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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부르심에 합당하게(엡4:1-6) 2024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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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4-08-04 16:38 조회 1,439 댓글 0
 

                         부르심에 합당하게(엡4:1-6)           2024. 8. 4

 

 

복음을 전파하다가 옥중에 갇혀 지내게 된 사도 바울은 갇혀 지내는 자기 자신을 ‘주 안에서 갇힌 나’라고 소개하고 있다. 그렇다. 바울은 감옥 밖에 있으나 옥중에 매어 있으나 늘 그의 생각을 사로 잡는 것은 각 사람을 향한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이었다. 갈,에,빌,골을 옥중서신이라고 한다. 바울은 세 번 옥에 갇혔다. 첫 번째는 가이사랴에서 2년, 두 번째는 로마에서 2년 그리고 나중에 다시 로마의 감옥에 갇혀 지내야 했다. 에베소서는 로마에서의 첫 번째 투옥 기간에 쓴 것으로 전해진다. 사도행전 28장 30절에 그러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있다. 주후 61-63년 경의 일이다. 

 

우리 각 사람은 주님의 부르심이 아니었다면 하나님의 자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주님은 우리 각 사람을 성도로 부르셨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셨다. 우리 각 사람을 향하신 주님의 뜻이 계셔서 믿음의 사람으로 부르신 것이다. 그렇지 않나. 이렇게 무더운 여름에 차려입고 예배당에 모여서 예배하는 일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다. 강으로 바다로 휴가를 떠나는 계절이다. 인천 공항에는 해외로 휴가 떠난 이들로 인해서 장기 주차장에 빈 자리가 없을 정도라고 한다. 일 년 52주, 주일마다 헌금 준비하고 와서 예배드리는 것이 아무나 하는 일이 절대로 아니다. 더군다나 남들보다 훨씬 일찍 와서 성가대 준비하고, 예배 준비하고 예배 안내하고, 음식 준비하고, 차량 운전 봉사하고, 주차 안내하고, 방송실에서 섬기고, 피아노, 신디 연주하고 하는 이 모든 일들이 부르심이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다. 

 

교회는 기업체가 아니다. 교회는 그 어떤 인위적인 연합 기구가 아니다. 교회란 하나님 아버지의 살아 계심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대속의 은총과 죄 사함의 은혜를 깨달아 알고 믿는 이들이 모인 공동체이다.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한 소망을 가지고 한 믿음으로 연합한 공동체가 곧 교회이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라고 하셨다. 그렇다. 교회란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신지 깨달아 알고 신앙을 고백하는 이들의 연합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라고 물으신 적이 있다. 그 때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때에 베드로의 신앙 고백을 들으신 예수께서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라고 축복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교회의 탄생에 관한 말씀이셨다. 

 

오늘 읽은 에베소서 4장의 서두에 있는 말씀은 교회의 구성원이 된 성도들이 어떤 자세와 어떤 태도와 어떤 마음가짐으로 서로를 대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섬겨 나가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교훈하고 있다. 

 

 

겸손(謙遜)과 온유(溫柔).

겸손과 온유, 온유와 겸손은 기독교인의 두 가지 미덕이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서 살아가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려 하는 자들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배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나의 일상에 실천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자들이다. 물론 기독교 신앙은 수양과 도덕으로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 받은 자들이다. 하나님의 은혜로 죄 사함을 받고 하나님의 은혜로 자녀의 권세를 선물로 받은 자들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는 하나님의 기대하시는 삶을 살아가고저 씨름해야만 한다. 우리가 선한 일을 많이 하거나 좋은 일을 많이 해서 그 공덕으로 구원 받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가  된 성도라면 마음 가짐과 입의 말과 행실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도록 삼가며 살아가야 한다.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라고 찬양만 부르지 말고 성도라면 성도다운 언행심사를 통해서 생각과 말과 행실이 주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려고 씨름해야만 한다. 그것이 거룩한 삶을 살아가려고 하는 성도의 태도이다. 이것을 잔 웨슬리는 그리스도인의 성화라고 설명해 주었다. 구원 받은 것,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으로만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야만 한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8장 30절에서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And those he predestined, he also called; those he called, he also justified; those he justified, he also glorified.)라고 입체적으로 명쾌하게 설명해 주었다. 

 

예수께서는 자신의 성품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마11:28-30)

 

예수께서는 자신의 마음 가짐, 자신의 됨됨이, 자신의 성품을 ‘온유와 겸손’이 두 단어로 설명해 주셨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 두 가시 성품을 본받으라고 강조하였다. ‘겸손이라 다른 사람을 나보다 귀하게 여기는 마음’을 말한다. 겸손의 반대는 거만, 교만, 오만이다. ‘온유란 주변 사람에 대하여 친절하고 너그럽고 따뜻하고 부드럽고 정중한 태도와 마음 가짐’을 뜻한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온유하고 겸손하게 사셨다. 겸손하고 온유하게 주변 사람들을 대하셨다. 가난한 사람, 병든 사람, 어린이, 여인 그 누구든지 한결 같이 대하셨다. 제자들을 막으려 했으나 예수께서는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다. 오히려 어린 아이를 품에 안으시고 축복해 주셨다. 어른들의 마음 가짐이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천국에 들아갈 수 있다고 교훈해 주셨다. 

 

그렇지 않나.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은 어디서나 환영 받는다. 가정에서든 직장에서든 사업의 현장에서는 사회 생활의 그 어디에서든지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은 환영 받는다. 그러나 교만하고 거만하고 오만하고 남들 무시하고 깔보고 사납고 거친 성격과 기질의 소유자는 그 주변에서 점점 사람들이 멀리 떠나고 만다. 

 

겸손하고 온유한 사람은 생각이 다르고 마음 씀씀이가 다르다.

 

H자매는 직장 생활 7년차의 30대 초반 주부이다. 직장 생활하랴 아들딸 키우랴 분주하게 생활한다. 직장 생활이란 것도 일이 힘든 것이 아니라 위아래로 주변 사람들을 대하며 살아가는 인간관계가 피곤하고 고달프다.

 

한 번은 오랜 만에 옛날 친하게 지내던 동창들을 만났다. 네 명이서 모처럼 맛있는 점심도 같이 먹고 멋진 커피 숍에도 갔다. 

 

H자매가 말했다. 

“난 요즘 직장 생활, 가정 생활, 부부 관계, 자녀 키우기, 시댁과의 관계 등등 너무 사는게 힘들어”라고 말했다.

 

A자매 “얘 너 너무 많이 힘들겠다. 근데 난 사는게 너보다 훨씬 더 많이 힘들어”

 

B자매 “야, 그래도 니가 그렇게 생각하면 않돼지 니 생각을 바꿔”

 

C자매 “얘 그 동안 얼마나 힘들었니 니 예기를 들으니까 나도 속상해진다.”

 

서로 바쁘게 살아가고 있지만 H 자매가 다음에 다시 시간이 나서 어느 친구인가를 다시 만난다면 어떤 유형의 친구를 다시 만나고 싶겠는가. 

 

교회는 지적질하고 판단하고 책망하고 꾸짖고 나무라고 우격다짐하고 비교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자기 자랑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집안 자랑, 자식 자랑, 학벌 자랑, 재산 자랑, 돈 자랑, 보석 자랑, 좋은 가방 자랑, 사회 신분 자랑하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사랑을 깨달아 알고 성령의 인도하심 가운데 함께 모여 예배드리고 격려하고 위로하고 배려하며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곳이어야 한다. 힘이 되어 주기는커녕 힘이 빠지게 하는 곳이어서는 안된다. 위로는커녕 상처를 주는 곳이어서는 안된다. 교회는 서로를 비교하고 자기를 드러내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어른 아이 노인 젊은이가 서로 더불어 주 안에서 하나된 사랑을 나누는 곳이어야 한다. 서로 돌보고 서로 위하고 서로 섬기고 서로 나누고 서로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하는 곳이어야 한다. 성도와 성도 사이가 그러해야 한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10장 1절에서 성도를 대하는 자신을 언급하면서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라고 하였다. 

 

 

오래 참음과 사랑으로 용납.

참을 인(忍)자가 셋이면 살인도 면한다는 속담이 있다. 층간 소음으로 인한 칼부림이나 이웃 살해, 부부 싸움 끝에 배우자를 살해하는 그 과정을 보면 거의 다가 참지 못해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에베소서 4장 2절에서 인용한 오래 참음이란 ‘마크로뒤미아’라는 단어는 “상대방의 나쁜 감정이나 노여움이나 잘못에 대하여 보복하거나 응징할 수 있는 상황을 참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속성 중의 하나가 ‘오래 참으심’이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과 방종과 타락에 대하여 오래 오래 참으신다. 길이 길이 참으신다. 로마서 2장 4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네가 하나님의 하나님의 인자하심이 너를 인도하여 회개 하게 하심을 알지 못하여 그의 인자하심과 용납하심과 길이 참으심이 풍성함을 멸시하느냐”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은 그의 길이 참으심이 풍성하신 주님이시다. 인간이 범죄하고 타락하고 악하게 살아가는 현장을 주님이 모른 척하시고 외면하시고 눈 감아 주지 않으시고 즉시 진노하셨다면 이 땅에 살아 남아 있을 인생이 몇이나 되겠는가. 

 

사도 바울은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1:16)라고 자신이 덧입은 하나님의 은혜를 간증하였다. 

 

97년을 사신 나의 증조할머니 이나오미 권사님은 개성에서 강화도로 출가해 오셨다. “얘들아. 참아라 참아. 나는 시집 올 때 친정 어머니께서 소경 삼년, 귀머거리 삼 년, 벙어리 삼 년, 그렇게 지내다 보면 잘 살아가게 될 것이라고 타일러서 시집 보내셨단다”라고 말씀하시던 기억이 난다. 맞다. 참아야 한다. 가정 생활,  학교 생활, 직장 생활, 사회 생활, 교회 생활 그 모든 것들이 참는 것으로부터 나에게 유익이 있고 은혜가 임하게 되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 장의 강조가 무엇인가. “사랑은 참는 것이다”라고 교훈한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사랑은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전 13:4, 7)라고 가르쳐 주었다.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가정과 세상과 교회 안에서 모든 것을 참으며 오래도록 참으며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여야 한다. 오래 참는 미덕은 용납하는 것으로 완성된다. 상대방의 단점이나 약점이나 허물이나 심지어는 죄까지라도 오래 참아 주고 사랑으로 덮어 주고 사랑으로 품어주고 사랑으로 받아 들어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자녀로 부르심을 입은 성도들 간의 합당한 관계이다. “니가 나에게 그럴 수가 있어”라고 화를 내지 말고 “그럴수도 있지”라고 너그럽게 받아 주어야 한다. 사랑으로 용납하여야 한다. 오래 오래 참고 기다려 주어야  한다. 그럴 때에 서로의 인간 관계가 아름다워 질 수 있다. 아름답다는 말은 단순히 이쁘다는 뜻을 넘어 서는 표현이다. 아름답다는 단어의 사전의 정의는 “즐거움과 기쁨을 줄 만큼 예쁘도 곱다”라는 것이다. 그러나 아름답다라는 단어에는 ‘조화롭다’라는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 조화로운 것이 아름다운 것이다. 꽃이 아름다운 것은 형형색색의 조화가 아름답기 때문인 것처럼 말이다. 

 

하나님은 인간을 향하여 오래 참아 주시는 사랑의 용납으로 이 땅에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 주셔서 인간을 죄로부터 구원받게 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신 것이다. 천국 백성 삼아 주신 것이다. 양자의 영을 부어 주신 것이다.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게 해 주신 것이다. 상속자의 유업을 받게 하신 것이다. 

 


성령이 하나되게 하심.

성령은 하나되게 하시는 영이시다. 하나님의 영이신 성령은 연합하게 하시는 영이시다. ‘하나’라는 말은 ‘일치, 연합, 통일’이란 의미이다. 성령은 평안을 선물해 주며 성령은 하나되게 하는 영이다. 분리하고 나누이고 대립하고 갈등하게 하는 것은 성령의 열매가 아니다. 성령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도와 성도를 주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하나되게 하신다.” 그러므로 성도는 서로 서로 간에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힘써 지켜야 한다”여기서 ‘힘 쓰다’는 ‘스푸다조’(σπουδάζω)'라는 단어인데 ‘부지런히 하다’라는 뜻이다. 서로 사랑 가운데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을 부지런히 이루어 나가라는 말씀이다. 

 

부지런한 한 사람의 힘은 게으른 백 사람의 힘보다 크다. 지혜로운 한 사람의 힘은 어리석은 백 사람의 힘보다 강하다. 성령은 하나되게 하시는 영이시다. 성령은 평안을 선물해 주시는 영이시다.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데 날마다 불안하고 어디서나 불안하다면 자신에게 물어 보아야 한다. “내가 과연 성령 안에서 성령과 더불어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 맞나”라고 스스로에게 질문해 보아야 한다. 자신의 영적 현주소를 점검해 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은 ‘하나’의 가치와 소중함을 설명하기 위해서 논리적은 열거를 계속하고 있다. “몸이 하나요 성령도 한 분이시니 이와 같이 너희가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느니라 주도 한 분이시오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시니 곧 만유의 아버지시라”라고 하였다. 

 

맞다. 하나님은 하나 되게 하시는 주님이시다. 하나님은 하나 되길 원하시는 아버지시다. 요즘 열왕기 하에서 교훈 받는 내용이 무엇인가. 우상 숭배의 심각성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과 하나가 되기를 원하시다. 우상 숭배를 절대로 허용하지 않으시다. 묵인하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개인, 가정, 민족을 막론하고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제대로 잘 지켜 가길 원하신다. 십계명의 시작이 무엇인가. “너는 나 외에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너를 위하여 우상을 만들지 말라. 하늘의 새, 땅의 짐승, 물속의 물고기 등 그 어떤 형상도 우상으로 여겨서 만들지 말라. 우상에게 절하지 말라. 우상을 섬기지 말라.”라고 가르쳐 주셨다. 

 

성도인 우리는 한 세례를 받고 한 믿음 안에서 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며 한 성령 안에서 살아가는 형제자매이다. 성찬이 무엇인가. 우리는 성찬을 통해서 한 피 받아 한 몸 이룬 한 몸 공동체의 일원임을 고백한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을 이룬 거룩한 공동체가 교회인 것이다. 서로 서로 주 안에서 행복하고 은혜로운 신앙 생활이 되기를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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