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이렇게 축복하라(민6:22-27) 2025. 1. 5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이 신약의 축복기도라면, 민수기 6장 24-26절은 구약의 축복기도이다. 제사장의 축복기도라고 불리기도 한다. 오늘 읽은 본문에는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네 번이나 반복된다. 모세와 그의 동족들이 광야 생활 중에 성막을 건설하였다. 하나님은 성막 건설을 마친 때에 모세에게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대제사장으로 부르신 그의 형 아론과 아론의 아들들에게 이렇게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축복하는 기도를 하게 하라”라고 명하셨다. 27절에 보면 축복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은 인간이지만 복을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라고 분명하게 교훈해 주셨다. 다른 이름으로 축복하지 말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라고 하셨다.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지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하셨다.
‘축복’이란 ‘바라크’(בָּרַךְ)의 뜻은 “절하다. 엎드리다. 무릎을 꿇고 기원하다”라는 의미이다. “하나님을 송축하다, 사람에게 은혜로 복을 주다, 번성하다”라는 뜻도 담겨 있다. “하나님이 허락하신 복과 은혜를 베푼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단지 축복의 근원이 대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시다. 민수기 6장 27절에 보면,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하셨다.
맞다. 이 세상을 살아가며 이러저러한 복을 누리며 살아 왔는가. 그 복이 어디서 온 것인가.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이고 내가 수고해서 누린 것인가. 그러면 그런 노력이 가능하게 하신 학습 능력, 지력, 체력, 지구력, 분별력, 사회 적응 능력은 어디서 주어진 것인가. 나의 나됨이 내 스스로에게서 주어진 것인가. 아니다. 지금의 내가 이런 모습의 나로 살아갈 수 있는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나에게 부어주신 복인 것이다. 수고하고 애쓰고 땀을 흘리고 노력하고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그 모든 과정도 하나님이 나에게 부어주신 복인 것이다.
연약하면 연약한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다 마찬가지이다. 남들보다 유능하고 탁월하고 더 건강하고 남다른 그 무엇을 내가 능력과 소양과 역량과 경험으로 갖고 살아 왔다면 그런 나의 나됨이 가능하도록 나를 어린 시절부터 이끌어 주신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란 말이다.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는 말이다. 시편 16편 2절에 보면 다윗은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라고 고백하였다. 민수기 6장 24절에 보면.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라고 하였다. 맞다. 여호와는 복을 주시기 원하시는 주님이시다. 여기서 말씀하는 ‘복’이란 ‘베라카’(בְּרָכָה.)는 좋고 풍성한 것이며 실제적이고 현세적일 뿐만 아니라 영적이고 신령한 모든 복을 포함한다. 전인적이고 총체적인 번영과 은혜를 가리킨다. 실로 하나님은 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자신의 그 모든 좋은 것들을 내어 주시고 공급해 주시겠다는 약속인 것이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보내 주셔서 복 주시는 하나님의 약속이 과연 무엇인지를 구체적으로 성취하셨다.
창세기 1장 28절에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라고 축복하셨다. 창세기 12장에는 하나님이 아브람을 부르셔서 “너는 복이 될지라.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라고 언약하셨다. 우리 찬송가에는 645곡의 찬송가가 있다. 그 중에서 제 1장 찬송가의 가사가 무엇인가.
“만복의 근원 하나님 온 백성 찬송드리고
저 천사여 찬송하세 찬송 성부 성자 성령 아멘”
이다. 28장 찬송가에서는 “복의 근원 강림하사 찬송하게 하소서”라고 찬송한다. 그렇다. 하나님은 만복의 근원이시다. 우리는 만복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께 찬송하고, 예배드리는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여호와’의 이름으로 세 가지의 복을 축복하라고 말씀하셨다.
첫째, 여호와여 우리를 지켜 주옵소서.
하나님이 주시는 복 중의 첫째는 지키시는 복이다. 그렇지 않나. 지켜 주신다는 사랑의 증거이며 소유하였다는 관계의 증명이다. 목자가 자기의 양떼를 돌보고 지킨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돌보고 양육하며 사랑하고 지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을 자기 백성으로 삼으시고 돌보시고 이끄셨다. 원수로부터 보호하시고 원수의 침략을 막아 주셨다. 여기서 ‘지킨다’는 ‘솨마르’(שמר)의 뜻은 “가시로 울타리를 치다. 온갖 주의를 기울여서 신중하게 보존한다”는 의미이다. 마태복음 10장에 보면 예수께서는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참새 한 마리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라고 하셨다.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니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마10:30-31)라고 말씀하셨다. 맞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을 지켜 주시는 주님이시다. 시편 121편은 지켜 주시는 하나님을 찬양한 유명한 고백이 담긴 시편이다. 그 말씀 3-8절까지에 보면 매 구절마다 ‘지켜 주신다’는 고백이 담겨 있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올까
나의 도움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에게서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실족하지 아니하게 하시며 너를 지키시는 이가 졸지 아니하시리로다
이스라엘을 지키시는 이는 졸지도 아니하시고 주무시지도 아니하시리로다
여호와는 너를 지키시는 이시라 여호와께서 네 오른쪽에서 네 그늘이 되시나니
낮의 해가 너를 상하게 하지 아니하며 밤의 달도 너를 해치지 아니하리로다
여호와께서 너를 지켜 모든 환난을 면하게 하시며 또 네 영혼을 지키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키시리로다”
이렇게 사고와 사건과 질병과 재난과 어려운 일이 끊임이 없는 땅에서 우리는 각 사람의 발 걸음을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시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실감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시편 121편 기자는,
여호와는 실족하지 않도록 지키신다고 했다.
졸지도 아니하시며 지켜 주신다고 했다.
나의 오른쪽에서 그늘이 되어 지켜 주신다고 했다.
낮의 해와 밤의 달이 상하고 해치지 못하도록 지켜 주신다고 했다.
모든 환난에서 지켜 주시고, 영혼을 지켜 주신다고 했다.
“여호와께서는 택한 백성의 출입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지켜 주신다” 라고 했다.
맞다. 하나님은 사랑으로 지켜 주시고 돌보아 주시고 인도해 주신다. 베드로 전서 2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을 “택하신 족속, 왕 같은 제사장, 거룩한 나라, 소유된 백성”으로 지켜 주신다고 했다.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다”라고 했다. 베드로 전서 2장 10절에 보니까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지켜 주시고,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지만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로 지켜 주신다 라고 하였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恩惠)를 베풀어 주옵소서.
25절에서 말씀하는 ‘은혜’즉 ‘하난’이란 위 사람이 허리를 숙여서 아랫 사람을 돌보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시려고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우리와 성정이 같은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게 하셨다. 이것이 성육신(成肉身)이다. incarnation이라고 한다. 이것을 키에르 케고르(Søren (Aabye) Kierkegaard, 1813-1855)는 왕자가 두메산골의 시골 처녀를 짝사랑해서 왕궁으로 모셔간 것이 아니라 왕자가 왕궁을 벗어나서 두메산골의 시골 처녀에게 장가들어 함께 살아가는 지고지순한 사랑 이야기로 설명한 바 있다.
생각하여 보라.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예배하며 의지하며 살아가는 바탕이 무엇인가. 우리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을 덧입고 죄 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의 권세를 누리며 영생의 약속과 소망 가운데서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을 은혜라는 표현 말고 그 어떤 다른 표현으로 설명할 수가 있겠는가. 사도 바울은 이것을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라고 설명해 주었다.
하나님은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합니다”라고 축복하는 기도를 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여기서 말하는 ‘여호와의 얼굴’이란 하나님의 거룩하신 성품과 의지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하나님 자신이 하나님의 얼굴이란 표현을 사용하신 것은 생명과 구원과 빛의 원천이신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려 주시려는 표현으로 사용하신 것이다. 이것을 깨달은 다윗은 시편 27편 1절에서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라고 하였다. 시편에는 하나님의 얼굴, 여호와의 얼굴 이란 표현이 참으로 자주 등장한다.
“여호와의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추소서”(시4:6)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시17:15)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굴을 찾으리이다”(시27:8)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게 비추시고 주의 사랑하심으로 나를 구원하소서”(시31:16)
“하나님은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사 복을 주시고 그의 얼굴 빛을 우리에게 비추사 주의 도를 땅 위에, 주의 구원을 모든 나라에게 알리소서”(시67:1-2)
“주의 얼굴을 주의 종에세 비추시고 주의 율례로 나를 가르치소서”(시119:135) 고린도후서 4장 6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담겨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성도란 하나님의 그 영광을 아는 빛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우리 각 사람의 마음에 비치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사람의 얼굴에도 빛이 있다. 사람의 얼굴을 보면 그 사람의 건강 상태, 됨됨이, 성격, 기질, 품성, 그 동안 살아온 삶의 이력 같은 것이 느껴진다. 그 사람의 얼굴에 그 사람의 그 무엇인가가 담겨 있다. 풍겨 나온다. 이처럼 하나님의 얼굴이란 표현 속에는 하나님을 의인화한 그 무엇인가가 다양하게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출애굽기 33장 23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에게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라고 하셨다. 그런 하나님께서 성막 건설 후에 이런 축복의 약속을 해 주신 것이다.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그러므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하여야 할 것이다.
“여호와여 주의 얼굴을 나에게 비추셔서 은혜를 베풀어 주옵소서”
요한 계시록 1장 16절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묘사 중에 “그의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더라”라고 하였다. 이는 사도 요한으로 하여금 보게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다. 말라기 4장 2절에서는 “공의로운 해처럼 떠 올라서 치료하는 광선을 비추시는 분”이 하나님이시라고 하였다. 올 한해, 그리고 앞으로 평생을 살아가면서 나를 향하여 비추시는 하나님의은혜로운 얼굴 빛을 정면에서 대하는 영광의 주인공이 될 수 있기를 소원한다. 찬송가처럼, “은혜가 풍성한 하나님은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 어제나 오늘도 언제든지 변찮고 보호해 주시네”이런 은혜가 늘 충만하기를 바란다.
여호와여 우리에게 평강(平康)을 주옵소서.
요즘 매 주일마다 묵상해 온대로 하나님은 이 땅에 하나님을 기뻐하시는 백성들에게 평화가 임하기를 원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선물로 보내 주신 것이다. 26절에서 말씀하는 ‘평강’이란 ‘솰롬’이다. 이는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에서 이룩될 완전하고 온전한 평화, 평강, 화목, 평안, 우정, 건강, 번영을 내포하는 말이다. 하나님이 이 땅에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인 이 평강, 이 솰롬을 이룩하시기 위함이다. 이는 절대전인 평강이며 완전한 평강이며 영원한 평강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보냄을 받으셨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보내셔서 어둠과 사망에 갇혀 있던 인생들을 빛과 생명으로 불러 내 주셨다. 주를 믿는 자들에게 이런 은혜, 이런 영광, 이런 선물, 이런 특권을 누리게 해 주셨다. 이것이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은혜이며, 이것이 구원 받은 자가 누리는 평강인 것이다.
본문을 잘 보면, “여호와는 그의 얼굴을 내게로 향하여 드사” 그런 평강을 주신다고 하였다. 사람이 사람을 향하여 얼굴을 들거나 고개를 숙이는 것이 의미가 다른 것처럼 하나님이 그의 얼굴을 나를 향하여 들어 주신다는 것은 얼마나 감격스럽고 복된 순간인가.
어린 아이를 키우는 엄마나 할머니는 어린아이에게서 어느 한 순간도 눈길을 떼지 못한다. 한눈을 팔 수가 없다. 한눈을 팔지를 못한다. 왜냐하면 그 어린 아이가 너무나 소중하고 너무나 귀하고 너무나 사랑스럽기 때문이다. 어린 아이기 잠을 자는 순간이 아니라면 잠시라도 눈길을 떼지 못한다. 그것이 사랑의 표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하나님이 택한 백성, 사랑하는 백성, 지명하여 불러 내신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여 드신다. 그리고 끊임이 없이 평강을 공급해 주신다. 평강을 누리게 해 주신다.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길 원하신다. 그 평강이 이 땅에서부터 시작해서 영원히 계속되길 원하신다.
이사야서에 보면 하나님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가 나음을 받았도다.”(사53:5)라고 미래 완료형으로 예언하게 하셨다. 그렇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런 구원의 은혜와 구원 받은 자의 평강을 누리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아들딸이 된 것이다. 천국 백성이 된 것이다. 412장 찬송가, < 내영혼이 그윽히 깊은 데서> 3절을 보라.
내 영혼에 평화가 넘쳐 남은 주의 큰 복을 받음이라
내가 주야로 주님과 함께 있어 내 영혼이 편히 쉬네
평화 평화로다 하늘 위에서 내려 오네
그 사랑의 물결이 영원토록 내 영혼을 덮으소서
413장 찬송가, <내 평생에 가는 길> 1절을 보라.
내 평생에 가는 길 순탄하여 늘 잔잔한 강 같든지
큰 풍파로 무섭고 어렵든지 나의 영혼은 늘 편하다
내 영혼 평안애 내 영혼 내 영혼 평안해
408장 찬송가 <나 어느 곳에 있든지> 1절을 보라
나 어느 곳에 있든지 늘 맘이 편하다
주 예수 주신 평안함 늘 충만하도다
나의 맘 속이 늘 평안해
나의 맘 속이 늘 평안해
악한 죄 파도가 많으나 맘이 늘 평안해
한 사람이 한 평생을 살아가는 동안에 늘 평안하고 늘 건강하고 늘 행복하고 늘 좋고 늘 만족스럽고 늘 순탄하고 늘 형통한 인생이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렇지 않나. 얼마나 세상이 시끄럽나. 얼마나 세상 살이가 복잡한가. 얼마나 세상에 별의 별 사고와 사건과 험한 일이 많이 일어나나.
아브라함의 비겁한 처신으로 아내 사라를 애굽 왕에게 빼앗길 뻔한 적이 있다. 이삭은 가는 곳마다, 파는 우물들마다 원주민들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겪었다. 야곱은 형의 증오를 떠나 처가 살이하는 동안에 고생이 말이 아니었다. 나중에 야곱의 열 아들은 동생 요셉을 애굽에 팔아 버렸다. 아버지에게는 짐승에게 물려 찢겨 죽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긴긴 세월 후에 죽은 줄 알았던 요셉을 애굽에서 만났다. 요셉은 애굽의 총리가 되어 있었다. 다윗은 십 수년의 광야 생활, 동굴 피신 생활 후에 겨우 왕이 될 수 있었다. 왕이 된 후에도 마음 편할 날이 없을 정도였다. 나중에는 아들 압살롬이 아버지의 왕권을 찬탈했다. 산다는 것이 평안을 구하고 평강을 구하지만 평강의 시간이 그렇게 쉽게 주어지질 않는다.
그런 세상에서 매 순간마다 주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나를 지키고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 안에서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놀랍고 감사한 일인가. 올 한해도 동행하시는 주의 은혜와 평강을 누리며 주변에 복음을 전파하는 성령 충만한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