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서 남궁억과 겨레 사랑
큰일이든 적은 일이든 잃는 것은 순간이요 되찾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러한 역사의 중심에서 나라를 사랑하고 겨레를 사랑하며 민족정신을 보존하고 기독교 신앙을 후대에 계승하려고 씨름한 애국지사들 중의 한 사람이 남궁억(南宮憶, 1863-1939) 선생이다. 지난 3월 1일, 새벽기도회를 마친 일행 30여명이 강원도 홍천군에 위치한 한서교회와 남궁억 기념관을 방문하였다. 한서(翰西)는 그의 호이다. 철종 14년에 한양에서 태어난 그는 고종 때에 동문학(同文學)에서 영어를 익히고 해관(海關)의 견습 생활을 거친 후에 고종의 통역관으로 등용되었다. 24살 때에 전권대신 조민희(趙民熙)의 수행서기관으로 영국, 러시아, 독일 순방길에 올라 홍콩까지 갔지만 청나라의 간섭과 방해로 인해서 2년간 홍콩에서 머물다가 소환되어 돌아오고 말았다. 그는 서재필, 이상재 등과 함께 독립협회를 창설하고 ‘독립신문’을 발간하였다. 독립 운동에 앞장서던 그는 후세대에게 독립심과 애국심과 하나님과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을 심어주던 교육자요 당대에 뛰어난 언론인이요 시인이며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과 같은 찬송가의 작사자이기도 하다.
그는 1894년, 갑오개혁 내각에 내부토목국장으로 있으면서 서울의 종로와 정동 일대 및 육조 앞과 남대문 사이의 도로를 정비하며 반대를 무릎 쓰고 오늘날에 이르는 파고다공원을 세웠다. 1900년 7월, ‘황성신문’에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분할설을 외국 신문에서 옮겨다가 싣고 러시아와 일본의 한국 침략 야욕을 폭로하고 경각심을 촉구하는 논평을 실었다가 경무청에 구금된 적도 있다.
1903년 영관(領官)을 지낸 유동근(柳東根)이 ‘황성신문’ 사장인 남궁억과 총무 나수연이 일본으로 망명한 박영효(朴泳孝) 등과 공모하여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였다고 모함하였다. 이로 인해 다시 경무청에 구속되었고 진상이 밝혀진 4개월 뒤에야 석방되었다. 출옥한 뒤에는 황성신문 사장직을 사임하였다. 1905년 3월 고종의 요구로 다시 관직을 맡아 성주목사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었다. 그러나 그 해 11월, 을사조약을 체결하고 국권을 박탈당하자 성주목사직을 사임하고 한양으로 돌아 왔다. 그 다음 해인 1906년 2월, 양양군수에 임명되어 애국계몽운동에 힘을 쏟았고 그 다음 해에 양양의 동헌 뒷산에 현산학교(峴山學校)를 설립하고 구국교육을 실시하였다.
1907년, 그는 일본이 헤이그밀사사건을 구실삼아 고종을 강제 폐위시키고 한국침략정책을 강화하자 관직을 사임하고 상경하였다. 그 해 말에 대한협회(大韓協會)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취임하여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는‘대한협회월보’와 ‘대한민보’를 발행하였다. 강원도 지방의 애국계몽운동단체로 ‘관동학회’(關東學會)를 창립해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교육구국운동 잡지로서 ‘교육월보’도 발행하였다. 1910년 8월, 한일합병 후에 후학을 양성하여야 한다고 판단하고 그 해 10월 배화학당(培花學堂)의 교사가 되었다. 1912년에는 기독교 청년 활동인 상동청년학원(尙洞靑年學院) 원장을 겸하면서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애국가의 가사를 보급하고 한글서체를 창안하고 보급하는 일에도 힘썼다.
55살이던 1918년, 건강이 악화되자 선조의 고향인 강원도 홍천군 서면 보리울인 모곡(牟谷)으로 낙향하였다. 다음 해 9월, 모곡학교(牟谷學校)를 설립한 뒤 학교 안에 무궁화 묘포를 만들어 나라꽃인 무궁화를 전국에 보급하기 위해 힘을 쏟았다. 또한 여러 편의 애국심이 담긴 찬송가를 만들어 전국의 교회와 기독교계 학교에 퍼트렸다. 70세가 되던 1933년 11월, 기독교 계열 독립운동 비밀결사 조직인 십자당(十字黨)을 조직하고 활동하다 일본 경찰에 붙잡혀 8개월간 투옥되었다. 석방되긴 하였으나 고령에 일본 경찰로부터 받은 잔혹한 고문의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76세에 눈을 감았다. 그는 임종 전에 “내가 죽거들랑 무덤을 만들지 말고 나무 밑에 묻어 달라”고 유언하였다. 그는 구한말의 격변기에 만 명이 모여 힘을 합쳐도 해 내기 어려운 일들을 성취하며 조국의 독립과 해방을 위해서 한 몸으로 맞서서 싸우며 후세들의 마음에 민족혼을 불 일 듯하게 해 주던 무궁화와 같은 영원한 애국청년이요 하나님과 겨레를 사랑하는 참다운 신앙인이었다.
역사학자들은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에 붙어 있는 우리나라는 1천여번의 전쟁을 겪어 왔다고 말한다. 반도국가인 우리나라는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중국, 동남쪽으로는 일본을 비롯하여 구한말 세계열강으로부터 초미의 관심을 갖던 나라들 중의 하나였다. 고려 시대의 몽골 침입, 조선시대의 일본의 침략이 반복되었던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어야 했다. 조선 시대 말기에는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등 우리나라를 삼키려는 외세의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1894년, 청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은 러시아에 의지하려하던 조선을 지배하기 위해서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다. 1905년 7월,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고, 미국은 일본의 조선 지배를 인정하자는‘가쓰라·태프트밀약’(桂太郎-Taft密約)을 맺었다. 한 달 후에는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음으로써 한국을 지배할 발판을 굳히기 시작하였다. 한편 러일전쟁의 우세한 전황 속에서 체결된 ‘포츠머스 강화조약’의 결과로 한국 안에서의 러시아 세력도 배제시킬 수 있게 되었다. 미국, 영국, 러시아 등으로부터 국제적인 승인을 받게 된 일본은 1905년 11월에 고종을 협박하고 매국노들을 매수해 한일협약을 체결하였다. 이것이 을사늑약이다.
상당수의 항일 애국지사들은 일제의 국권 침탈이 점점 가속화되어 국내에서의 항일운동이 어려워지자 항일민족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치기 위해 만주나 시베리아 등지로 이주하거나 망명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는 가운데 응칠 안중근(安重根, 1879-1910)은 1909년 12월, 만주 하얼빈 역에서 대한 침략의 원흉인 초대 조선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하여 한민족의 울분을 만천하에 알렸다.
1910년 8월 22일, 총리대신이었던 매국노 이완용(李完用)과 데라우치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됨으로써 한국은 일제에 식민지화 되고 말았다. 이로써 한국은 조선왕조 27대 519년, 그리고 대한제국 14년 만에 국권을 잃게 되었다. 이것이 1910년의 경술국치인 한일합병이다. 해방과 6. 25의 동족 전쟁을 겪은 우리 민족은 분단된 땅에서 다시 새해를 맞았다. 99년 전 3.1절. 독립 만세 시위에 앞장서던 선조들의 겨레 사랑하는 마음이 오늘날 우리들 가운데 불길처럼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