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를 주로 믿는다면(고전12:1-11) 2025. 1. 19
로마 시대의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섬기는 신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저주하고는 하였다. 그러하다 보니 심지어는 예수의 이름으로 상대방을 저주하기도 하였다. 3절에서 언급하는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는 자”와 “예수를 주시라 하는 자”의 차이가 그것이다.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은 처참한 죽음을 염두에 두고 그런 말을 하고는 하였다. 예수를 죽은지 삼일 만에 부활하신 구세주로 믿지 않는 자들은 예수를 십자가에 달려 저주를 받아 죽은 자로만 여겼다. 그러나 예수의 수난과 십자가 죽음과 부활 승천을 믿는 성도들은 예수를 주시라고 고백하는 믿음으로 살아간다. 그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처럼 크나큰 차이다.
1절에서 말하는 ‘신령한 것’이란 ‘영적인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을 구분한다. 하나님은 육체가 아니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영이신 하나님이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성육신(成肉身, incarnation)이라고 한다. 성령이란 영이신 하나님이 이 땅에 자신의 영을 보내 주셔서 성도들로 하여금 깨닫게 하시는 영적 세계이다. 1절에서 말하는 ‘신령한 것’이란 ‘성령에 관한 것’이란 말씀이다. ‘알지 못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라는 말씀은 이중 부정이다. 반드시 알기를 원한다는 강조 어법이다. 사실 그 당시의 고린도 사람들은 제각각 자기들이 믿는 각양의 우상 숭배자들이었다. 2절의 내용이 그것이다. “말 못하는 우상에게로 끄는 그대로 끌려 갔느니라”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말 못하는 우상’이란 우상 자체가 죽은 신이란 지적을 한 것이다. 그렇지 않나. 가령 열왕기상 18장에 소개된 엘리야 선지자와 바알 숭배자들의 갈멜산 정상의 영적 대결 장면을 보라. 바알이나 앗세라는 죽은 신이다. 말 못하는 신이다. 그야말로 우상일 뿐이다. 바울 사도가 우상의 그런 면을 언급한 것이다. “죽은 신인 우상에게 끌려 다니던 너희가 아니냐” 라고 지적한 것이다.
그렇게 다양한 우상 숭배 가운데 붙잡혀 미신에 끌려 다니던 고린도의 시민 들 중에서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를 주시라고 시인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이다. 그러나 고린도 교회에는 다양한 곳에서 몰려와서 도시를 형성하고 교회를 구성한 공동체 안에 별의별 문제가 다 있었다. 그러한 문제투성이의 교인들이 교회의 영적 질서와 신앙생활의 안정을 위해서 질문한 질문에 대답하는 형식으로 쓴 편지가 고린도 전서이다.
오늘 본문에서는 성도의 은사와 직분과 사역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다. 왜냐하면 고린도 교회 안에는 잘난 사람들이 많았다. 여기 저기서 모여든 다양한 인종, 다양한 문화, 다양한 언어, 다양한 풍습을 가진 다양한 경력을 가진 저들은 서로가 다 제 잘난 맛에 자기의 주장을 강하게 하려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그래서는 안된다. 이래야 한다.”라고 대답한 편지가 고린도 전서이다. 즉, 신앙 생활의 지침, 교회 생활의 지침과 같은 다양한 주제의 내용들은 자세하게 언급한 편지가 고린도 전서이다. 가령 고린도 전서 7장에서는 결혼관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8장에서는 우상의 제단에 바쳐졌던 고기를 먹어도 되느냐 먹어서는 안 되느냐의 논쟁에 대답해 주었다. 11장을 보면 “예배 시간에 여자가 머리에 수건을 써야 하느냐 쓰지 않아도 되느냐”그런 질문 앞에 대답한 내용이 나온다. “성찬식에 참여하는 성도의 자세와 태도와 마음가짐은 어떠해야 하느냐”라는 내용도 담겨 있다.
이처럼 신앙생활과 교회 생활에 대한 별의별 문제들이 계속해서 거론되던 당시에 사도 바울은 오늘 읽은 본문인 고린도 전서 12장을 통해서 우리의 신앙생활의 자세와 태도가 어떠하여야 하는가에 대하여 심도 있게 교훈해 주고 있다. <현대인의 성경> 에 보면 고린도전서 12장 4-6절을,
은혜의 선물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성령님은 한 분이시며
섬기는 일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주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리고 해야 할 일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모든 사람 안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은 한 분이십니다.
라고 알아 듣기 쉽게 번역해 주었다.
성령 안에서의 은사(恩賜).
‘은사’(恩賜)란 “값없이 주시는 선물의 능력”을 뜻한다. 우리는 고린도 전서 12장 뿐만 아니라 로마서 12장과 에베소서 4장의 내용을 통해서 하나님이 성령의 능력으로 각 성도에게 허락하신 다양한 은사에 대하여 안다. 그러므로 은사란 내 노력, 내 열심, 내 수고, 내 관심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하나님께서 성령의 능력으로 각 사람에게 부어주신 은혜의 선물이다. ‘선물’이 무엇인가. 내 수고나 내 공로와 상관없이 상대방이 나에게 베풀어 주는 호의가 담긴 그 무엇이 아닌가. 선물이란 값의 문제가 아니다. 선물은 크고 작고의 문제도 아니다. 선물이란 그 자체로 좋고 귀하고 감사한 것이다. 그렇지 않나. 상대방이 나에게 선물을 건네주면 “감사합니다”라고 고마운 마음으로 받아 들면 상대방의 선물이 나에게 전해지는 것이 아닌가. 이처럼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각양 다양한 선물인 은사를 성령 안에서 허락해 주신 것이다. 7절 말씀처럼 성령으로 인한 은사는 유익(有益)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8절 이하에 보면, 지혜의 말씀, 지식의 말씀, 믿음, 병 고침, 능력 행함, 예언, 영 분별, 방언, 방언 통역 등의 은사에 대하여 언급하였다. 그 모든 다양한 은사들은 11절 말씀처럼 “이 모든 일은 같은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다”하나님이 하나님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것이 은사란 말이다. 물론 각 사람이 그 은사를 개발하고 유지하고 발전시켜 나가야 하는 것은 맞다. 어떤 이는 찬양의 은사, 어떤 이는 악기를 다루는 은사, 어떤 이는 지휘하는 은사, 어떤 이는 성가대원들을 위해서 악보를 준비하고 정리하고 뒷 마무리를 위해서 돌보고 섬기는 은사가 있다.
교회 안에서는 구석 구석에 다양한 은사를 가진 누군가가 자신의 은사를 가지고 서로를 섬기고 돌보고 배려하고 위하기 때문에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로 자리매김하게 되는 것이다.
에베소서 4장 12절에 보면, “이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라고 하였다. 에베소서 4장 16절에 보면, “그에게서 온 몸이 각 마디를 통하여 도움을 받음으로 연결되고 결합되어 각 지체의 분량대로 역사하여 그 몸을 지키려 하며 사랑 안에서 스스로 세우느니라”라고 하였다.
은사란 결코 자기를 자랑하거나 자기를 드러내거나 자기를 높이라고 주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각 사람에게 주신 은사를 통해서 성도 간에 서로 서로를 섬겨 나가고 세워 나가기를 원하신다. 은사(恩賜)라는 카리스마(Χάρισμα)는 은혜(恩惠)라는 카리스(Χάρισ)에서 나온 말이다. 은혜라는 카리스는 기쁨이란 카라(χαρά)라는 말에서 나온 것이다. 그렇게 보면 은사란 주 안에서 기쁨과 은혜로 인해서 주어진 성령의 선물인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그 은혜에 감사하며 살아갈 때에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은사를 깨닫게 하셔서 기쁘고 자원하는 마음으로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며 서로 지체된 성도를 섬기게 하시는 것이다.
주 안에서의 직분(職分).
직분이란 ‘디아코니온’(διακονιῶν)이란 단어는 “섬긴다, 봉사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즉, “섬기는 자, 주어진 직무를 수행하는 자”라는 뜻이다.
집사(執事)라는 영어 ‘deacon’이 여기서 나온 단어이다. 교회 안에는 다양한 직분이 있다. 그 직분은 서로에게 차이가 없다. 각 분야, 각 부서, 각 현장의 각 사람에게 주어진 직분은 모두 다 소중하다. 어느 누구의 그 어느 직분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직분이 없다. 높고 낮은 직분이란 없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모든 직분이 각기 다 소중한 것이다. 각 사람에게 은사와 역량을 따라서 주어진 모든 직분은 모두가 다 소중한 것이다.
그러므로 직분자들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이다. 누구나 자신에게 맡겨진 일을 잘 감당해야 한다. 성실하게 지혜롭게 책임감을 가지고 온전하게 감당하도록 힘써야 한다. 고린도 전서 4장 2절에 보면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각 사람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성실하게 감당하여야 한다. 자식에게 맡겨진 일을 충성스럽게 감당하여야 한다. 누가 나를 보던지 안 보던지 주어진 직분, 맡겨진 직분을 잘 감당해야 한다. 베드로전서 4장 11절에 보면 “만일 누가 말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하는 것 같이 하고 누가 봉사하려면 하나님이 공급하시는 힘으로 하는 것 같이 하라”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25장 14절 이하에 나오는 달란트의 비유가 주는 교훈이 무엇인가.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은 종은 왜 칭찬을 받았는가. 갑절로 남겼기 때문인가. 아니다. 저들은 자신에게 달란트를 맡긴 주인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 하였다. 그래서 성실했고 그래서 부지런했다. 그래서 주인의 기대에 합당한 삶을 살아갔다. 어느 날 갑자기 타국에 갔던 주인이 돌아 왔다. 그리고 결산하자고 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종과 두 달란트 받은 종은 기쁜 마음으로 겴산할 내용을 주인에게 설명하였다. 주인의 칭찬이 이어졌다.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마25:21, 23) 라는 칭찬과 상급은 두 종에게 똑 같이 주어졌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았던 종은 달랐다. 차이가 무엇인가. 주인에 대한 오해가 심각하였다. “주인이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습니다.”(마25:24)라고 떠벌였다. 평소에 주인에 대한 오해와 착각이 심각하였던 것이다. 주인은 그에게 “악하고 게으른 종아 나는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데서 모으는 줄로 네가 알았느냐”라고 책망하였다.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서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라”라고 하였다.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 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라고 선언하였다.
신앙생활이 무엇인가. 나에게 이 직분을 주신 분이 누구신지를 깨달아 아는 것이다. 나에게 이런 은사를 주시고 나에게 이런 직분을 주신 분이 누구신지를 아는 것이다. 나를 귀하게 여기시고 나에게 이와 같은 직분을 맡겨 주시는 분은 주님이시다. 교회가 맡기고, 사람이 맡기는 것이 아니다. 직장에서는 그 직장의 대표나 아니면 자기 분야의 책임을 맡은 그 누군가가 나에게 이러 저러한 일과 직분을 맡길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다. 교회가 맡기고 목사가 맡기고 그 누군가가 맡기는 것 같지만 아니다. 주님이 나의 은사와 역량과 능력을 따라서 나에게 적합한 직분을 맡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 주어진 직분을 겸허하고 소중하게 맡아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이십 대 중반에 개척교회를 섬겼다. 수요일 밤 예배 시간에 기도 순서를 맡은 여 집사가 예배가 시작되었는데도 오질 않았다. 예배를 진행하던 나는 “만약에 찬송가가 끝나도록 기도 순서 담당자가 오지 않으면 내가 대신 기도해야 하겠다”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찬송가 2절쯤을 부를 때에 기도 담당자가 헐레 벌떡 뛰어 들어 왔다. 머리에는 미용실에서 퍼머를 할 때 머리에 쓰는 비닐 두건에 그대로 쓴 채로 나타났다. 그가 기도 시간에 기도했고 예배를 마쳤다. 수요일 오후에 미용실에 퍼머하러 갔다가 퍼머를 마치지 못한 상태에서 예배 시간이 다가 오지 헐레 벌떡 달려 왔다고 했다. 의정부 중앙교회 장로인 문재석 장로의 부인 신선화 권사의 이야기이다.
직분 중의 직분은 예배자의 직분이다. 지난 금요일 기도회 시간에 마음 속에 가득 차 오르는 기도 제목이 있었다. “주님. 금요 기도회 시간에 장로님 권사님 집사님 속장님 교사 여러분이 모두 다 함께 달려 와서 함께 찬양하고 함께 말씀 묵상하고 함께 부르짖어 기도하는 그런 교회가 되게 해 주세요.”
지금은 기도할 때이다. 개인, 가정, 가족, 자녀, 교회, 나라와 민족, 열방을 향하여 기도할 제목이 가득한 때를 살아가고 있다. 물론 개인적으로 기도할 수 있다. 혼자서도 기도할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초대교회의 탄생 현장인 마가의 다락방처럼 다 같이 한 곳에 모여서 마음을 합하여 기도하기를 원하신다. 직분 중의 직분은 기도자의 직분이다. 예배자의 직분이다. 봉사와 섬김이 다 귀하고 소중하지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은 예배이다.
선지자 사무엘은 세상을 떠나 주님 앞으로 돌아가기 전에 “나는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쉬는 죄를 여호와 앞에 결단코 범하지 아니하고 선하고 의로운 길을 너희에게 가르칠 것인즉 너희는 여호와께서 너희를 위하여 행하신 그 큰 일을 생각하여 오직 그를 경외하며 너희의 마음을 다하여 진실히 섬기라”(삼상12:23-24)라고 하였다.
하나님 안에서의 사역.
여기서 말씀하는 사역이란 일하는 그 자체이다. 영어 성경 NIV에 보면 ‘working’이라고 하였다.(There are different kinds of gifts, but the same Spirit. There are different kinds of service, but the same Lord. There are different kinds of working, but the same God works all of them in all men.)
‘에네르게마톤’(ἐνεργημάτων)이라는 이 표현은 ‘활동하다’라는 동사인 ‘에네르게오’( ενεργεω)에서 온 말이다. 이는 ‘어떤 행해진 일의 결과’를 의미하는 것이다. 영어의 ‘에너지’(energy)라는 단어가 여기서 나왔다. 그렇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각양의 은사와 직임을 주셔서 그 하는 일의 결과를 좋게 하신다. 유익하게 하신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신 은사와 직임으로 일했는데 그 결과가 나쁜 경우란 있을 수 없다. 만약에 결과가 나쁘다면 그것은 은사를 따라 한 것이 아니다. 자기 열심, 자기 공명심, 자기 만족, 자기 허영심을 채우기 위해서 직임을 구하고 사역한다면 그 나중은 점점 나쁘고 점점 악한 결과를 맺고 말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날마다 좋았다. 날마다“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다.” 하나님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지으신 인간 창조는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결과를 나쁘게 하고 악하게 하려는 것은 사탄의 책략이다. 마귀의 술책이다.
그러므로 성도는 성령을 의지해야 하고 교회 공동체는 성령 중심의 사역에 마음을 모아야 한다.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분은 성령님이시며 주님이시며 하나님이시다. 은사와 직임과 사역은 여러 가지이지만 그 모든 것을 이루시는 분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으로 역사하시는 것이다. 7절에 “각 사람에게 성령을 나타내심은 유익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하였다.
은사는 직분과 사역의 원동력이다.
직분은 사역의 성격이다.
사역은 은사와 직분의 활동상이다.
하나님은 성령을 각 사람에게 부어 주셔서 주어진 직임을 감당하게 하시며 그 직임을 감당할만한 힘과 지혜와 능력을 공급해 주신다. 지난 주중에 무슨 글을 읽는 중에 이런 깊이 있는 묵상을 보았다.
힘을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나를 강하게 할만한 고난을 주셨습니다.
지혜를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나에게 풀어야 할 문제를 주셨습니다.
용기를 달라고 기도했더니 하나님은 이겨나가야 하는 위험을 주셨습니다.
I askd for strength and God gave me difficulties to make me strong.
I askd for wisdom and God gave me problems to solve.
I askd for courage and God gave me dangers to overcome.
그렇다. 하나님은 각 사람과 공동체 안에 여러 가지 은사와 직임과 사역들을 통해서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뜻을 펼쳐 나가기를 원하신다. 11절에 보면 “이 모든 일은 같은 한 성령이 행하사 그의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것이니라”라고 말씀하였다. 그러므로 우리는 시시 때때로 질문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서로에게 유익한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일인가.
라고 말이다.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하나님은 각 사람에게 부여 하신 다양한 은사와 여러 가지 직임을 통하여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일이 성취되게 하신다. 자기 자신에 물어 보라. 나의 은사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은사와 직임을 통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사역을 꾸준히 감당해 나가는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라고 칭찬을 받는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소망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