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므로(벧전1:13-23) 2023. 4. 23
지난 주일에는 베드로전서 1장의 앞 부분을 본문으로 ‘부활 신앙’이란 어떤 것인가에 대하여 묵상하였다. 우리는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부활 신앙이란 곧 구원 신앙이다. 베드로전서 1장 9절에 보면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라고 하였다. 자, 그러면 다시 질문해 보자. “구원이란 무엇인가.”그 다음 절로 이어지는 10절에 보면 “이 구원에 대하여는 너희에게 임할 은혜를 예언하던 선지자들이 있다”라고 했다. 왜 하나님은 수 많은 선지자들을 통해서 장차 임할 구원의 은혜에 대하여 예언하게 하신 것일까. 단순하게 “세상 사람들 중에서 누군가가 예수를 구주로 믿고 영접하고 살아가면 장차 사후에 천국 백성이 된다”는 정도의 논리에 붙잡혀 살아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말 할 수는 없다.
미국을 비롯한 세계의 신학계가 알아주는 한국이 배출한 신학자 중에서 풀러 신학대학의 교수로 있던 김세윤 박사가 2001년에 출간한 책 중에 <구원이란 무엇인가>라는 꽤 알려진 책이 있다. 22년만에 그 증보판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원래의 원고는 45년 전의 있었던 3-4시간의 신학 특강의 자료였다고 한다.
여러분은 어떤가. “구원이 무엇인가요”라는 질문을 받는다면 무엇이라고 대답하고 어떻게 설명할 수 있겠는가. 그는 책에서 “우리가 구원받아야 할 이유/ 사람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는가/ 예수의 삶과 죽음과 부활은 구원의 사건이다/ 예수의 구속적 죽음에 대하여 해석하는 성경적 범주들/ 하나님의 구원은 어떻게 우리에게 효력을 발생하는가/ 구원의 종말론적 구조/ 예정과 지키심”등의 목차를 통해서 우리가 궁금증에 대하여 구원에 대하여 이해하기 쉽게 풀어 주고 있다. 모든 인간은 질병과 고난과 죽음으로부터 구원 받기를 원한다. 그러나 인간은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다. 하나님만이 인간과 세상을 구원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셔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셨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성도라면 이 구원 신앙을 분명히 깨달아 알고 믿고 누군가에게 증거 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 각 사람이 부활 신앙, 구원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의 증인이라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어떻게 하나님의 구원이 가능한 것인지...
그 구원을 우리가 어떻게 믿음으로 덧입을 수 있는지...
구원받은 성도라면 세상에서 어떻게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살아가야 하는지...
우리가 바라는 구원의 완성이란 무엇인지...
등에 대하여 분명한 대답을 가지고 살아가야만 한다.
우리 가운데는 두 주 전에 세례를 받은 초신자도 있고 50년 이상 신앙생활을 한 이도 섞여 있다. 자, 그러면 도대체 구원이란 무엇일까. 사도바울은 로마서 14장 17절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 있는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라고 정의하였다. 여기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이 구원의 상태를 말씀하는 것이다. 그러면 구원받은 성도인 하나님의 자녀라면 이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요’라고 했다. 먹고 마시고 시집가고 장가가는 일은 노아 시대에도 그랬고 롯의 가족이 함께 소돔과 고모라 성에서 살던 시대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므로 구원의 복음을 깨달아 알고 살아가는 믿음의 사람이라면 ‘의와 평강과 희락’를 각자가 실현하며 누리며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 안타깝게도 OECD 38개국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의 행복지수는 36위라고 한다. 무슨 말인가. 행복하게 살 줄을 모른다는 말이다.
이는 대한민국 국민의 모습이며 곧 기독교인의 모습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고, 천국 백성이 되고, 죄 사함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대속의 은혜를 입은 성도라면 삶의 내용, 삶의 질이 달라져야 마땅하다. 그렇지 않나. 예수 안에서 ‘나’란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1장 1절에서 ‘흩어진 나그네’들에게 편지한다고 했다. 그러면 예수의 복음을 깨닫고 열방에 흩어져서 살아가는 성도는 어떤 사람들인가. 1장 2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읽으면,“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미리 아신 대로 여러분을 선택하시고 성령님을 통해 거룩하게 하여 여러분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순종하고 그분의 피로 구원을 얻도록 하셨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뿐만 아니라 1장 12절에 보니까,“그리고 그들이 연구한 진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의 도움으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사람들에 의해 여러분에게 알려졌습니다.”라고 하였다.
자, 그러면 이런 구원의 진리를 깨달아 알고 믿게 된 성도라면 세상을 어떤 자세와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할까.
장래에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라.
사람이 장래의 어느 시간에 자신에게 임할 그 어떤 순간을 마음에 품고 생활한다면 생각과 말과 행실이 남다르게 될 것이다. 마치도 아기를 임신한 산모가 아기가 태어나기까지 보고 듣고 생각하고 앉고 눕고 들고 나는 매사를 삼가는 것처럼 말이다. 이건 거창하게 ‘태교’라는 용어를 쓰지 않더라도 동서고금의 모든 정상적인 모성애를 가진 여성이라면 그러하지 않겠는가. 그처럼 구원이란 무엇인지 복음을 깨닫게 된 성도라면 13절의 말씀처럼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며 지내는 것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이 세상에 사십일을 더 계셨다. 그리고 열한 제자가 보는 앞에서 승천하셨다. 승천하시면서 하신 약속이 성령 받기를 기다리라는 것이었다. “언제 다시 오실 것입니까”라는 제자들의 질문에 대하여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만 아신다”라는 대답을 남기고 하나님 아버지 곁으로 승천하셨다. 베드로는 13절에서 그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라는 것은 예수의 재림에 관한 말씀이다. 성도는 그 장래에 임할 은혜를 온전히 바라며 살아가야 한다는 강조이다. 입시생들이나 재수생들은 이렇게 화창하고 아름다운 봄날이 되어도 다른 생각, 허튼 생각할 여유가 없다. 왜냐하면 올 한해 성적 관리를 어떻게 하느냐와 다가오는 올해 말의 수능 시험을 어떻게 치루느냐에 따라서 내년, 2024년도의 봄이 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란 그러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거듭난 신앙으로 살아가는 성도라면 그래야 한다. 장차 주어질 영원한 유업을 상급으로 받아 누릴 성도라면 그래야 한다. 뭔가 달라야 한다. 7절의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상급으로 받아 누릴 성도라면 매 순간의 생활과 날마다의 삶이 달라야 한다. 때가 되면 주께서 각 사람에게 누리게 하실 영광스럽고 은혜로운 순간을 위하여 지금 세상을 살아가는 삶의 태도가 달라야 한다.
동성애의 문제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거론되는데 요즘은 마약 문제 또한 점점 심각해지고 있다. 10여 년동안 살던 미국이란 나라는 ‘총기 소지 문제’와 ‘마약 문제’가 심각한 나라 중의 으뜸이었다. 그 때나 오늘 날이나 큰 변화가 없다. 우리나라도 살인 사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미국처럼 몇 십명씩 총기 난사 사건으로 안타까운 죽음에 휘말리는 경우는 거의 없다. 마약 문제는 어떤가. 우리 가족은 필라델피아시 외곽에 살았다. 30-40분 정도 고속도로로 운전해 가면 시내에 갈 수 있는 거리였다. 입원 환자 문병이나 교우들 일터 심방을 위해서 필라델피아 시내에 들어가 보면 여기저기 마약에 찌들어 있는 길거리의 불쌍한 이웃들의 실상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얼마 가지 않아서 우리나라도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 마약 문제는 술이나 담배 문제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이다. 시각과 청각 장애, 편집증, 환각 증상, 메스버그 등의 증상이 심각하다. ‘메스 버그’(meth bug)란 피부 속으로 벌래가 기어다니는 듯한 증상이 계속되면서 피부를 끊임없이 긁어 대기 때문에 온몸이 피범벅이 되는 심각성에 빠지게 된다. ‘메스마우스’(meth mouth)라고 해서 치아가 심각하게 썪어 가기도 한다. 마약을 중단하고 나면 ‘플래시백 현상’이라고 해서 정신병에 시달리기도 한다. 최근에 강남의 학원가에서는 학생들에게 기억력 강화제라고 속여서 마약 성분이 들어 있는 음료수를 시음하게 하고 부모를 협박하는 사건이 있었다.
신앙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은혜 생활’이다. 은혜를 깨닫게 되면 세상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다. 우리가 ‘은혜 많이 받으세요’ 혹은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라는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성경이 말씀하는 ‘은혜’란 세상을 살아가면서 그 누군가에게 입은 신세를 갚기 위해서‘이 은혜를 어떻게 다 갚을 수가 있을까요’라고 말하는 차원의 그런 은혜가 아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라고 하였다.
손경민의 <은혜>라는 찬양의 가사를 보라.
“내가 누려왔던 모든 것들이
내가 지나왔던 모든 시간이
내가 걸어왔던 모든 순간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이 땅에 태어나 사는 것
어린아이 시절과
지금까지 숨을 쉬며 꿈을 꾸는 삶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내가 하나님의 자녀로 살며
오늘 찬양하고 예배하는 삶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축복이
당연한 것 아니라 은혜였소...
라고 고백한다.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거룩이 무엇인가.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거룩하게 살아가는 것인가. 14절에 보면 ‘사욕을 본 받지 말고’라고 했다. 2장 11절에 보면 “영혼을 거슬러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라고 하였다. 4장 2절에 보면 “사람의 정욕을 따르지 말라”고 했다.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갈5:19-21)라고 하였다.
사도 베도로는 레위기 11장 45절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인용하고 있다. 맞다. 하나님은 거룩한 영이시다. 거룩이란 죄와 악과 짝할 수 없는 생태를 설명하는 표현이다. ‘거룩’이란‘하기오스’(ἅγιος)는‘분리되다. 구별되다’는 뜻이다. ‘성도(聖徒), 성물(聖物)’사람이 복음을 깨달아 알고 구별되면 성도이다. 같은 물건이지만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구별되면 성물이다. 같은 시간이라도 하나님의 기대를 위하여 살면 거룩한 날 즉 성일(聖日)이다. 우리가 일요일이라 하지 않고 주일(主日)이라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처럼 하나님은 거룩을 요구하신다. 성부 성자 성령이 무엇인가. 하나님 아버지는 거룩하신 아버지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신 독생자 그리고 보내 주신 영은 거룩한 영이시다.
17절에 보니까 하나님은 외모로 보시지 않는다고 했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심판하신다고 했다. 그러므로 나그네의 인생길을 두려움으로 지내야 함이 맞다. 옳다.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로 죄 사함을 받은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룩하신 구원의 은혜를 깨달은 성도라면 믿음과 소망을 하나님께 두고 살아야 함이 마땅하다. 사도 베드로는 이것을 21절 끝에서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라고 하였다. 그렇다. 이것은 1장 3절에서 말씀하신 ‘산 소망’이다.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소망이다. 영원한 소망이며 값진 소망이다. <주 예수 나의 산 소망>이란 찬송을 부르자.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절을 <현대인의 성경>으로 먼저 보면 “여러분이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라 썩지 않을 씨로 된 것이며 영원히 살아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렇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다. 썩지 않을 씨로 된 것이다. 영원히 살아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 22절이 교훈하고 있다. “여러분은 진리에 순종하여 자신의 영혼을 깨끗하게 하였고 진심으로 형제를 사랑하게 되었으니 순결한 마음으로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자, 그러면 서로를 뜨겁게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가. 어떻게 사랑하며 살아가란 말씀인가. 여기서 강조하는 ‘뜨겁게’라는 말씀은 ‘쉬지 않고 열심히’라는 뜻이다. 22절의 ‘형제 사랑’이 헬라어로 ‘필라델피아’이다. 이것은 세상 만민을 향한 사랑이 아니다. 진리를 순종하는 자들 간의 사랑이다. 하나님 아버지를 통해서 그의 영혼이 깨끗해진 자들의 사랑이다. 거짓이 없는 복음의 가치를 깨달은 자들 간의 사랑이다. 말뿐인 사랑이 아니다. 겉으로만 그런 척하는 사랑이 아니다.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다”(요15:13)라고 하셨다.
마태복음 5-7장의 산상 수훈에 보면, 예수께서는 이웃사랑을 넘어서서 원수를 사랑하며 박해하는 자라도 위하여 기도하라고 하셨다.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겠느냐”라고 하셨다.
누가 네 오른편 뺨을 치거든 왼편도 돌려대라.
누가 너를 고발하여 속옷을 가지려고 하면 겉옷까지도 가지게 해라.
누가 너에게 오리를 억지로 가게 하면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해라.
누가 네게 구하면 주고 꾸려고 하면 거절하지 말라고 하셨다.
워치만 니(Watchman Nee, 1903- 1972)의 <영에 속한 사람>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계단식 농사를 하는 기독교인이 있었다. 저녁 나절 내내 논에 물을 댔다. 그런에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 보면 물 고랑을 터서 아랫 논에만 물이 흥건하고 자기 논에 댔던 물은 온데 간데 없어지곤 했다. 하도 속이 상해서 하나님께 기도드렸다. 하나님의 응답인 즉은 “여보게 자네가 아랫 논에 먼저 물을 대고 나서 자네 논에 물을 나중 채우면 속이 상할 것도 없지 않는가.”라는 음성이었다. 소유를 나누고, 재물을 나누고, 시간을 나누고, 경험을 나누는 것이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를 향하신 예수의 사랑은 자기 목숨을 십자가에 대속물로 내어 주신 사랑이다. 사랑의 실천은 상념이 아니라 열매요 결과이다. 주님 안에서 복된 나날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