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과 부활(골3:1-4) 2023. 4. 9 부활주일
미국 버니지아주의 어느 교회학교에서 부활절 행사가 열렸다. 교회학교 선생님들은 자기 반 학생들에게 달걀 모양의 캡슐 안에 생명을 가진 것을 담아 오라고 했다. 어떤 어린이는 예쁜 꽃을 담아 가지고 왔다. 또 어떤 어린이는 예쁜 나비를 담아 가지고 왔다. 파란 새싹을 뜯어서 담아 온 어린이도 있었다. 그런데 그들 중에는 필립이란 이름의 좀 모자라는 어린이가 있었다. 필립은 평소에 늘 놀림도 많이 받고 매사에 적응도 느렸다. 행동도 느렸고 말도 어눌했다. 그날도 필립은 망설이면서 달걀 모양의 캡슐을 내어놓지를 못했다. 한참 후에 선생님이 필립을 설득해서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달걀 모양의 캡슐을 선생님 손에 옮겨 받아 들었다. 캡슐을 연 순간 그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텅 비어 있었다. 선생님은“필립! 어째서 아무것도 담아 오지 않은거지”라고 물었다. 그 때에 필립이 “선생님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었었쟎아요.”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렇다. 예수를 장례하였던 무덤은 사흘 만에 빈 무덤이 되었다. 이 세상의 앞서 죽어간 모든 사람은 무덤이 있다. 물론 전쟁 중에 어느 산하에서 죽었고 시체도 찾지 못한 군인의 죽음도 있다. 우리나라에 복음을 전파한 감리교회의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목사는 1885년 4월 5일 27살 때에 갓 결혼한 아내와 함께 제물포에 도착하였다. 17년 후에 1902년 6월 11일, 44살에 서해안 충청도 앞 바다에 배 사고로 숨졌다. 그의 시체는 찾지도 못했다. 그러나 부활 신앙의 증인으로 이 땅에 와서 17년간 사역한 그의 선교 열매는 상상을 초월한다. 배재학당, 이화학당, 연세 학당을 비롯하여 인천 내리교회와 서울 정동제일교회는 그가 친히 담임 목사요 설립 목사로 목회하였던 곳이다. 그를 통해 기독교의 부활 복음을 받아들인 선교의 열매는 수를 헤아릴 수 조차 없을 정도로 많고 크고 풍성하다.
요즘은 시체를 화장하여 산이나 바다에 뿌려 버리면 무덤이란 물론 없을 수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전통적으로는 동서고금에 앞서 죽은 이들은 무덤이 있다. 공자, 석가모니, 마호메트 다 마찬가지로 무덤이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는 무덤이 없다. 예수의 시체를 장례하였던 무덤은 비어 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다. 구약 시대를 배경으로 하면 사두개인들은 부활이나 천국이나 천사의 존재를 믿으려 하지 않는 자들이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달랐다. 바리새인들은 천국, 천사 그리고 부활을 믿는 이들이었다.
부활은 역사적인 사실이다. 사실이란 사전의 정의는“지난 날 있었던 일 그리고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말한다. 사실이란 “있다 혹은 없다”라고 설명하면 된다. 사실에 대한 목격자의 목격담은“그렇다 혹은 아니다.”라고 설명하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우리의 마음에 있는 사랑이란 것도 “있다 혹은 없다”라고 설명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이란 것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사랑의 무게를 달아 볼 수도 없고 사랑의 크기를 잴 수도 없다. 그러나 사랑이란 분명히 존재한다.
사실이란 과학적 사실과 역사적인 사실 이 두가지로 나눌 수 있다. ‘과학적인 사실이란 객관적 사실, 실증적 사실’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다. 또 하나의 사실은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근대사를 예로 들면‘3. 1 독립운동, 8. 15 해방, 6. 25 전쟁, 5. 16혁명, 10. 26 사건, 12. 12사건’등은 모두가 아는 역사적인 사실이다.
사실인데 사실이 아니라고 부정하려면 그것을 부정하는 입증이 가능해야 한다. 그러나 역사의 인물 중에 ‘세종 대왕, 이순신’등이 역사적인 인물인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역사적인 입증은 불가능하다.
성경에는 역사적인 사실의 기록으로 가득하다. 가령 모세 시대의 출애굽과 광야 사십년, 여호수아 시대의 요단강 도하 사건과 여리고 성 함락 사건 등이 역사적인 사실이다. 지난 사순절 기간에 오래도록 묵상한 사무엘상의 사무엘, 사울 왕, 다윗의 이야기가 모두 역사적인 3천년 전의 사실들이다.
이처럼 지금부터 이천 년 전에 있었던 예수의 탄생과 생애와 부활과 승천도 역사적인 사실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부활을 부정할 수 있는 입증이란 불가능하다. 신약성경은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는 내용으로 가득하다.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은 사복음서와 사도행전과 각 서신서에 가득하다. 넘쳐난다. 고린도전서 15장을 ‘부활장’이라고 한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목격한 이들의 증언에 대하여 기록해 주고 있다. <현대인의 성경>으로 같이 읽어 보자.
“형제 여러분, 내가 여러분에게 전한 기쁜 소식에 대하여 다시 한번 여러분을 깨우치려고 합니다. 여러분은 이 기쁜 소식을 받아 그 위에 여러분의 신앙을 굳게 세웠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내가 전한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았으면 그 기쁜 소식으로 여러분은 구원을 받을 것입니다. 나는 내가 받은 가장 중요한 것을 여러분에게 전하였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성경 말씀대로 우리 죄를 위해 죽으시고 무덤에 묻히셨다가 삼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서 그분은 베드로에게 나타나셨고 그 후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으며 그 다음에는 오백명이 넘는 형제들에게 일시에 나타나셨는데 그들 가운데는 죽은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습니다. 그 후에는 야고보에게 나타나셨고 그 다음에는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셨으며 맨 나중에는 부족하기 짝이 없는 내게도 나타나셨습니다. 나는 사도들 중에 가장 보잘것 없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기 때문에 사도라고 불릴 자격마저 없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내가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며 내게 주신 그분의 은혜가 헛되지 않아 내가 다른 모든 사도들보다 더 많이 일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내가 한 것이 아니라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고전15:1-10)
2023년 부활절 예배를 드리는 이 시간에는 사도 바울의 서신서 중의 하나인 골로새서의 말씀을 잠시 묵상하려고 한다. 오늘 말씀의 제목을 <죽음과 부활>이라고 정하였다. 이 세상에 죽음을 원하는 이들은 없다. 그러나 누구나 반드시 죽을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의 탄생이 역사적인 사실이듯이 우리 각 사람은 나이에 상관 없이 언젠가는 죽음 앞에 서게 될 것이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죽는다. 영웅호걸 절세가인 그 누구라도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 오래 살다가 죽든지 아니면 어려서 죽든지 청년기에 죽든지 모든 사람을 누구나 다 죽는다. 성경은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히9:27)라고 하였다.
자, 그러면 “죽음은 무엇이며 부활이란 무엇이며 영생이란 무엇이며 구원이란 무엇인가” 그런 주제의 말씀을 좀 더 나누도록 하자.
사도 바울은 부활을 믿지 않던 유대교 율법주의자요 바래새인이었다. 그런 그가 다메섹 체험을 통해서 예수의 부활 복음을 강력하게 전하는 선교의 사람으로 평생을 살다가 순교 당하였다. 골로새서의 강조하는 부활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란 주 안에서 새 생명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기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라는 근거는 골로새서 2장 12절에 기초한다. “너희가 세례로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고 또 죽은 자들 가운데서 그를 일으키신 하나님의 역사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 안에서 함께 일으키심을 받았느니라.”
물론 여기서 말씀하는 세례란 물 세례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성도란 물 세례와 함께 성령 세례를 받아야만 한다. 세상 사람들 중에서 그 누군가가 세례를 받기 위해 신앙을 고백하고 물 세례를 받으려 할 때에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 속에 역사하신다. 따라서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죄인됨을 시인하고 고백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면 예수를 통한 죄 사함을 받게 될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마음에 역사하셔서 거룩한 길을 가고자 하는 성도의 삶으로 이끌어 가기 시작하신다. 우리는 이것을 ‘은혜를 받았다. 성령이 임했다.’라는 등으로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1절의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란 상태는 일회적인 것일뿐만 아니라 지속적인 영적 체험이며 영적 사건의 연속을 의미한다. 이는 전적으로 하나님을 통한 은혜의 경험이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증거 중의 하나는 1절 말씀처럼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이란 그 증거를 지켜가며 생활하는 것이다. 그것은 “위의 것을 찾으라”라는 성경의 명령에 충실하는 삶을 말한다. 맞다. 신앙생활이란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는 상태’를 지속해 나가는 생활을 의미한다. 부활 신앙으로 살아가는 증거는 이것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이 세상 것에 마음을 다 빼앗기고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에 푹 빠져서 세상 낙을 즐기기를 너무 좋아한다면 그는 ‘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이란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자답게 살아가는 것이다.’이런 은혜 생활이 계속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심.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증거’는 3절이 대답이다. 나는 죽고 내 안에 예수의 생명이 자리 잡은 상태로 살아가는 것이어야 부활 신앙인 것이다. 내 안에 주어진 새 생명은 3절의 말씀대로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생명’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란 1절 끝의 말씀처럼 ‘부활하신 사십일 후에 승천하여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감추어진 생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 남아 있는 우리는 내 안에 예수의 그 영원한 생명이 함께 계셔서 장차 때가 되면 예수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어렸을 적이 우리 시골 마을에는 누에를 키우는 집이 많았다. 누에는 뽕나무 잎을 먹고 자란다. 누에나방이 수백 개의 알을 낳는다. 그 알을 20도C 정도의 온도를 유지해 주면 2주 정도 후에 개미누에가 태어난다. 4주 동안 뽕잎을 먹으며 커 간다. 네 번 잠 자고 네 번 허물을 벗는다. 그 때 그 때마다 채반을 갈아 주고 누에 똥을 깨끗하게 치워준다. 쉬파리나 쥐가 드나들지 못하게 정성을 다하여 관리한다. 다 자란 누에는 입에서 명주실을 뽑아서 집을 만든다. 그것을 고치라고 한다. 누에 한 마리가 입으로 뱉어낸 고치 한 개의 실의 길이는 자그마치 1. 5KM나 된다. 그 고치를 통해서 사람들은 명주실을 마련해서 고운 비단을 생산하게 된다.
알과 애벌레와 나방의 과정이 신비하다. 달걀에서 병아리가 삼주 만에 부화하는 것도 신비하다.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그런 신비가 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 우리 각 사람이 엄마의 태중에 잉태되고 이 땅에 태어나서 이렇에 살아가는 것이 신비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진 성도의 새 생명에 신비가 있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신자라면 분명히 고백해야 하는 사실이 이것이다. 3절 말씀 그대로 “나는 죽었고 내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는 이 분명한 사실을 믿으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국제선 비행기를 타면 3만 5천에서 4만 피트 이상의 높이에서 날아간다. 거의 10km 높이에서 비행한다. 10시간 혹은 15시간 씩 계속하여 비행한다. 그 안에서 먹고 자고 쉬고 영화도 보고 책도 보고 글도 쓰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 비행기를 타고 있는 동안에는 이 땅을 떠나 있는 것이다. 이처럼 성도는 이 세상에서 살지만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며 살아가는 자들이어야 한다. 땅의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
미국 워싱턴 D.C의 큰 교회 담임 목사 비행기가 레이건 공항으로 하강하는데 도저히 교회 건물을 찾을 수 없었다. 그런데 생각했다. 그 교회의 성도들이 백악관, 상하원, 펜타곤 등지에서 근무하는 이들이 많았다. 하나님은 성도들로 하여금 교회를 통해서 복음을 알게 하시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게 하신다. 교회 건물은 않보여도 웅장하게 눈에 들어오기 시작하는 백악관과 의사당 건물을 보며 마음에 긍지과 보람과 감사한 생각을 갖게 되었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가정과 세상에서 그리스도인답게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누릴 나중 영광.
이 세상에는 질병과 슬픔과 고통과 사고와 사건이 끊임이 없다. 요한 계시록 21장 4절의 말씀처럼 이 세상에는 “눈물, 사망, 애통, 아픔” 등이 끊임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 주실 것이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라는 약속의 말씀을 이루어 주실 것이다.
<아무도 원하지 않는 선물>의 저자인 영국 외과 의사 폴 브랜드는 “고통은 하나님의 선물이다”라고 말한다. 어느 누가 고통스러운 삶을 원하겠는가. 그러나 살아가다 보면 비바람이 불고 폭풍우가 휘몰아치는 날씨처럼 고난과 고통과 시련의 날들을 겪게 된다. 그러나 지내 놓고 보면 고난과 고통과 시련 가운데에도 하나님의 숨겨진 은혜와 복이 있다는 것이다.
미 기독 언론인 ‘크리스채너티 투데이(CT)’의 편집인이기도 한 핍립 얀시(Philip Yancey, 1949-)는 지난 2월에 파킨슨병을 진단받았다. 필립 얀시는 친구가 응원차 보낸 시편 71편 9절 말씀에서 큰 위로를 받게 되었다.“늙을 때에 나를 버리지 마시며 내 힘이 쇠약할 때에 나를 떠나지 마소서”라는 말씀이다.
세계적인 선교단체 예수전도단(YWAM) 창립자인 로렌 커닝햄(Loren Cunningham, 1935-) 목사는 폐암 4기 진단을 받았으나 사역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조직 검사와 CT 촬영 결과, 폐에 느리게 자라는 일부 결절이 암이란 사실이 밝혀졌다. 암세포가 폐 외에도 뼈와 림프계 등 광범위하게 퍼졌다. 그런데도 그는 “기적적인 것은 암세포가 뇌까진 퍼지지 않았다”고 말하며 예전처럼 날마다의 일과를 소화해 내고 있다.
뉴욕 맨해튼 리디머장로교회의 설립목사이며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집필한 기독교 변증가인 팀 켈러(Timothy J. Keller, 1950-) 목사는 3년 전부터 췌장암 4기로 투병 중이다. 지난해부터는 갑상선암도 발견되었다. 그는 미 국립암연구소에서 면역치료제 임상시험에 참여하는 등 꾸준한 치료를 받고 있다. 그는“과장처럼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암 진단을 받기 전의 기도 생활과 영적인 삶으로 결코 돌아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암 투병으로 인해 시편 90편 14절인 ‘아침에 주의 인자하심이 우리를 만족하게 하사 우리를 일생 동안 즐겁고 기쁘게 하소서’ 구절을 진정으로 경험하게 됐다”라고 말했다. “죽음의 순간이 다가 오고 있기에 평생의 신앙 생활과 일상의 모든 영역에서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야가 완전히 새롭게 바뀌었다.”라고 말했다.
목 베임을 당한 순교자의 길을 간 사도 바울은 4절에서 이렇게 교훈하고 있다. “우리 생명이신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그 때에 너희도 그와 함께 영광 중에 나타나리라.”
죽음과 부활과 영생과 천국의 분명한 믿음과 확신을 가지고 나그네 인생길에서 복음으로 승리하는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