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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너희는(골3:12-17) 2024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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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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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12-29 17:47 조회 34 댓글 0
 

                      그러므로 너희는(골3:12-17)            2024. 12. 29

 

 

성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이다. 그리스도로 인한 죄 사함과 부활과 영생을 믿는 너희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라. 땅의 지체를 죽이라. 새 사람을 입으라는 강조의 말씀이 골로새서 3장의 앞 부분에 담겨 있다. 그리고 이어서 교훈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이다. 

 

성도란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이다. 에베소서 1장 4절에 보면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라고 하였다. 예수께서는“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였다”라고 말씀하셨다. 성도란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 인하여 거룩함을 덧입고 십자가의 그 사랑을 받는 자들이다. 그런 믿음의 사람들에게 연이어 권면하는 사도 바울의 권면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 답게 살아가는 길인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죄 사함을 받은 성도의 삶인가 말이다. 

 

 

이렇게 옷 입으라.

사도 바울은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참음을 옷 입으라”라고 하였다.  다섯가지 덕목을 옷입으라고 하였다. 타락 이전의 아담과 하와는 벗고 살았다. 벗었으나 서로 부끄러움이 없었다. 그러나 타락 이후에는 하나님이 짐승을 잡아서 가죽 옷을 입혀 주셨다. 그 옷을 사도 바울은 긍휼, 자비, 겸손, 온유, 오래 참음이라는 옷으로 설명해 주었다. 

 

‘긍휼’(矜恤)이란 고난을 겪는 이웃에 대하여 갖는 너그러운 마음과 동정심을 의미한다. 세례 요한의 아버지 사갸랴는 그의 찬가에서 “이는 우리 하나님의 긍휼로 인함이라”(눅1:78)라는 고백을 하였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인간을 긍휼히 여기셔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구주로 보내 주셨다는 고백인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구원 받을 백성들을 대하는 마음을 표현하면서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을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빌1:8)라고 하였다. ‘

 

자비’(慈悲)란 성품이 부드럽고 친절한 상태를 말한다. 자비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이다. 

‘겸손’(謙遜)이란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자신을 낮추는 모습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자기 자신을 소개하실 때에 “내 마음은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라고 말씀하셨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2장 3절에서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다른 사람을 낫게 여기고”라고 하였다. 

 

‘온유’(溫柔)란 회개를 통해서 주어진 부드러운 마음을 말한다. 예수께서는 마태복음 5장의 산산 수훈, 팔복 말씀을 통해서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마5:5)라고 하였다. 온유 또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이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절에서,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라”라고 권면하였다. 

 

또 하나는, 오래 참음이다. 이는 상대방에 대하여 복수하지 않고 참는 마음을 말한다. 이 또한 갈라디아 5장 22- 23절에 소개된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중의 하나이다. 사도 바울은 골로새서 1장 11절에서 이미 성도다운 삶이란 “기쁨으로 모든 것을 견디고 오래 참아야 한다”고 권면하였다. 사도 바울은 성도의 삶이란 이러한 다섯 가지 덕목의 옷을 매 순간마다 골고루 차려 입고 살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으로 온전하게 띠를 띠라.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며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은 서로의 인간 관계를 온전하게 매는 띠라고 하였다. 13절의 ‘불만’이란 비난과 다툼의 요인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한 경우에 용납하라고 하였다. 용납한다는 것은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 들이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것을 말한다. “서로 용납하고 피차 용서하라”라고 하였다. 쉬운 일인가. 어려운 일이다.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더 서로 용납하려 하고 피차 용서하기를 힘쓰라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그리하라”라고 권면하였다. 여기서 ‘용서’하는 것은 은혜를 베푸는 것이다. 상대방의 혐의나 부족이나 약점이나 죄에 대하여 용납하고 덮어 주고 용서하는 일이 쉬운가.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더욱 더 용서하라는 것이다. 상대방에 대하여 화를 내거나 분을 폭발하거나 복수하려는 앙심을 품지 말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받아 주라는 가르침이다. 

창세기에 보면 처가살이 하던 야곱이 고향을 향한다. 형 에서가 400여명의 훈련시킨 검객을 이끌고 야곱에 대한 살의를 내려 놓지 않고 있는 소식을 접한다. 야곱은 밤을 새워 기도하였다. 그런데 하나님이 그 밤에 형 에서의 마음을 만지셨다. 동생을 죽이려고 혈기 등등하게 지내던 형 에서의 마음이 봄 눈 녹듯이 녹았다. 자식들과 레아와 라헬과 여종들을 뒤로하고 야곱은 형이 있는 곳으로 다가 서며 몸을 일곱 번이나 땅에 굽혀 인사하였다. 창세기 33장 4절에 보니까 “에서가 달려 와서 그를 맞이하여 안고 목을 어긋맞추어 그와 입 맞추고 서로 우니라”라고 하였다. 상상할 수 없던 대 화해가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게도 다윗을 미워하던 사울 왕이 블레셋과의 전쟁에서 중상을 입었다. 사울은 스스로 남은 목숨을 끊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윗은 백성들의 열망 가운데 이스라엘의 왕이 되었다. 어느 날 다윗은 “사울의 집에 아직도 남은 사람이 있느냐”고 묻는다. 요나단으로 인해서 입었던 은혜를 갚고 싶다는 의지를 밝혔다. 요나단의 아들 중에 다리를 몹시 저는 므비보셋에 대한 내용을 전해 들었다. 다윗은 므비보셋을 자기 앞으로 나오게 했고 식탁에 마주 앉게 하였다. 다윗은 사울 왕의 재산을 몰수하지 않고 고스란히 므비보셋으로 하여금 누리게 하였다. 은혜를 베푼 것이다. 사울의 원한을 용서한 것이다.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으로 덥는 것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마음이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 8절에서,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그리스도 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랗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용납하시는 사랑, 용서하시는 사랑이시다. 그 크신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 아니었다면 이 땅에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는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은 바다를 먹물 삼고 하늘을 두루마리 삼아도 다 표현할 수 없는 사랑이다. 

 

골로새서 3장 8절에 보면 예수 믿기 이전의 옛 사람의 모습에 대하여 말했다.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같은 입에 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멈추고 그와 같은 악한 감정들을 벗어 버리라고 하였다. 이처럼 옛 자아를 벗어 버리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의 옷을 입으라는 것이다. 그 위에 용납하고 용서하는 사랑의 띠를 띠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의 띠로>라는 찬양의 가사를 보라. 

 

“우리는 사랑의 띠로 하나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의 사랑을 널리 전하세

모두 찬양하며 주의 사랑을 전하세

모두 함께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널리 알리세”

 

그렇다. 성도는 서로의 부족과 잘못과 혐의에 대하여 불만을 품지 말고 서로 용납하고 피차에 용서하며 사랑으로 대하여야 할 것이다. 그 어떤 경우를 만나든지 그 어떤 누구에 대하여서든지 서로 용납하고 피차에 용서하며 주님의 마음으로 사랑한다면 잘못될 인간 관계가 있겠는가.

 

남은 한해, 혹시라도 서먹해진 관계가 있으면 오늘 말씀을 묵상하는 중에 용기를 내서 결단하고 주변 사람과 서로 화해하고 화목한 관계를 회복할 수 있기를 바란다. 

 

사실, 용납하고 용서하고 사랑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작가 이청준(1939- 2008)의 소설 <벌레 이야기>는 나중에 전도연, 송강호 주연의 영화 <밀양>으로 세상에 더 잘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은 실제로 있었던 살인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1980년 11월 13일, 강서 중학교에 다니던 이윤상이란 학생이 유괴 살인을 당한다. ‘주영형 사건’이라고 알려진 유괴 살인 사건이다. 범인은 학교의 체육 교사였다. 

 

작가 이청준은 어느 날 아들을 살인범에게 엄마의 아들을 잃은 슬픔과 분노와 복수심과 원한과 저주를 다룬다. 그런데 살인범은 사형 선고를 받고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이런 글을 남긴다. “나는 하나님의 품에 안겨 평화롭게 떠나간다. 그 자비가 희생자와 가족에게도 임하기를 빈다”라는 내용이었다.

 

작가 이청준은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한 살인자의 그 말에 충격을 받는다. 그리고 <벌레 이야기>라는 소설을 써 내려 갔다. 

 

어느 한 마을에서 약국을 경영하던 부부의 초등학교 4학년 아들이 실종되었다. 애 엄마는 이성을 잃었다. 제 정신이 아니다. 그런데 이웃에 사는 김집사란 이가 애 엄마에게 찾아가서 위로해 보려고 노력한다. 종교를 가지라고 권한다. 

 

“우리 구주 예수님께로 나오세요. 그분의 사랑을 의지하세요. 주님께서는 모든 힘든 이들의 무거운 짐을 함께 져 주세요. 모든 상처 받는 영혼들의 아픔을 함께 해 주세요. 주님은 상처 받은 이들의 슬픔을 사랑으로 치유해 주세요. 애 엄마는 혼자의 힘으로 절대로 지금의 슬픔을 이길 수 없을  꺼에요. 주님을 의지하세요” 이런 말을 해 주기 시작했는데 김집사의 말을 들은 애 엄마가 김 집사를 따라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김 집사는 살인범을 용서하라고 권면한다. 

 

두어달 수 소문 끝에 재개발 지역의 버려진 건물 지하실 콘크리트 바닥에 처참하게 부패해 버린 아들의 시체를 발견하게 되었다. 애 엄마는 제 정신이 아니었다 슬픔과 분노와 원망과 복수심에 가슴이 이글거렸다. 

 

세월이 많이 흘렀다. 살인범은 붙잡혔고 사형 언도를 받았다. 세월이 흘러 갔다. 하루는 애 엄마가 김집사와 함께 교도소의 그 범인을 찾아 갔다. 그런데 사형 집행일을 기다리고 있는 그 범인의 입에서 믿어지지 않는 말을 듣게 되었다. 

 

“이제 와서 제가 왜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제 영혼은 이미 아버지 하나님께서 사랑으로 거두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제 영혼뿐만 아니라 제 장기 이식을 받는 이들을 통해서 제 육신의 일부는 이 땅에서 다시 새 생명을 얻을 것입니다. 저는 저의 눈과 신장을 이 땅에 있는 이웃들에게 기증하고 떠나니까요.

 

;....다만 한 가지 여망이 있다면 저로 하여금 아직도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들의 영혼에도 주님의 사랑과 구원이 함께 해 주셨으면 하는 기원뿐입니다. 저는 그분들의 희생과 고통을 통해서 오늘 새 영혼의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죽은 아이의 가족들은 아직도 무서운 슬픔과 고통 속에 있을 것입니다. 저는 이제 하나님 앞으로 가지만 그 분들을 위해서 기도합니다. 슬픔 가운데 이 땅에 남아 있는 아이의 가족들에게 주님이 위로해 주시고 사랑으로 덮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즈음에서 질문해 보자. “서로 용납하고 피차에 용서하며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라”라는 권면을 실천하는 일이 쉬운 일인가. 아니다. 결코 쉽지 않다. 어려운 일이다. 어쩌면 누군가에게는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성경은 분명하게 강조하고 있다.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용서하라”고 말이다. 

 

서로 용납하고 피차에 용서하며 이 모든 것 위에 사랑을 더하는 한해의 마무리와 새 해 맞이가 되기를 바란다. 

 

 

예수를 힘 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라고 하였다. 성도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하였다. 예수를 믿는데 마음에 평강이 없다면 스스로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예배를 늘 드리는데, 교회를 늘 다니는데, 성도들과 교제하며 살아가는데 마음에 평강이 없다면 점검해 보아야 한다. 성탄절이 지난 지 며칠 지나지 않았다. 성탄절은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는 그 평화가 선물로 주어지는 때이다.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평강의 근원이신 예수를 나의 삶의 주인으로 모셔 들이는 일이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평강을 선물해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예수께서는,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14:27)라고 말씀하셨다.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라는 찬양을 부르자. 

 

평안을 너에게 주노라

세상이 줄 수 없는

세상이 알 수도 없는 평안

평안 평안 평안

평안을 네게 주노라  

 

험난한 세상에서 주님이 주시는 평안을 누리며 살아가는 것은 성도의 특권이며 의무이다. 성도는 불안과 초조와 우울과 낙담과 의심과 걱정과 염려와 두려움을 다스리고 주님이 매 순간 선물해 주시는 그 평강, 그 평안, 그 평화를 누리며 살아 갈 수 있어야 한다. 

 

성도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고 하였다. 골로새서 3장 15, 16, 17절에 보면 세 차례 반복해서 “감사하는 자가 되라.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라.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라고 반복해서 감사 생활을 하라고 권면하였다. 

 

그리스도의 말씀이 믿는 성도인 우리 각 사람의 마음 속에 풍성히 거하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라고 하였다.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라”라고 하였다. 그 모든 찬양 생활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라고 하였다. 그렇다. 감사하는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께 찬양할 수 있겠는가. 감사하는 마음이 없는데 어떻게 시편의 말씀을 묵상할 여유가 있겠는가. 감사한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신령한 노래인 찬송 생활을 계속할 수 있겠느냐 말이다. 성도인 우리는 무슨 일을 하든지 무슨 말을 하든지 다 주 예수의 이름을 의지하여 행하고 말해야 한다. 주님의 주시는 힘을 덧입어 감사하게 생각하고 감사를 말하고 감사를 행해야 한다. 생명 주신 것 감사, 지금 숨을 쉬는 것 감사, 복음을 알게 하신 것을 감사하며 살아가는 주님의 자녀가 다 되어야 할 것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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