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창시자(히2:10-18) 2023. 1. 1 신년주일
누가 썼는지 불분명한 유일한 신약 성경이 히브리서이다. 바울, 바나바, 아볼로, 브리스가와 아굴라, 실라 심지어는 사도행전 일곱 집사 중의 한 사람이었던 빌립 집사 저작설까지를 포함하면 참으로 여러 사람이 저자 중의 한 사람으로 거론되는 특별한 성경책이 히브리서이다.
기독교 초기의 교부 오리겐은 “히브리서를 누가 기록했는지는 오직 하나님만이 아신다.”라고 말했다. 이 표현이 오직 정설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하여 “아버지도 없고 어머니도 없고 족보도 없고 시작한 날도 없고 생명의 끝도 없는 멜기세덱"과 비교하는 히브리서 7장 3절의 표현 등은 오직 히브리서에서만 만나 볼 수 있는 특별한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히브리서 2장 10절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창시자’라고 하였다. 맞는 표현이지만 이런 표현을 사용한 곳은 성경 그 어디에도 없다. 그래서 오늘 말씀의 제목을 ‘구원의 창시자’라고 정한 것이다.
자, 그러면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구주로 믿고 따르며 섬기는 신자들에게 어떤 분이신가.
구원 받을 자를 붙들어 주시는 분.
16절에 보면“오직 아브라함의 자손을 붙들어 주려 하심이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질문하게 된다. “누가 아브라함의 자손인가”라고 말이다. 우리는 마태복음 1장 1절에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라는 말씀을 기억한다. 맞다. 다윗이나 구원의 창시자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것이 맞다. 그러면 오늘 이렇게 새해의 첫 날을 주일로 맞아 몇 시간 전까지 깊은 밤 중에 예배당에 모여서 새해를 기다린 우리들이 또 다시 이 곳, 예배당에 모여서 또 다시 예배드리는 우리는 과연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왜 예배하고 또 예배하는가. 도대체 예배라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누구에게 예배드리는 것인가. 왜 이렇게 자주 예배드리며 살아가야 하는가. 물론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드린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끊임이 없이 호흡하며 살 듯이 끊임이 없이 하나님 아버지께 예배드리며 살아간다. 그 뿐만 아니라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 예배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원의 창시자이시기 때문이다.
히브리서 1장 2절부터 보면,
예수는 만유의 상속자
모든 세계의 창조자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
하나님의 본체의 형상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 분
죄를 정결하게 하는 일을 하신 분
높은 곳에 계신 지극히 크신 이의 우편에 앉으신 분
천사보다 훨씬 뛰어난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맞다. 그렇다. 이 모든 묘사들이 다 구원의 창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그 분, 예수 그리스도는 “구원 받을 자를 붙들어 주시는 분”이시다. 아브라함의 혈통의 자손만 구원하시고 붙들어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를 구주로 고백하고 영접한 모든 믿음의 형제 자매들을 일일이 붙들어 주신다. 매 순간 붙들어 주신다. 영원히 붙들어 주신다.
지난 밤 송구영신예배 시간에 펼쳐서 읽은 이사야 41장의 말씀의 강조가 무엇인가. 이사야 41장 9절에 보면 “내가 땅 끝에서부터 너를 붙들며”라고 약속하셨다. 10절에서는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 손으로 너를 붙들리라”라고 약속하셨다.
맞다. 구원 받는 다는 것은 내가 그 분을 붙드는 것이 아니다. 그 분이 나를 붙들어 주시는 것이다. 그 분이 그 분의 의로운 오른 손을 나를 꼭 붙들어 주시는 것이 구원이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 수훈이 끝나고 8장이 시작되자 마자 하나님의 아들이신 구원의 창시자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이루신 구원에 대하여 다양한 기사와 이적들을 기록하고 있다. 그 모든 내용이 무엇인가. 구원 받을 자를 붙들어 주시는 내용들이다.
가령 마태복음 8장에 보면,
산에서 내려 오신 예수를 수 많은 무리가 따르고 있었다. 그 중에 한 나병 환자가 예수께 나와서 절하였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하게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간청하였다. 그 때 예수께서는 손을 내밀어 그에게 대시며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하고 명하셨다. 그 즉시 나병이 깨끗해 졌다. 그 한센 병 환자는 예수를 만나서 구원 받은 것이다. 병 고침을 받고 새 삶을 살기 시작한 것이다. 이처럼 구원은 구체적인 것이다. 구원은 구원의 창시자이신 그 분이 나를 붙들어 주시는 것이다. 어둠과 죄와 악과 사망의 자리에 버려 두시는 것이 아니라 건져 주시고 살려 주시고 붙들어 주시는 것이다. 영원히 붙들어 주시는 것이다. 이것이 구원이다.
산에서 내려오시자 마자 한센 병자를 고치신 예수께서는 가버나움에 들어 가셨다. 한 백부장이 나와서 간구하였다.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워하나이다.” 그 때에 예수께서 “내가 가서 고쳐 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백부장은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습니다. 다만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내 하인이 나을 것입니다. 나도 남의 수하에 있는 사람입니다. 내 아래에도 군사가 있습니다. 내가 이더러 가라 하면 가고 오라 하면 옵니다. 내 종더러 이것을 하라 하면 합니다.”예수께서 그 백부장의 하는 말을 들으시고 놀랍게 여기셨다. 그리고 따르는 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
예수께서 그 백부장에게 말씀하셨다. “가라 네 믿은대로 될지어다” 그 즉시 그의 하인이 고침을 받았다. 예수께서 구원의 창시자란 말씀은 이런 것이다. 에수께서는 가시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저들의 간구를 들으셨다. 그리고 구원을 베푸셨다. 각색 병자를 고쳐 주셨고 귀신을 내어 쫓으셨다. 각색 병자가 고침을 받았다. 예수 그리스도는 항상 그를 필요로 하는 자들을 붙들어 주셨다. 구원 받을 자를 구원하셨다. 붙들어 달라고 간청하는 이들을 외면하지 않으셨다. 예수 만나니 열두해 혈루병이 나았다. 38년된 병자도 고침을 받았다. 예수 만나니 베드로의 장모의 열병이 떠나갔다. 베드로의 장모는 고침 받고 일어나서 예수와 제자들을 위해서 맛있고 풍성한 음식을 준비해서 대접하였다. 예수께서 오셨다는 소문을 듣고 사람들이 귀신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을 쫓아 내셨다. 병든 자들을 다 고쳐 주셨다.” 마태는 이 장면을 기록하며 이사야 53장 4절을 인용하고 있다.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마8:17)
예수 만나니 앞 못 보던 이들이 눈을 떴다. 말 못하던 이들이 말하기 시작하였다. 못 걷던 이들이 걷고 뛰기 시작하였다. 예수는 믿는 자를 구원하시되 의로운 오른손으로 우리를 붙들어 주시는 구원의 창시자이시다.
백성의 죄를 속량(贖良)하시는 대제사장.
히브리서 기록자는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신실한 대 제사장”이라고 표현하였다. 그렇다. 예수께서는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시다. 대 제사장이신 그 분 앞에 나아가면 그 분은 우리 각 사람의 죄를 대속하고 넉넉히 속량하시는 대 제사장이시다. 제사장이 누구인가. 대 제사장이 누구인가. 하나님은 레위기의 말씀을 통해서 제사를 명하셨다. 그리고 제사장을 세우셔서 우리 인간의 죄를 속량하기를 원하셨다. 왜 제사하게 하셨나. 왜 송아지와 양과 염소를 번제하였나.
레위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회막에서 모세를 부르셨다. 그리고 말씀하셨다. 백성들에게 명하여 소나 양으로 예물을 드리도록 하라고 명하셨다. 흠이 없는 것으로 드리라고 하셨다.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시도록 드릴지니라”라고 명하셨다. 아론과 그의 자손이 제사장이 되어 번제물의 머리에 안수하라고 하셨다. 이는 “그를 위하여 기쁘게 받으심이 되어 그를 위하여 속죄가 될 것이라.”라고 설명해 주셨다.
제단의 나무 위에서 불태워 드리라 하셨다. 이것이 화제이다. 이는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라고 하셨다. 레위기 1장을 읽다 보면 “여호와께 향기로운 냄새니라”라는 표현이 세 번이나 반복된다.(레1:9, 13, 17)
맞다. 자비하고 신실한 대제사장이 되셔서 백성의 죄를 속량하시는 일은 여호와께 향기로운 일이다. 올 한해 그리고 앞으로 평생토록 죄 사함 받고 거듭난 하나님의 아들딸답게 여호와께 향기로운 인생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시험 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시는 분.
예수는 죄가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에게는 흠과 티가 없으시다. 그런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그의 몸에 짊어지고 영문 밖으로 끌려 가셨다. 골고다 언덕의 나무 십자가에 못박히셨다. 그는 옷 벗김을 당하셨다. 발가 벗겨지는 부끄러움을 당하셨다. 끌려 가셨다. 매를 맞으셨다. 로마의 병정들은 예수를 무참하게 채찍으로 때렸다. 잔등이 피 범벅이 되었다. 넘어지고 쓰러졌다. 구레네 시몬의 도움이 아니면 십자가를 메고 골고다까지 갈 기운이 없으셨다. 그는 온갖 고난과 수모를 다 당하셨다. 죄편 강조의 조롱도 당하셨다.
10절을 다시 보자. “그들의 구원의 창시자를 고난을 통하여 온전하게 하심이 합당하도다”라고 하였다. 맞다. 하나님은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창시자로 당하는 그 모든 고난과 시험을 통해서 나중에는 “영광과 존귀로 관 씌우시며 만물을 그 발 아래 복종하게 하셨다.”(히2:7-8)
생각하여 보라. 이 세상에 누가 고난을 원하겠나. 누가 시험 받기를 기뻐하겠나.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온갖 시험과 온갖 고난을 그의 한 몸에 다 짊어지셨다. 그의 한 몸으로 다 당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창시자로 세상에 보내신 거룩한 뜻을 이룩해 가시는 과정이셨다. 이를 히브리서 2장 9절 중반절부터 보면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죽음의 고난 받으심으로 말미암아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예수를 보니 이를 행하심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여기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을 주목하자. 그렇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라면 어떻게 그 극심한 고난과 시험을 다 감당할 수가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히브리서 기록자는 시편 22편 22절을 인용하면서 주의 이름을 선포할 이유와 주를 찬송할 이유를 설명해 주고 있다.“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선포하고 내가 주를 교회 중에서 찬송하리라.”이처럼 주의 영광스러운 이름을 만방에 선포하고 찬송하는 일이 평생 계속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