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밴드에 공유
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십일조와 도둑질(말3:7-12) 20250112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으로 보내기
  • 밴드로 보내기
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5-01-24 15:52 조회 35 댓글 0
 

                      십일조와 도둑질(말3:7-12)              2025. 1. 12

 

 

오늘 본문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의 경제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말라기가 기록될 당시는 느헤미야의 예루살렘 성곽 중건이 끝난 이후의 때였다.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통해서 예루살렘 성곽 중건의 대업을 52일만에 성취하게 하셨다. 이미 스룹바벨을 앞장 세운 제 2차 예루살렘 성전이 재건 된 이후였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벨론 포로 생활로 인해서 몸과 마음이 피폐해질대로 피폐해진 상태였다. 이방 땅에서 선조들의 땅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는 것은 꿈에도 소원이었다. 예레미야의 예언 그대로 포로 생활 70년이 지난 후에 하나님은 고레스 왕의 마음을 감동하셨다. 유대인을 선조의 땅으로 돌아가라고 명령하게 하셨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루살렘 성에 돌아가서 무너진 솔로몬의 성전을 재건하는 은혜를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성전만 지었다고 문제가 다 해결되는 것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사람이 새 집에 들어가서 살고 새 자동차를 탄다고 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지 않나. 사람이 심령의 변화가 일어나지 않으면 새 옷을 갈아 입는다고 해서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나.

 

일, 이, 삼차 포로 귀환 이후에 하나님은 느헤미야를 총독으로 세우셔서 예루살렘에 대대적인 변화의 바람을 일으키셨다. 말라기 1장 8절에 ‘총독’이란 용어가 나온다. 성경학자들은 그 총독이 느헤미야 총독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해석한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성벽 중건 이후에 느헤미야로 하여금 12년 동안 총독으로 예루살렘에 머물게 하셨다. 그 후에 얼마 동안 예루살렘을 떠나서 다시 수산 성으로 돌아갔다. 세월이 지난 후에 다시 예루살렘에 돌아가서 보니 실망스러운 일들이 한 두가지가 아니었다. 그런 당시의 문제점들과 기도 제목들을 발견한 하나님은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말라기는 크게 세 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는 매우 짧은 선지서이다. 

 

첫째는, 제사장들의 타락상이다. 

1장 6절에, “내 이름을 멸시하는 제사장들아”라는 책망으로 시작된다.

 

둘째는, 

오늘 본문에서 접하는 잃어버린 십일조 생활에 대한 책망과 경고이다.

 

셋째는, 이방 여인과의 통혼 문제를 책망하신 내용이다. 

그 당시는 정치, 종교, 경제 등 각계 각 분야가 몹시 암담한 때였다. 정치적으로는 바사 제국의 식민지 상태였다.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허용했다고 하지만 주권을 빼앗긴 식민지 백성들로서 바사 제국에 각종 세금을 바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하다 보니 경제적으로 점점 참담한 나날을 연명하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라 가뭄, 병충해, 엄청난 메뚜기 떼의 습격 등으로 인해서 밭과 포도원이 황폐해져만 가고 있었다. 오늘 읽은 본문인 말라기 3장 11절의 내용이 바로 그것이다. 그게 무슨 말씀인가. 밀과 보리 등 밭의 농사를 메뚜기 떼가 달려들어서 초토화 시키면 농부의 한해 농사가 흉작이 되고 만다. 포도나무에 아무리 꽃이 만발하고 많은 포도 송이가 맺혀도 기한 전에 병들고 말라 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렇지 않나. 우리 각 사람의 인생사를 보라.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애쓰고 수고를 다한들 하나님이 지켜 주시고 은혜를 풀어 주시지 않는다면 내 노력으로 거둘 수 있는 일들이 과연 몇가지나 있는가. 

 

주전 537년, 제 1차 바벨론 포로 귀환을 시작으로 예루살렘과 유다 땅에 돌아간 무리들이 성전도 짓고 성곽도 중건한 것 까지는 좋았다. 그러나 저들의 신앙 중심에는 인본적이고 민족적인 관점에서 눈에 보이는 메시야 왕국이 건설되기를 바라는 소망이 너무나도 강하였다. 그러하다 보니 경건하게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하고 인내하며 지내기보다는 현세적인 안일과 만족과 번영에 눈이 멀어서 온갖 불의를 일삼는 이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심지어는 “그렇게 살아서는 않된다”라고 백성들을 책망하고 바른길로 지도해야 할 제사장들조차도 앞장서서 하나님의 이름을 멸시하는 신앙의 타락이 횡횡하고 있었다. 악이 악을 부르듯이 백성들은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앞장서서 십일조와 봉헌물을 주의 제단에 봉헌하지 않고 떼어먹는 이들이 넘쳐 나고 있었다. 하나님은 그러한 민족적인 타락과 변질을 안타깝게 여기셨다. 하나님은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서 제사장과 이스라엘 민족을 책망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셨다. 그 내용의 말씀이 오늘 읽은 본문이다. 말라기 3장 9절에 보면 크게 노하신 하나님은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라고 엄중히 말씀하셨다. 

 

우리는 매년 일월 둘째 주일을 청지기 주일로 지킨다. 오늘도 다시 십일조 신앙에 관한 말씀을 묵상하려고 한다. ‘십일조와 도둑질’ 이런 제목을 정하였다. 

 

하나님께 돌아가는 증거.

말라기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을 떠나서 살아가고, 하나님 없이도 살 것처럼 생활하고 있었다. 심지어는 제사장들의 성전 제사마저도 정성과 마음이 떠난 채 형식적인 제사 생활, 형식적인 예배 생활에 젖어 있었다.    그 때에 하나님은 제사장들과 백성들을 책망하시며 회개를 촉구하시는 말씀이 이것이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그 앞부분에 보니까 하나님은“너희 조상들의 날로부터 너희가 나의 규례를 떠나 지키지 아니하였도다”라고 지적하셨다. 여기서 언급하는 ‘떠나’라는 표현은 ‘고의적으로 하나님께 불순종하고 하나님의 계명을 거역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하신 내용이다. 그러므로 “내게로 돌아오라”라는 촉구는 참된 회개와 온전한 순종의 삶을 요구하시는 말씀이시다. 

 

말라기와 거의 동시대에 부름을 받아서 선지자로 활동했던 스가랴 선지자를 통한 말씀도 마찬가지였다. 스가랴 1장 3절에 보면, “너희는 내게로 돌아오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라고 반복해서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 이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돌아가리이까”라는 반문은 주께로 돌아가는 회개의 길과 방법을 몰라서 묻는 물음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향하여 매우 불경스러운 태도로 대드는 모습이다. 그 당시에는 백성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심지어는 제사장들조차도 그 모양이었다. 1장 6-7절에 보면, 하나님이 제사장들을 책망하신 내용이 나온다. 하나님은 “너희가 나를 공경하지도 않고 두려워하지도 않는구나”라고 책망하셨다. 그러자 제사장들이 “우리가 어떻게 주의 이름을 멸시하였습니까”하고 하나님께 대들 듯이 퉁명하게 대답하였다. 하나님은 “너희가 더러운 떡을 나의 제단에 드리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를 더럽게 하였나이까”라고 말대답을 했노라고 책망하고 계시다. 

 

그 당시의 타락상이 무엇인가. 이방 땅에서 살든, 선조의 땅에 돌아와서 살든 삶이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였다. 성전을 재건하고 하나님께 제사 생활을 한다고 해서 크게 별반 달라지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만 같았다. 그러하다 보니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가 이 땅에 오시리라는 기대는 점점 식어져 가고 있었다. 반면에 현세와 타협하고 눈에 보이는 물질문명에 사로잡혀서 세상적인 풍요과 성공과 출세에만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그러하다 보니 제사장이 앞장서야 하는 하나님 제사마저 형식적인 제사요 마음에 떠난 제사가 되고 말았다. 이에 동조해서 백성들은 십일조와 봉헌물을 드리는 일을 등한히 하고 있었다. 이 때에 하나님은 “너희가 어찌 나의 것을 도둑질 하느냐”라고 책망하신 것이다. 맞다. 십일조는 하나님의 몫이다. 십일조를 드리지 않는 것은 하나님의 몫을 도둑질하는 행위이다. 악이 악을 부르는 악순환이 계속되던 그 때에 하나님은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서 이같이 말씀하신 것이다. 

 

“내게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나도 너희에게로 돌아가리라”

 

그러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구체적인 증거가 무엇일까. 온전한 십일조와 봉헌물을 드리는 봉헌 신앙의 회복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네 보물이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마6:21)라고 말씀하셨다.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라는 말씀도 해 주셨다. 십일조를 드리는 신앙의 바탕은 나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신앙의 고백이 담긴 것이다. 

 

생각해 보라. 내가 병들고 아파 보면 하루 하루 순간 순간 무탈하게 지내는 그 날들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 날들인가를 실감하게 된다. 아침마다 출근하고, 교대 근무 시간마다 분주하게 출근하는 그 일상의 건강이 얼마나 큰 축복이냐 말이다. 그렇지 않나. 병원에 입원해 본 적이 있는가. 수술대에 누워 본 적이 있는가. 전신 마취를 해 본 적이 있는가. 큰 수술을 받아 본 적이 있는가. 암으로 투병 생활 해 본 적이 있는가. 팔 다리가 골절되어 고생해 본 적이 있는가. 사랑하는 가족을 앞서 보낸 충격에 휩싸인 적이 있는가. 남다른 슬픔을 겪어 본 적이 있는가. 남다른 마음 앓이를 해 본 적이 있는가. 경제적으로 무너졌던 적이 있는가. 마음에 알 수 없는 우울증이 찾아와서 생의 의욕을 잃고 무기력하게 지내본 적이 있는가. 고독과 외로움에 휩싸여서 사는게 사는게 아닌 공허와 무력감에 갇혀 지낸 적이 있는가.

 

생각해 보라. 하루 하루 순간 순간을 기쁘게, 감사하며, 소망을 가지고, 주님을 찬송하며 살아가는 날마다의 시간이 얼마나 대단한 축복의 순간이냐 말이다. 십일조를 드리는가. 감사 예물을 드리고 절기 예물을 드리는가. 직장이 있고 일터가 있고 날마다 매 달마다 일정한 소득과 수입을 갖고 사는가. 사랑하는 가족들이 주님의 도우심의 손길과 은혜 가운데 살아가고 있는가. 그런 평범한 일상 생활이 주께로 돌아와서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의 크나큰 축복의 순간이 아닌가. 

 

무슨 일만 있으면 크고 작은 일에 감사해서 하나님 앞에 감사 예물을 드리고 봉헌하고 또 봉헌하고 싶은가. 그런 마음, 그런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나의 마음, 나의 믿음이 주님이 내 마음에 부어 주시는 크고도 큰 믿음의 증거가 아닌가. 

 

생각해 보라. 말라기 당시에는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온 나라의 백성들이 십일조도 드리지 않고 봉헌물도 드리지 않는 참담한 지경이 되었다. 백성들 앞에서 모범을 보여야 할 제사장들 조차도 하나님을 실망시켜 드리고 말았다. 

 

말라기 1장 10절에 보니까, 하나님은 차라리 번제단에 헛된 불을 피우고 마음에도 없는 제물을 드리는 것 보다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라고 참담한 심경을 말씀하고 계시다. 

 

올, 2025년, 각 가정과 모든 성도들이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누구나 다 십일조와 각종 봉헌 신앙을 회복하는 은혜와 감사의 해가 되기를 소망한다. 

 

 

하늘의 복을 받는 비결.

10절에 보면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그 시작이 무엇인가. 하나님 앞에 십일조 봉헌 생활을 하라는 것이다.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라”라고 말씀하셨다. 원래 성막 시대와 성전 시대의 십일조는 레위 사람과 제사장들을 위한 몫이었다. 왜냐하면 저들은 다른 자파의 사람들처럼 자기 몫의 땅도 없고 아무 소출도 없었다. 그러하다 보니 밭의 소출과 소와 양과 염소를 비롯한 목축의 소출을 가져다가 십일조를 성전에 드려야만 그 몫을 가지고 제사장과 레위 사람들이 성전을 섬기는 일을 전담할 수 있었다. 

성막과 성전의 건설을 명하시고 성막과 성전의 제사를 명하신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하다 보니 하나님은 성전과 성막에서 하나님을 제사하는 일을 전담하는 이들을 위해서 십일조의 구분을 명하셨다. 그 뿐만 아니라 십일조와 봉헌물 신앙을 지키는 이들에게 하늘 문을 여시고 부어 주시는 풍성한 하늘 복을 약속해 주셨다. 생각해 보라. 하늘에서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지는 복이 무엇일까. 우리는 ‘쌓을 곳이 없도록’ 이라는 표현을 주목하며 금과 은과 보석과 각종 값비싼 것들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금은보화보다 억 만배 더 귀하고 좋은 것이 무엇인가. 기쁨, 감사, 소망, 화평, 은혜 이런 것들이 넘쳐 나고 내 삶에 풍성하게 임하는 일상의 복이란 금은보화와 비교할 수 없는 놀라운 은혜가 아닌가. 

 

물론 금은보화가 좋다. 필요하다. 그러나 재물이 많다고 다 만족하고 다 행복하고 다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가끔씩 재벌 집 자식들이 재산 때문에 서로 물고 뜯고 다투고 싸우는 것을 보라. 어쩌면 가끔 씩이 아니다. 재벌들 치고 형제자매들간에 화목한 집안이 거의 없다. 서로 더 가지려고 으르렁거리고 서로 법정 다툼을 불사한다.

 

십일조 신앙과 봉헌물 신앙의 바탕은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이다. 이만한 일자리, 이만한 직장, 이만한 사업의 터전에서 이만한 건강으로 이렇게 하루 하루 한달 한달 소득을 가지고 주님께 감사하며 온전한 십일조 신앙으로 살아가는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복이며 얼마나 크나큰 복인가 말이다.

 

메뚜기 떼를 하나님이 막아 주셔야 한다. 밭의 포도 열매가 풍성하게 열매 맺기까지 하나님이 지켜 주셔야 한다. 그렇지 않나. 하박국 3장 17절 이하의 말씀처럼 무화과나무, 포도나무, 감람나무의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것이 농부의 지혜인가. 밭에 가득한 먹을거리, 우리에 가득한 양과 소 떼를 주인이 잘 관리한다고만 해서 지켜 나갈 수 있는가. 하박국 선지자는 무어라고 고백하고 있는가. 아무것도 없어도, 큰 흉년이 들었어도, 외양간에 양과 소가 없어도“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8)라고 고백하였다. 이것이 십일조 신앙의 출발인 것이다. 

 

양과 염소와 소와 낙타의 수가 번성하는 것이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이다. 장인 라반의 양떼를 치며 처가살이하던 야곱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니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아롱지고 다롱진 것이 자기 몫이 되리라는 약조를 한 후에 하나님은 태어나는 양과 염소마다 아롱지고 다롱지게 해 주셨다. 하나님이 도우시는 복이다. 올 한 해 온전한 십일조 신앙과 함께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부어 주시는 풍성한 복을 받아 누리는 주인공이 다 될 수 있기를 바란다. 

 

 

이방인이 ‘너희는 복되다’말하는 복.

하나님을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은 경제관의 기본이 달라야 한다. 출발이 달라야 한다. 만복의 근원이 하나님께로 부터 나오는 것이다. 내가 믿음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우리 가족이 신앙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하나님을 모르는 이웃들이 나와 나의 가족들의 신앙 생활을 보고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과연 다르다”는 평판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 각 사람이 그런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를 기대하신다. 

 

집회 중에 식당에 갔다. 나는‘처음처럼’이란 앞치마를 둘렀고 맞은 편의 그 교회 담임 목사는 ‘하이트 맥주’를 선전하는 앞치마를 둘렀다. 물론 나는 글씨가 않보이도록 뒤집어서 사용하기는 했다. 요즘 손님을 배려하는 식당의 앞치마는 하얀 일회용 앞치마를 제공한다. 하나님이 우리 각 사람과 각 가정에 세상 사람들이 우리를 복되다 할만한 깨끗한 옷, 은혜로운 옷, 명예스러운 옷, 축복의 옷을 입혀 주시길 원하신다. 에베소서 4장 2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라고 명하였다. 

 

지미 카터(Jimmy Carter, 1924 - 2024) 대통령이 작년 12월 29일에 세상을 떠났다. 100년 전 10월 1일에 태어나서 12월 29일에 주님 앞으로 돌아 갔다. 이 땅에서 100년 3개월을 살았다. 그는 평생 침례교인이었다. 22살에 미 해군 사관학교를 졸업하였다. 초급 장교 생활을 마치고 아버지의 땅콩 농장 일을 이어 받았다. 조지아 주지사를 4년 지낸 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9-1981년까지 미국의 제 39대 대통령으로 워싱턴 DC에 머문 4년 말고는 줄곧 고향인 조지아주 프레인스의 자기 마을에서 살았다. 주일이면 반드시 예배드리러 교회에 갔다. 그는 50년이 넘도록 평생 장년부 주일학교 교사였다. 그는 대통령 후보 유세 시절에도 주말이면 비행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본 교회에서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장년 주일학교 교사로 섬겼다. “나는 대통령보다 교회의 일꾼으로 지내는 것이 항상 자랑스럽고 기쁘다”라고 말했다. 그는 현직 대통령일 때보다 대통령 직을 마친 그의 나중 생이 더욱 존경을 받았다. 가난한 나라에 가서 집을 지어 주는 그의 헤비타트 운동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그는 수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하였다. 그를 통해서 복음을 받아들인 이들도 많았다. 그는 김일성에게도 복음을 전했다. 1979년 방한 중에는 박정희 대통령에게도 복음을 전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미 카터, 그의 삶은 언제 어디서나 세상 사람들로부터 ‘참으로 복된 하나님의 사람’이란 칭찬과 명성이 따랐다. 그는 하나님의 은혜를 한 몸에 받으며 100년을 이 땅에서 살다가 주님 앞으로 돌아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사람이다. 

 

오늘 읽은 본문은 말씀한다.

 

“너희 땅이 아름다워지므로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리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말3:12)

 

이런 은혜가 각 사람과 각 가정과 우리 공동체 위에 풍성하기를 소망한다. 아멘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지성래목사
담임목사소개
칼럼
세미나글
사역일지
출판도서소개
언론관련 글과 영상
활동사진
동영상
상담코너
사역동향

교회소개

교회연혁

주일설교

성가대찬양

교회앨범

이달의행사

행사동영상

선교지현황

섬기는분들
전체 최신글
그의 말씀(시19:7..최고관리자
"선한 능력으로"최고관리자
"그의 말씀"최고관리자
"하늘 가는 밝은 길..최고관리자
"예수가 함께 계시니..최고관리자
예수를 주로 믿는다면..최고관리자
십일조와 도둑질(말3..최고관리자
너희는 이렇게 축복하..최고관리자
"험한 십자가 능력 ..최고관리자
"어두운 내 눈 밝히..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