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이스북에 공유 트위터에 공유 구글플러스에 공유 카카오스토리에 공유 밴드에 공유
예수사랑교회
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너희는 위로하라(사40:1-2, 고후1:3-7) 20201129 대강절 첫째주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으로 보내기
  • 밴드로 보내기
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0-11-30 23:11 조회 6,256 댓글 0
 
                너희는 위로하라(사40:1-2, 고후1:3-7)       2020. 11. 29  대강절 첫째주


지난 목요일 저녁에 슬픈 소식이 전해져 왔다. 그 슬픈 소식을 가슴에 담고 밤을 지내야 했다. 다음 날인 금요일 새벽 기도를 마치고 경상남도 진주로 내려 갔다. 믿어지지 않는 39살 젊은 의사의 죽음의 현장이 눈 앞에 펼쳐졌다. 젊은 아들의 죽음 앞에 넋이 나간 어머니, 갑작스러운 남편의 죽음 앞에서 슬퍼할 기운조차 없어 하는 젊디 젊은 아내, 아빠의 죽음의 소식조차 전해 듣지 못한 채 아파트에서 친척의 보살핌 속에서 그 밤을 지내며 엄마 아빠가 돌아 오기를 기다리는 10살난 딸과 7살난 아들, 엄마 아빠를 따라서 이 나라 저 나라를 옮겨 다니며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내며 성장기를 함께 했던 누나의 오열하는 통곡 소리, 입관실의 관 안에 베옷을 입고 잠이 든 모습으로 누워 있는 죽은 이의 얼굴을 보고 시멘트 바닥에 주저앉아 오열하며 흐느끼는 가족들..... 청년과 같은 젋은 의사의 건장한 몸이 한 시간 여만에 하얀 한 줌의 재가 되어 항아리에 담겼다. 남편의 한 움큼의 재로 변한 항아리를 가슴에 안고 안치실로 향하는 30대 중반의 젊은 아내는 무슨 생각을 하며 이런 슬픔을 소화해 나가고 있을까 싶었다. 

우리는 욥기의 내용을 알지만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충격과 슬픈 일들은 또 다른 현실의 무게로 다가온다. 그러기에 감당하기가 그리 쉽지 않다. 날마다의 여전한 슬픔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야만 한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라는 찬양의 가사는 이렇다. 

매일 스치는 사람들 내게 무얼 원하나
공허한 그 눈빛은 무엇으로 채우나
모두 자기 고통과 두려움 가득
감춰진 울음소리 주님 들으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사랑의 주님
캄캄한 세상에서 빛으로 부름 받아
잃어버린 자들과 나누라고 하시네
주의 사랑으로만 사랑할 수 있네
우리가 나눌 때에 그들 알겠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깨지고 상한 마음 주가 여시네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모두 알게 되리 우리의 사랑으로
그들은 모두 주가 필요해

그렇다. 이 땅의 우리 모두는 주가 필요한 위로와 구원의 대상들이다. 찬양의 가사처럼 그들 모두에게 주가 필요한 이유가 각기 다 다르다. 이 땅의 모든 사람들은 어른이나 아이나 주님의 위로가 필요한 존재들이다. 우리는 누구나 다 나 자신이 누군가의 도움과 위로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다. 반면 나 또한 누군가를 돕고 누군가를 위로하며 살아가야만 한다. 이 세상에 아무도 필요 없이 자기 혼자만의 힘으로 세상을 이기며 살아 갈 수 있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가는 그 누구라고 할지라도 자연의 혜택, 기후와 기온의 변화 가운데 낮과 밤의 조화를 덧입고 버티며 살아가는 것이다. 태양 볕과 나무와 풀과 꽃과 그 열매와 동물과 벌과 나비와 물고기 등 그 모든 것들 속에서 도움을 입고 매 순간 힘을 얻으며 생존해 가는 것이다. 

무인도에서 불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른 나무 조각을 서로 비벼서 불을 지핀다. 마른 풀을 모아 놓고 불길이 일어나게 한다. 그 불은 누가 주신 것이며 그렇게 불을 지필 수 있는 지혜는 누가 주신 것인가. 마른 나뭇가지 둘을 비빌 수 있는 두 손은 누가 주신 것이며 피어 오르는 불길을 호호 불어가며 그 불길이 활활 타오르도록 하게 하는 입의 호흡은 누가 주신 것인가. 마른 두 나무를 비빌 때에 이 자연 환경 속에서 불이 피어 오를 수 있는 보이지 않는 공기는 누가 만든 것인가. 솔솔 불어 오는 바람은 누가 지은 것인가. 

이렇게 생각해 나가다 보면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이신 하나님 앞에서 할 말이란 없다. 단지 그 분을 높이고, 그 분을 경배하고, 그 분을 찬양하고, 그 분을 예배하는 것만이 인간의 할 일이다.
우리 각 사람은 매 순간을 살아서 하루를 살고 한 생을 살고 영원을 살아가는 존재들이다.

이사야는 66장의 방대한 분량이다. 이사야는 1-39장 그리고 40-66장의 두 부분으로 나눈다. 그 중에서 이사야 40장은 ‘구약 속의 신약’(New Testament book of Old Testament) 이라고 이름 붙이는 장이다. 39장까지의 앞 부분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과 열방 백성들의 죄에 대한 책망과 심판에 관해서 하신 말씀이 담겨 있다. 불의와 모순, 전쟁과 고통으로 신음하는 백성들과 그들을 그와 같은 고난과 고통 속에서 구원하실 분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뿐이심을 선포하고 예언하였다.

그러나 40장부터는 장차 끌려간 바벨론 포로의 땅에서 다시 유다 땅과 예루살렘 성으로 돌아 올 회복에 대하여 미래 완료형으로 말씀하셨다. 장엄한 회복의 노래를 담고 있다. 뿐만 아니라 때가 되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실 하나님의 아들이 메시아로 이 땅에 오셔서 천하 만민을 저들의 죄로부터 구원하실 구속의 날, 은혜의 날이 다가 오고 있음을 선포하는 내용이다. 이사야의 입을 열어 말씀하신 이 모든 말씀들은 70년 바벨론 포로 생활로부터의 회복은 물론 그 후 100년 그리고 150년 후에 포로의 땅에서 연이어 되돌아 오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그 자손들의 회복에 대한 예언이다.

뿐만 아니라 메시아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누리게 될 택함 받은 자의 구원의 감격과 기쁨, 찬양과 경배, 그 영광스러운 구원의 축복을 미래 완료형으로 선포하는 내용들로 가득하다. 

그렇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 모두는 매 순간 주님의 위로가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위로하라” 너희가 서로를 위로하며 살아가라고 명령하고 계시다. 그렇다. 우리가 누군가를 위로하고 반면 누군가로부터 위로를 받는 것은 마땅한 일이다. 이는 의무요 특권이다. 

오늘 이사야서와 더불어 신약 성경 중에서 고린도후서 1장의 말씀을 읽었다. 그 곳에 보면 ‘위로’라는 단어가 가장 많이 나온다. 신구약 성경 중에서 이처럼 ‘위로’라는 단어가 많이 나오는 곳이란 그 어디에도 없다. 우리가 아는대로 사도 바울은 고난의 사도였다. 그는 다메섹 체험 이후에 이방 사도로 부르심에 순종하기 위해서 끊임이 없이 파도쳐 밀려 오는 고난을 극복하고 감당해야만 했다. 그런 그가 나중에 고린도후서를 쓰면서 무어라고 말씀하고 있나.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고후1:6)

너희는 위로하라고 말씀하시는 이사야서를 통한 말씀의 교훈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는 아침이 되길 소망한다.


‘너희의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라.
이 세상에는 하나님의 실존을 인정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다. 아니 많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피조물을 우상으로 섬기는 이들이 여전히 많다. 요즘 다니엘서를 날마다 묵상하고 있지 않나. 벨사살 왕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니까 하나님 앞에서 오만하고 방자하게 행동하였다. 일천명의 고관  대작들과 왕후와 후궁들과 더불어 앉아서 술잔치를 벌였다.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였다. 우상을 찬양한 것이다. 술에 취하자 느브갓네살 때에 예루살렘 성전에서 가져간 금그릇과 은그릇을 가져오게 해서 거기에 술을 따라 마셨다. 끌어간 유대인들과 저들의 믿는 여호와 하나님을 조롱하는 만행을 벌인 것이다. 그렇게 살아가는 이들의 의식 속에는 하나님이란 존재가 없다.

오늘 말씀의 시작에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말씀을 주목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렇지 않나. 대형서점의 기독교 서적 코너를 정리정돈하는 직원이 날마다 수 백가지의 기독교 서적들을 사서정리법에 따라서 책꽂이에 정리할 것이다. 그 중에는 각종 크기와 모양과 겉 표지 가죽의 색상이 다른 성경책을 진열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믿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펼쳐 읽고 그 말씀의 위로와 은혜를 나누는 신자가 아니라면 그 많은 기독교 서적들과 특히 성경책이 그에게 무슨 상관이 있나. 한 달 한 달 때가 되어 자기 월급을 받는 것으로 족할 뿐이다. 

그러므로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라는 말씀은 너희가 믿는 하나님, 너희가 섬기는 하나님, 너희가 따르는 하나님, 너희가 찬송하고 경배하는 하나님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귀 기울여 들으라는 초청을 하고 계신 것이다. 

오늘이 강림절 첫 주일이다. 이렇게 네 번의 주일을 지내고 나면 성탄절을 맞게 될 것이다. 해마다 이 때가 되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에 관한 성경 말씀을 연이어 묵상해 오고는 하였다. 올해는 이사야 40장의 말씀을 가지고 몇주 동안 연이어 묵상해 갈 것이다. 그야말로 지금 정부가 말하는대로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나라’에서 살고 있다. 혼란과 무질서와 거짓과 부추기는 대립과 갈등 속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격변기를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코로나19로 이름 붙여진 나라와 열방에 창궐해 가는 전염병에 대한 감염의 두려움으로 인하여 일상의 삶이 마비된 답답한 연말을 맞고 있다. 

바라기는 이러한 음울한 때에 우리 각 사람이 믿는 나의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계절이 되기를 소망한다. 그렇지 않나. 세례 요한의 때에 여전히 예루살렘 성전이 건재하였다. 성전 제사도 날마다 이어졌다. 성전에는 아름다운 옷을 입은 제사장들이 가득하였다. 그런데 온 나라의 백성들이 광야로 몰려 나갔다. 예루살렘 성 안의 성민들이 성전을 찾아 가는대신에 광야에서 약대 털옷을 입고 메뚜기를 잡아 먹으며 석청 즉 야생 꿀을 손가락으로 찍어 허기와 갈증을 해결하며 남루한 복장으로 광야에서 지내는 세례 요한을 찾아 나섰다. 왜 그랬을까. 저들은 광야에서 만난 세례요한으로부터 하나님의 무슨 말씀을 전해들었을까.

마태복음 3장에 보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사야 40장 3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광야에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가 오실 길을 곧게 하라.”고 하였다. 

이렇게 시작되는 강림절기에 날마다 올해 나에게 새롭게 말씀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이 들려지는 말씀 묵상의 나날이 되기를 축원한다. 


내 백성을 위로하라.
“너희는 위로하라”고 명령하시는 하나님은 누구를 위로하라고 하셨는가. “내 백성을 위로하라”고 하셨다. 그러면 “누가 하나님의 백성인가.” 혈통으로 하면 아브라함의 후손이 하나님의 백성이다. 그런데 그들이 범죄하였다. 그들이 하나님을 떠났다. 그들이 우상을 섬겼다. 그들이 하나님의 심판과 화를 자초하였다. 바벨론 포로 생활은 그렇게 시작된 것이다. 바벨론이 강하고 유다의 군대가 약해서 포로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백성 즉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여호와를 떠난 죄 값을 물으시려고 저들을 70년동안 바벨론 포로 생활을 하게 하셨다. 이는 하나님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버리신 것이 아니다. 불같은 시험을 견뎌 내고 연단 받은 믿음의 백성들로 회개하고 돌아와서 하나님을 제대로 섬기는 민족으로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이사야 36-39장은 하나님이 선민 이스라엘을 어떻게 고난의 풀무불 가운데에서 연단받게 하셨는가를 역사적인 내용으로 언급하신 부분이다. 그러나 그와 같은 극심한 고난과 연단을 거치게 하시는 하나님의 의도는 분명하셨다. 위로하시는 하나님의 품으로 회개하고 돌아오는 민족으로 삼으시려는 계획과 섭리이셨다. 

어렸을 적에 어른들을 따라서 주일 저녁 예배에 가면 그 당시 고향 교회 목사님은 “돌아 와 돌아 와”라는 525장 찬송을 자주 함께 부르시고는 하였다. 왜일까. 그 가사를 가만히 생각하며 불러 보면 그런 찬송을 불러야 하는 이유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진정한 위로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위로를 받으려면 하나님께로 돌아 와야 한다. 집 나가 타국에 갔던 둘째 아들이 거지가 되어 유산 다 날려 버리고 남의 나라의 돼지 우리에 누워서 아버지의 집을 그리워 하지 않나. 용기를 내어 아버집의 집으로 돌와 왔을 때에 풍성한 위로를 받는 아들의 모습으로 회복되지 않나. 

<돌아와 돌아와> 찬송 525장 1절을 부르자. 

돌아와 돌아와 맘이 곤한 이여 길이 참 어둡고 매우 험악하니
집을 나간자여 어서와 돌아 와 어서와 돌아오라

유다가 멸망당하고 예루살렘에 초토화 되던 그 당시에 이미 여러 해 전에 먼저 바벨론에 끌려간 젊은이들이 있었다. 그 중의 한 사람이 청년 다니엘이다. 그의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이다. 저들은 비운의 시대에 청년기를 지내며 이방 나라에 끌려 갔다. 그러나 그들은 그 곳에서 여호와의 위로를 기다렸다. 바벨론의 임금 느브갓네살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죽으면 죽으리라는 신앙의 결단이 있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라는 결연한 신앙의지가 분명하였다. 그런 저들은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서로를 위로하며 포로의 땅에서 여호와의 위로의 손길을 의지하였다. 여호와는 그런 저들을 사자굴에서 건지시고 풀무불 가운데서 보존하셨다. 

하나님은 택한 백성이 범죄하고 하나님을 떠났다고 해서 저들을 쉽게 포기하고 버리시는 하나님이 아니셨다. 하나님은 가시채와 막대기 같은 앗수르와 바벨론의 침략 가운데 형용할 수 없는 고난과 시련과 핍박과 환난 가운데서 정금보다 더 귀한 믿음을 회복한 하나님의 백성들로 거듭나기를 원하셨던 것이다.


마음에 닿도록 외쳐 말하라.
우리가 서로 날마다 수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간다. 그런데 그 말이란 것이 영혼이 담긴 말이 있고 영혼이 떠난 듯한 말이 있다. 누군가의 말에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 있고 그냥 입술로만 말하는 건조한 말이 있다. 말이란 것이 사랑과 관심과 진정이 담겨야 상대방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너희는 예루살렘의 마음에 닿도록 말하며”라고 말씀하셨다. 영어 성경 NIV 에 보니까 “speak tenderly to Jerusalem” 이라고 하였다. 맞다. 공동번역 성경에 보니까 그렇게 번역되어 있다. “예루살렘 시민에게 다정스레 일러라. 이제 복역 기간이 끝났다고, 그만하면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야훼의 손에서 죄벌을 곱절이나 받았다고 외쳐라.”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서 예루살렘 백성들 각 사람의 마음에 전달되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때로 하나님의 백성을 책망하시기도 하고 벌하시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최종 목적은 아니시다.  하나님의 사랑과 구원 섭리를 깨닫고 주께로 돌아 오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라는 초청이시다. 이사야 51장 12절 보면 “너희를 위로하는 자는 나 곧 나이니라”라고 말씀하셨다. 

예레미야 29장 11-13절에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너희를 향한 나의 생각을 내가 아나니 평안이요 재앙이 아니니라 너희에게 미래와 희망을 주는 것이니라 너희가 내게 부르짖으며 내게 와서 기도하면 내가 너희들의 기도를 들을 것이요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신앙생활의 힘은 무엇인가. 어디서 위로가 오나. 어디서 격려가 오나. 우리가 왜 예배하나. 우리가 왜 찬송하고 기도하나. 우리가 왜 성도 간에 교제하고 떡을 떼나. 그 목적이 무엇인가. 우리는 서로 하나 주 안에 한 가족 한 마음 한 뜻 되어 한 성령 안에서 한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전하고 나누는 마음 공동체여야 한다. 마음과 마음이 이어져야 한다. 마음이 문제이다. 마음이 담기지 않은 사랑의 표현은 공허한 것이다. 울리는 굉가리와 같다고 하였다. 그래서 하나님도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마음에 닿도록, 마음과 마음이 통하도록 다정스럽게 말하되 누구나 다 듣도록 외쳐 말하라고 하였다. 이제 복역 기간이 다 끝났다고, 벌을 받을 만큼 받았다고 이제는 하나님 안에서 위로받고, 격려받고, 칭찬받고, 인정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누릴 날만 영원히 계속될 것이라고 다정하게 외쳐 말하라는 것이다. 

엘비스 프레슬리(Elvis Presley, 1935-1977) 의 “LOVE ME TENDER”이란 노래가 있다. 그 가사는 이렇게 시작된다.

Love me tender Love me sweet Never let me go
부드럽게 사랑해주세요. 감미롭게 사랑해주세요.
날 떠나보내지 마세요.
You have made my life complete And I love you so
당신은 내 삶을 완전하게 만들었고 나는 당신을 사랑해요.
.................
Take me to your heart For it's there that I belong
당신의 마음속에 나를 간직해주세요. 그곳에 내가 속한 곳이에요.
And we'll never part
우린 절대 헤에지지 않아요.
....................
Love me tender Love me dear
부드럽게 사랑해주세요. 소중하게 여겨주세요.
Tell me you are mine I'll be yours through all the years
당신은 내꺼라고 말해봐요. 나는 언제나 당신의 것이에요.
Till the end of time
세상이 끝날때까지.

하나님은 회복시키고 용서하시는 백성을 향하여 부드럽게 마음에 닿도록 외쳐 말하라고 하셨다.
위로의 말을 하라고 하셨다.
여리고 성 삭개오를 누가 위로하였나.
38년된 병자를 누가 위로하였나.
12해 혈루병 여인을 누가 위로 하였나.
앞 못 보던 바디메오를 누가 위로하였나.
10명의 나병 환자를 누가 위로하였나.
예수의 죽음을 목격하던 어머니 마리아를 누가 위로하였나.
죽은 나사로와 그의 여 동생 마르다와 마리아를 누가 위로하였나.
벳세다 광야의 배고픈 무리들을 누가 어떻게 위로하였나.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시다.
다가 오는 성탄절 서로 주님의 위로를 마음을 담아 나누는 위로의 공동체가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지성래목사
담임목사소개
칼럼
세미나글
사역일지
출판도서소개
언론관련 글과 영상
활동사진
동영상
상담코너
사역동향

교회소개

교회연혁

주일설교

성가대찬양

교회앨범

이달의행사

행사동영상

선교지현황

섬기는분들
전체 최신글
"그의 생각"최고관리자
그의 생각(요일3:1..최고관리자
"주님 먼저 가세요"최고관리자
"주는 피난처"최고관리자
"천 번을 불러도"최고관리자
2023. 12.17최고관리자
2023. 12.10최고관리자
2023. 12.06최고관리자
2023. 12.03최고관리자
2023. 11.19최고관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