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 김구와 그의 신앙
대한민국 국민 중에서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를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는 조선시대 말기에 황해도 해주에서 평민의 아들로 태어났다. 며칠 전인 6월 26일은 그가 경교장에서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암살당하여 세상을 떠난 지 69년이 되는 날이었다. 그의 유해는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그가 남긴 책 중에는 <백범일지>(白凡逸志)가 유일하다.
백범(白凡)은 호이고 그의 본명은 창수(昌洙)이다. 구(九)라는 이름은 개명한 것이다. 구한말과 개화기 그리고 일제시대의 인물들 중에 서재필, 안창호, 이승만을 비롯한 애국지사들이 적지 않지만 백범 김구에 견줄만한 인물이 또 있을까.
그는 조국 독립을 위하여 동분서주 하던 나중에 상해 임시 정부의 경무국장, 내무총장, 국무령(國務領)을 역임하였다. 그러는 동안에 상해임시정부의 재정상황은 최악이었다. 독립운동은커녕 청사 운영비 조달도 힘겨웠다. 나중에 백범은 가지고 있던 권총 네 자루 중에서 두 자루를 팔아서 운영비로 쓰기도 하였다. 잠은 청사의 빈 방에서 자야 했고 동포들의 집을 기웃거리며 한 끼의 먹을거리를 해결하며 지내야만 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도 그의 가슴 속에 끓어오르는 조국의 독립에 대한 의지는 단 한 순간도 식은 적이 없었다.
그는 1932년 일본왕 사쿠라다몬(櫻田門) 저격사건과 상하이 훙커우(虹口)공원 일본왕 생일축하식장의 폭탄투척사건 등 이봉창(李奉昌), 윤봉길(尹奉吉) 등의 의거를 직접 지휘하였다. 1933년 난징(南京)에서 장제스(蔣介石)를 만나 한국인 무관학교를 설치할 것과 일본에 대항하는 전투방책을 협의하였다. 1935년 한국국민당을 조직하였고 1940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상해에서 5000여km 떨어진 먼 거리의 충칭(重慶)으로 옮길 때 이를 총괄하였다. 그 후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를 설치하고 사령관에 지청천(池靑天) 장군을 임명하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주석에 선임되었다.
1945년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하고 광복군 낙하산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훈련을 실시하던 중에 8․15 광복을 맞아 귀국하였다. 임시정부가 미군정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정통성을 인정받지 못하게 되자 한국독립당 위원장으로서 모스크바 3상회의 성명을 반박하고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이승만(李承晩), 김규식(金奎植)과 함께 민족통일총본부를 이끌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한다는 국제연합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였다.
백범은 투철한 애국심을 지닌 독립 운동가였을 뿐만 아니라 철저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의 오직 유일한 소원은 대한민국의 자주독립이었다. 그는 27살에 기독교에 귀의했다. 그는 도산 안창호의 여동생인 안신호와 함께 교회학교 교사를 한 적도 있었다. 그는 상해 임시정부의 주석이 됐을 때도 꾸준히 교회에 출석하며 주일마다 교회학교를 운영하였다. 당시의 교회학교 교사 중의 한 사람이 장준하 선생이다. 광복 후에는 남대문 교회의 김치선 목사가 새벽기도 후에 6시면 경교장에 방문해서 김구와 함께 따로 새벽 기도회 시간을 갖고는 하였다고 전해진다. 그 당시에 백범은 주일마다 남대문교회에 출석하여 예배를 드렸다.
그는 주일 성수를 소중히 여겼다. 1948년 김일성과의 통일 논의를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에도 주일을 맞자 공산치하에서이지만 교회에 찾아가서 예배를 드렸다. 그는 “평양에서 함께 편안한 여생을 보내자”고 회유하는 김일성의 제안을 거절하였다. 그리고는 “조만식 장로를 석방하여 함께 남한으로 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백범은 어머니 곽낙원 여사와 아내인 최준례(1889-1924) 여사등과 함께 온 가족이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갖고 살아갔다. 아내 최준례 여사는 첫째 인(仁)이 어린 시절 동생 신(信)을 낳은 지 2년 후에 중국의 일본 점령지에서 폐렴으로 35세에 눈을 감았다. 백범은 그의 <백범일지>에 아내의 최후에 즈음한 글을 썼고 오늘날까지 전해져 온다.
“그간 아내는 신이를 해산한 후 낙상(落傷)으로 인해 폐렴에 걸려 몇 년을 고생하다, 상해 보륭의원(寶隆醫院)에서 진찰을 받고, 역시 서양 시설을 갖춘 홍구(虹口)폐병원에 격리, 입원하게 되었다. 나와는 보륭의원에서 마지막 작별을 하였고, 민국 6년(1924, 49세) 1월 1일 홍구 폐병원에서 영원의 길을 떠났다. 나는 아내를 불란서 조계[法界] 숭산로(嵩山路) 경찰서[捕房] 후면의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나의 본뜻은 우리가 독립운동 기간 중 혼례나 장례의 성대한 의식으로 금전을 소비하는 것에 찬성하지 않았으므로, 아내의 장례는 극히 검약하게 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여러 동지들이 아내가 나로 인해 무한한 고생을 겪은 것이 곧 나라 일에 공헌한 것이라 하여, 나의 주장을 불허하고 각기 연금하여 장의도 성대하게 지내고 묘비까지 세워주었다. 그중에 유세관(柳世觀) 인욱(寅旭) 군은 병원 교섭과 묘지 주선에 성력을 다하였다.
아내가 병원에 입원했을 때 인(仁)이도 병이 중하여 공제의원(共濟醫院)에 입원 치료하다가 아내 장례 후 완전히 나아 퇴원하였다. 신(信)이는 겨우 걸음마를 익힐 때요, 아직 젖 먹을 때였다. 먹는 것은 우유를 사용하나, 잘 때는 반드시 할머님의 빈 젖을 물고야 잠이 들었다. 차차 말을 배울 때는 단지 할머님만 알고 어머니가 무엇인지 몰랐다.”
백범의 첫째 아들 김인(金仁)은 해방되던 해에 먼저 하늘나라로 갔고 둘째 김신(金信)은 나중에 공군 조종사로 6. 25 전쟁에 참전하기도 하였다. 그는 나중에 공군참모총장을 지냈고 교통부장관과 국회의원도 지냈다. 김신의 아들 김양은 나중에 국가보훈처장을 지냈다. 김양의 아들이며 백범의 사대 손인 김용만은 공군정보장교를 마쳤고 미국 조지워싱턴대학교에서 정치학을 공부하였다.
백범은 여수 애양원을 직접 방문하는 등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와도 친분을 갖고 지냈다. 그는 자신의 두 아들을 총으로 쏘아 죽인 공산당을 양자로 받아들인 손양원 목사의 넉넉한 마음에 대하여 경의를 표하고 탄복하는 글을 언론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는 신문 기고를 통해 “공산당을 진정으로 이긴 사람은 손양원 목사”라고 언급할 정도였다.
주역과 무속에 관심을 보였던 그의 성장기 때에 “관상(觀相)보다는 수상이요, 수상(手相)보다는 족상이요, 족상(足相)보다는 심상(心想)이라.”는 말을 듣고 나중에 인간의 마음과 생각을 감찰하시는 분이신 창조주 하나님을 믿기로 결심하였다는 일화는 널리 알려진 바이다.
성경, 창세기의 요셉이나 다윗 왕이나 다니엘이나 느헤미야처럼 백범은 자유와 평등 그리고 통합과 연대를 소중한 가치로 주창하며 몸소 실천하며 평생을 살다가 주께로 돌아갔다. 그는 이 시대의 누구나가 본받아야만 할 영원한 사표(師表)의 생을 살다가 간 꺼지지 않는 등불과 같은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