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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시125:1-5) 201909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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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19-10-02 21:42 조회 9,854 댓글 0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시125:1-5)      2019. 9. 29


커피 원두를 볶는 것을 로스팅(roasting)한다고 한다. 로스팅을 잘하는 바리스타가 천사에게 물었다. “ 혹시 천국에도 커피가 있나요”천사는 “이 세상보다 훨씬 좋은 커피가 넘쳐 난다.”고 대답해 주었다. 그 바리스타는“그래도 하나님께 맛있는 커피를 한 잔 대접해 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천사는“그 대신 천국에 한 번 가면 이 세상에는 다시는 올 수 없다. 그래도 괜찮겠냐.”고 물었다. 그 바리스타는 “이 세상에 다시 못 돌아 와도 좋으니 꼭 하나님께 내가 직접 로스팅한 커피를 드립 커피로 준비해서 대접해 드리고 싶다.”고 간청했다. 드디어 천국에 올라간 그 바리스타는 정성스럽게 따뜻한 아메리카노 커피 한 잔을 예쁜 잔에 준비해 가지고 하나님께 대접할 수 있게 되었다. 떨리는 손으로 준비한 커피 잔을 들고 하나님 앞에 나서서 대접해 드리려고 하자 하나님께서 “나는 삼위일체 커피 말고는 안 마신다.”고 대답하셨다. 그 바리스타는 당황한 채로 “하나님 삼위일체 커피가 뭐에요”하고 여쭈었다. 하나님은 설명해 주시기를 “커피, 우유, 설탕이 삼분의 일씩 골고루 들어간 커피가 삼위일체커피란다”하고 설명해 주셨다. 

신앙생활도 그래야 한다. 평소에도 하나님을 잘 의지해야 하지만 고난과 환난 중에서도 그 어떤 질병과 고통 중에서도 여호와 하나님만 의지할 수 있어야 한다. 본문의 시편 기자는 성도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 여호와 하나님 아버지를 믿고 신뢰하며 의지하는 믿음을 흔들리지 않는 산 즉 시온 산에 비유하고 있다. 시온 산이란 예루살렘 성이 건설된 산을 일컫는다. 시온 산은 640-770m 높이의 높고 높은 산악으로 되어 있고 그 산 꼭대기에 예루살렘이 성곽에 둘러싸인 도시로 건설되어 있다. 성벽의 평균 높이는 17m이고 성곽의 둘레는 4km이다. 오늘 날은 성곽 안에 구 도시(old city)가 있고 성곽 문 밖에 신도시가 건설되어 있다. 예루살렘을 다윗 성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3000년 전에 다윗이 왕이 되어 그 곳을 중심으로 왕위를 견고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강도 7-8도의 지진이나 거대한 쓰나미가 일어나면 모든 것이 흔들린다. 인간이 공학적으론 연구해서 쌓아 놓은 방파제가 무용지물이 된다. 항구에 정박되어 있던 배들이 쓰레기처럼 뒤 엉키고 부서진다. 큰 집들이 성냥갑처럼 부서지기도 한다. 교량이 끊기고, 철로가 엿가락처럼 휘어지고 주저앉는다. 
그러나 지진으로 산이 금이 갔다든지, 쓰나미로 산이 사라졌다든지 하는 경우는 없다. 물론 거대한 지각 변동이 일어나면 산이 바다가 되고 바다가 융기해서 산이 되는 것은 맞다. 그러나 그런 경우는 수백 만 년 만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경우이다. 아니 그 보다 훨씬 더 수 억 년 전에 일어났던 일들 혹은 수십억 년 전의 일들을 지질학자들이 연구해서 발표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서울 한 복판에 남산이 언제 저렇게 융기해서 자리 잡았는지 우리는 잘 모른다. 서울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아름다운 명산인 북한산의 나이를 우리는 정확히 모른다. 아시아 대륙의 동쪽 끝자락에 반도 국가를 형성하고 있는 한반도의 나이는 얼마나 될까. 

지구의 나이를 연구하는 지질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지구의 형성 역사는 46억 년 전이라고 한다. 그 때에 불덩어리였던 지구가 점점 식으면서 38억년 전 쯤에 오늘 날의 땅이 형성되었다고 한다. 한반도는 5억 년 전에 고생대 초기에 아시아 동쪽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이처럼 학자들의 연구에 바탕을 둔 내용을 가지고 이해하려고 하면 우리 눈에 들어오는 한 반도의 처처에 있는 높고 낮은 산의 나이는 대략 5억 살쯤 되었을 것이다. 

시편 125편의 기록자는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산에 비유하였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이 그 주변에 사방으로 산에 둘러 싸여 있는 지세를 인용하여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을 고백하였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신앙의 사람은 그 어떤 시련과 핍박과 역경과 고난이 와도 시온산이 흔들리지 않는 것처럼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금부터 영원까지 산이 둘러 있듯이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감싸 안으시고 보호해 주시리라는 확신 가운데 살아 갈 수 있어야 한다. 이런 묵상을 하다 보면 생각이 나는 찬양이 있다. <내가 산을 향하여>라는 찬양이다. 

내가 산을 향하여 눈을 들리라
나의 도움이 어디서 오나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 나의 하나님
영원 무궁히 지키시리로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란 “믿는 자, 신뢰하는 자”를 의미한다. 'trust in the Lord'라고 하였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를 흔들리지 않는 시온산과 같이  '지금부터 영원까지'(both now and forevermore)지키시고 보호하시고 산이 둘러서 감싸듯이 두르신다고 하였다. 오늘 본문인 시편 125편을 현대인의 번역 성경으로 읽으면 이런 내용이다.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여호와를 신뢰하는 자는 흔들리지 않고 언제나 든든하게 서 있는 시온산과 같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둘러싼 것처럼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둘러싸서 지금부터 영원히 보호하시리라.
악인들이 의로운 자들을 항상 다스리게 하지는 못할 것이니 이것은 의로운 자들이 악한 일에 손을 대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여호와여, 선한 사람과 마음이 정직한 사람에게 선을 행하소서.
그러나 주께서 악인들을 벌하실 때 주의 길을 저버린 자들도 함께 벌하소서. 이스라엘에 평화가 있기를 원하노라.

하나님은 누가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계신가. 


의인(義人).
하나님은 이 땅에서 살아가는 인생들을 두 부류의 사람들로 나누어 보신다. 그 한 부류는 의인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악인들이다. 하나님은 악인들이 의로운 자들을 항상 다스리지 못하게 하시길 원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의로운 자들로 하여금 악한 자들의 악한 일에 손을 대지 않도록 막으시고 인도해 주시길 원하신다. 시편 125편을 읽고 묵상하다 보면 누구라도 시편 1편의 내용이 떠오를 것이다. 그 이유는 의인과 악인의 삶을 비교하여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시편 125편의 끝 절인 5절의 내용이 무엇인가. 

“그러나 주께서 악인들을 벌하실 때 주의 길을 저버린 자들도 함께 벌해 주십시오.”하는 기도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는 마치도 시편 1편의 마지막 절이 “악인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끝나는 것과 같다. 시편 1편의 앞부분은 “복 있는 사람은...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되어 있다. 시편 1편의 마지막 절도 의인과 악인을 비교하여 말씀하고 있다. “무릇 의인의 길은 여호와께서 인정하시나 악은들의 길은 망하리로다.”라고 되어 있다.

성경학자들은 시편 125편을 바벨론 포로에서 예루살렘에 되돌아오게 된 유대 백성들 중에서 그 누군가가 썼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생각하여 보라.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 백성들에게 끌려가서 고생하던 하나님의 백성들이 꿈처럼 예루살렘에 되돌아가서 하나님을 예배할 때의 감격이 얼마나 대단하였겠는가. 온갖 방해와 위협과 횡포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이 그 모든 위협을 극복하고 이기며 절대로 하나님만 의지하려는 신앙을 고백한 기도시의 내용을 대하게 된다. 

20대 초반에 신학교를 졸업하고 소위로 임관된 후에 전방의 휴전선을 지키는 GOP 소대의 소대장으로 배치되었다.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 벙커 시설 안에서 30명의 소대원이 함께 생활하였다. 교대로 밤새 휴전선을 지키고 낮에는 교대로 잠을 자고 틈틈이 휴전선 철책 주변에 풀이 자라지 않도록 불모지 작업을 해야 했다. 몇 달 동안 주일이 되어도 교회에도 갈 수 없는 환경이었다. 주일이면 예수 믿는 병사들끼리 따로 모여서 내무반 한 귀퉁이에서 예배를 드렸다. 그렇게 지내다가 몇 달 만에 대대 본부에 있는 교회에 가서 주일 예배를 드릴 기회가 찾아 왔다. 대대 본부의 예배당도 둥근 함석으로 지은 허름한 예배당이었다. 그러나 그 예배가 얼마나 감격스럽고 얼마나 기다리던 예배였는지 모른다. 

본문에 보면 시편 기록자는 악인들의 권세가 가득한 땅에서 죄악에 손을 대지 않을 만한 땅으로 인도하심을 받은 후에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을 예배하는 그 감격이 얼마나 컸겠는가. 그래서 3절에“의인들의 땅”이란 표현을 쓰고 있는 것이다. 시온 산 정상에 건설된 예루살렘에 돌아간 예배자의 감격이 느껴지지 않는가. 동서남북으로 펼쳐진 요새와 같은 난공불락의 높은 시온 산, 예루살렘 성 안에서 사방을 바라보며 그렇게 고백하는 것이다. 

“산들이 예루살렘을 두름과 같이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들을 지금부터 영원까지 두르시리로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려 하는 의인들로 하여금 죄악에 손을 대지 아니하게 하신다고 하였다. 술 중독, 담배 중독, 마약 중독, 도박 증독, 음란, 사기, 횡령, 밀수, 탈세, 공문서 위조 등등 이런 일에 손을 대기 시작하면 그 나중에 어떻게 되나. 
 
창세기 6장 9절의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는 말씀이 무엇인가. 도대체 노아는 어떤 삶을 살았기에 그의 생을 의인의 생이요 당대의 완전한 자의 생이라고 평가 받게 된 걸까. 그렇지 않나. 우리의 삶이란 것이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나의 삶을 어떻게 평가하실까가 소중하지 않나.

세상 인물에 대한 평가야 정당 따라 나누이고, 파벌 따라 나누이고, 색깔 따라 나누이고, 이익을 따라 나누이고, 지역 따라 나누이는 실망스럽고 슬픈 세상이지만 하나님이 나를 보실 때 의인이라 하실까 악인이라 여기실까가 두렵지 않나. 

그러면 과연 누가 의인인가. 로마서 3장 10절은“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 누가 의인일까.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살아가고자 하는 믿음의 사람이 의인이다. 자기 생각대로 자기 뜻대로 자기 좋은 대로 이기적으로 판단하는 그런 식의 믿음 말고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기대와 뜻을 찾아 가는 믿음의 삶이야말로 의인의 믿음을 지켜 가는 길일 것이다. 

우리가 아는 대로 아브라함은 인간적으로 부족함이 적지 않은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셨다.”(창15:6)고 하였다.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 성을 심판하시려는 하나님 앞에서 의인 10명이 있다면 “그 성을 용서하시겠습니까” 하고 묻는 절절한 기도를 드렸다. 예레미야 5장 1절에 보면 하나님은“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고 말씀하셨다. 로마서에 보면“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롬1:17)고 하였다. 
그러면 과연 누가 의인인가. 주의 길을 저버리고 등지며 악을 행하는 악인들이 가득한 땅에서 여호와를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 의인이다. 


선(善)한 자.
하나님은 선한 자들을 선대하신다. “여호와여 선한 자들을 선대하소서”라는 기도가 무엇인가. 이 시편 125편의 기록자는 하나님은 선한 자들을 선하게 대해 주신다는 믿음과 확신이 있었다. 선대하신다는 표현을 영어 성경에 보니까 “do good"이라고 하였다. 선하게 대해 주는 것이 선대하는 것이다. 착하게 대해 주는 것이다. 맞다. 하나님은 선한 자에게 선대하시고 악한 자를 심판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은혜와 인자와 긍휼과 자비가 풍성하셔서 악인의 악에 대하여 길이길이 참으시고 용서하시며 돌이키고 새 사람이 되기를 원하신다. 그러나 하나님은 불의한 자의 불의, 악한 자의 악, 거짓된 자의 거짓에 대하여 언제 까지나 눈 감아 주시는 하나님은 아니시다.

하나님께서 노아 때에 세상을 물로 심판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 성을 유황불로 심판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나님은 아합과 이세벨에 대하여 왜 더 이상 기다려 주거나 참아 주지 않으시고 처절하게 심판하셨나. 

왜 하나님을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세상을 선하게 살아가야 하는가.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되면 거두리라.”(갈6:9)고 말씀하였다. 

이 말씀을 20대 중반 초년병 목회자 시절에 어느 날 새벽 시간 말씀 묵상 중에 깨달았다. 그렇지 않나. 선을 행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선을 심으면 선을 거두고 악을 심으면 악을 거두는 법이다. 마태복음 7장의 산상 수훈에 보면 예수께서도 말씀하셨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딸 수는 없다.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도 없다. 좋은 나무마다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다는 말씀은 악이 가득한 세상에서 선한 자로 살아가라는 권면이시다. 못된 나무가 나쁜 열매를 맺는 법이다. 나무가 좋은데 나쁜 열매를 맺는 경우란 없다. 나무가 못 됐는데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경우도 없다. 아름다운 나무를 맺지 아니하는 나무는 찍어 불에 던진다고 하였다. 이것이 예수의 교훈이시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고 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렇게 까지 엄히 말씀하셨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

사람은 사람을 잘 모른다. 사람은 사람을 속이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을 속일 수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선한 자로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의 믿음이다. 

제주도 이시돌 목장이란 곳이 있다. 가 본적은 없으나 언론에서 수 없이 다루고 있다. 6.25 전쟁이 휴전으로 멈춘 다음 해인 1954년 4월에 25살 된 아일랜드 출신의 패트릭 제임스 맥그린치(P. J. Mcglinchey, 1928-2018. 4. 23)라는 이름의 청년이 제주도에 도착하였다. 그는 골롬반 외방 선교회의 파송을 받은 젊은 사제였다. 

한라산 중간 산악 지대의 드넓은 황무지를 65년 동안 목초지로 개간하였다. 전쟁 이후의 제주도의 가난한 서민들의 삶을 보며 1960년대 4. 3 사건의 고난과 충격적인 슬픔의 현장을 온 몸으로 겪었다. 

1969년에 뉴질랜드에서 면양 몇 마리 종돈인 돼지 몇 마리를 가져다가 키우기 시작하였다. 그 후로 호주와 캐나다 등지에서 좋은 종자의 양과 돼지와 소를 도입 해다가 그 수를 늘려가기 시작하였다. 

1985년에는 치즈 가공 공장을 시작하였다.  
1991년에는 배합 사료 공장을 현대화된 시설로 준공하였다.
그는 임피제라는 한국 이름도 짓고 제주도 명예 도민증도 받았다. 
성이시돌의 이시돌(Isidore)은 독일계 유대인 자손 이시도르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병원도 설립하였다. 경로당과 양로원과 요양원도 세웠다. 유아원과 유치원, 청소년 시설인 성이시돌 젊음의 집도 그의 손을 통해서 탄생되었다. 그는 사제이자 개척자이자 지침이 없는 지역 개발가였다. 그는 성경대로 주님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는 행동가로 90년을 살다가 지난 해 4월에 하나님의 품에 안겼다. 
선한 자란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선을 행하는 자를 일컫는 것 맞다. 그러나 선한 자란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을 맛보아 알고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가 선한 자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사랑과 죄 사함을 받은 그 은혜를 의지하고 살아가는 자가 선한 자이다.


마음이 정직(正直)한 자.
마음이 정직한 지 거짓된지는 겉으로는 알 길이 없다. 아무리 이력서가 화려하고 경력이 대단한 것 같아도 아무리 키가 크고 굽 높은 구두를 신었어도 그 속마음은 알 길이 없다. 아무리 헤어스타일을 2대 8로 정확히 빗어 넘겼어도 아무리 겉으로 평온한 척 그럴싸한 얼굴 표정을 유지하고 다녀도 그의 거짓된 속마음은 알 길이 없다. 

거짓과 위선 덩어리였던 사울 왕 앞에서 선지자 사무엘이 말한 대로 하나님은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사람의 마음 중심을 살피신다. 하나님은 마음이 정직한 자를 선대하시는 주님이시다. 욥기 1장의 시작은 이렇다.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더라.” 하나님은 오늘 날도 정직하여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하나님의 사람을 찾으신다. 

길을 잃고 목자의 손길을 벗어나서 제 멋대로 제 힘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고 여기며 살아가는 것은 그 마음이 정직한 자의 모습이 아니다. 목자이신 주님께로 돌아오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 선한 자이며 그 마음이 정직한 자이다. 

1958년, 하나님을 믿던 음악자 잔 피터슨(John W. Peterson)이 자기의 음악 작업실에서 피아노 앞에 앉아 즉흥곡을 연주하고 있었다. 그 순간 자기가 관련하는 음악사의 대표 한 사람이 노크하며 그 방에 들어섰다. 즉흥곡을 듣고 있던 알프레드 스미시(Alfred Smith)는 시편 23편을 묵상하며 그 현장에서 이 찬양의 가사를 썼다. 가사의 내용을 대하던 잔 피터슨은 그 시간 그 자리에서 즉흥곡을 다듬어 찬양을 완성하였다. 이렇게 해서 탄생된 찬양이 “나는 길 잃은 나그네였네”라는 찬양이다. 

1970년대 후반 신학생 시절에 중고등부 학생들과 더불어 찬양제를 준비하면서 이 찬양을 선곡해서 부르던 기억이 새롭다.

나는 길 잃은 나그네였네 죄 중에 헤매이는데
사랑의 왕 내 목자 예수 나를 집으로 인도하네

진실로 선함과 그 인자하심이 날마다 함께하시리라
진실로 선함과 그 인자하심이 날마다 함께하시리라
영원토록 주안에 내가 거하리라
영원토록 주안에 나 안식하리라
진실로 선함과 그 인자하심이 날마다 함께하시리라
날마다 함께하시리라

나의 영혼이 피곤할 때에 날 붙들어 힘주시며
날 위로해 주시는 예수 나와 언제나 동행했네

내가 이 세상 살아갈 동안 주 내 곁에 함께 하사
늘 보호해 주시는 예수 나를 안전케 하시리라.

하나님은 하나님을 목자로 모시고 따르려는 인생들의 인생길을 인도해 주신다. 광야 같은 인생길에서 먹이시고 입히시고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 만나와 메추라기로 먹이신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보해해 주신다.

죄를 가까이 하면 그 죄가 자기를 지배하게 된다. “마음이 정직한 자”란 말씀이 무엇인가. 말보다 행동보다 먼저가 마음이다. 그 사람의 마음, 그 사람의 생각, 그 사람의 사상, 그 사람의 품은 뜻이 그 사람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그 사람의 마음이 곧 그 사람이다. 그 사람의 생각이 곧 그 사람이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잠23:7)이란 말씀이 무엇인가. 사람은 그 마음과 그 생각이 곧 그 사람이다. 

그렇지 않나. 요즘 세상은 우파 좌파 이야기로 가득한데 우파 사람과 좌파 사람이 외모가 다른가. 얼굴 생김새가 다른가. 아니다. 생각과 마음과 사상이 그 사람을 결정하는 것이다. 에서와 야곱은 한 어머니 리브가의 태에서 쌍둥이로 태어났지만 서로 달랐다. 그 나중이  서로 달랐다. 말라기 1장 2-3절에 보면 야곱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 받는 자가 되었고 에서는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자가 되었다. 하나님은 에서의 산들을 황폐하게 하였고 에서의 산업을 광야의 이리들에게 넘기셨다고 하였다. 
말라기 2장 17절에 보면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이르기를 우리가 어떻게 여호와를 괴롭혀 드렸나이까 하는도다”하고 경고하셨다. 악을 행하는 자들은 악을 행하면서도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여호와께 기쁨이 된다.”고 하나님을 조롱하고 멸시하면서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계시냐”고 함부로 말하는 자들이라고 경고하셨다. 

하나님은 영이시지만 눈으로 보신다. 귀로 들으신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그 마음가짐이 중요하다. 5절 말씀처럼 세상에는 “자기의 굽을 길로 치우치는 자들”이 적지 않다. 여호와께서는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쳐 다는 자들이 죄를 범하는 자들과 함께 다니도록 내어 버려두신다. 이것이 무서운 심판이다. 하나님의 방임, 하나님의 방치 이것은 두렵고 떨리고 무시무시한 심판의 시작이다. 육신의 부모라도 사랑하는 자식에게 경고하고 꾸지람하고 나무라고 훈계하는 것이 맞지 않나. 그러나 하나님이 자기의 굽은 길로 치우치는 자들을 죄를 범하는 악한 자들과 함께 다니도록 내어 버려두신다면 이는 엄청난 심판의 시작이다. 

로마서 1장 24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 그들의 몸을 서로 욕되게 하게 하셨으니” 라고 말씀했다. 그 뒤에 이어지는 로마서 1장 26절에 보면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라고 말씀하였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내버려 두시는 것은 무서운 심판의 시작이다. 

하나님은 시편 125편을 통해서 그런 죄악된 세상이지만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하게 하셨다. 그러면 어떻게 하여야 그 마음에 평강이 임하게 될까. 여호와를 의지하자. 

지난 2015년 북한이 설치한 목함지뢰 사건으로 무릎 아래 두 다리를 모두 잃은 하재헌 예비역 중사에 대한 근황이 최근에 뉴스에 오르내리고 있다. 그를 처우하는 국가적인 처우가 어떻게 되었느냐에 대한 언급을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는 두 다리에 의족을 하고 재활하며 장애인 조정 국가 대표 선수로 재기해 나가고 있다. 어제 주말 일간 신문 특집으로 전면 양면 기사의 주인공으로 실린 그와의 대담 기사를 읽어 내려가다 보니“혹시 종교가 있느냐”는 대담자의 질문에 “없어요. 저는 아무도 안 믿어요.”라고 답했다. 

당신은 무엇을 믿고 살아가는가. 당신은 누구를 믿고 살아가고 있는가. 아니라면 당신은 왜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인가. 

복음이란 무엇인가. 믿음이란 무엇인가. 시편 125편의 기록자가 고백하는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의 믿음이란 어떤 믿음인가. 왜 세상의 적지 않은 사람들은 아무도 믿으려 하지 않는 불신의 담장 안에 스스로를 가두고 살아가려 하는 걸까.

우리가 지난 두 주 동안 주일마다 빌립보서 말씀을 통해서 “그리하면 하나님의 평강이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는 내용의 말씀을 묵상하였다. 오늘 본문의 시작과 끝은 이렇다.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

이스라엘에게는 평강이 있을지어다.”

이런 은혜와 평강이 지금부터 영원까지 계속되시길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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