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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사40:9-11) 20201213 강림절 셋째 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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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12-13 19:45 조회 6,187 댓글 0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사40:9-11)        2020. 12. 13  강림절 셋째 주일   


올 2020년의 성탄절은 12월 25일이 아니라 내년, 2021년 1월 9일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이 땅에 오신 아기 예수께서 코로나 19로 인하여 15일간 자가 격리 기간이 끝나야 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난 일주일 동안 강원도 횡성군 갑천 두메산골에서 지냈다. 둔내 IC에서 30리를 더 달려 700고지의 높은 고개를 넘어 구비 구비 산속으로 달리는 산중의 시골 길을 달리니 하늘과 산만 보이는 작은 산간 마을이 나타났다. 밤에 도착해서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다음 날 아침을 맞았다. 날마다 새벽기도회에 영상으로 참여하였다. 산이 높고 깊고 그야말로 하늘과 산만 보이는 곳에서 지냈다. 틈틈이 산허리를 이쪽 저쪽으로 걸었다. 모처럼 산 속에서 마스크 쓸 필요가 없이 지냈다.

삼주째 이사야 40장을 강림절 말씀으로 묵상하고 있다. 하나님은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셨다. “노역의 때가 끝나고 죄악이 사함을 받았다”고 큰 소리로 외쳐 전하라고 하였다. “광야와 사막에서 여호와의 오실 큰 길을 예비하라”고 하였다. “골짜기와 산과 언덕과 고르지 못하고 험한 곳이 평탄한 평지가 되게 하실 것이라”고 하였다. “모든 육체가 장차 나타날 여호와의 영광을 함께 보게 되리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기운 앞에서는 모든 풀과 꽃이 마르고 시들 것이라”고 하였다. “오직 우리 하나님의 말씀만이 영원히 서리라”고 외쳐 선포하라고 하였다. 

시온 즉 예루살렘에 힘써 소리를 높여 전하라고 하신 소식이 무엇인가. “아름다운 소식”이다. 9절에 “아름다운 소식”이란 말씀을 반복하였다. 영어로는 “good tidings”혹은 “good news”이다. “good news”이것이 복음(福音)이다. 이사야 당시에는 장차 임할 바벨론 포로에서의 해방과 귀환이 복음이다. 나중으로 하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룩하실 십자가 사랑이 복음이다. 죄사함과 구원의 은총을 덧입는 것이 복음이다. 이것이 아름다운 소식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좋은 소식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아름답고 복된 소식을 고대하며 살아간다. 그렇지 않나. 당신에게는 무엇이 당장 기다려지는 복된 소식인가. 수능시험 결과를 기다리는 입시생들에는 조만간 받아들 성적표가 그러할 것이다. 

인간이 살아가는 것은 끊임이 없이 좋은 소식, 복된 소식을 고대하며 살아간다. 지난 100연 동안 스페인 독감, 아시아 독감, 홍콩 독감, 사스, 메르스, AI조류 독감 등 그 어떤 전염병도 제대로 개발된 백신에 의해서 이겨 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러나 이번 코로나 19 전염병은 백신 개발이 가능해져서 이미 그 혜택이 시작되었다. 이 또한 좋은 소식, 아름다운 소식, 복된 소식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사야의 입을 열어서 말씀하시는 ‘아름다운 소식’이란 그런 정도의 좋은 소식과 비교할 수 없는 영원히 기쁘고 감사하고 좋은 소식이다. 이 아름다운 소식은 베드로 사도의 표현을 빌리면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벧전1:4) 복된 소식이다. 

하나님은 그 아름다운 소식을 “높은 산에 올라서 전하라. 힘써 소리를 높여 전하라. 두려워하지 말고 소리를 높여 전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무어라고 전하라는 말씀인가. “너희의 하나님을 보라”고 전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왜 하나님을 보라고 하였을까. 하나님의 무엇을 보라는 말씀일까. 이는 “장차 행하시는 여호와의 구원을 보라”는 말씀이시다.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실 주 여호와를 보라.
맞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시다. 강하고 의로운 오른팔로 천한 만국 백성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다. 여호와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애굽의 바로 왕이라고 꼼짝 못하고 만다. 그렇지 않나. 출애굽이 모세의 작품인가. 아론의 전략인가. 아니다. 강하신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하나님이 강한 자로 임하시니 홍해를 육지처럼 가르셨다. 이백여 만명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루밤에 광야로 이끌어 내셨다. 뒤쫓던 애굽의 군대와 마병을 홍해의 물을 다시 합쳐서 흐르게 하심으로 수장(水葬)하셨다. 물 속에 장사지내셨다.

하나님은 강한 자이시다. 하나님이 강한 그의 팔로 광야 생활 40년을 인도하셨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셨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뜨거운 해를 가리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어둠을 밝히셨다. 때가 되니 요단강을 홍해처럼 건너게 하셨다.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여호수아와 그 따르는 자들로 하여금 여리고 성을 칼과 창을 쓰지 않고 무너트리셨다. 

우리가 믿음으로 사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들은 누구나 다 약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강하시다. 여호와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온갖 지혜와 존귀와 권능과 힘이 우리 하나님에게서 영원히 나온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 가사 그대로이다. 우리가 “예수 사랑하심은”이라고 563장 찬송을 찬송하지 않나. 

예수 사랑하심은 성경에서 배웠네 우리들은 약하나 예수 권세 많도다.
내가 연약할수록 더욱 귀히 여기사 높은 보좌 위에서 낮은 나를 보시네

이런 찬송의 가사가 우리 각 사람의 신앙 고백이 되어야만 할 것이다. 

물론 나는 아무 노력이나 수고도 하지 않고 허황된 생각으로 하나님의 기적만을 바라며 살아간다면 하나님을 만홀히 여기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심고 물주는 노력과 수고를 계속하되 하나님께서 풍성하게 열매 맺게 하시리라는 믿음과 기대를 갖고 살아가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나.
가령 과학의 발전과 의학 기술과 의학 기계의 발전을 보라. 컴퓨터 공학의 발전상을 보라. 우주 공학, 해양 공학, 로봇을 비롯한 인공지능 공학의 발전상이 눈부시지 않나. 어쩌다 보니까 그런 결과를 맺을 수 있나. 아니다. 명석한 두뇌의 학자들이 수십 년 아니 수백 년 동안 연구에 연구를 계속해서 각 분야에 오늘 날과 같은 눈부신 발전을 이룩해 온 것이다. 그 배후에는 얼마나 많은 노력과 수고와 헌신과 희생이 따랐겠나. 그러나 크고 넓게 보면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와 힘이다. 

인간은 결코 강하지 않다. 얼마 전에는 1조 2천억의 재산을 쌓은 40대 중반의 미국 기업가가 아산화탄소 과다 복용으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우리는 권력을 가진 자, 부를 가진 자, 인기를 누리는 자, 남들과 비교하여 외모가 뛰어나고, 능력과 역량이 뛰어나고, 남들보다 앞서가는 이들을 부러워할 때가 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세상과 자신을 비교하지 말고 “하나님 앞에서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하고 그 대답을 찾아 나설 수 있어야만 한다. 

<구멍난 복음>이란 책이 있다. 저자인 리처드 스턴스(RICHARD STERNS)는 일반기업에서 23년간 일한 후 1998년 6월부터 월드비전 미국 회장을 맡고 있다. 코넬대학에서 신경생물학 학사학위를 마쳤다. 펜실베이니아대학 와튼스쿨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았다. 서른세 살의 나이에 파커브라더스게임스의 사장이 되었다. 이후 레녹스 사의 사장 겸 최고경영자가 되었다. 평사원에서 시작해서 높은 지위에 까지 올랐다. 큰 집과 좋은 차, 순종적이며 착한 다섯명의 자녀와 함께 행복했다. 어느 날 월드비전의 회장을 찾는 헤드헌터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남의 부탁을 거절할 때 하는 흔히 하는 말을 했다. “기도해 보겠습니다.” 막 전화를 끊으려는 순간 전화기 저쪽에서 헤드헌터가 이렇게 질문해 왔다. 

“하나만 더 여쭤 보겠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마음을 열어 놓고 계십니까?”

그는 그 날 이후 그의 인생을 향한 하나님의 부르심을 따라 22년 전인 1998년에 레녹스의 최고경영자(CEO) 자리를 그만두고 월드비전 미국 회장이 되었다.  그 후로 세계의 가난 한 나라 수십개국을 찾아 다니며 160만 마일 이상을 비행기 안에서 지냈다. 그리고 월드비전의 대변인으로 CNN, FOX, ABC, NBC, PBS에 출연하여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에 대하여 목소리를 높히고 있다.  

리처드 스턴스에게는 과거에 신학교를 다니던 짐 월리스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가 트리니티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 동급생들과 함께 한 가지 실험을 했다. 성경 66권을 모두 살펴보면서 가난, 부, 정의, 억압을 다루는 대목과 구절마다 밑줄을 치고, 동료 중의 하나는 가위를 가지고 와서 그 구절을 모두 잘라 냈다. 그 결과 너덜너덜해진 채로 간신히 붙어 있는 책이 남았다. ‘가난과 부, 정의와 억압’에 대한 2천여 개의 구절을 다 잘라내고 나니 성경이 구멍 난 채로 너덜너덜해진 것이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도전한다. 

“우리가 가진 복음은 온전한가 아니면 구멍 난 복음인가?”


우리는 예수께서 말씀하신 부자와 거지 나사로의 비유 내용을 안다. 나사로는 선행을 했고 부자는 악행을 했다는 표현이 전혀 없다. 단지 부자는 자신이 누릴 수 있는 것을 누렸다. 죄의 경계를 넘어가지는 않았지만 그의 왕궁 같은 대문 밖에서 지내는 거지 나사로를 못 본체 하면서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 그러다 두 사람 다 죽었다. 한 사람은 천국에 갔고 한 사람은 지옥에 갔다. 

그러면 성경이 말씀하는 ‘아름다운 소식’이란 과연 무엇일까. 

우리가 가진 복음은 온전한 복음인가. 아니면 구멍 난 복음인가. 내 삶은 어떤가 온전한 삶인가 아니면 구멍 난 삶인가. 하나님을 믿는 우리는 기도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 기도라는 것이 “내가 이렇게 기도하였더니 이렇게 응답되었다.”고 간증하는 대신에 오히려 “내가 이렇게 기도하였더니 하나님은 내 뜻을 꺾으시고 나를 향하여 하나님의 이런 뜻이 이루어지게 하셨어.”라고 간증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신앙으로 산다는 것이 그러하지 않나. 광야에 이끌러 나서고 보니 하루 하루 버티고 사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서 애굽의 고기가마를 그리워하고 풍성한 과일과 채소를 그리워하며 불평한 것이다. 그러나 당장 오늘 내 눈에 보이는 그것이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의 전부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뜻은 광야를 거쳐 장차 들어갈 땅 가나안을 향하고 계셨다. 이는 시간적으로 그러하고 공간적으로 그러하였다. 그보다 더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저들을 언약 민족으로 살아가게 하시려는 분명한 목적이 있으셨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시기 까지 거룩한 포기를 통해서 그를 믿는 자들에게 죄 사함의 길을 활짝 열어 놓으신 것이다. 하나님은 그래서 강한 자이시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보다 더 강한 것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하나님의 그 크신 사랑이 가장 강한 능력이시다. 하나님은 언제나 그의 권능의 오른팔로 천하 만민을 다스리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이 땅에 인간의 모습을 입고 오셔서 그 전능하신 사랑을 친히 처처에서 보여 주셨다. 하나님은 사랑과 의와 진리와 선에 있어서 강하시다. 미움과 불의와 거짓과 악에 대하여는 외면하신다. 그 강한 자의 사랑의 능력으로 선포하시니 베데스다 못 가의 38년된 병자가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요한복음 5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

그렇게 말씀하시자 38년 된 그 병자가 곧 나아서 자리를 들고 걸어갔다. 

그 강하신 사랑의 주님의 옷자락을 뒤에서 붙잡았는데 여인의 12해 혈루병이 나았다. 그 분이 말씀하시자. 죽은 나사로가 살아났다.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이 살아났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도 살아났다. 그 분이 말씀하시자 갈릴리의 높은 파도가 잔잔해지고 풍랑이 멈추었다. 그 분이 감사기도를 드리시고 떼어 나누어 주라고 말씀하시자 벳세다 광야의 이만여명의 무리가 배불리 먹고도 남았다. 어린 아이의 보리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배불리 먹고 오히려 부스러기만도 12 광주리에 가득 찼다. 

우리 가정, 우리 교회 공동체 안에 그런 여호와의 강하신 능력이 임하시기를 소망하자. 왜냐하면 하나님은 언제나 때가 되면 장차 강한 자로 임하시고 강한 팔로 다스리시는 전능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 강하신 여호와께서 임하시면 전쟁이라도 멈추신다. 앗수르의 군대 185,000명이라도 송장되게 하신다. 소년 다윗의 물매 돌 한 개로라도 블레셋의 골리앗 장군을 물리치게 하신다. 

올 한해 답답하고, 요즘 여전히 답답한 날들을 지내고 있지만 장차 임할 여호와의 강한 팔의 다스리심과 통치를 믿고 기대하며 살아가자.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사랑이 강해야 한다. 진리의 편에서 강해야 한다. 정의와 공의의 편에서 강해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 그래야 그 삶이 하나님 안에서 오래간다. 그래야 그 삶이 하나님 안에서 영원하게 된다. <전능하신 나의 주 하나님>이란 찬양의 가사 그대로이다. 


상급과 보응이 그 앞에 있음을 보라.
때가 되니 하나님은 언약의 백성들을 연단하셔서 상급을 주셨다. 그렇게 강한 것 같던 바벨론이라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게 하셨다. 영원할 것 같던 바벨론에 끌려간 포로의 땅에서 해방되는 자유의 순간이 찾아 왔다.

성탄은 그런 절기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베들레헴에 오시는 것은 그런 역사적인 사건이다. 이것이 미가서 5장 2절의 예언이고 성취이다. 

“베들레헴 에브라다야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릴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 그의 근본은 상고에, 영원에 있느니라.”

여기에 보면 “너는 유다 족속 중에 작을지라도 이스라엘을 다스실 자가 네게서 내게로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렇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을 다스리실 영원한 통치자로 오셨다. 영원한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이 세상의 통치자는 백성들에게 실망을 안겨 주시면 주님은 영원한 평화의 왕이시다. 

신앙 생활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나를 다스리시고 주 예수께서 나를 다스리시도록 나를 주님께 내어 드리는 순간의 연속이어야 한다. 내 안에 내가 시퍼렇게 살아 있으면 나도 불행하고 주변 사람도 불행해진다. 내 안에 내가 살아 나를 주장하면 주님을 참으로 슬프시게 해 드리는 불경(不敬)한 소행이다. 그렇지 않나. 겉으로는 신자 행세하고 교회도 다니고 직분도 있지만 내가 내 속에 주인 행세하고 주님께 “주님. 잠시 눈 감아 주세요. 모른척 해 주세요. 내가 알아서 할께요.” 이런 식이면 주님이 기뻐하실까. 

늘 반복하지만 찬양 따로 내 생활 따로인 것은 차라리 예배를 드리지 않는 것만도 못하다. 왜 교회에 다니나. 왜 예배드리나. 왜 성경을 묵상하나. 왜 성경 말씀을 서로 나누나. 설문지의 종교란에 ‘기독교’라고 쓰기 위해서인가.

<내가 주인 삼은>이란 찬양의 가사를 보라. 

후렴에 보면 “주 사랑 내 영혼의 반석 그 사랑위에 서리”라고 고백하고 있다. 나를 향하신 주님의 사랑이 내 영혼의 반석이라는 고백에 부끄러움이나 이중적인 모습이 없어야 하지 않겠나. 
 
상급(賞給)과 보응(報應)은 반대되는 단어이다. 상과 벌이 전혀 다른 의미이듯 말이다. 악을 심었는데 선을 열매로 거두는 경우란 없다. 반대로 선을 심었는데 악을 거두는 경우도 없다. 물론 상대편의 음주 운전으로 내가 피해를 보는 경우가 있다. 이런 일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참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이다. 그러나 세상은 선을 심어 선을 거두고 악을 심으면 악을 광풍처럼 거두는 법이다. 

예수께서는 열매로 그 나무를 안다고 하셨다. 하나님은 언약 백성인 이스라엘 백성들을 앗수르와 바벨론의 풀무불과 같은 연단을 통해서 정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가진 언약 민족으로 뽑아내셔서 이끄시고 인도하길 원하셨다. 

이는 오늘 날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왜 이런 고난, 이런 슬픔, 이런 시련, 이런 연단, 이런 아픔, 이런 괴로움을 겪게 하실까 하고 질문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환난을 통해서 인내하게 하시고 인내를 통해서 연단받게 하시며 연단을 통해서 소망을 이룩하게 하신다. 

로마서 5장 3-4절 말씀 그대로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목자 같으신 여호와를 보라.
하나님은 하나님 자신을 양떼를 인도하는 목자로 비유해 주셨다. 우리나라는 목축 문화가 아니라서 성경의 이런 내용이 덜 실감나게 전해진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은 양떼를 인도하시는 목자와 같은 분이시다. 11절에 보면 세 가지 동사가 이어진다. 이것이 목자의 모습이다. “먹이시고, 안으시고, 인도하신다.”

다 같이 이사야 40장 11절을 함께 읽자.

“그는 목자 같이 양 떼를 먹이시며 
어린 양을 그 팔로 모아 품에 안으시며 
젖먹이는 암컷들을 온순히 인도하시리로다”

이 얼마나 목자의 사랑이 절절하게 느껴지는 말씀인가.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0장에서 양과 목자의 비유를 들어 교훈하셨다. 예수님을 나의 목자로 삼고 그 분의 인도하심과 보호하심과 돌보심을 따르면 양과 같은 나의 인생이 얼마나 평온하고 행복하겠나. 다윗도 시편 23편에서 그런 고백을 하지 않았나.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 가로 인도하시는도다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지난 번 추수감사 예배 때에 덕기가 엄마 곁에 속도원 어른들과 함께 등단헤서 시편 23편을 암송하였다. 덕기는 우리 교회가 건축된 후 첫 번째 태어난 아기이다. 그런데 이제는 일곱 살이 되었다. 앞으로 이십년만 더 잘 자라면 훌륭한 교회의 일꾼이 될 것이다. 

그렇지 않나. 다윗도 어렸을 적에는 베들레헴의 아버지 이새 곁에서 아버지의 양떼를 치던 어린 목동이었다. 그러나 형들을 면회갔던 엘라 골짜기에서 불레셋의 고함치는 적장 골리앗을 보았다. 다윗의 마음 속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이 불길처럼 치솟아 올랐다.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가 나아가노라”(삼상17:45)고 말하며 물매 돌 한 개를 던졌는데 그 돌맹이 한 개를 맞고 골리앗이 죽었다. 전쟁이 끝났다. 고대 전쟁은 장수가 죽으면 모든 군대가 항복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다. 하나님을 전능자로 믿어야 한다. 하나님의 강한 팔을 의지해야 한다. 하나님의 다스리심에 순복할 줄 알아야 한다. 선악 간에 상급과 보응을 분명하게 하시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삯꾼이 아니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 착한 목자이시다. 하나님은 선한 목자로 내게 다가오셔서 먹이시고 품에 팔로 안으시고 젖먹이는 어린 암양과 같은 나의 삶을 온순하신 손길로 인도해 주신다. 

대강절과 성탄절은 목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손길에 나의 삶을 맡기는 때이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선한 목자로 보내셔서 그를 목자로 믿고 의지하고 따르는 인생들마다 푸른 초장과 잔잔한 물가로 인도해 주신다. 험악한 세상에서 목자의 눈길과 손길을  벗어나지 말고 사랑의 목자이신 주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먹이시고 돌보시고 안으시고 인도하시는 주님의 사랑 받는 양과 같은 은혜의 나날을 살아 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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