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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께서 이르시되(렘1:4-10) 202502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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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2-12 07:37 조회 566 댓글 0
 

                        여호와께서 이르시되(렘1:4-10)         2025. 2. 2

 

 

예레미야의 이름인 ‘이르메야’는‘여호와께서 높이신다’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하나님은 베냐민 지파의 땅 아나돗에 사는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인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택하셨다. 그가 태어 나던 때는 남왕국 유다의 므낫세 왕의 악정이 극심하던 때였다. 그처럼 암울하던 때에 태어난 제사장의 아들을 하나님은 선지자로 부르신 것이다. 그가 부르심을 받을 때의 나이는 20살이었다. 요시야(BC640-609) 왕의 통치 제 13년차 되던 때였다. 주전 627년의 일이다. 

 

요시야 왕의 통치기간을 끝으로 남 유다는 멸망의 길로 치달았다. 여호아하스, 여호야김, 여호야긴, 시드기야- 이 네 명의 왕들의 시대를 끝으로 남 유다는 주전 586년에 바벨론에 멸망하고 말았다. 

 

우리는 한 국가의 흥망성쇠(興亡盛衰)를 안다. 그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인생의 흥망성쇠와 생로병사(生老病死)도 안다. 언제까지나 잘 되기면 하는 인생도 없고 언제까지나 내리막길만 걷는 인생도 없다. 사람은 누구나 다 한 생을 살면서 별의 별 우여곡절을 다 겪으면서 살아간다. 문제는 하나님 안에서 살아가느냐 아니면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아가느냐의 두 경우 뿐이다. 

 

하나님은 장차 아버지의 대를 이어 제사장이 될 자인 예레미야를 스무살 때에 선지자로 부르셨다. 그리고 그에게 말씀하셨다. 예레미야 1장의 오늘 본문은 예레미야의 부르심에 관한 내용이다. 

 

4절에 보니까,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라는 기록을 보게 된다. 이것이 선지자로의 부르심의 시작이다. 예레미야는 방대한 분량의 선지서이다. 가장 자주 반복되는 표현은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라는 내용이다. 그렇다. 선지자란 자기의 생각이나 견해나 입장이나 경험이나 주장을 전하는 자가 아니다. 선지자는 철저히 하나님이 그를 통해서 그 시대에 전하라고 하시는 말씀을 대언하는 대언자인 것이다. 

 

5절에 보니까, 모태에 짓기 전에 알았다. 어머니의 배에서 나오기 전에 성별하였다. 그 이전부터 이미 “너를 여러 나라의 선지자로 세웠노라”라고 말씀하셨다. 이는 예레미야 스스로 선지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이 아니라는 실증이다. 그렇다. 하나님은 그 시대에 그 현장에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람을 택하여 불러 쓰시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택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를 택하여 쓰시는 것이다. 이것이 택하심이요 부르심인 것이다. 요즘 수요일마다 접하는 에베소서의 교훈이 그것이다. 하나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에는 하나님의 예정이 있다는 말씀이다.

 

하나님은 일방적으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택하셔서 남 유다의 운명과 열방의 운명에 대하여 예언하게 하셨다. 이는 열방 나라와 열방 민족이 하나니므이 예언의 말씀은 받아들이든지 받아 들이지 않든지 상관이 없다. 이는 유다 백성들과 열방 민족이 예레미야를 통한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을 믿든지 믿지 않든지 상관이 없다. 하나님의 예언의 말씀 가운데는 장차 하나님께서 행하사는 하나님의 섭리와 경륜과 계획이 담겨 있기 때문이다. 

 

6절에 보니까,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예레미야가 당혹스러워 하는 장면이 나온다. “아닙니다 하나님 저는 아직 어려서 말을 할 줄 모릅니다”라고 반응한다. 7절 이하에서는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택하신 목적과 명령과 격려의 내용이 이어진다. 

 

 

가서 말하라.

하나님은 당황스러워하는 예레미야를 설득하셨다. 그리고 분명하게 명령하셨다. 너는 스스로 네 자신을 아이라고 말하지 말아라.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너는 가서 말해라. 내게 네게 무엇을 명령하든지 그대로 말해라”라고 선지자로서의 부르심을 확고하게 하셨다. 이는 어느 시대의 어느 누구나 다 마찬가지이다. 구약의 수 많은 선지자들이 그러하다.  신구약 시대의 수 많은 하나님의 사람들의 부르심이 그러하다. 호렙 산 떨기 나무의 불 붙는 환상 앞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던 모세도 그랬다. 사사 기드온도 그랬다. 솔로몬도 그랬다. 사도 바울도 그랬다. 그러나 하나님은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에 의해서 사명을 주시고 감당할만한 능력과 지혜도 공급해 주셨다. 

 

하나님은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신다. 그러므로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께서 제자들을 부르실 때도 그랬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이런 고백을 하던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셔서 역사적인 사도가 되게 하셨다. 우리가 잘 아는대로 베드로는 갈릴리에서 물고기를 잡던 어부였다. 조상 대대로 그렇게 살아 왔다. 그런데 예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라고 사명자로 부르신 것이다.

 

사도 바울의 부르심은 어떤가. 디모데전서 1장 13절에 보면, 그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다.” 그런 그를 예수께서는 다메섹 성 입구에서 부르셨다. 변화시켜서 쓰셨다. 성령을 부으셔서 새 사람으로 만드셨다. 

 

그릇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릇에 담긴 내용물이 중요한 것이다. 개화 초기 선교사들의 비유 중에“뚜껑이 있는 같은 단지이지만 그 단지 안에 소변을 담으면 요강이 되고 꿀을 담으면 꿀 딴지가 된다”는 설명이 있다. 그렇다. “나란 그릇에 무엇을 담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는 달라진다. 그 장래는 달라진다. 악을 담으면 악의 병기가 되고 선을 담으면 선한 병기가 되는 것이다. 같은 밭에도 장미를 심으면 장미 꽃밭이 되고 엉겅퀴를 심으면 엉겅퀴 밭이 되고 마는 것이다.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이 택하심을 받은 그릇으로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디모데 후서 2장의 그릇 이야기가 무엇인가. “큰 집에는 금 그릇과 은 그릇뿐 아니라 나무 그릇과 질그릇도 있어 귀하게 쓰는 것도 있고 천하게 쓰는 것도 있나니 그러므로 누구든지 이런 것에서 자기를 깨끗하게 하면 귀히 쓰는 그릇이 되어 거룩하고 주인의 쓰심에 합당하며 모든 선한 일을 준비함이 되리라”(딤후2:20-21)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오늘도 우리 각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각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가서... 말하라”라고 말이다. 우리는 마태복음 28장 마지막 부분에 있는 선교 대명령을 안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28:19-20)

 

라는 선교 명령 말이다. 

 

주님은 예루살렘 북서쪽 5km쯤에 있는 아나돗이라는 제사장 마을에 사는 제사장 힐기야의 아들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신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명령하셨다. 

 

“너는 내가 너를 누구에게 보내든지 가고, 

무슨 명령을 하든지 말하라”

 

명령이 무엇인가. 명령이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니다. 명령은 반드시 수행해야 하고 분명하게 준행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선지자는 아니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으로서의 선지자성(先知者性)을 누구나 다 부르심과 사명으로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외쳐 말해야 한다. 우리가 잠잠하면 돌들이라고 소리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민수기 22장 이하에 나오는 이방 나라인 모압의 왕 발락에게 매수되어 타락한 선지자 발람의 일화가 무엇인가. 선지자가 선지자의 사명을 다하지 못하며 하나님은 나귀를 통해서라도 말씀하신다.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라. 나의 하루 24시간을 무슨 일에 쓰고 사는가. 나의 일주일 168시간을 무슨 일에 쓰고 사느냐고 말이다. 올 한해, 그리고 앞으로의 삶에 나를 통해서 하나님께서 전하라고 하시는 복음 전파의 말씀이 선포되는 선교의 통로, 복음 전파의 통로로 쓰임 받는 사명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두려워하지 말라.

하나님은 하라고 하시는 사명만 명령하시는 분이 아니시다. 감당할만한 능력을 덧입혀 주시고 용기를 주시며 격려해 주시는 주님이시다. 8절을 보라. “너는 그들 때문에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하여 너를 구원하리라 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믿음의 사람과 언제 어디서나 늘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두려워하고 염려하면 안된다. 하나님은 다니엘의 사자굴에도 함께 하셨다.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풀무불 가운데도 함께 하셨다. 낮의 해외 밤의 달이 해하지 못하도록 함께 하시는 주님이시다. 우리는 시편 121편의 그 유명한 말씀을 기억한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돌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지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 서로다”라는 말씀으로 시작되는 시편 말이다. 

 

너를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아니하신다. 주무시지도 아니하신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신다. 여호와께서 네 그늘이 되신다.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신다.

밤의 달이 너를 해치지 아니하게 하신다. 

여호와는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네 영혼을 지켜 주신다. 

여호와는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 주신다.

 

라고 약속하고 있다. 그러므로 불안과 두려움에 갇혀 살지 말고 주님을 믿고 신뢰하는 믿음으로 담대하게 살아가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이 닥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요16:33)

 

주님의 이와 같은 약속의 말씀을 가슴에 간직하고 두려움과 불안과 염려와 초조와 우울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은혜를 누리며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41:10)

 

그렇다. 하나님은 연약한 민족을 붙드셔서 새 타작기계와 같게 해 주시리라고 약속하셨다. 그 어떤 대적, 그 어떤 원수라도 두려워 하지 말라고 하셨다.

 

“이는 나 여호와 너의 하나님이 네 오른손을 붙들고 네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를 도우리라 할 것임이니라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보라 내가 너를 이가 날카로운 새 타작기로 삼으리니 네가 산들을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 것이며 작은 산들을 겨 같이 만들 것이라 네가 그들을 까부른즉 바람이 그들을 날리겠고 회오리바람이 그들을 흩어 버릴 것이로되 너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겠고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로 말미암아 자랑하리라”(사41:13-16)

 

밝아온 새 달, 말씀의 은혜를 붙들고 약속의 말씀에 따라서 담대하게 승리하는 각 사람이 되기를 소망한다.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나님을 믿으라.

우리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개인과 가정과 나라와 민족과 시대 역사를 주관하시는 대 주재이시다. 왕을 세우시기도 하시고 폐하시기도 하신다. 나라를 세우시기도 하시고 멸하시기도 하신다. 민족을 흥왕하게 하시기도 하시고 패망하게 하시기도 하신다. 흥망성쇠(興亡盛衰) 길흉화복(吉凶禍福)이 모두 다 주의 손 안에 있다. 오늘 말씀 10절에 보면 파괴하신다는 표현이 네 번 반복되고 회복하신다는 말씀이 두 번 반복된다.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 뜨리며”라는 반복적인 표현은 모두가 다 멸하시겠다는 경고의 내용이다. 그러나 “건설하고 심게 하였느니라”라는 말씀은 회복하시겠다는 약속이시다. 

 

맞다. 하나님은 심판하시기도 하시고 회복하시기도 하시는 주님이시다. 찢기도 하시고 꿰매기도 하시는 주님이시다. 깨트리기도 하시고 온전하게 하시기도 하시는 주님이시다. 흩어 버리기도 하시고 불러 모으기도 하시는 주님이시다. 부숴 버리기도 하시고 일으켜 세우시기도 하시는 주님이시다. 

 

10절에 다시 보면, 하나님은 “보라 내가 오늘 너를”이라고 말씀하셨다. “내가”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주인이시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시다. 하나님이 소유자이시다. “오늘”이란 하나님의 시간과 역사의 주관자이시라는 말이다. “너를”이란 말씀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서 각 사람을 선택하여 쓰신다는 선언이시다. 

 

영화나 드라마가 제작되기까지에는 수 많은 사람들의 수고가 필요하다. 스크린에 등장하는 주인공이나 배역은 그야말로 배역일 뿐이다. 시나리오에 의해서 희노애락이 전개 되는 것이다. 작가의 의도이며 연출가의 의도인 것이다. 물론 내가 내 인생의 주인인 것이 맞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에 자유 의지를 선물해 주셨다. 그러나 더 큰 그림으로 보면 하나님이 나에게 주신 그 자유 의지를 가지고 내 마음대로 쓰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

먹고 싶다고 다 먹고 마시고 싶다고 다 마시고 가고 싶다고 다 가고 하고 싶다고 다 하고 자고 싶다고 다 자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되냐는 말이다. 

 

요나서의 내용을 우리는 안다. 요나는 선지자이다. 하나님은 그를 앗수르르 수도 니느웨로 보내셨다. 니느웨의 멸명을 예언하여 ‘외치라’라고 하셨다. 그러나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하려 하였다. 요나는 여호와의 낯을 피하려 하였다. 욥바 항구에 갔는데 마침 다시스로 가는 배가 있었다. 배삯을 주고 그 배에 올랐다. 그런데 큰 바람으로 큰 폭풍을 만났다. 성경은 일기가 갑자기 않좋아 져서 그렇게 되었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여호와께서 큰 바람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바다 가운데서 큰 폭풍이 일어나 배가 거의 깨지게 된지라”(욘1:4)라고 하였다. 

 

요나는 제비 뽑혔다. 바다에 던져졌다. 큰 물고기가 그를 삼켰다. 요나는 큰 물고기 뱃속에서 회개하는 기도를 드렸다. 요나서 2장은 물고기 뱃속에서 기도한 요나의 회개 기도 내용이 담겨 있다. 요나는 인생을 구원하시는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이시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은 요나의 기도를 들어 주셨다. 하나님은 물고기에게 명령하셨다. 물고기는 요나는 육지에 토하였다. 요나는 삼일만에 물고기 뱃속에서 육지에 토해졌다. 살아 남았다. 살아 남은 후에도 요나는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다. 여전히 자아가 살아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박넝쿨 교훈이 아닌가. 

 

선지자 요나는 죄악 많은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백성들이 회개하고 구원 받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몹시 싫어 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다. 하나님의 뜻은 달랐다. 하나님은 니느웨의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십이만여명의 어린이와 더불어 그곳의 성민들이 회개하고 구원 받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예레미야를 열방의 선지자로 부르셨다. 그 내용이 예레미야 1장 10절에 있다. “보라 내가 오늘 너를 여러 나라와 여러 왕국 위에 세웠다”라고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입의 말씀은 세우시기도 하시고 멸하시기도 하신다. 하나님은 북 왕국 이스라엘도 멸망시키셨다. 140여년 세월이 흘러 가도 회개 하지 않고 여전히 우상을 숭배하며 하나님을 떠나가던 남 왕국 유다도 멸망시키셨다. 10절 말씀 그대로 “뽑고 파괴하고 파멸하고 넘어뜨리셨다.” 그러나 긴 긴 세월이 흘러 간 후에 저들을 다시 “건설하고 심게 하셨다”

이것이 바벨론 포로에서의 회복인 것이다.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한 경고의 말씀을 그 당시의 왕들과 방백들과 백성들은 들으려 하지 않았다. 결국은 심판으로 인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며 회개하고 돌이킨 백성들을 바벨론과 메대와 바사의 흩어진 땅에서 하나님은 불러 모으셨다. 이것이 제 1차, 제 2차, 제 3차 포로 귀환인 것이다. 물론 포로에서 귀환 된 것만이 대답은 아니다. 그것은 지리적으로 잃어 버린 땅에 돌아 온 것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주께로 돌아 와야 한다. 주께로 돌아 가야 한다. 마음과 뜻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전심으로 주께 돌아가지 않으면 돌아간 것이 아니다. 

 

말도 많고 탈도 많던 미국 대통령에 도널드 트럼프 당선자가 취임하였다. 워싱턴 DC에 맹추위가 몰려오는 바람에 야외에서 치러지는 전통을 이어가지 못하고 의사당 내부에서 취임식이 열렸다. 개회 기도는 빌리 그래험 목사의 아들인 프랭크린 그래험(Franklin Graham, 1952-) 목사가 맡았다. 야외 행사 참석 예정자 20여만명을 뒤로 하고 600여 명만이 제한적으로 의사당 중앙 홀에 둘러 앉았다. 그 곳에는 역대 대통령을 지낸 조지 W. 부시(George Walker Bush, 1946-) 대통령 내외도 자리하였다. 프랭크린 그래함과 조지 W. 부시 두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TIME지의 표지 모델로 실린 적이 있다. 제목을 “돌아온 탕자 Prodigal Son”이었다. 

 

조지 W. 부시는 예일대학교에서 역사학을 공부하고 하버드 대학원에서 경영학을 공부한 정치 명문가 출신이었다. 그런 그가 철없던 시절에는 마약에 손을 대기도 하였다. 20살 때까지 술을 좋아해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는 등 방황이 계속 되었다. 그러나 그는 과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삶을 살아갔다. 텍사스 하원의원, 텍사스 주지사를 거쳐서 미국의 제 4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그의 곁에는 남편을 위해서 진심을 담아 조언하는 믿음 좋은 아내 로라 부시(Laura Bush, 1946-) 여사가 있었다. 아내는 남편의 40살 생일 때에 “술을 계속 마시려면 나와 이혼하자”라고 담판하였다. 남편인 조지 W. 부시는 결단했고 새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그는 변화되었다. 부모님은 영국 성공회의 미국 교회를 일컫는 에피스코팔 처치(Episcopal Church) 교인이었다. 그러나 조지 W. 부시는 아내를 따라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교인이 되었다. 그의 방황을 끝낸 건 빌리 그레이엄 목사의 충고로 큰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그는 2010년,  6. 25 제 60주년 기념 행사 참석을 위해 한국에 왔다가 자신의 신앙에 대하여 간증한 적도 있다. 빌리 그래험 목사의 아들 프랭크린 그래험도 목사의 아들이었지만 청년기의 방황을 뒤로 하고 아버지의 대를 이어서 역사적인 인물로 살아 가고 있다. 

하나님은 한 시대의 문명과 역사 뿐만 아니라 각 사람의 생애에 개입하시고 간섭하신다. 부수시기도 하시고 건설하시기도 하신다. 찢기도 하시고 싸매어 새롭게 하시기도 하신다. 넘어지게도 하시고 일으켜 세우시기도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야 한다. 

 

가롯 유다는 유월절 전날 만찬 자리에 예수와 마주 앉아서 함께 먹었다. 예수께서 떼어 주시는 떡도 받아 먹었다. 그러나 그는 예수께서 가시는 길을 몰랐다. 하려 하시는 일도 몰랐다. 그래서 배반하고 그래서 예수를 팔아 버린 것이다. 신앙이 무엇인가.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주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다.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는 부르심과 사명이 분명해야 한다. 그것이 예레미야를 선지자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다. 그것이 오늘 날 우리 각 사람의 믿음에 대하여 질문하시는 주님의 질문이시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 각 사람에게 말씀하신다.

 

가서 전하라

두려워 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내가 너를 구원하리라

내가 너를 세웠다

내가 네 입에 나의 말을 두었다 

 

라고 말씀하신다. 

 

이와 같은 주님의 부르심과 사명에 정직하게 반응하고 응답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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