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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부터 난 지혜(약3:13-18) 2014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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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9-22 14:32 조회 3 댓글 0
 

                       위로부터 난 지혜(약3:13-18)          2014. 9. 22

 

 

야고보서는 예수의 동생인 야고보의 서신이다. 마태 복음 다음으로 일찍 쓰여진 서신이다. 복음 서 중에서는 마태복음이, 서신서 중에서는 야고보서가 가장 일찍이 기록되었다. AD 49년 이전의 기록이라고 여겨진다. 야고보서는 신약의 지혜서, 신약의 잠언이라고 불려지기도 한다. 갈라디아서 5장 22-23절에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9가지 열매를 강조한다. 그처럼 야고보는 야고보서 3장 17절에서 성결, 화평, 관용, 양순, 긍휼과 같은 선한 열매, 의의 열매를 말씀하였다.  길지 않은 분량의 야고보서는 지혜와 행함이 있는 믿음 생활을 강조하고 있다. 

 

야고보서는 세상 사람들을  대상으로 쓴 서신이 아니다. 그 당시에 이곳 저곳에 흩어져서 살아가던 기독교인들을 대상으로 쓴 편지이다. 물론 그가 초대 감독으로 목회하던 예루살렘 교회를 염두에 두고 쓴 편지일 것이다. 교회는 천사의 구성체가 아니다. 교회에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공동체를 형성한다. 빈부귀천이 섞여서 살아간다. 어른과 아이, 노인과 젊은이가 뒤 섞어서 생활한다. 그러하다 보니 다양한 직업, 다양한 문화, 다양한 경제력, 다양한 사회 신분, 다양한 지식 정도, 다양한 능력과 실력, 다양한 성격과 기질 등등 참으로 총천연색을 이루는 공동체가 교회일 수 밖에는 없다. 

 

그러하다 보니 초대 교회들 중에는 문재 투성이인 곳이 한 두 곳이 아니었다. 14절에서 “너희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라는 지적이 그것이다. 얼마나 심각했는지 15절에서는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로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적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라고 그 심각성을 매우 심도 있게 다루고 있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위로부터 난 지혜’라고 정한 것은 야고보가 사용하는 지혜라는 명제에는 위로부터 난 지혜와 그 반대로 땅에서 비롯된 지혜가 대조를 이루기 때문이다. 땅으로부터 난 지혜란 시기와 다툼과 자랑과 거짓말과 정욕적인 것과 혼란과 악을 점점 도모하게 된다. 그러하다 보니 그 결과가 선하지 못하다. 그 결과가 악하게 되고 만다. 그 결과가 불의하게 되고 만다.

 

크고 작은 모든 일이 다 그렇지 않나. 일이란 것이 시작과 과정이 다 소중하지만 결과를 보면 안다. 시작과 의도가 선했는데 결과가 악한 경우란 없다. 물론 선하고 의로운 의도로 시작한 일이라도 과정 중에 불의한 세력이 끼어들고 악한 무리가 개입해서 원래의 의도한 바를 왜곡하면 잘 못 될 수도 있다. 그러나 대개는 심은 대로 거두는 법이다.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좋은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못된 나무가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없느니라”(마7:18),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마7:20)라고 하셨다. 

 

야고보가 말하는 ‘지혜와 총명’은 무엇을 말하나. 지혜의 근본은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1장 5절에서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되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라고 하였다.

 

그렇지 않나. 역사를 보라. 성경의 역사이든 기독교의 역사이든 세상의 역사이든 다 마찬가지이다. 15절에서 언급하는‘땅 위의 것’을 지혜로 삼고 잘 된 개인이나 나라나 민족이 있는가. 

 

노아 시대의 노아는 위로부터 난 지혜를 덧입고 살았던 시대적인 인물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던 에녹도 마찬가지이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했다는 말은 그가 위로부터 주어지는 지혜를 덧입고 살았던 믿음의 사람이었음을 증명하는 말이다. 

 

성경은 하나님을 말할 때에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님”이라는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한다. 왜일까. 물론 저들에게도 인간적인 부족함이 많았다. 그러나 저들의 공동점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체결하신 언약 안에서 살려고 씨름한 언약의 조상들이 아닌가.

 

예수께서 부활 승천하신 후에 성령의 강림으로 최대 교회가 탄생하였다. 예수께서 살아 계신 동안에는 예수를 반신 반의하던 동생 야고보가 은혜를 받고 성령을 받고 예루살렘 교회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 갈라디아서 2장 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내가 기둥 같이 여기는 야고보”라고 하였다. 예수의 아머니 마리아가 나중에 요셉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 중에 한 사람이 야고보이다. 그는 나사렛에서 형님 예수를 가까이서 늘 대했다. 집 안에서 늘 보았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을 나중에야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고 야고보는 예수의 제자들과 더불어 성령 받는 120명의 성도들 가운데 함께 있었다. 성령을 받았다. 은혜를 받았다. 능력을 받았다. 위로부터 난 지혜도 덧입게 되었다. 훌륭한 초대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런 편지를 남겨서 오늘 날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믿음을 일깨우고 있는 것이다.

“너희 중에 지혜와 총명이 있는 자가 누구냐”라는 질문을 하는 이유가 뭘까. 헛 똑똑이들이 적지 않다는 말이다. 서로 시기하고 서로 다투고 서로 자랑하고 서로 거짓말하고 서로 정욕에 가득차서 혼란과 악한 일만 만들에 내는 세력들이 교회 안에 있었다는 말이다. 

 

세상이 그렇다는 말이 아니다. 교회 안에서조차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지적을 하는 것이다. 세상은 몰라도 교회는 달라야 한다. 세상 사람은 몰라도 교인은 달라야 한다. 그래서 야고보는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런 편지를 써 내려 간 것이다. 

 

선행으로 말미암고 지혜의 온유함으로 말미암은 일이라면 그 행함이 어떠한지 나타내 보이라고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로마의 사람들은 온유라는 것은 매우 비겁한 인간의 처세로 여겼다. 강하고 용감한 것이 로마인의 상징이지 겸손하고 온유한 것은 인간다운 모습으로 여기질 않았다. 그런 세상에 오신 예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라고 가르치셨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말씀은 세상의 상식과 역행하는 말씀이었다. 땅 위의 것과 정욕적인 것과 마귀적인 것만을 추구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부를 쌓고 권력을 쟁취하고 명예를 누리며 남들 위에 군림하는 삶을 생의 목표로 삼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있어서 예수께서 가르쳐 주시는 교훈들은 쉽게 받아 들여지지 않았다. 그런 모습들이 교회 안에까지 스며 들어 와서 서로 시기하고 서로 다투고 서로 자랑하고 서로 거짓말하고 서로 속이며 진리를 거슬리며 지내는 세력들이 적지 않았다. 너나 나나 할 것 없이 서로가 땅에서 난 지혜를 추구하는 자들이 너무나도 많았던 것이다.

 

땅에서 난 지혜가 무엇인가.

모세가 이끌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모세를 원망하고 하나님을 원망한 사건들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절대 은혜로 출애굽하고 하나님의 절대 은혜로 만나와 메추라기를 공급받던 백성들이다. 하나님의 절대 은혜로 반석에서 터쳐서 흘려 넘치는 물을 날마다 공급받고 지내야 했던 백성들이다. 그런데도 시시 때때로 원망하며 불평하였다. 황금 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그 앞에서 절하고 경배하였다. 애굽의 고깃 가마를 그리워 하였다.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민11:5-6)라고 불평을 쏟아 놓았다. 저들을 광야로 이끌어 내신 것은 그곳이 목적지가 아니었다. 요단 건너 가나안으로 이끄시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출애굽한 백성들은 여호수아와 갈렙 외에는 모두 다 광야에서 죽고 말았다. 광야에서 태어난 세대만이 요단을 건널 수 있었다. 땅 위의 것, 정욕적인 것, 마귀적인 것만을 추구하면 그 결과는 패망이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난 지혜를 추구해야 한다. 

 

그와 같은 심각한 기도 제목들이 가득한 교회 공동체 안에 이 편지를 회람하게 하여서 주님이 기대하시는 성도다운 성도, 교회다운 교회의 회복을 바라고 소망하며 간절한 심정을 담아 편지한 편지가 야고보서이다. 자, 그러면 본문에서 야고보는 무엇을 강조하고 있나. 위로부터 난 지혜가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다. 

 

성결(聖潔)

하나님은 성결한 영이시다. 하나님은 거룩한 영이시다. 하나님은 불의와 거짓이 없으신 영이시다. 하나님의 영은 의로운 영이시며 선한 영이시며 진리의 영이시다. 하나님은 흠과 티가 없으신 영이시다. 하나님의 영은 완전하고 부족함이 없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성결하다. 시편 12편 6절에 보면, “여호와의 말씀은 순결함이여 흙 도가니에 일곱 번 단련한 은 같도다”라고 하였다. 야고보가 말하는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라는 강조는 마땅하고 지당한 강조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은 영적으로 성결하고 도덕적으로 성결한 삶을 지향하여야 한다. 성결이란 거룩함이다. 베드로전서 1장 15절에 보면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이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라고 하였다.

 

출애굽기 28장  36절 이하에 보면 순금으로 패를 만들었다. 도장을 새기는 방법으로 그 위에 “여호와께 성결”이라고 새겼다. 그 패를 청색 끈으로 대제사장이 머리에 쓰는 관 위에 매어서 관 전면에 있게 하였다. 하나님은 이렇게 만든 패를 첫 대제사장인 아론의 이마에 얹게 하였다. 그 앞에 나아오는 백성들이 여호와 앞에 거룩한 성물을 드리기를 기대하셨다. 

 

하나님은 성결한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주의 자녀된 성도들이 성결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신다. 죄와 악과 탐욕이 가득한 세상에서 땅 위의 것과 정욕적인 것과 귀신의 것을 따라 살면 않된단 말이다. 

 

지난 주중의 뉴스에 따르면 지난해 대마와 양귀비 등 마약류를 지배하다 적발된 이들이 3000명이 넘는다. 어떤 이들은 월세방에서도 키웠다. 실내에서 마약류를 몰래 재배할 수 있는 LED를 해외에서 싼 값에 직구해서 사용한다고 한다. 경찰이 작년 마약 사범들이 기르던 양귀비, 대마를 압수한 양만 총 18만488주에 이른다. 이 중 대마는 1만 2,304주다. 대마 1주당 약 2,000명이 동시에 흡연 가능하다고 한다. 약 2,460만명이 대마초를 피울 수 있는 분량을 압수한 셈이다. 4선 국회 의원을 지냈고 경기도 지사를 지낸 남경필(1965- ) 전 지사는 아들이 마약에 빠져서 수감 생활을 하고 재활의 길을 쉽게 걷지 못하는 안타까운 가정사를 세상에 공개하고 자신의 남은 생을 마약 퇴치 운동에 앞장 서겠다고 하였다. 마약예방치유 단체인 <은구>를 창설하고 마약퇴치 운동에 선봉에 서서 살아가고 있다. ‘은구’란 ‘은혜를 구하라’의 줄임말이라고 한다. 우리나라에 매년 마약 사범의 수가 2만명 이상 씩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한 번 마약에 손을 대면 그 중독을 벗어나가란 거의 불가능하다. 참으로 쉽지 않다. 거의가 다 폐인이 되고 만다. 

 

세상은 죄와 악으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은 죄와 악이 홍수처럼 범람한다. 생각하는 것이 악이고 구상하는 것이 악이고 말하는 것이 악이고 추구하는 것이 악이다. 세상에는 악이 독버섯처럼 자리 잡고 있다. 교묘하고 치밀하고 통 크게 악을 저지르면 나라라고 잡아 삼킬 수 있다. 민족이라도 짓밟을 수 있다. 과거에 히틀러가 그랬다. 레닌이 그랬고 스탈린이 그랬다. 김일성이 그랬다. 너무나 잘 아는 히틀러나 김일성 이야기 말고 스탈린은 어떤 인물인가. 1936-1938년까지 대숙청 시기에 밀고로 체포된 이들은 3년간 170만 명에 이른다. 이 중 160만 명이 유죄판결을 받았으며 사형당한 이들만 무려 68만 명이었다. 스탈린의 KGB 출신 중의 한 사람이 현재 러시아의 독재자인 블라디미르 푸틴이다. KGB의 뒤를 이은 조직으로 꼽히는 것은 FSB(러시아 연방보안국) 요원은 약 35만 명에 이른다. 

 

세상에는 살인, 강간, 사기, 횡령, 도둑질, 거짓, 탐심이 가마솥처럼 부글 부글 끓고 있다. 52살의 중양이란 이름의 중국정부 고위직 여성은 부하 남성 58명과 불륜, 113억 뇌물 챙기며 지내다가 발각되어서 13년 징역형을 받았다. 

 

야고보는 초대 교회 당시에 교회 안에도 그와 같은 독한 시기와 탐심과 자기 자랑과 거짓과 혼란스러운 악이 득실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므로 위로부터 난 지혜인 성결을 추구하라고 권면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안다. 사도행전 5장의 아나니아와 삽비라 사건을 말이다. 다 성령 충만 받고 다 헌신하고 다 충성하고 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간 것이 아니란 말이다. 이는 오늘 날도 마찬가지다. 기도할 때는‘주여 주여’ 하지만 탐심에 사로 잡히고, 자기 자랑에 사로 잡히고, 정욕에 사로 잡하고, 땅의 것에 사로 잡혀서 살아가는 이들이 여전히 얼마나 많으냐는 말이다. 

 

성결한 삶이란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고자 하는 삶이다. 내 생각, 내 의지, 내 판단, 내 결정, 내 주장, 내 취향, 내 꿈, 내 요구, 내 만족을 채우기 위해서 하나님을 이용하려는 자로 살아서는 않 된단 말이다. 

 

 

화평(和平) 관용(寬容) 양순(良順) 긍휼(矜恤).

화평(和平,peace-loving)이란 “온유하고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귀하게 여기는 것”을 말한다. 하나님은 죄와 악으로 인해서 하나님을 떠난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화목제물로 보내 주셨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화평을 선물해 주셨다. 구원이란 하나님과 불화했던 죄인이 십자가의 사랑과 용서를 깨달아 알고 주를 믿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화평이란 구원받은 자가 누리는 선물이다. 화평을 선물로 받은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들은 서로간에 화평케하는 자의 삶을 살아야만 한다. peacemaker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불화하게 하면 않된다. 그것은 주님의 뜻이 아니다. 주님은 남자, 여자 어른, 아이할 것없이 누구나 다 주 안에서 화평한 삶을 영위하기를 원하신다. 인종과 민족과 피부색과 언어와 풍습과 문화와 식생활이 서로 다를 지라도 주 안에서 화평을 이루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종교 다원주의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복음 안에서 화평하고 주의 말씀 안에서 화평하고 십자가의 진리 안에서 화평한 삶을 원하시는 것이다. 

 

사탄 마귀는 서로 간에 불화하고 이간질하고 독한 시기심을 갖고 다투고 싸우고 죽이게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위하고 감싸고 용납하며 형제자매의 기쁨과 감사와 소망을 서로 나누며 살아가길 원하신다. 

 

관용(寬容,considerate)이란 “나 자신에게 도전해 오거나 자극하는 상대방에 대하여 잘잘못을 따지거나 논쟁을 삼가고 화를 내지 않으며 너그럽게 받아 주는 마음”이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4장 5절에서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라고 하였다. 디도서 3장 2절에서는“아무도 비방하지 말며 다투지 말며 관용하며 범사에 온유함으로 모든 사람에게 나타낼 것을 기억하게 하라”라고 권면하였다. 디모데전서 3장 3절에 보면 교회의 지도자는“관용하며 다투지 아니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관용이 무엇인가. “‘그럴 수가 있어’라고 말하지 않고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양순(良順)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진실하신 말씀을 받아 들이고 순종하는 태도”를 말한다. ‘양순’을 영어로는 ‘submissive’라고 하였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지 않고 순종함으로 받아 들이고 따르며 생활에 적용해 나가는 일관된 믿음의 사람의 모습을 일컫는 말이다. 

 

그리고, 긍휼하며 라고 하였다. 긍휼(矜恤, full of mercy)이 무엇인가. “시기(猜忌)에 반대되는 말이다. 남이 겪는 어려운 형편을 돌아보며 동정심을 가지고 실제적으로 도움을 주는 것을 의미한다”시기심(猜忌心)이란 남을 부러워하고 미워하는 마음이다. 예수께서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를 통해서 긍휼의 가치를 교훈해 주셨다. 마태복음 25장의 양과 염소의 비유가 교훈하는 내용도 그것이다. 말로만 하지 않고 사랑을 구체적으로 실천하는 것이 긍휼이다. 

 

가득한 선(善)한 열매.

(full of good fruit)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의로운 열매가 가득하려면 편견과 거짓을 버려야 한다. 편견이란 사람을 외모로만 보고 판단하는 것을 말한다. 야고보는 야고보서 2장 1절에서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고 하였다.

 

“교회에 금반지를 끼고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은 가난한 사람이 들어올 때 만일 여러분이 화려한 옷을 입은 사람은 좋은 자리에 앉히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거기 섰든지 내 발앞에 앉으시오.' 하고 푸대접한다면 사람을 차별하여 악한 생각으로 판단한 셈이 되지 않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내 말을 잘 들으십시오. 하나님은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택하여 믿음에 부요하게 하시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나라를 그들이 소유하게 하지 않았습니까?”(현대인의 성경, 약2:2-5)

 

그렇다. 선한 열매를 맺으려면 편견과 거짓을 버려야 한다. 주변 사람을 존중하고 이해하고 용납할 때에 화평이 온다. 독한 시기와 다툼과 자랑과 거짓말과 혼란이 계속되던 교회 현장에 야고보가 편지한 내용의 구구절절의 말씀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오늘 날의 우리 각 사람에게도 반드시 필요하고 소중한 말씀이다. 

 

선한 열매를 맺고, 의의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화평하게 하는 자로서 화평을 심어야 한다.”그래야 화평이 나에게도 부메랑이 되어 돌아오는 법이다. 분쟁과 불화와 반목과 시기와 다툼은 자신도 무너지고 공동체도 무어지게 하는 악이다. 이런 것은 땅에 속한 것이요 정욕적인 것이요 귀신의 것이다. 

 

사도 바울은 데살로니가 후서에서 이렇게 강조하였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2:9- 12)

 

각종 열매가 풍성한 계절이다. 우리도 믿음의 선한 열매, 의로운 열매를 풍성하게 맺는 충성된 청지기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주께서 그런 은혜를 우리 각 사람에게 부어 주시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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