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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하라(히4:12-16) 20241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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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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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10-13 21:49 조회 68 댓글 0
 

                        이렇게 하라(히4:12-16)              2024. 10. 13

 

 

인간은 누구나 안식(安息)을 원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끊임이 없이 이어지는 일상에 눌려서 피곤해하며 지친 채로 살아간다. 며칠간의 휴가, 얼마간의 여행이 위로를 줄 수는 있다. 그러나 인생의 근원적인 안식의 문제를 해결 받지 못한다면 사람은 누구나 다 거기서 거기다. 이는 지위고하 빈부귀천에 차이가 없다. 나이와도 상관이 없다. 유무식이나 재산의 많고 적음과도 상관이 없다. 프랑스의 작가 알베르트 까뮈(Albert Camus, 1913-1960)는 <시지프스의 신화>라는 제목의 철학 평론에서 인간의 허무와 부조리의 문제를 심도있게 다루었다. 그는 1957년에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인간은 마치도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시지프스(Sisyphos)처럼 마지 못해 연명하며 살아간다. 벌을 받아 높은 산꼭대기까지 밀어 올린 큰 바위 덩어리가 산 꼭대기에서 저 아래 계곡으로 굴러떨어진다. 그러면 다시 저 아래 맨 낮은 곳으로부터 시작해서 산 꼭대기까지 그 엄청난 크기와 어머 어마한 무게의 바위를 다시 산 꼭대기까지 밀어 올리기를 계속해야 한다. 이러한 일을 끊임이 없이 반복하고 또 반복한다. 이런 걸 천형(天刑) 혹은 천벌(天罰)이라고 해야 할까.

 

성경은 구원받지 못한 인간의 사후 세계인 지옥을 그렇게 교훈하고 있다.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 못의 심판에 처하게 된다는 것이다. 마태복음 25장의 달란트 비유에 보면 한 달란트 받은 자에게 “이 무익한 종을 바깥 어두운 데로 내쫓으라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마25:30)라고 하였다. 이어지는 양과 염소의 비유의 끝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마25:46)라고 하였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히브리서 4장 12절의 그 앞 부분에는 3장 1절부터 4장 11절까지에 안식을 주제로 한 교훈이 길게 이어져 있다. 안식이 무엇인가. 하나님 안에서 누리는 자녀의 권세, 영생의 축복, 죄 사함의 은혜, 구원의 감격, 거듭난 자가 주 안에서 누리는 삶의 열매가 안식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세 시대 때에 출애굽한 백성들이 광야 40년을 거치고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을 안식의 모형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나 우리가 잘 아는대로 가나안에 들어갔다고 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영원한 안식의 언약을 온전히 누린 것은 아니었다. 지리적으로는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으나 하나님과의 언약의 관계에서는 그 온전하고 영원한 언약을 누리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면 질문해 보자. “하나님이 약속하신 그 안식을 누릴 자가 과연 누구인가”라고 말이다. 히브리서 3-4장은 분명하게 교훈한다. 불순종과 불신앙 때문에 안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3장 18절에서는 ‘불순종’, 3장 19절에서는 ‘불신앙’을 지적하였다. 히브리서 기자는 일관되게 강조한다. 하나님도 육일 창조 후에 제 칠일에 안식하셨음을 강조한다. 인류는 노동과 수고를 통해서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그러나 인간은 그 일과 노동의 감옥에 갇혀서 헐떡거리며 쉼이 없는 삶을 살아간다. 진정한 안식을 누리질 못한다. 몸과 마음이 피곤하고 지친채로 살아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술과 담배와 마약에 빠져 지내기도 한다. 성적 일탈 행위에 빠져 들기도 한다. 도박과 놀음으로 삶을 탕진하기도 한다. 매주간마다 복권을 구매하는 것으로 작은 희망에 마음을 빼앗기며 살아가기도 한다. 

 

히브리서 4장 10절에 보면, “이미 그의 안식에 들아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11절에서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저 안식에 들아가기를 힘써야 한다. 누구든지 순종함으로 안식을 누려야 한다고 교훈해 주고 있다. 

 

예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하신 예수의 멍에를 메고 예수께 배워야 그를 믿고 따르는 자에게 안식이 선물로 주어진다고 가르쳐 주었다. 예수의 초청은 분명하다 “수고 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라고 하였다.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이 ‘쉼’이란 일시적으로 사라지는 쉼이 아니다. 완전한 쉼이며 영원한 쉼이다.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는 히브리서 3-4장에서 ‘안식’을 주제로 명확하게 설명해 주고 있다. 신앙 생활이란 주 안에서 매 순간의 안식을 누리는 것이다. 세상에는 불안과 초조와 두려움과 염려와 걱정과 근심과 괴로움, 낙심, 의심, 분노, 실망 가운데 덕지 덕지 상처와 아픔과 슬픔 속에서 살아가는 이들로 넘쳐 난다. 이와 같은 세상 중에서 하나님 아버지 안에서 누리는 진정한 안식이 무엇인지를 교훈하는 말씀이 히브리서에 담겨 있다. 

 

그리고 이어지는 교훈의 말씀이 오늘 본문으로 읽은 내용이다. 본문 말씀의 제목을 ‘이렇게 하라’라고 정하였다. 구체적인 실천 지침을 가르쳐 주고 있다. 무엇 무엇을 이렇게 하라고 교훈하고 있나. 

 

 

말씀의 힘을 믿으라.

히브리서 4장 12절은 너무나도 잘 알려진 성경 말씀 가운데 한 구절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이다. 여기서 말씀이란 요한 복음 1장 1절에서 말씀하는 대로 ‘로고스’이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살아 있고’라는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을 의인화한 표현이다. 살아 있는 말씀이란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권위가 살아 있다는 강조이다. 요한복음 6장에 보면 예수께서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요6:55)라고 말씀하셨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 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요6:38)라는 말씀도 하셨다. 예수께서 자기 자신을“하늘에서 내려온 떡이라”라고 말씀하셨다. 가버나움의 회당에서 이런 교훈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자기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에서 내려왔다 하느냐”라고 서로 수군거렸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마태, 마가, 누가, 요한 복음에 소개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한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수훈을 비롯하여 얼마나 많은 천국 비유의 말씀을 하셨는가. 예수께서는 그에게 나아오는 각색 병자들을 고치고 회복시켜 주셨다. 그 때마다 저들에게 무슨 교훈의 말씀을 하셨는가 기억해 보라.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활력이 있어’라고 했다. 여기 ‘활력’이란 ‘에네르게스’인데 여기서 에너지라는 영어 단어가 나왔다. 활기차게 움직이는 활동력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모든 살아 있는 생명체는 나름대로 움직이는 운동력이 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툴한다. 이처럼 살아 계신 하나님의 말씀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운동력을 내포하고 있다. 이것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라는 하나님의 말씀의 권능에 대한 설명인 것이다.   

 

마태복음 4장에는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다. 40일 금식하신 예수를 마귀가 시험하였다. 그 세 가지 시험을 예수께서는 하나님의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말씀으로 대적하셨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니라”(마4:4), “주 너의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마4:7), “주 너의 하나님께 경배하고 다만 그를 섬기라”(마4:10)라고 차근 차근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셨다. 마침내 마귀는 예수를 떠나갔다. 그리고 천사들이 나아와서 수종들었다. 예수께서는 신명기 8장 3절, 신명기 6장 13절과 16절의 말씀을 인용해서 넉넉히 마귀를 대적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은 언제 어디서나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말씀이시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 수훈이 끝나고 처음으로 기록된 기적의 장면이 마태복음 8장 1-4절의 나병 환자를 고치신 장면이다. 산에서 내려오신 예수의 곁에 수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그 때에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나아 왔다. 절하면서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간청하였다. 그때에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마8:3)

 

나병환자는 예수의 말씀의 권세를 믿었다. 그리고 무리를 헤치고 예수께 다가갔다. 그 당시 문화로는 불가능한 일을 한 것이다. 건강한 이웃으로부터 격리되어 지내야 하는 나병환자였다. 그런데 그는 치료 받기를 열망하는 소원을 가지고 무리를 밀치고 예수 앞에 나아가서 엎드렸다. 그리고 간청하였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예수께서는 그의 앞에 엎드려 절하며 간청하는 나병환자에게 손을 내미셨다. 그리고 그의 병든 몸에 선을 대시며 말씀하셨다. “내가 원한다. 깨끗하여 지거라” 그 순간에그 나병 환자의 병이 깨끗하게 나았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은 살아 있는 말씀, 활력이 있는 말씀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으로 선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의 권세를 믿고 말씀을 선포할 때에 주님의 말씀은 믿음의 사람을 회복하고 치료 하는 권세가 있다.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순종하는 삶을 출발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언약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믿음의 선조가 되었다. 하나님은 말씀하시고 그 말씀하신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권능으로 때가 되면 성취의 열매를 보게 하신다. 믿고 따르는 이들에게 응답되게 하신다. 

 

인류 역사에 아무리 위대한 문학이나 명언이라도 그 모든 것들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 말씀과 비교할 수가 없다. 철학, 종교, 문학 등 그 어떤 분야의 그 어떤 놀라운 정신 사조나 연구 업적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말씀과 비교할 수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시다. 하나님의 말씀은 동서고금, 어느 시대의 그 어디서나 그 누구에게나 동일한 진리로 역사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과거나 오늘 날이나 장래의 그 어느 때에나 동일하게 역사하실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누군가의 마음에 받아 들여져서 회개하고 하고 변화 받게 하고 새로워 지게 한다. 치유되게 하고 새 사람이 되게 한다. 발전하게 하고 흥왕하게 한다. 번영하게 하고 창대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13절의 말씀처럼 모든 것이 나타나게 하시고 드러나게 하신다. 

 

마귀의 말은 넘어지게 하고 빼앗고 죽이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말씀은 힘을 얻게 하고 일어나게 하고 잘 되게 하고 번성하게 한다. 생명을 얻게 하고 누리게 한다. 하나님의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말씀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

 

이방 종교의 경전들은 교훈일 뿐이고 규범일 뿐이다. 그러나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은 죽은 자를 살린다. 병든 자를 고친다. 악한 자를 선하게 변화시킨다. 거짓된 자를 진실하게 만든다. 불의한 자를 의로운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드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좌우에 날이 선 그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다. 그래서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갠다. 각 사람의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을 주로 믿고 따르는 이들의 발에 등과 빛이 되신다. 시편 119편 130절에 보면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1장에 보면, 예수의 족보가 나온다. 그리고 곧 이어서 예수 그리스도가 어떻게 동정녀 마리아에게 잉태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약혼하고 결혼을 준비하던 남편 될 요셉은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요셉은 마리아의 약혼 관계를 정리하려고 하였다. 그런데 밤 중에 천사가 꿈에 나타났다. 천사는 마리아에게 일어난 일이 사람의 일이 아니고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하신 일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아들을 낳으리니 그의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마1:21), “이 모든 일이 된 것은 주께서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다.”라고 차근 차근 설명해 주었다. 잠에서 깨어 일어난 요셉은 천사의 지시대로 아내 될 마리아를 데려 왔다. 그리고 아들을 낳기 까지 동침하지 않았다. 때가 되어 베들레헴 마굿간에서 아들 예수가 태어 났다. 요셉은 태어난 아기의 이름을 천사가 지신한 대로‘예수’라고 지어 불렀다. 

 

이것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의 힘이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선지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신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은 여러 통로를 통해서, 여러 사람을 통해서, 여러 방법으로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인 우리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살아 있는 말씀, 활력이 있는 말씀으로 믿고 받아 들이고 순종할 줄 알아야 한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19:7-10)

 

에스겔 37장에 보면, 여호와께서 권능으로 에스겔에게 임하셨다. 하나님의 영은 에스겔 선지자를 데리고 골짜기로 갔다. 그 곳에는 뼈가 가득하였다. 그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셨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에스겔이 대답했다.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그 때에 하나님은 에스겔로 하여금 마른 뼈를 향하여 대언하라고 하셨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겔37:4-5)

 

에스겔은 순종하였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대언하였다. 그런데 대언 할 때에 “소리가 나고 움직이며 이 뼈 저 뼈가 들어 맞아 뼈들이 서로 연결되었다. 그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올랐다. 그 위에 가죽이 덮였다.” 그러나 생기는 없었다. 그 때에 하나님이 말씀하라고 하셨다. 에스겔은 하나님이 하라 고 하신 대로 명하였다. “생기야 사방으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에게 붙어서 살아나게 하라”그러자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서 그들이 곧 살아나서 일어나 서는데 쿤 군대가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선포하면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말씀은 인생을 살리고 가정을 살리고 나라와 민족을 살리고 시대를 살리는 힘이 있다.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아가는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믿는 도리를 굳게 잡으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는 큰 대 제사장이시다. 그냥 대 제사장이라고 하지 않고 큰 대제사장이라고 하였다. 모세의 형 아론이 첫 제사장이다. 제사장은 아론의 후손이 대를 이었다. 제사장 중의 제사장이 대 제사장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그 어떤 대 제사장과 비교할 수 없는 큰 대 제사장이시다.  십자가의 단번 희생 제물로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는 부활 승천하셨다. 그 분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다. 그러므로 큰 대 제사장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우리 각 사람은 죄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영생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하나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는 하나님의 양자의 영을 덧입게 된다. 예수 안에 구원이 있다. 예수 안에 길이 있다. 예수 안에 대답이 있다. 예수 안에 쇠하지 않는 영원한 소망이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각 사람의 삶의 모든 요구의 전부이시다. 전지 전능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을 때에라라만 참 만족과 참 행복과 참 가치가 있는 인생으로 살 수 있다. 

 

마태복음 14장에 보면, 제자들이 탄 배가 바람과 파도에 휩싸여 밤 바다인 갈릴리 호수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예수께서 물 위를 걸어서 다가 가셨다. 베드로는 예수이신 것을 알고 자기도 물 위로 걷고 싶다고 하였다. ‘오라’하시는 주님의 말씀을 따라서 물 위를 걷던 베드로는 바람과 풍랑을 보고  물 속에 빠져 들어 갔다. 예수께서는 물에 빠져 들어가는 베드로의 손을 잡아 베위에 오르게 하셨다. 그리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느냐”고 책망하셨다. 그 때에 모든 제자들이 예수께 절하면서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이 나를 굳게 잡아 주시기를 소원할 뿐만 아니라 우리 각 사람이 매 순간마다 언제 어디서나 주님의 손을 꼭 붙잡고 살아가야 한다.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고 살아가야 한다. 인공 암벽 등반하는 이들을 본다. 아슬 아슬하다. 20여 미터의 암벽을 기어 오른다. 어떤 때는 대롱 대롱 매달린다. 마디 마디 마다 생명줄이 있다. 그 생명 줄을 안전 고리에 연결하고 또 연결한다. 그것이 대답이다. 그렇지 않고는 어떻게 그 높은 암벽을 맨 손으로 기어 오를 수 있다는 말인가. 생명줄, 안전줄이 대답인 것처럼 믿는 도리를 굳게 잡아야 한다. 히브리서 3장 6절에서는 “우리가 소망의 확신과 자랑을 끝까지 굳게 잡고 있으면 그의 집이라”라고 하였다. 히브리서 3장 14절에서는 “우리가 시작할 때에 확신한 것을 끝까지 견고히 잡고 있으면 그리스도와 함께 참여 한 자가 되리라”라고 하였다.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라고 찬양하지 않나. 

 

“주님여 이 손을 꼭 잡고 가소서 약하고 피곤한 이 몸을

폭풍우 흑암 속 헤치사 빛으로 손 잡고 날 인도 하소서

인생이 힘들고 고난이 겹칠 때 주님여 날 도와 주소서

외치는 이 소리 귀 기울이시사 손 잡고 날 인도 하소서”

 

날 불쌍히 여기시고 동정하시며 우리를 크고 작은 시험에서 건져 내시는 예수님의 손길 안에서 나도 매 순간마다 “넘어질까 실족할까 범죄할까 타락할까 버림 받을까” 두렵고 떨리는 마음을 가지고 믿음의 도리를 굳게 잡고 살아가는 믿음의 주인공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가라.

신앙 생활은 날마다 순간마다 주님의 보좌 앞으로 나가는 생활이어야 한다. 주저함이 없이 담대한 마음을 가지고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아가야 한다.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을 긍휼히 여겨 주시는 주님이시다.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내려 주시는 주님이시다. 교회 생활이 무엇인가. 왜 우리가 주일마다 이렇게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가.

 

하나님은 모세를 앞장 세우셔서 동족을 출애굽하게 하셨다. 바로 왕은 노예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을 풀어 놓을 생각이 없었다. 결국 하나님은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바로의 마음을 움직이셨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제사하는 민족을 삼으시기 위해서 저들을 출애굽하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증거는 예배이다. 예배가 살아나야 모든 것이 살아나는 것이다. 예배의 감격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고 활력이 있는 말씀으로 깨달아지고 믿어져야 하는 것이다. 매 순간마다 주님의 손을 꼭 잡고 믿는 도리의 말씀을 굳게 잡아야 한단 말이다. 그 뿐만 아니라 하루 하루 순간 순간마다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으로 나아 올 수 있어야 한다.

 

다니엘이 그랬다. 그의 세 친구였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가 그랬다. 저들은 사자굴도 두렵지 않았고 평소보다 일곱 배나 더 뜨겁게 타오르는 풀무불도무서워 하지 않았다. 다니엘은 다리오 왕의 조서에 왕이 어인을 찍은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 윗방에 올라갔다. 예루살렘을 향한 창문을 열었다.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그는 진심으로 하나님께 감사하는 기도를 드렸다. 다니엘은 사자 굴에 던져져도 두렵지 않았다. 다니엘을 사자굴에 던져 넣은 왕 다리오가 더 착잡해 하였다. 왕 다리오는 그날 밤에 금식하며 밤을 새웠다. 이튿날 새벽같이 사자 굴로 달려 갔다. 왕은 기적의 현장을 목격했다. 왕은 다니엘을 사자 굴에서 이끌어 올리게 했다. 왕 다리오는 그동안 다니엘을 미워하고 시기해서 죽여없애려고 하며 참소하던 자들을 모조리 색출해 내게 하였다. 왕 다리오는 저들을 처자식들까지 모조리 붙잡아다가 사자굴에 던져 넣게 하였다. 다리오 왕은 다스리는 온 땅에 각 백성, 각 언어로 조서를 내리게 하였다.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하였더라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단6:26-28)

 

이런 은혜의 믿음을 가지고 언제 어디에서나 주님의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가는 믿음의 승리자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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