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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 인재를 양성하여,열방선교에 앞장서는 교회
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오직 하나님께 영광(렘33:14∼16, 고전10:29∼11:1) 2021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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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1-12-04 20:06 조회 5,736 댓글 0
 

         오직 하나님께 영광(렘33:14∼16, 고전10:29∼11:1)     2021. 11. 28 

 

 

과거에 어느 앞 못 보는 사람이 시장 골목 모퉁이 집에 살고 있었다. 그는 밤이 되면 늘 등불을 집 앞에 켜 두었다. 지나가는 시장 사람들과 행인들은 늘 의아하게 여겼다. “아니 저 앞 못 보는 이는 낮이나 밤이나 못 보기는 마찬가지일텐에 왜 밤만 되면 집 문 앞에 등불을 켜서 매어다는 것일까” 한 사람이 실례를 무릎 쓰고 그에게 다가가서 그 이유를 물어 보았다. 그의 대답은 “나야 낮에나 밤에나 못 보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밤이 되면 내 집 앞 골목을 지나는 이웃들이 내 집 앞에서 넘어지지 않게 하려고 불을 밝혀 드리는 것입니다.”하고 대답하였다. 

 

이 앞 못 보는 이는 그의 집 앞을 지나 다니는 많은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게 하기 위해서 밤마다 등불을 밝히노라고 대답한 것이다. 오늘 본문에 보면 사도 바울은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고 하였다. 

 

그러면 어떻에 살아가는 것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을 유익하게 하는 삶일까.

고린도전서 8장과 10장에는 우상의 제단에 드려졌던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먹으면 않되느냐의 주제에 대하여 교훈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그 당시 고린도 도시의 예수를 믿는 이들 중에는 그 우상에게 바쳐졌던 제물을 별 생각이 없이 먹는 이들이 있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어떻게 우상의 제단에 바쳐졌던 제물을 먹는단 말인가.”하고 꺼려 하는 이들이 있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의 편지에서 그러한 내용들은 신학적으로, 신앙적으로 해석해서 교훈하는 내용이 본문에 담겨 있다. 

 

이는 마치도 우리나라에 잊을만하면 언급되는 ‘혐오 식품’을 먹어도 되느냐 먹으면 않되느냐의 문제를 갖고 서로 의견을 달리하는 것과도 흡사한 내용이다. 

 

그 당시에 고린도 시내의 시장에서 거래되는 거의 모든 육류는 대개가 다 우상의 제단에 제물로 먼저 바쳐졌던 것들이었다. 구분이 불가능하였다. 고린도의 예수 믿는 이들 중에는 우상을 섬기는 자의 집에 들어가서 그들과 함께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별 거리낌 없이 먹는 이들도 있었다. 반면에 그래서는 안된다고 여기는 이들도 있었다. 이런 일은 언제나 화젯거리였고 서로에게 상처가 되기도 하였다. 늘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이런 소문을 들은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서 “그러므로 만일 음식이 내 형제를 실족하게 한다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하지 않게 하리라.”라고 단호한 입장을 전하기 까지 하였다. 

 

고린도전서 10장 20절 이하에 보면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0-24)라고 교훈하였다. 

 

이런 내용을 심각하게 다루면서 길게 교훈한 내용 중의 일부가 우리가 요절처럼 기억하는 고린도전서 10장 31절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는 이 말씀 말이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나.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이런 명제를 생각할 때에는 뭐 국가적인 차원의 대단히 거창한 문제들을 주제로 떠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신자가 신자답게 살아가는 길인가에 대하여 교훈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언급한 것은 사실 먹고 마시는 일상의 문제 때문이었다.

 

물론 먹고 마시는 문제가 곧 인생이 문제이기도 하다. 나라와 나라 사이에도 이 먹고 마시는 경제와 무역, 수입과 수출 등의 경제 외교 문제 때문에 우방이 되기도 하고 대적하는 관계가 되기도 한다.

 

경제적으로 중국이 재채기하면 한국이 감기 드는 것처럼 말이다. 몇 해 전의 싸드배치 문제에 대하여 미국과의 관계에 대하여 불편하게 반응한 중국이 한국에 날마다 쏟아져 들어오던 중국인 한국 관광객의 관광길을 전면 폐쇄한 적이 있었다. 그 후유증은 심각하였다. 명동 거리에 날마다 발 디딜 틈이 없이 북적대던 중국 관광객 물결이 밀물처럼 빠져나가고 텅 빈 거리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먹고 마시는 문제는 개인과 개인, 이웃과 이웃, 기업과 기업, 국가와 국가 사이에 매우 민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바울은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이 과연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길인가에 대하여 교훈해 주고 있다.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

고린도전서 10장 30절에 보면 우상의 제단에 올려졌던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먹으면 안되느냐의 문제로 비방거리가 되지 않게 하라고 하였다. 32절에서는 동족인 유대인들에게 있어서나 타인종인 헬라인에게 있어서나 더 나아것 교회에 속한 하나님의 자녀들인 성도들을 대할 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다. 

 

32절의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는 교훈이 소극적인 교훈이라면 33절의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는 교훈은 대단히 적극적인 교훈이다. 

 

성도가 믿음의 사람답게 세상에서 살아가고 교회 안에서 성도들을 예절 있게 대하려면 이 두 가지 태도가 모두 다 중요하다. 거치는 자가 누구인가. 거치는 자란 그의 어떤 태도를 언급하는 것일까. 

 

<공동번역> 성경에서는 “어느 누구에게든지 양심의 가책을 받게 하는 일을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번역하였다. <새번역 성경>에서는 ‘걸림돌’이라고 했고 <현대인의 번역 성경>에서는 ‘거치는 돌’이라고 번역하였다. 이쯤되면 무슨 교훈을 말씀하는지 그 의미가 명확하게 전달되지 않는가.

 

우리는 어려서부터 가정의 가족, 그리고 가정 밖에서의 그 어떤 누구와의 관계에서이든지 상대방에게 ‘양심의 가책’이 되는 생각과 말과 행동을 조심하여야 할 것이다. 상대방에게 거침돌이 되거나 거치는 돌이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생각하여 보라. 나는 어떤 경우에 상대방에게 양심에 가책이 되는 말이나 행동을 한 적이 있는가. 어떤 경우에 나 자신이 주변 사람들이나 소속한 그 어떤 단체 안에서 주변에 거치는 돌이나 걸림돌과 같은 불편한 존재로 처세한 적은 없는가. 

 

세상을 살다 보면 어떤 사람은 말 한 마디를 해도 매사에 거치는 말을 습관처럼 하는 이들이 있다. 꽈배기 꼬듯이 배배 꼬아서 말하는 이들이 있다. 

 

며칠 전에 선교회의 새해 준비 모임에 가기 위해서 오전에 시내에 다녀 왔다. MBC 라디오의 양희은 씨가 등장하는 매일 생방송을 잠시 들었다. 어느 시어머니가 30대 며느리에게 입에 가시가 돋친 말을 말끝마다 하는 바람에 사사 건건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으며 사는 얘기였다. “얘 너는 내가 처음 보던 날부터 첫 인상이 아니었어. 얘 너는 지금 삼십대에 그 몸매가 그게 뭐냐. 얘 내 두 손자는 내 아들을 닮아서 인물도 좋고 머리도 명석하다. 너는 남편 잘 만났는지나 알아라. 도대체 너는 잘 할 줄 아는게 뭐가 있냐” 뭐 이런 식의 독이 가득한 말을 날마다 썩은 뜨물 토하듯이 쏟아 놓는다는 하소연이었다. 

 

여러분은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떤 생각이 드나. 혹시 집안 일에 대하여 시댁 일에 대하여, 처가의 대소사에 대하여 이런 식은 아닌가. 직장에서는 어떤가. 상사에 대해서는 어떻고 동료들 사이에서는 어떤가. 반면에 아래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떤가. 사업하는 현장에서 사장이랍시고 주인이랍시고 갑질하지는 않는가. 거래처에 대하여 어려운 상대에게는 굽신거리고 만만한 상대에게는 거만 떨지는 않는가.

 

교회 안에서는 어떤가. 내가 교회 생활 좀 오래 했다고 텃세 부리지는 않는가. 내가 남들보다 기도 좀 더 많이 한다고, 봉사 좀 더 많이 한다고 거들먹거리지는 않는가. 내가 남들보다 성경 좀 더 많이 안다고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깔보지는 않는가. 내가 남들보다 재주도 많고 은사도 다양하고 솜씨도 좋고 남다른 그 무언가가 있기 때문에 남들이 항상 나를 알아 주기를 은근히 바라지는 않는가. 항상 남들로부터 대접받고 싶어 하지는 않는가.  

 

혹시 내가 이 교회 초창기에 얼마나 남다르게 헌신했는데 왜 나를 알아 주지 않느냐고 불만을 마음에 품고 살지는 않는가. “내가 없으면 우리 교회가 잘 될 줄 아느냐”는 식의 거만한 마음가짐이 어느 순간마다 내 생각에 스쳐 지나가지는 않는가. 

 

사도 바울의 교훈은 분명하다. 고린도전서 8장 1절을 보라. “지식은 교만하게 하며 사랑은 덕을 세우나니”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거치는 자가 되지 않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지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문제이다. 

 

야곱의 형 에서는 언약에 벗어나서 거치는 자였다. 사울왕과 솔로몬의 말년은 하나님 앞에서 거치는 인생이었다. 느헤미야 시대의 산발랏과 도비야와 세겜은 하나님의 하시는 일에 거치는 자들이었다. 

 

예수의 제자 중에 가롯 유다는 거치는 자가 되고 말았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초대 교회인 성령 받은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 중에서는 아나니나아 삽비라 부부가 거치는 자가 되고 말았다. 저들 부부는 베드로 사도를 속였다. 뿐만 아니라 초대 교회 공동체의 성령 충만한 성도들을 속였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와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속인 자들이 되고 말았다.

 

사도 바울의 곁에도 거치는 자들이 있었다. 에베소 교회 안에는 거짓말하는 자들과 쉽게 화내는 자들이 거치는 자들이었다. 술에 취하는 자들이 거치는 자들이었다. 도둑질하는 이들이 거치는 자들이었다.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더러운 말을 하고 음담패설하는 이들이 거치는 자들이었다. 떠들고 서로를 비방하며 악한 의도를 가지고 상대방을 대하는 이들이 거치는 자들이었다. 

 

빌립보서 4장 2절에 보면 서로 다투고 마음이 나뉘어서 교회를 어지럽혔던 유오디아와 순두게가 거치는 자들이었다. 디모데후서 4장 14절에 보면 구리 세공업자 알렉산더가 거치는 자였다. 알렉산더는 사도 바울에게 경제적으로 해를 많이 입히고 그의 곁을 떠나가 버린 자였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너도 그를 주의하라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고 경고하고 있다. 

 

상대방의 영혼을 귀하게 여기고 상대방의 인격을 소중하게 여긴다면 상대방을 사랑으로 대해야 한다. 그래야 고린도교회가 직면한 우상의 제단에 바쳐졌던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먹으면 않되느냐와 같은 팽팽하게 상반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매사가 그러하고 누구나가 다 마찬가지이다. 그러므로 가정에서이든 사회생활이든 직장이나 사업이나 상업의 현장에서이든 우리는 이 질문을 반드시 먼저 해야만 할 것이다. “나의 생각이나 결정이나 판단이나 말이나 행동이 주변에 거치는 말이나 거치는 말이나 거치는 행동은 아닌가.”라고 말이다. 

 

우리가 교인 간에 주고받는 말이나 전화상의 대화나 문자나 카톡방의 한 줄 문장이라도 신중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인들 간에 서로를 내 경제 활동의 이익의 대상으로 삼거나 내 편리를 위한 수단으로 삼아서는 안 될 것이다. 성도들 간에 금전거래 하거나 물건을 사고 팔거나 계를 하거나 하면 필경 탈이 나고 만다. 그렇게 하면 십중팔구 성도들 간의 인간관계는 금이 가고 병들고 무너지고 많다. 40여 년 교회를 섬기면서 그런 경우를 너무나도 많이 보아 왔다.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잘 하고, 성도들 간의 관계를 원만하게 하려면 서로 간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이것이 소극적인 행동 강령 같지만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훌륭한 성도, 주님께 “잘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을 받는 성도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구원을 받게 하라.

교회의 존재 목적은 영혼 구원이다. 아무리 예배당 건물이 화려하다고 해도 영혼 구원에 힘쓰지 않는 교회라면 그 교회는 교회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것이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건물이 크든 작든 아니면 해빛도 들지 않는 상가 지하에 있는 교회일지라도 그 교회에 속한 성도들의 일상의 삶의 태도는 33절의 교훈대로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우리가 누구나 내 주변 사람에 대하여 매사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아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우리는 그 어떤 누구이든지 상대방을 주께 구원 받아야 할 소중한 영혼으로 대해야만 한다. 상대방의 영혼을 실족시키면 나는 “연자 맷돌을 매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차라리 나을 것이다” 라고 경고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염두에 두어야만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이 주변 사람들을 대할 때에 항상 유대인에게는 유대인처럼, 헬라인에게는 헬라인처럼, 자유자에게는 자유자처럼, 종에게는 종처럼, 할례자에게는 할례자처럼, 무할례자에게는 무할례자처럼 대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언제 어디서나 누구를 만나든지 사도 바울의 생각은 단 한가지였다. 바울 사도는 언제나“어떻게 하면 지금 내가 만나고 있는 이 상대방을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복음을 영접하고 죄 사함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에 몰두하고 있었다. 

 

그 유명한 선언이 사도 행전 26장에 있다. 그 당시 사도 바울은 로마의 백부장과 그의 군대의 호송을 받으며 로마로 끌려 가는 죄수 신분이었다. 죄몫은 함부로 복음을 전했다는 것이었다. 아그립바 왕이 바울을 죄수 취급하며 심문하는 내용이 사도행전 26장에 실려 있다. 바울은 이 때를 놓치지 않고 아그립바 왕과 그 주변 사람들에게 예수의 부활 복음과 죄 사함의 길을 증거할 기회로 삼았다. 아그립바 왕 곁에서 사도 바울의 긴 복음 증거의 말을 듣고 있던 베스도 총독은 크게 소리를 지르며 “바울아 네가 미쳤구나.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하는구나”하며 조롱하였다. 그 때에 바울은 침착한 목소리로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라고 대답하였다. 사도 바울은 전혀 마음의 위축되지 않고 “아그립바 왕이여 선지자를 믿으시나이까 믿으시는 줄 아나이다.”하며 대화를 이어가려 하였다. 그 때 당황한 아그립바 왕은 “네가 적은 말로 나를 권하여 그리스도 인이 되게 하려 하는도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때 연이어 대답한 사도 바울의 그 유명한 대답이 사도행전 26장 29절에 나온다. 

 

“바울이 가로되 말이 적으나 많으나 당신 뿐아니라 오늘 내 말을 듣는 모든 사람도 다 이렇게 결박한 것 외에는 나와 같이 되기를 하나님께 원하나이다 하니라.”

 

코로나 19로 인한 혼돈과 두려움과 불안이 여전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 날 성도된 우리들은 사도 바울의 이 복음 전파에 대한 확신을 본 받아야만 할 것이다. 

 

오늘 본문에서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에게 증거하고 싶었던 사도 바울의 심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사도 바울은 모든 사람들을 기쁘게 대하고, 모든 사람들을 대할 때에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상대방의 유익을 구하려는 목적은 단 한가지 뿐이었다.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는 이 대 명제 앞에 한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았던 분명한 부활 구원 복음 전파의 사람으로 살아갔다. 오늘 날 성도된 우리 각 사람에게 이러한 성령 충만한 구령열이 활활 불 붙기를 간절히 축원한다.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라.

우리가 잘 아는 고린도전서 11장 1절은 “내가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가 된 것같이 너희는 나를 본 받는 자가 되라”내용이다. 이 말씀은 원래 10장의 마지막 절로 이어져야 문맥 구분이 맞는 내용이다. 바울은 우상의 제단에 드려진 제물을 먹어도 되느냐 않 되느냐의 문제를 통해서 우리에게 분명한 교훈을 가르쳐 주고 있다. 그리고 곧 이어서 그리스도를 본 받는 생활에 대하여 강조해 주고 있다. 

 

우리는 먹든지 마시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해야 한다. 그러한 삶을 살아가려면 우리는 영원한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남겨 주신 온갖 비유의 말씀들을 바탕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는 자의 삶을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핍박자 사울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철저히 본받으려는 삶을 살고자 씨름한 위대한 초대 교회의 사도의 한 사람이 되었다. 사도 바울의 가슴 속에는 자가 깨나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생각 뿐이었다. 앉으나 서나 예수로 가득 차 있었다. 들어가나 나가나 예수 생각 뿐이었다. 

 

바람이 불면 라일락 꽃나무는 그 그윽한 라일락 꽃 향기를 멀리 멀리 날려 보낸다. 이처럼 사도 바울은 움직일 때마다, 입을 열어 말 할 때마다 언제 어디를 가든지 예수 향기로 가득하였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서 3장 17절에서도 “형제들아 너희는 함께 나를 본받으라”고 권면하였다. 이 얼마나 담대하고 떳떳한 신앙 고백인가. 우리는 마치도 창세기의 요셉이나 느헤미야서의 주인공 느헤미야처럼 이런 삶을 가꾸어 가야 할 것이다. 

 

집안에서 엄마가 아들을 앉혀 놓고“아들아 너는 제발 네 애비처럼 살지 말아라”이런 말을 한다면 그 집안 꼴이 무엇이 되겠는가.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은 회심 한 이후로 평생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기 위해서 매진한 말씀의 사람이요 복음의 사람이요 경건하고 거룩한 성령의 사람이었다. 

 

우리는 가정과 세상과 교회 안에서 서로에게 이런 존경을 받을만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어야만 할 것이다. 아멘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빌립보서 2장 5절의 교훈대로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야 한다. 히브리서 12장 2절처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 보아야 한다. 히브리서 12장 3절의 말씀처럼 ‘자기를 거역한 죄인들이라도 참으신 예수를’ 생각하여야 한다. 

 

예수의 산상수훈의 가르침처럼 말로만 주여 주여 하지 말고 “다만 하늘에 계시 하나님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마7:21)여야만 한다. 

 

예수께서는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5:48)고 분명하게 가르쳐 주셨다. 

 

토마스 아켐피스의 명상록 <그리스도를 본 받아>에 보면 주옥 같은 글들이 페이지 마다 줄마다 잘 익은 석류알처럼 가득 차 있다. 2부 “내적인 삶을 위한 거룩한 권면”에 보면,

 

 “겸손하고 화평해라. 그리하면 예수님이 함께하실 것이다. 헌신적이 되고 말을 삼가라. 그리하면 예수님이 함께 거하실 것이다. 외적인 것들에 마음을 돌리면 그분은 우리 안에 설 자리를 찾지 못하실 것이다. 만약 그분을 몰아냄으로써 잃게 되면 위급할 때 누구에게 달려가고 누구를 진정한 벗으로 삼을 수 있겠는가? 친구 없는 인생은 아무것도 아니다. 예수님이 으뜸가는 벗이 되지 않으면 슬픔과 외로움을 겪게 될 것이다. 예수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기보다는 온 세상으로부터 버림받는 편이 훨씬 더 나을 것이다. 그런즉 세상 사람들 가운데 일부로부터 사랑을 받더라도 오직 예수님 한 분만을 더욱 특별히 사랑해야 한다. 친구를 많이 사귀라. 그리고 그들을 진정으로 사랑하라. 하지만 예수님을 더욱 특별히 사랑하라.”라고 하였다. 

 

오직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길이 무엇일까. 날이 가고 달이 가고 해가 더할수록 예수 그리스도를 본 받아 성숙한 성도의 삶을 가꾸어 가는 은혜의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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