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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의 역할(롬8:21-27) 20240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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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4-05-19 22:26 조회 288 댓글 0
 

                          성령의 역할(롬8:21-27)             2024. 5. 19

 

 

성령은 하나님이 영이다. 그러므로 성령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을 증거하는 영이다. 누가복음에 보면 예수께서는 성령 안에서 잉태되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잉태하게 될 것을 마리아에게 알린 것도 성령이었다. 성령 안에서 성장하셨다.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에 비둘기와 같은 성령이 예수께 임하였다. 예수는 안식일에 고향 나사렛 회당에서 이사야 61장 1절 이하의 본문을 주제로 설교하셨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라는 내용이다. 예수는 늘 성령 안에서 사역하셨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각색 병자를 고치셨다. 성령의 능력으로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예수의 기도 생활은 늘 성령 안에서의 일과였다. 누가복음 10장 21절에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시고”라고 하였다. 예수는 성령 안에서 십자가 죽음을 맞으셨다. 예수의 부활과 승천까지의 그 모든 삶이 성령 안에서의 삶이었다. 요한복음 20장 22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숨어 있던 제자들을 찾아 가셔서 “그들을 향하여 숨을 내 쉬며 이르시기를 ‘성령을 받으라’”라고 성령 받아야 할 것을 분부하셨다. 

 

기도하던 초대 교회 120성도에게 성령이 임했다. 저들은 승천하시기 전에 예수께서 말씀하신 대로 성령의 임재로 인하여 권능을 받고 땅끝까지 이르러 예수 부활을 증거하는 증인의 삶을 살았다. 생각하여 보라. 베드로는 심한 갈릴리 사투리를 썼다. 그런 저가 성령 받고 나니까 그의 부활 복음 설교를 들은 삼천명의 무리들이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말하며 회개하고 성령의 충만함을 받았다. 이처럼 복음 전파는 오직 성령의 능력이다. 예수께서 승천하신 후 성령 강림에 대한 약속의 말씀을 믿고 기도하던 120여 성도들에게 열흘째 되는 날 성령이 임하였다. 기도하던 현장에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가득하였다.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 모두에게 보였다. 기도하던 각 사람에게 그 불 같은 것이 임했다. 성령의 충만함을 그렇게 설명한 것이다. 성령 받은 각 사람이 제 각기 방언으로 말했다. 경건한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서 천하 각국에서 모여 들었다가 그 현장을 목격하였다. 저들은 다  놀라 신기하게 여겼다.

 

성령의 임재, 성령의 충만이란 이처럼 말로 다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이다. 오늘, 지금 우리 각 사람이 이렇게 주일 날 모여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성령의 도우심이다. 그렇지 않나. 언제부터 내가 이렇게 주일마다 예배자로 살아가게 되었는가. 우리가 예배드리고, 봉사하고, 헌신하고, 전도하고, 섬기고, 서로를 돌보며 살아가는 것이 성령의 역사이다.

 

기도드리고 찬송하고 말씀을 듣고 읽고 연구하고 암송하고 묵상하며 말씀 따라서 살아가려고 씨름하는 그 모든 순간이 성령의 역사이다. 

 

우리는 성령의 다양한 역할에 대하여 안다. 그러나 오늘 이 시간에는 로마서 8장의 본문에서 강조하는 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함께 묵상하려고 한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당하는 것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속량과 구원을 기다린다고 하였다. 맞다. 그러므로 성도는 현재의 고난을 장차 믿는 자에게 나타날 영광스러운 구원의 순간을 위하여 참고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다. 19-22절까지에서는 ‘피조물’이란 표현을 반복하여 사용하고 있다. 인간도 피조물이지만 이 세상 천하만물이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해와 달과 별들을 비롯한 우주 삼라 만상의 그 모든 것들이 하나님의 피조물이다. 사도 바울의 때나 오늘날이나 피조물은 탄식하며 고통을 겪고 있다. 인간의 타락과 범죄는 생태계를 파괴하는 주범이 되었다. 오늘날 지구촌의 기온상승과 기후의 위기는 우리가 아는 것 보다 훨씬 심각하다. 지난 겨울을 나면서 우리는 그 흔한 사과 대란을 겪었다. 최근에 강원도에는 10cm가량의 눈이 내렸다. 최근에 제주도는 900미리미터의 폭우가 쏟아졌다. 사막의 인공 도시 두바이에는 몇 시간 만에 일년치의 비가 내렸다. 야구공만한 우박이 섞여 쏟아졌다. 수마트라에는 홍수로 2만여채의 가구가 물에 잠겼다. 남미에도 처처에 물 날 리가 났다. 옥수수 세계 최대 곡창지대가 불바다가 되었다. 캐나다의 산불은 여의도 면적의 45,000배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미국 텍사스 지역의 불은 서울 면적의 7배 정도를 불태웠다.

 

영하 40-50도여야 할 남극의 날씨가 섭씨 20도까지 오르는 현상도 나타났다. 지금처럼 수온이 상승되고 해수면이 높아지면 미국 뉴욕의 J. F 케네디 공항이 바닷물에 침수되는 날이 올 것이라고 한다. 지구의 처처에 가뭄, 홍수, 한발, 지진, 고온, 돌풍 등등 기상 이변과 재난이 끊임이 없이 계속되고 있다. 

 

그야말로 피조물이 다 함께 탄식하고 있고 다 함께 고통을 당하고 있다. 세상 모든 피조물이 탄식하고 고통을 당하는 것처럼 인간도 마찬가지다. 아담과 하와의 타락 이후로 인간은 하나님에게서 멀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며 살아간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참고 기다리며 소망을 갖고 구원 얻기를 기다린다.”로마서 8장 18절의 말씀처럼 우리는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라는 바울의 심정을 처절이 깨닫고 공감하며 살아간다. 

 

그러므로 주를 믿는 성도된 우리 각 사람은 언제나 성령의 도우심을 간절히 의지하며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26-2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성령의 역할’에 대하여 자세하게 교훈해 주고 있다.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

여기서 말씀하는 ‘연약함’이란 인간의 육체적인 유한함이나 유약함만을 일컫는 말이 아니다. 이는 인간의 부패하고 타락한 본성을 말한다. 인간의 죄성을 지적하는 표현이다. 아담과 하와 이후로 타락한 인간은 스스로의 노력으로 구원 받을 수 없다. 하나님은 율법을 정하셔서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를 자세하게 구별하여 주셨다. 그러나 인간은 그 어느 누구도 율법을 완전하게 지킬 수 없는 존재이다. 율법은 인간의 죄가 무엇인지 드러나게 하고 복음은 인간을 죄로부터 자유하게 하는 구원의 능력이 있다. 복음은 인간을 죄로부터 해방하는 능력이 있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하도록 구원의 문을 활짝 열어 놓으셨다. 23절의 ‘속량’(贖良)과 24절의 ‘구원’(救援)의 대상에는 예외가 없다. 속량이란 노예의 값을 치루고 노예를 풀어 놓아 자유하게 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 하시므로 그를 믿는 자마다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양자의 영을 선물해 주셨다. 이것이 구원이다. 구원에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할례를 받은 자나 할례를 받지 않은 자의 구분의 없다. 남자냐 여자냐의 구분도 없다. 피부색과 인종과 문명의 구분도 없다.

 

그러므로 속량 받고 구원 받은 성도는 언제 어디서나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성령님을 의지하지 않고 제 맘대로 판단하고 제 맘대로 결정하고 제 맘대로 세상을 살아 가다가는 사탄의 공격 앞에 무너지고 만다. 사울은 왕이었지만 하나님을 멀리 떠나고 선지자 사무엘을 무시하였다. 그 결과 그는 악신의 부림을 받고 그의 나중이 불행해 지고 말았다. 가롯 유다는 예수의 12제자 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불행해지고 말았다. 사탄이 가롯 유다의 마음에 들어가 그를 장악하고 말았다. 요한복음 13장 27절에 보면 “조각을 받은 후 곧 사탄이 그 속에 달아간지라”라고 하였다. 유월절 예비일 만찬 자리에서 가롯 유대는 예수의 맞은편에 앉아서 식사하고 있었다. 예수께서는 떡 한 조각을 떼어서 가롯 유다에게 주었다. 가롯 유다는 예수께서 건네 주시는 떡 한 조각을 받아 먹었다. 그러고도 잘못되었다. 사탄의 그의 마음 속에 들어가니까 불행해 지고 말았다. 예수를 배반하고 예수를 팔아 버렸다. 왕이냐 제자냐의 문제가 아니다. 나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매 순간 의지하지 아니하면 그 어떤 누구라도 사탄의 공격 앞에 무너지고 만다. 

 

성령의 하시는 일은 각 사람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크고 작은 일 앞에서 항상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여야 한다. 그 어떤 사람 앞에서든지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한다. 성령은 지혜의 영이요 가르치시는 영이요 생각나게 하시는 영이시다.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과 교회에 다니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인격적으로 예수와 동행하고 인격적으로 성령님과 함께 하는 매 순간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어느 순간에 사탄이 나의 연약함을 공격할지 모른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이지만 미국도 지도자의 함량 미달로 곤혹을 치루고 있다. 올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의 강력한 후보 중의 한 사람인 도널드 트럼프(Donald Trump, 1946- )는 이미 미국의 대통령을 지낸 바 있다. 그러나 그는 91가지의 혐의가 재판 중에 있다. 최근에는 그의 부끄럽고 숨기고 싶은 사생활이 세상에 알려지고 재판정에 피고인 석에 나서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돌아가신 빌리 그래함(Billy Graham, 1918-2018) 목사의 세계 선교 현장에 아들 프랭크린 그래함이 대를 이어 헌신하고 있다. 과거에 그는 도널드 트럼프 후보를 지지하였다. 2017년에 미국 제 45대 대통령(2017-2021)에 당선 되기 이전의 일이다. 그 당시 도널드 트럼프는 자칭 기독교인이라고 말했다. 교회도 다녔다. 간혹 예배에도 출석했다. 그러나 그의 비 기독교적인 이면이 세상에 많이 알려졌다. 그를 지지하는 의사를 밝인 프랭크린 그래함 목사가 캐나다 선교 대회에 나서자 캐나다 기독교 연합회는 앞장서서 그의 집회를 반대하였다. 노르웨이 기독교 연합회도 마찬가지로 프랭크린 그래함의 노르웨이 선교 대회를 반대하였다. 이는 정치적인 문제를 넘어서서 전혀 기독교인 답지 않게 행동하는 도널드 트럼프를 어떻게 성직자가 공식적으로 지지하고 나설 수 있느냐는 신앙적인 반대 의견이었던 것이다. 

 

물론 인간은 다 죄인이다. 인간은 누구나 다 연약하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가 아니고는 구원 받을 자가 단 한 사람도 없다. 그러나 주님의 속량의 은혜와 구원의 은총 앞에 겸손히 회개 하지 않고 기독교인 행세를 하려 하는 것은 죄 중의 죄이다. 이것은 성령을 속이는 죄이다. 성령을 훼방하는 죄이다. 성령을 경홀히 여기는 죄이다. 성령은 거룩한 영이며 진실한 영이며 깨끗한 영이다. 성령은 곧 하나님의 영이시다. 성령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인간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거역하고 인간의 위선과 교만과 사악함에 사로잡혀서 진심으로 회개하지 않고 기독교인 행세하는 것은 용서받기 어려운 죄 중의 죄가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사도행전 5장에 기록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불행한 죽음 사건을 안다. 왜 그런 일을 겪었는가. 그 뿌리는 무엇인가. 저들 부부는 성령 의 강력한 역사로 큰 부흥을 계속해 가던 예루살렘 교회의 일원이었다. 성령 충만한 성도들이 서로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는 은혜 운동이 일어났다. 구브로 섬 출신인 레위 사람 요셉은 밭을 팔아서 그 값을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그 요셉의 별명은 ‘위로의 아들’이란 뜻의 ‘바나바’였다. 그 뒤를 이어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소유를 팔았다. 그런데 그 값에서 얼마는 감추고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그 현장에는 남편 아나니아만 있었다. 사도 베드로는 아니나아의 마음 속에 가득찬 사탄을 보았다. 그리고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너는 사람에게 거짓말 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라고 책망하였다. 그 순간에 아나니아는 베드로 사도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났다. 이 일로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큰 두려움을 느꼈다. 젊은 청년들이 들어 와서 아나니아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였다. 세시간 쯤 후에 남편의 죽음을 모른 채 베드로 사도를 찾아 온 아내 삽비라에게 베드로가 물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삽비라가 “예 이것 뿐입니다”라고 대답하자 “너희가 어찌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라고 지적하자 삽비라도 베드로 사도의 발 앞에 엎드러져서 혼이 떠났다. 죽은 것이다. 연이어 들어 온 젊은 청년들이 삽비라를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지냈다. 이 일로 온 교회와 이 소문을 들은 성도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였다.

 

사도행전 5장의 이 내용은 우리에게 무슨 교훈을 주고 있는가. 성령 충만함이란 성령과 함께 동행하는 생활을 말한다. 성령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영이시다. 성령은 정직한 영이요 진실한 영이요 거짓이 없는 영이요 속임수가 없는 영이시다. 그러므로 성령의 도우심 속에 살아간다고 말하면서 성령을 속이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다. 스스로를 속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속이고 성령님을 속이는 죄이다. 

 

오늘은 2024년 성령 강림 주일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공기가 실존하는 것처럼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는 성령님을 철저히 의지하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

성령은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믿음의 사람을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는 영이시다. 히브리서 7장 25절에 보면 “이는 예수가 항상 살아계셔서 그들을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라고 하였다. 로마서 8장 34절에도 보면 “그는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신 자여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라고 하였다. 이천년 전에 예수께서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을 다녀 가셨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무덤에 장사지낸 바 된 예수를 하나님은 다시 살리셨다. 예수는 부활 승천하였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다가 구름을 타고 천사장의 호령 나팔 소리 가운데 재림 주로 다시 오실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 계시록 1장에서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고 장차 오실 이...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였다. 26절에“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느니라”라고 하였다.

 

우리가 기도해야만 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교회를 움직이는 힘은 기도다. 우리의 사역의 동력은 기도다. 항공 모함은 핵을 주 연료로 운행된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군함은 2009년에 건조된 미국의 핵 추진 항공모함 Gerald R. Ford이다. 배의 길이는 337m, 너비는 78m, 높이는 76m다. 두 개의 A1B 원자로는 재부팅 없이 50년 동안 작동할 수 있으며 56km/h를 낼 수 있다. Gerald R. Ford는 90대의 F-35 항공기와 헬리콥터를 수용할 수 있다. 미사일 무장에는 ESSM, 대공 RAM이 포함된다. 이 거대 군함에는 해군 2,700명과 2,400명의 공군 승무원을 보유하고 있다. 이 거대한 항공모함도 핵연료 운영 체계에 문제가 발생하면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그러나 교회를 교회 되게 하는 동력은 오직 기도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끊임이 없는 기도의 힘에 의해서 교회되는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이 예배당에 모이든 모이지 못하든 날마다 순간마다 수 많은 각 가지의 기도 제목을 가지고 계속하여 끊임이 없이 기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수께서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고 가르쳐 주신 기도가 “주기도문”이 아닌가. 예수께서도 낮에는 수 많은 병자를 고치시고 귀신 들린자에게서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만나는 무리와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비유로 가르치셨다. 그러나 늘 개인적으로 구별된 장소에서 끊임이 없이 기도하셨다. 예수는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밤에도 밤 새도록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도의 의무요 책임이다. 성령은 기도의 사람의 기도를 도우시는 영이시다. 성령은 탄식하시기까지 성도의 기도 생활을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 누가복음 22장 43절에 보면 예수께서 기도하실 때에 천사가 하늘로부터 나타나서 힘을 더하였다. 맞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기도하는 사람에게 천사를 보내셔서 도우신다. 성령께서 친히 기도의 사람을 위하여 간구하신다. 우리가 생활하면 늘 그림자가 내 곁에서 떠나지 않는 것처럼 우리 각 사람의 기도 생활에 성령께서 친히 내 마음 중심에 찾아 오셔서 중보하고 간구하심을 믿고 기도하자. 

 

요한 웨슬리 목사는 손님이 찾아 와서 밤 늦게 까지 돌아가려 하지 않으면 “이제 그만 가서 자고 새벽이 일찍이 일어나 기도합시다”라고 새벽 기도를 강조하였다. 요한 웨슬리는 새벽 기도의 사람이었다. 우리 주님이 늘 밤마다 기도하시고, 새벽마다 기도하신 것처럼 요한 웨슬리 목사도 늘 기도의 삶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기도는 습관이다. 누가복음 22장 39절 이하에 보면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따라 감람 산에 가시매 제자들이 따라갔다.” 그 곳에서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라고 말씀하신 후에 저 만치 돌 던질만한 거리에 가셔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셨다. 

 

지난 금요일 밤에 읽고 묵상한 열왕기상 18장 42절에 보면 갈멜산의 엘리야는 “갈멜산 꼭대기로 올라가서 땅에 무릎을 꿇어 엎드려 그의 얼굴을 무릎 사이에 넣고”기도하였다. 기도할 때에 여호와의 능력이 엘리야에게 임하였다. 삼년 육개월만에 북 왕국 이스라엘에 비가 내렸다.

얼마나 기도해야할 제목이 많은가. 기도해야지 라고 생각만 하지 말고 기도하자. 기도하면 주께서 들으신다. “내가 일하면 내가 일하고 내가 기도하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기도의 유명한 명제가 있다. 기도는 노동이다. 기도는 하나님이 가장 원하시는 바이다. 하나님은 기도의 사람을 주목하신다. 

 

모세 때에 광야길을 가던 아말렉이 전쟁을 벌여 왔다. 여호수아는 군대와 함께 나가 싸웠다. 모세는 산 꼭대기에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하였다. 피곤하여 손이 내려오면 지고 힘을 내어 손이 올라가면 이겼다. 아론과 훌은 바위 위에 모세로 하여금 앉아서 두 손 들고 기도하게 하였다. 그리고 좌우편에서 함께 손을 잡고 기도하였다. 저들의 손이 올라가 있는 동안에 이스라엘의 군대는 아말렉과 싸워 이길 수 있었다. 전쟁의 승패는 칼과 창과 활에 달린 것이 아니다. 전쟁의 승리는 하나님의 손에 달린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한다. 인생은 끊임이 없는 싸움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친히 간구하시는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고 겸손하게 살아가자.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시는 성령.

기도의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의 뜻대로 드리는 기도여야 한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 각 사람의 마음을 살피신다. 하나님은 성령의 생각도 아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27절의 말씀처럼“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것을”깨달아 알고 기도해야만 할 것이다. 

 

사람에 보이려고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다. 골방에 들어가서 기도하라고 하셨다. “너는 기도할 때에 네 골방에 들어가 문을 닫고 은밀한 중에 계신 네 아버지께 기도하라 은밀한 중에 보시는 네 아버지께서 갚으시리라”(마6:6)라고 가르쳐 주셨다. 중언부언 기도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가르쳐 주신 기도가 우리가 아는 <주기도문>이다. 주기도문의 모든 내용이 다 소중하지만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셨다. 예수의 겟세마네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나의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이다. 

 

우리가 기도할 때에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성령은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찾아 나가는 기도를 드리도록 인도하신다. 예수의 아우 야고보는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하기 때문이라”(약4:3)라고 교훈하였다. 

 

내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기도는 기도라고 할 수가 없다. 모든 기도의 바탕은 하나님의 뜻을 구하는 기도여야 한다. 성령은 우리 각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찾아가는 기도를 드릴 수 있도록 도우시고 깨우쳐 주시는 영이시다.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간 다니엘을 보라. 그는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바벨론의 느브갓네살 왕을 두려워하지 않고 기도하였다. 나중에 오히려 느브갓네살 왕이 다니엘이 믿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다니엘로 하여금 느브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게 하였다. 다니엘 2장 46절에 보면 “느브갓네살 왕이 엎드려 다니엘에게 절하였다.”느브갓네살 왕은 다니엘에게 “너희 하나님은 참으로 모든 신들의 신이시오 모든 왕의 주재시로다”(단2:47) 라고 말하며 여호와 하나님을 높혔다.

 

언제 어디서 누구를 대하든지 무슨 일을 만나든지 성령의 도우심으로 여호와의 뜻을 구하는 신실한 기도의 사람들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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