럼 결박당하는 번제물로 사셨다. 예수는 우리의 죄를 인하여 질고를 지고 슬픔을 당하고 징벌을 받고 고난을 당하였다. 그는 찔리고 상하고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았으나 그를 믿는 자들에게 온전한 평화와 죄 사함과 영원한 구원의 상급이 선물로 주어졌다. 그는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다녔다. 그러나 그는 다시 살아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다. 주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25-26) 부활 예수.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실 뿐만 아니라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이삭과 그들의 후손 다윗의 자손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즉 우리의 그리스도이시다. 그림자처럼 잠시 다녀간 그의 이름이 이삭이란다. 이삭이란‘웃음’이란 뜻이다. 늙어 가던 부모를 웃게 한 아들 이삭. 이 땅에 그런 미소와 웃음이 회복되기를 원하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