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함께하시는 하나님(시46:1-11) 2025. 11. 23
미국의 어느 노인이 아내와 사별한 후에 홀로 외로움을 달래며 지냈다. 그나마 자기에게 위로를 주는 것은 반려견이었다. 세상을 떠나기 전에 반려견에게 우리 돈으로 1,560억을 유산으로 물려주었다. 그리고 반려견 돌보아 달라고 부탁한 사육사에게는 1년에 5만 불씩 우리 돈으로 약 7,500만원의 연봉을 주겠다고 유언했다. 반려견이 죽고 난 후에는 반려견 몫의 유산 1,560억 원 중 남은 돈을 가까운 동물보호소에 기증하도록 유언했다. 그리고 자신의 외동 아들에게는 100만 불을 유산으로 주라고 유언하고 눈을 감았다. 100만불은 요즘 달라의 가치가 높으니 14억 7천만원 정도이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아들은 분을 참지 못하였다. “어떻게 내가 개보다 못하단 말입니까? 개에게는 1,560억을 주고 나에게는 15억을 주다니 이게 말이 됩니까? 판사님 억울합니다. 다시 판결해 주세요”라며 변호사를 사서 소송을 제기했다.
그 젊은이에게 판사가 질문하였다.
"젊은이. 1년에 몇 번이나 아버지를 찾아 뵈었는가?”
“ …… ”
"돌아가시기 전 아버지가 즐겨 드신 음식 아는가?”
“ ……. ”
"전화는 얼마나 자주 드렸는가?”
젊은이는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아무 대답을 못했다.
"아버님 생신은 언제인가?”
“ ……. ”
늙으신 아버지 생신 날짜도 모르는 아들은 할 말이 없었다.
그때 판사는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찍어 놓은 영상을 보여 주었다. "혹시 아들이 받는 100만불이 적다고 불평을 하거든 아들에게는 단 1불만을 물려 주세요.”판사는 "자네에게는 1불을 상속하네.”라고 판결을 마쳤다.
우리는 누구나 그 어느 누군가가 나와 함께 해 주기를 원한다. 물론 홀로 지내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사람은 서로 서로 더불어 살아가는 사회적인 동물이다. 사랑과 관심은 함께 하는 것이다. 도움과 격려도 함께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하며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과 늘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이다. 하나님이 나와 늘 동행하시는 것을 아는 것이 지혜이며 믿음이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시편 46편 7절과 11절에 보면, “만군의 여호와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니”라고 하였다. 그렇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는 언제 어디서나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임재와 동행을 깨닫는 것이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을 깨달을 때에 주님께 경배하고 예배하며 복음을 위하여 몸과 마음과 재물과 목숨을 바쳐서 헌신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라는 찬양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하는 것이 주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일까를 생각하며 충성되게 주를 섬기게 된다.
우리와 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에게 어떤 분이신가. 각 사람의 체질과 건강 상태가 서로 다 다르긴 하지만 우리가 남자 혹은 여자로 태어나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증거이다. 우리가 지금 숨을 쉬며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동행해 주시는 은혜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며 살아가는 것이 나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며 축복이다. 나보다 힘이 있는 그 누군가가 내 곁에 있어 주는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꽤나 의지가 되고 마음이 든든해진다. 밤 중에 깜깜한 시골에서 엄마 손을 잡고 예배당에 가는 시간은 전혀 무서움이나 두려움이 없었다. 왜인가. 엄마가 나와 함께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만군의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면” 두려울 것이 무엇인가.
고라 자손의 11편의 시편 중의 하나가 오늘 본문으로 읽은 시편 46편이다. 우리는 모세와 아론의 때에 광야에서 모세에게 반역하였던 레위 지파 고라 자손의 반역 사건을 안다. 많은 사람들이 땅이 갈라져서 심판을 받아 죽었다. 그들 중에서 더러 살아남은 자들의 후손이 은혜를 깨달아 알고 성전의 문지기와 노래하는 자로 세움을 받았다. 충성스럽게 살아가던 중에 고백한 잘 알려진 시편 중의 하나가 오늘 읽은 본문이다.
우리의 피난처이신 하나님.
우리나라에도 한남동이나 성북동이나 평창도 부잣집에는 지하 벙커가 있다고 한다. 핵폭탄이 터져도 대피할 수 있는 시설이 집 안에 있다는 소문이 있다. 세계의 그 많은 나라들 중에서 피난 시설이 가장 잘 되어 있는 나라는 스위스라고 한다. 9백만 명 가량의 전 국민 모두가 짧은 시간에 모두 다 대피할 수 있는 피난 설비가 완벽하게 유지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정도를 부러워 할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나의 피난처시라는 깨달음처럼 든든한 믿음이란 없다. 시편 46편에는 세차례나 반복적으로 여호와 하나님이 우리의 피난처라고 반복해서 말하고 있다. 1절에서는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오”라고 하였다. 7절과 11절에서는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고 하였다. 우리는 창세기의 야곱의 생애를 잘 안다. 야곱의 새 이름이 이스라엘인 것도 잘 안다. 우리는 ‘야곱’은 ‘거짓말쟁이, 발 뒷꿈치를 잡는 자’ 뭐 이런 정도의 이름으로 기억하지만 성경의 말씀하는 야곱의 생애는 한 두 줄로 정리하기에는 그리 간단치 않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언약하신 언약이 구체적으로 이룩되기 시작한 것이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의 때이다. 성경은 처처에서 반복적으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언급한다. 왜일까. 하나님은 진실로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창세기 25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의 집안에 아내 리브가를 통해서 에서와 야곱 쌍둥이 형제가 탄생한다. 창세기 27장에서는 앞이 잘 보이지 않던 노년기의 아버지 이삭의 침실에 어머니 리브가가 마련해 준 별미를 들고 들어가서 축복 기도를 받는 야곱의 장면이 실려 있다. 창세기 27장 끝자락에 보면 형 에서를 피해서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길에 오르는 야곱의 고단한 인생길의 시작이 자세하게 나온다. 아버지 이삭에게서 먼저 받아야 하는 축복 기도의 기회를 동생에게 빼앗긴 형 에서는 동생 야곱을 죽여 버리겠다고 혈기를 부리며 한을 품고 있었다. 평온하던 집안에 갑자가 살기 등등한 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집안 분위기가 이쯤 되자 엄마인 리브가는 둘째 아들 야곱을 따로 불러서 급하게 설득하였다. “내 아들아 하란에 있는 내 오라버니 집으로 피신하고 네 형의 노가 풀리기까지 몇 날 동안 네 외삼촌의 집에 가서 숨어 지내거라”(창27:43-44) 늘 엄마의 편애를 받으며 지내던 야곱이 갑자기 도망자 신세가 된 것이다. 이렇게 시작된 타향살이는 불과 며칠이 아니라 무려 20년이나 이어졌다. 이렇게 시작된 야곱의 피난살이는 드라마로 만들어도 50부작 100작감은 될 것이다. 야곱의 생애는 고단하고 험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 때 그 때마다 하나님은 야곱을 지키고 보호해 주셨다. 야곱의 피난처가 되어 주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과의 언약을 야곱의 때에 이루기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언약의 아들 이삭을 주셨다. 하갈을 통해서 태어난 이스마엘을 언약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삭의 둘째 아들 야곱을 통하여 자손이 번성하게 하셨다. 외삼촌 라반의 두 딸인 레아와 라헬을 통해서 여덟명의 아들이 태어 났다. 레아의 여종 실바를 통해서 두 아들, 라헬의 여종 빌하를 통해서 두 아들이 더 태어났다. 하나님은 야곱으로 하여금 첫 부인인 레아의 태를 통해서 여섯 명의 아들들을 선물로 받게 하셨다. 우리가 아는 “르우벳, 시므온, 레위, 유다, 잇사갈, 스블론”이 레아의 아들들이다. 우리가 너무나도 잘 아는 “요셉과 베냐민”은 야곱의 끔찍이 사랑하던 아내 레아의 아들들이다. 거기다가 단과 납달리, 갓과 아셀이 더 태어나면서 야곱은 12아들과 외동딸 디나는 낳은 13남매의 가장이 되었다. “가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이 없다”라는 말처럼 야곱은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았다. 나중에 연세 130살이 되었을 때에 애굽의 바로 임금을 만났다. 죽은 줄 알고 지내던 아들 요셉이 애굽에서 총리대신으로 출세한 모습을 만나게 된 이후의 장면이다. 가나안에 덥친 대 기근이 아니었다면 아마도 늙어가던 아버지 야곱은 평생토록 11번째 아들이었던 요셉의 생사조차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가나안 지역에 계속된 대기근과 흉년으로 인해서 먹을 식량을 구하려고 국경을 넘어 드나들던 애굽 출입으로 인해서 17살에 죽은 줄 알았던 아들 요셉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좋은 일이 있다고 너무 호들갑을 떨면서 좋아할 이유도 없고 속이 상하고 슬프고 충격적인 일을 당해도 너무 절망하거나 낙망해서도 않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실수와 실패라도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우리는 때때로 하나님을 잊고 살아갈지라도 하나님은 어느 한 순간도 우리를 잊지 아니하신다.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찬송가 중의 하나가 오늘 설교 후에 부를 “피난처 있으니”라는 찬송가이다. 이 찬송가의 제목 밑에 보면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시편 46편 1절 말씀이 일부 적혀 있다. 117년 전인 1908년에 그 누군가가 시편 46편 말씀을 묵상하다가 이런 은혜로운 찬송가의 가사를 써 내려 간 것이다.
“피난처 있으니 환난을 당한 자 이리 오라
땅들이 변하고 물결이 일어나 산 위에 넘치되 두렵잖네”
생각해 보라. 천재지변과 전쟁 앞에서 당황스러워 하지 않을 인생이 어디에 있겠는가. 2-3절의 말씀대로,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에 빠지고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고 넘쳐서 산이 흔들리는데 두려워 하지 아니할 자가 어디에 있겠는가. 이런 상황은 강도 7-8도의 지진이고 쓰나미가 밀어 덮피는 상황이 아닌가. 그런데 어떻게 “우리는 두려워 하지 아니하리로다”라는 고백이 가능할까. 6절에 보면,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리는데” 어찌 두려워 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8절의 말씀대로 울창하던 동산과 숲과 나무와 흘러가던 강물이 사라지고 땅이 황무지로 변하는데 어찌 두려워 하지 않을 수가 있단 말인가.
우리는 한 생애를 살면서 별의 별 일들을 다 당하며 살아간다. 지진, 쓰나미, 홍수, 거대한 산불, 가뭄, 폭염, 폭설, 맹추위가 몰려 오는 한파, 전염병, 전쟁, 폭동, 사고, 사건, 질병, 상해, 실직, 파산 등의 경제적인 위기, 가정 해체의 위기, 가족의 갑작스러운 죽음 등등 예기치 않았던 별의 별일들을 다 겪으며 살아간다. 그야말로 땅이 변하고 산이 흔들려 바다 가운데 빠지고 바닷물이 솟아나고 뛰놀며 넘쳐나서 산이 흔들리는 그런 격동의 세상을 살아간다. 그런데 오늘 시편 46편의 기록자는 고백하고 있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로다”
이것은 무감각한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무덤덤한 모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포자기의 모습도 아니다. 우린 그 누구라도 세상을 살면서 별의별 일들을 다 겪으며 살아간다. 그런데 어떻게 시편 46편의 기록자인 고라 자손 중의 그 누군가는 이런 담대하고 침착한 믿음을 고백할 수 있었을까. 찬송가 70장의 3절은 이렇다.
“만유의 하나님 우리를 도우니 피난처요
세상의 난리를 그치게 하시니 세상의 창검이 쓸데 없네”
그렇다. 맞다.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만날 지라도 하나님을 피난처 삼는 것이다. 우리가 아는 창세기의 야곱의 그랬다. 하나님은 세월이 흘러가면 흘러 갈수록 야곱의 믿음을 점점 더 그런 견고한 믿음의 세계로 이끌어 가셨다. 그래서 시편 46편은 이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야곱의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로다”라고 말이다. 시편 46편은 열왕기하 18-19장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앗수르의 산헤립이 주전 701년에 예루살렘에 쳐 들어 왔다. 예루살렘 성이 함락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앗수르의 침략군의 선봉장이었던 랍사게는 “성위에 앉은 사람들도 너희와 함께 자기의 대번을 먹게 하고 자기의 소변을 마시게 하신 것이 아니냐”라고 조롱하며 위협하였다.
남유다의 히스기야 임금의 때에 있었던 전쟁 장면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히스기야 왕과 백성들의 기도를 들으셨다. 임금 히스기야는 옷을 찢고 굵은 베를 두르고 하나님의 전에 들어갔다. 그 당시 선지자는 이사야였다. 왕은 왕궁 책임자인 엘리야금과 서기관 셉나와 제사장 중 장로들에게 굵은 베를 동이게 하였다. 그리고 저들로 하여금 선지자 이사야에게 찾아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하였다. 하나님은 선지자 이사야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하나님을 모욕하는 말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임금 히스기야는 앗수르의 산헤립이 유다 백성들을 조롱하고 위협하는 선전 포고문을 들고 여호와의 성전에 올라 갔다. 선전 포고문을 하나님 알에 펴 놓고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룹들 위에 계신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는 천한 만국에 홀로 하나님이시라 주께서 천지를 만드셨나이다. 여호와여 귀를 기울여 들으소서 여호와여 눈을 떠서 보시옵소서 산헤립이 살아 계신 하나님을 비방하러 보낸 말을 들으시옵소서....우리 하나님 여호와여 원하건대 이제 우리를 그의 손에서 구원하옵소서. 그리하시면 천하 만국이 주 여호와가 홀로 하나님이신 줄 알리이다.”(왕하19:15-16, 19)
하나님은 밤을 새워서 기도하는 히스기야 왕과 고관대작들과 백성들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그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와서 앗수르 진영에서 군사 185,000명을 쳤다.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보니 다 송장이 되어 있었다. 열왕기하 19장 35절에 나오는 역사적인 전쟁 기록이다. 앗수ㄹ의 왕 산헤립은 수도인 니느웨에 머물렀다. 니스록의 신전에서 경배하고 있었다. 그 같은 시간에 두명의 검객이 들이 닥쳤다. 저들의 아름은 아드람멜렉과 사례셀이다. 앗수르의 왕 산헤립은 저들 두 명의 검객의 칼에 죽임을 당하였다. 열왕기하 19장 7절에서 대하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이 성취되는 순간이 현실로 다가온 것이다.
우린 세상을 살면서 때때로 젊음이 피난처 같고 실력이 피난처 같고 경제력이 피난처 같고 사회적인 신분과 지위가 피난처인 것처럼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의 영원한 피난처는 오직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 뿐이시라는 믿음 뿐이다. 그 어떤 두렵고 떨리는 일을 만날 지라도 오직 야곱의 하나님만을 나의 피난처 삼고 살아갈 수 있는 담대한 믿음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우리의 힘이신 하나님.
세상 사람들은 힘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것이 참으로 많다. 학력, 실력, 외모, 돈, 젊음, 좋은 직장, 안정된 사업, 인기, 권력, 명예 등등 그런 것들 말이다. 물론 좋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그런 것들을 추구하며 살아간다. 끝이 없는 무한 경쟁 사회에서 헐덕거리며 살아간다. 남들보다 앞서가는 이들은 은근히 자신의 역량을 자랑하며 으스대며 뽐내며 자랑하며 살아간다. 남들이 자기를 알아 봐 주는 것으로 만족을 누리며 살아간다. 남들이 자기를 부러워 하고 추앙하는 것을 즐기며 살아간다. 권력을 꿀을 빨아 먹기도 한다. 경제적인 번영에 도취되기도 한다. 잘 나갈 때는 돈이면 다 될것처럼 착각하기도 한다.
아주 어려서부터 우리나라는 이런 경쟁의 현장으로 어린 아들딸들을 내어 몬다. 대치동 아이들을 능가하지 못하면 모두 다 세상의 머저리가 될 것처럼 여긴다. 그래서 실력, 실력, 경쟁, 경쟁을 부추긴다. 물론 앞서가야 한다. 물론 실력을 쌓아야 한다. 물론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 물론 유능해야 한다. 그러나 악이 악을 부르고 화가 화를 부르는 줄 뻔히 알면서도 성공과 출세를 위해서만 질주하는 것을 주님은 결코 원하지 않으신다.
“여호와는 말의 힘이 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며
사람의 다리가 억세다 하여 기뻐하지 아니하시고
여호와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들과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들을 기뻐하시느니라”(시147:10-11)
라고 하였다. 맞다. 그렇다. 하나님은 하나님은 힘의 근원으로 삼고 살아가는 믿음의 백성을 기뻐하신다. 그런 민족, 그런 나라, 그런 가정, 그런 인생을 기뻐하신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I love you, Lord, my strength”(시18:1) 다윗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믿음으로 살아가는 증거가 무엇인가. 내가 자랑할 것이 아무리 많다고 하여도 그런 것 자랑하지 않고 하나님만 자랑하고 하나님만 높이고 하나님만 의지하는 그런 믿음이 참으로 믿음다운 믿음이 아닌가.
이런 사람은 찬송이 다르다. 고백이 다르다. 관심 분야가 다르다. 경제 생활 우선 순위가 다르다. 취향이 다르고 삶의 목표가 달라진다.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나의 생명이 되신 주
밤낮 불러서 찬송을 드려도 늘 아쉰 마음 뿐일세”
(95장, 나의 기쁨 나의 소망 되시며) 이런 찬송가가 진심으로 불려 지게 되는 법이다.
우리의 큰 도움이신 하나님.
고라 자손은 이렇게 고백하였다. “하나님은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4-5절에 보라. “한 시내가 있어 나뉘어 흘러 하나님의 성 곧 지존하신 이의 성소를 기쁘게 하도다 하나님이 그 성 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라고 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한 시내’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흘러나오는 영원한 생명의 물줄기를 말씀하는 것이다. 다윗의 시편인 시편 36편 9절에 보면, 다윗은“진실로 생명의 원천이 주께 있사오니 주의 빛 안에서 우리가 빛을 보리로다”라고 고백하였다. 고라 자손은 예루살렘 성을 ‘하나님의 성(城), 지존(至尊)하신 이의 성소(聖所)’라고 고백하였다. 지금 앗수르의 위협을 받고 지금 산헤립의 조롱을 받고 있을지라도 하나님은 최후 승리를 얻게 해 주시리라는 믿음과 분명한 확신이 있었다. 5절에 보니까 “하나님이 그 성중에 계시매 성이 흔들리지 아니할 것이라”라고 하였다. 이런 믿음이 우리 각 사람에게 있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 나의 마음 속에 계시매, 하나님이 나의 가정에 계시매, 하나님이 나의 삶의 현장에 늘 함께 계시매 나는 결코 두려워 하거나 불안해 하지 아니할 것이다”이런 담대한 믿음의 고백이 우리 각 사람에게 있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은 대적자와 원수를 잠잠하게 하시는 만군의 여호와이시다. “뭇 나라가 떠들며 왕국이 흔들렸더니 그가 소리를 내시니 땅이 녹았도다”라고 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적군이 벌벌 떠는 공포의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큰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은 땅을 황무지로 만들어 버리시는 전능자이시다. 땅 끝까지 전쟁을 쉬게하시는 평화의 왕이시다. 활을 꺾고 창을 끊으며 수레를 불사르시는 만군의 여호와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만히 있어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주목해야 한다. 하나님만이 뭇 나라 가운데서 높임을 받으시며 세계 중에서 높임을 받으시는 것을 목격해야 한다”
“너희는 가만히 있어”라는 말씀은 아무 대책이 없이 그냥 멍하고 앉아만 있으라는 요구가 결코 아니다.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버리고 역사를 주관하시며 각 사람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라는 선언이다. 시편 62편에 보면 다윗은 “나의 영혼이 잠잠히 하나님만 바람이여 나의 구원이 그에게서 나오는도다”라고 고백하였다.
다음 주일은 강림절의 시작이다. 나의 범사에 큰 도움의 손길이신 만군의 주 여호와를 찬양하며 경배하는 강림절 맞이가 되기를 소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