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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신앙(벧전1:3-9) 2023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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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3-04-17 21:36 조회 2,791 댓글 0
 

                                 부활 신앙(벧전1:3-9)                2023. 4. 16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라면 베드로의 이름은 역사 속에 잊혀진 이름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던 그 날 아침 일찍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다 도망가고 말았다.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장담하였던 베드로도 도망가고 말았다. “주님이 죽으시는 곳에 나도 함께 죽을 것입니다.”라고 큰소리치던 베드로인데 예수를 모른다고 부인하고, 배반하고, 저주하고 도망가 버렸다. 

 

그랬던 베드로인데 어떻게 그가 베드로전후서를 쓰는 주인공이 되었을까. 예수의 부활이 아니었다면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역사 속에 기억될 이유가 없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에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을 몇 차례 만나 주셨다. 특별히 베드로에게는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는 세 번의 분부를 통해서 사명을 새롭게 하셨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던 날 베드로는 그 현장에 없었다. 그런 베드로인데 나중에 회개하였다. 예수의 승천을 목격하였다. 성령 받기를 기도하며 기다리던 120성도들과 함께 기도하던 중에 성령의 충만함을 체험하였다. 그 날 이후로 십자가에 거꾸로 달려 죽기까지 예수의 부활 사실을 증거하는 복음 전도자가 되었다. 

 

예수의 부활이 역사적인 사실이 아니었다면 이 땅에 기독교는 존재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의 부활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 기독교 복음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그리스도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기독교인의 믿음은 헛것이다.

모든 사람은 여전히 죄 가운데 있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살다가 죽은 자들은 망한 자들이다.

바울을 비롯하여 예수의 부활을 믿고 전파하던 자들은 더욱 불쌍한 자이다. 

 

라고 분명하게 부활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독교의 바탕은 예수의 부활이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한다”고 말하는 그 근본은 예수의 부활에 근거하는 것이다. 만약 예수의 부활이 사실이 아니라면 지난 이천년의 기독교는 사기 집단에 불과할 것이다. 

 

오늘 읽은 본문을 보자. 베드로는 왜 하나님을 찬송한다고 말하고 있나. 하나님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찬송한다는 것이다. 예수는 그를 믿는 자들의 구주시다. 예수는 그를 구주로 믿는 자들의 메시아이시다. 그리스도이다. 예수는 그를 믿는 자들의 “왕 중의 왕이시며 제사장 중의 대 제사장이시며 선지자 중의 선지자이시다”

 

베드로가 하나님 아버지를 찬송하는 이유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는 부활의 첫 열매이다. 자, 그러면 예수의 부활은 그를 믿는 자들에게 어떤 신앙의 열매와 복을 주시는가. 

 

 

거듭난 자의 산 소망(所望).

“우리를 거듭 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라고 하였다. 성도가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덧입게 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다. 내가 스스로 내 죄를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고 하나님 안에서 새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은 놀라운 하나님의 선물이다. 이것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6장 11절에서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는 살아 있는 자”라고 설명해 주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게 된 성도의 소망이란 세상적이고 세속적인 정도의 소망이 절대로 아니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는 그냥 소망이라고 하지 않고 일관되게 ‘산 소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렇지 않나. 소망이 다 소망이 아니다. 우리는 어른이나 어린이나 누구나 다 각기 다른 소망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러나 그 소망이란 것이 시간과 세월이 지나다 보면 별 것이 아닌 소망이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가. 

 

대개는 좋은 학교, 좋은 직장, 좋은 집, 좋은 차 등등... 사람들은 거의 누구나 비슷 비슷한 소망을 가지고 산다. 그렇지 않나. 월세 사는 이들은 전세, 전세 사는 이들은 내 집 마련, 내 집 마련한 경우에는 화장실 둘 있는 집, 좁은 집에 사는 이들은 좀 더 넓은 집을 마련하는 게 소원 중의 소원이다.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고 여유 없이 사는 이들은 돈 걱정 좀 하지 않고 여유롭게 살아 보는게 소원 중의 소원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대개는 거의 다 상대적이다. 이 세상에 완전한 만족을 줄 수 있는 것이란 그 어디에도 없다. 

 

말레이시아의 성공한 여성 사업가인 파르하나 자흐라는 5번째 생일을 맞은 딸에게 40만7000달러(5억3200만원)에 달하는 '메르세데스 지바겐'(Mercedes G-Wagon)을 선물했다. 딸이 학교 가는 것을 싫어하자 딸을 설득하기 위해서 준비한 깜짝 선물이라고 했다. 세상에는 태어나면서 그런 환경에서 그런 금수저로 자라나는 애들도 있기는 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너무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성경이 말씀하는 ‘산 소망’이란 그런 정도 차원의 소망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렇지 않나. 사람이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우주 여행을 갈 정도의 경제력을 가지고 산다고 해도 인간다움이라는 것은 그런 것으로 비교하거나 그런 것으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기대하시는 하나님의 자녀의 삶이란 어떤 모습일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와서 이룩하길 원했던 산 소망이란 무엇일까. 예수께서는 승천하시면서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셔서 성령을 받은 후세의 성도들로 하여금 주 안에서 어떤 삶을 살아가길 기대하신 것일까.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간다. 세월이 흐르는 물처럼 흘러간다. 벌써 사월 중순이다. 보름만 지나만 올 2023년도의 삼분의 일의 시간이 지나간다. 어린 시절과 청년의 때가 꿈처럼 지나간다. 베드로도 그걸 알았다. 그래서 베드로전서 1장이 끝나기 전에 이사야서 40장 6-8절의 말씀을 인용하였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벧전1:24-25)

 

이처럼 덧 없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성도가 품어야 할 참 소망, 비교할 수 없는 소망, 영원한 소망이 무엇인가. 우리는 이렇게 찬송하지 않나. “이 몸의 소망 무언가 우리 주 예수 뿐일세”그러면 다시 자신에게 물어 보자. “요즘 나의 소망은 무엇인가, 올해 나의 소망은 무엇인가. 지금 나의 소망은 무엇인가.” 물론 사람은 시시 때때로 소망이 바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면 성도의 산 소망은 공통된 소망이어야 한다. 그래야 맞다. 그 소망은 썩지 않는 소망, 더럽지 않는 소망, 쇠하지 않는 소망이어야 한다. 

 

창세기 25장에 보면, 사냥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온 배가 몹시 고팠던 에서의 소망을 당장 고픈 배를 채우는 것이었다. 그래서는 동생 야곱의 흥정을 쉽게 받아들이고 말았다. 동생 야곱이 퍼주는 따끈한 팥죽 한 그릇 앞에서 형 에서는 장자권을 바꾸어 버린 것이다. 에서는 어떻게 하다가 장자권을 동생에게 넘겨 주고 말았는가. 소망이 불분명한 삶을 살면 그 누구라도 에서처럼 되고 말 수 있다. 

 

소망이 뭔가. 소망이란 마음에 품은 꿈이요 생각을 사로 잡고 있는 기대와 열망이다. 소돔과 고모라 성에 하나님의 두 천사들이 방문하였다. 창세기 19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롯은 두 천사를 집안으로 강권하여 모셔 들이고 정성스럽게 음식을 준비하여 대접하였다. 깨끗한 잠자리도 마련하였다. 그런데 소돔 성 사람들이 낯설은 두 사람이 롯의 가정에 온 것을 소문으로 들었다. 소돔 성 사람들이 떼로 몰려와서 두 사람을 내어 놓으라고 롯을 다그쳤다. “오늘 밤에 네게 온 사람들이 어디 있느냐 이끌어 내라 우리가 그들을 상관하리라”(창19:5)라고 요구했다. 여기 ‘상관하리라’라는 말은 ‘동성연애하겠다’라는 말이다. 이는 그 당시의 소돔과 고모라 사람들의 생활상을 입증하는 장면이다. 

 

두 천사는 롯에게 장차 임할 하나님의 심판을 전하였다. 죄악이 가득한 소돔 성을 하나님이 멸망시키실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롯은 급하게 아내와 두 딸과 두 사위들에게 천사의 말을 전하였다. 그러나 두 사위들은 장인 롯의 말을 농담으로 여겼다. 롯은 급하게 아내와 두 딸과 함께 소돔 성을 빠져나갔다. 하나님은 뒤도 돌아보거나 들에 머물지 말고 산으로 도망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도망하던 중에 유황과 불이 비처럼 소돔과 고모라 성에 내렸다. 롯의 아내는 천사들을 통한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잊어버리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 순간에 롯의 아내는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다. 롯의 아내는 왜 소금 기둥이 되었는가. 누가복음 17장에 보면 예수께서도 롯의 아내에 대하여 말씀하신 적이 있으시다. 

 

“또 롯의 때와 같으리니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짓더니 롯이 소돔에서 나가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오듯 하여 그들을 멸망시켰느니라 인자가 나타나는 날에도 이러하리라 그 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무릇 자기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 밤에 둘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얻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니라”(눅17:28-35)

 

그렇다. 믿음으로 살아가노라 말하면서도 주 안에서 거듭난 자의 분명한 산 소망을 갖고 살지 못한다면 그 누구라고 불행해지고 말 것이다. 주 안에서 참된 소망, 영원한 산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영원한 유업(遺業)의 상속(相續).

유업이 무엇인가. 조상이나 부모에게 물려받는 그 모든 것을 유업이라고 한다. 우리는 대개 유업 혹은 유산이라고 하면 물질적인 것을 먼저 생각할 것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가 본문에서 강조하려는 ‘유업’이란 그런 정도의 차원의 유업을 언급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유업이나 유산이란 영원한 것이란 없다. 그러나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이 있다. 하나님은 그런 유업을 하나님의 자녀들이 이어 가길 원하신다. 그것은 성도들을 위하여 “하늘에 간직하신 것이라”라고 하였다. 모세 시대의 광야 백성들로 하면 요단 강을 건너가서 차지할 가나안 땅이 약속의 땅이요 유업으로 이을 땅인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로 세월이 흐르면서 하나님이 약속하신 유업이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그 자체인 것을 점점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다윗은 “여호와는 나의 산업과 나의 잔의 소득이시니 나의 분깃을 지키시나이다.”(시16:5)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 자신이 다윗의 전부라는 고백인 것이다. 아삽의 시편인 시편 73편에 보면 “내 육체와 마음은 쇠약하나 하나님은 내 마음의 반석이시오 영원한 분깃이시라”(시73:26)라고 고백하였다. 디도서 3장 7절에 보면 “영생의 소망을 따라 상속자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라고 교훈하였다. 맞다. 성도의 산 소망과 유업이란 ‘영생’그 자체인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유업을 상속한다는 의미는 곧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지니”(롬8:17) 라고 하였다. 성도란 각 사람이 하나님 안에서 구원 받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구원 받을 상속자”(히1:14)인 것이다. 이 모든 말씀들을 종합해 보면 결국 성도의 산 소망과 하나님으로부터 상속 받을 영원한 유업이란 미래적이며 내세적인 것이다. 요한 계시록에 보면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 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들을 상속으로 받으리라”(계21:6-7)라고 약속해 주셨다. 

 

 

믿음으로 인한 상급(賞給).

5-9절까지의 말씀을 묶어서 묵상해 보면 ‘믿음’의 결국이 상급으로 주어진다는 것이다. 5, 7, 9절에서 반복적으로 ‘믿음’ 에 대하여 언급하는데 특히 9절에 보면 ‘믿음의 결국’이 있다고 있다.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장차 영원한 유업을 상급으로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주를 믿는 믿음, 주를 향한 믿음을 분명하게 하여야만 한다. 왜냐하면 말세가 되면 될수록 ‘시험, 근심, 연단’이 끊임이 없이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성도를 능력으로 보호하신다. 하나님은 불 같은 시험을 잘 견디고 이겨낸 성도에게 오히려 큰 기쁨을 얻게 하신다. 확실한 믿음으로 살아가면 하나님은 성도에게 “칭찬과 영광과 존귀”를 얻게 하시리라고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는 어떤 형편, 어떤 처지, 어떤 경우의 무슨 일을 만날지라도 “믿음을 가지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며 살아 갈 줄 아는 비결을 익혀야 한다.”9절의 말씀 그대로 믿음의 결국은 ‘영혼의 구원’이기 때문이다. 

 

베드로 뿐만 아니라 사도 바울도 이와 같은 권면을 분명하게 하고 있다.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롬8:18)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 받았던 종의 비유처럼 주인이 돌아와서 계산 하자 할 때에 칭찬 받고 더 큰 상급을 받아 누리는 은혜의 주인공으로 살아가자. 주인의 뜻을 제대로 헤아리지 못해서 받은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 두었던 어리석은 종처럼 살아서는 안될 것이다. 각 사람에게 주어진 은사와 역량이 녹 슬기 전에 달아서 없어지기까지 부활 신앙을 간직하고 충성과 헌신을 계속해 가는 아름답고 향기나는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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