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집을 채우라(눅14:15-24) 2023. 3. 5
예수께서는 모든 교훈을 비유(比喩)로 말씀하셨다. 오늘 읽은 본문의 비유는 ‘큰 잔치의 비유’라고 제목 붙여진 내용이다. 비유란 항상 그 비유를 통해서 전달하려고 하는 진리와 교훈의 명확한 전달을 목표로 삼는 것이다. 그러면 오늘 읽은 본문의 비유 내용과 그 교훈이 무엇인가.
큰 잔치에 초청받은 이들.
어떤 사람이 큰 잔치를 베풀었다. 그리고 많은 사람을 초청하였다. 누구나 와도 그만 안 와도 그만 그런 정도의 잔치라면 안가도 그만이다. 그러나 정중하게 초대받은 잔치 자리에는 응급 상황이 아니라면 반드시 참석하여 그 잔치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 축하하고 축복해야만 한다.
그런데 정작 잔칫날 잔치 시간이 다가오기에 다급해진 주인은 종들을 보내서 초대받은 손님들의 안부를 물었다. 그런데 제각각 못 오게 된 사연을 말하는 것이었다.
“한 사람은 ‘나는 밭을 샀으니 나가 봐야겠습니다. 용서하십시오.' 라고 대답했다. 또 한 사람은 ‘나는 소 다섯 겨리를 사서 시험하러 가는 중입니다. 용서하십시오.' 라고 말했다. 다른 한 사람은 ‘나는 방금 결혼을 해서 갈 수가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 비유에서 말하는‘큰 잔치’는 천국을 말한다. 잔치를 베풀 준비를 한 ‘어떤 사람’은 하나님이시다. 잔치 시간이 가까워오자 주인의 명령을 따라서 초대받은 이들에게 일일이 찾아다니며 큰 잔치에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라고 말하는 종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상징한다.
그런데 정작 초대받은 사람들이 큰 잔치날 잔치 시간이 다 되도록 한 사람도 응하지 않았다. 밭을 샀다. 소 다섯 겨리를 샀다. 장가 들었다 라고 말하면서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큰 잔치의 초대를 거절하는 자들은 유대인들을 상징하는 것이다.
오늘 이 비유를 말씀하신 배경은 이렇다. 누가복음 14장 1절을 보자. 어느 안식일 날에 예수께서 한 바리새인의 지도자의 집에 가셨다. 저들과 함께 떡을 잡수시기 위해서였다. 궁금해진 사람들이 그 집을 넘석 거리며 엿보고 있었다. 그 날 그 집에 예수 앞에 수종병 든 한 사람이 있었다. 한글 개역 성경에는 고창병이라고 했다. 몸의 이곳 저곳에 물이 고이고 몸이 붓고 살이 썩어 가는 무서운 병이다. 성경에 고창병 즉 수종병 든 사람 이야기는 여기 한 번 나온다. 예수는 율법교사들과 바리새인들이 보는 앞에서 안식일인데 그를 깨끗하게 고쳐서 보내 주셨다. 수종병(Dropsy) 환자를 고치기 전에 “안식일에 병 고쳐 주는 것이 합당하냐 아니하냐”고 물으신 후에 잠잠한 저들 앞에서 보란 듯이 수종병자를 깨끗하게 고쳐서 보내셨다.
그리고 이어서 해 주신 두 가지의 비유 중의 하나가 ‘큰 잔치’ 비유이다. 이 비유 앞에서는 잔치 자리에 청함을 받으면 높은 자리에 먼저 앉으려 하지 말고 차라리 끝 자리를 찾아가서 앉으라는 교훈으로 겸손의 가치를 가르쳐 주셨다. 그 비유 후에 하신 말씀이 누가복음 14장 12절의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 지고 가지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라는 말씀이시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부한 이웃 보다는 “가난한 자들과 몸이 불편한 자들과 저는 자들과 맹인들을 청하라”(눅14:13)는 교훈과 함께 천국은 어떤 자의 것인가를 가르치셨다.
그 안식일에 바리새인 지도자의 집에서 예수와 함께 떡을 떼며 음식을 먹던 사람 중의 하나가 이 말을 듣고 말했다. “ 하나님의 나라에서 잔치 음식을 먹는 사람은 참 행복하겠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비유로 해 주신 말씀이 오늘의 본문이다. 여기 바리새인 중의 한 사람인 유대인이 한 말은 자신은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과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고 자신하며 오만한 마음가짐으로 말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큰 잔치에 초청을 받았으나 “땅을 샀다. 소 다섯 겨리를 샀다. 장가 들었다”라고 말하며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고 큰 잔치의 초대에 응하지 않은 자가 바로 유대인들이라고 지적하신 것이다.
그렇지 않나. 오늘 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부모의 신앙, 조상들의 신앙, 혹은 배우자의 신앙 등을 운운하며 심지어는 “나도 과거에 기독교 학교 즉 미션 스쿨 출신이다” 라고 말하면서 정작 주님이 기대하시는 신앙생활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일상을 살아가는 이웃들이 점점 늘어 가고 있다. 자기 자신은 성경에 대하여 알만큼 안다. 교회에 다닐 만큼 다녀 봤다. 난 지금 이렇게 살아도 천국 갈 준비 다 해 놓고 살고 있으니 내 걱정은 말아라. 뭐 이런 식으로 살면서 우리 집안에도 목사도 있고 장로와 권사는 흔하고 나도 성경도 알고 교회도 안다. 그러면서 자신의 지금의 모습을 매우 낙관적으로 보는 이들이 우리 주변에는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예수의 비유에서 강조하는 첫 교훈이 바로 그런 내용이다. 아무리 아브라함의 후손이고 아무리 유대인일지라도 천국 백성답게 하나님의 기대에 부응하며 살아가지 못하면 큰 잔치로 비유하는 천국과 상관이 없는 자가 되고 만다는 가르침인 것이다.
누구든지 모셔 오라.
큰 잔치에 초대받은 이웃들 중에서 아무도 오지 못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종은 서둘러 돌아와서 주인에게 알렸다. 그러자 주인은 몹시 화가 났다. 그리고 하는 말이 “빨리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고 명하였다. 이미 큰 잔치에 풍성하고 고급진 음식을 잔뜩 차려 놓았으니 이 음식이 상하기 전에 시내의 거리와 골목을 찾아다니면서 그 누구라도 데려오라고 명령한 것이다.
예수께서 비유에서 사용하신 표현의 ‘시내’란 사회 전반의 그 누구나 다니는 넓은 길을 의미한다. 또 ‘골목’이란 사회의 소외 계층이 드나드는 뒷 골목 같은 곳을 말한다. 예수는 이 비유를 통해서 유대인이 기득권층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사두개인들이 늘 무시하고 깔보았던 사회의 버림받고 비천한 사람들이 완고하고 패역하고 거만한 율법학자들 대신에 천국의 새로운 백성이 될 것이라는 새로운 사실을 교훈해 주신 내용이다.
그렇지 않나. 예수께서 이 땅에 와서 활동하시던 그 당시에도 산헤드린 공회원이나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을 비롯한 율법학자들이 회개하고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로 영접한 경우는 그리 흔하지 않다.
오히려 각색 병자와 귀신 들렸다가 고침을 받은 자들과 창기와 세리와 같은 사회의 소외계층민들 중에서 허다한 사람들이 예수를 따르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였다. 그렇지 않나. 내 배가 부르고 내 등이 따뜻한데 ‘주여 주여’하며 살아갈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당장 가정이 평안하고 재물이 넘쳐나고 아들딸 잘 자라나고 내 몸 건강하고 직장과 사업이 안정되어 있는데 밤마다 예배당에 나와서 금식하며 밤을 새워 가며 목소리 높여서 기도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예수 때에 예수를 소문에 듣고 찾아 나선 이들은 누구나 다 사연이 있는 사람들이었다. 가령 누가복음은 4장에 가서야 예수의 본격적인 사역의 내용이 담겨 있다. 예수는 고향 나사렛에 방문했다가 고향 사람들에게 배척을 받으셨다. 그리고 찾아간 곳이 갈릴리의 가버나움 동네였다. 안식일이 되었다. 말씀을 가르치시는데 사람들이 놀라워했다. 그 회당에 더러운 귀신들린 사람이 있었다. 늘 크게 소리를 질러 대고는 했다. 안식일에 예수를 회당 안에서 만는 그 귀신 들린 사람은 “나사렛 예수님,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우리를 없애려고 오셨습니까? 나는 당신이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임을 압니다.' 하고 외쳤다.”그 때에 예수께서 그에게 들어가 있는 귀신을 꾸짖으며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하고 명하셨다. 그러자 귀신이 그 사람을 무리 가운데에 넘어 뜨리고 떠나갔다. 다행히 그 사람은 다치지 않고 깨끗이 나았다. 그날 이후로 예수의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예수께서는 회당에서 나가셔서 중한 열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베드로의 장모를 찾아 갔다. 베드로의 장모는 마침 사위 베드로의 집에 머물면서 중한 열병으로 고생하고 있었다. 예수께서 꾸짖으시니까 베드로의 장모가 앓던 심한 열병이 떠나갔다. 베드로의 장모는 그 자리에서 힘을 얻고 일어나서 각종 음식을 잘 차려서 예수와 열 두 제자들을 융숭하게 대접하였다. 해질무렵이 되자 사람들이 소문에 듣고 예수께 몰려 들었다. 온갖 병자들을 데리고 왔다. 예수께서는 일일이 그들의 머리에 안수하여 고쳐 주셨다. 여러 사람에게서 귀신이 떠나갔다.
이처럼 소문을 들은 임금이나 방백이나 율법학자들이 예수를 찾아온 것이 아니었다. 소문을 들은 무리들은 집안이나 이웃의 병든 자들과 귀신들린 자들을 예수께 데리고 왔다. 예수는 저들을 일일이 고쳐 주셨고 예수의 소문은 점점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어제, 토요일 새벽 기도 후에 오전 10시 30분에 다시 교회에 왔다. 4층 카페에서는 단원들이 가득히 모여서 팜트리 오케스트라 악기를 연습하는 소리가 예배당 계단에 가득찼다. 식당에서는 주일 음식을 준비하는 구수한 멸치국물 우려 내는 구수한 음식 냄새가 진동했다. 주차장이 꽉 찼다. 지하 2층 백향목 홀에서는 어린이 합창단이 시작되는 첫날이어서 엄마 아빠의 손을 잡은 낯설은 어린이들이 백향목 홀에 가득하였다.
교회는 그런 곳이어야 한다. 어른과 어린이, 젊은이와 노인, 남자 여자 할 것 없이 그 누구나 예배당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공부하고 성도의 교제를 나누어야 한다. 누구나 비파와 수금을 타고 주신 목소리로 마음껏 주님을 경배하는 곳이어야 한다. 그렇게 힘을 얻은 이들이 가정과 직장과 세상에 나아가서 그리스도의 향기로 살아가고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는 그리스도인들로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집주인이 초청한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가난한 자들, 몸 불편한 자들, 맹인들, 저는 자들을 데려오라는 말씀이 그런 말씀이시다. 시내와 골목에서 만나는 사람들을 구분하지 말고 그 어느 누구나 다 큰 잔치에 초대하라는 말씀이시다.
아침 출근 시간이 되면 회사의 빌딩에 아무나 출근하는 게 아니다. 그 회사의 직원이어야 출근할 수 있다. 광화문 앞 정부종합청사에 아무나 출입하는 게 아니다. 앞가슴에 출입증을 매단 공무원들이 출입 보안 게이트를 통과해야 그 빌딩의 각 방에 들어가서 주어진 정부의 부처의 업무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대학도 마찬가지다. 대학이 개강되었으나 원하는 대학, 원하는 교실에 아무나 들어가서 수업을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그 학교가 입학 자격을 주어야 그런 일이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교회는 그렇지 않다. 교회는 사회적인 지위, 신분, 성별, 능력 등등 그 어떤 차별이나 차등이 없다. 그 어느 누구나 원하는 사람은 어른이나 어린이 할 것 없이 자유롭게 예배당에 와서 예배드릴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울 수 있다. 함께 기도하고 함께 찬송하고 함께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함께 음식을 먹고 함께 커피를 마시며 대화하고 사귈 수 있다.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수고 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이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고 초청해 주셨다.
그러나 세상은 그렇지 않나. 세상 사람들은 끼리끼리 만난다. 동향, 동창, 동문, 동기, 동업자 등등 일정한 기준을 가진 이들이 서로 만난다. 그러나 교회처럼 다양한 계층의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서로 격의 없이 만날 수 있는 곳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천국이란 그런 곳이다. 어떤 사람의 큰 잔치 초대, 집 주인의 잔치 초대에 기쁜 마음으로 응하고 참석하기만 하면 귀빈으로 환영받게 된다. 큰 잔치의 풍성한 음식을 먹고 마시고 즐기며 잔치의 기쁨을 주인과 함께 맘껏 누릴 수 있는 곳이 천국이다. 그러므로 천국이란 지금 내가 주인의 초청에 응하는 순간 날마다 나의 일상에 주어지는 하나님 나라 백성의 특권과 그 즐거움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교회란 그런 곳이어야 한다. 마태복음 16장 18절에 보면 예수께서는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라고 약속해 주셨다. 사도행전 2장 46-47절에 보면 성령 받은 초대 교회의 성도들은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았다.”
교회는 천국의 모형이다. 큰 잔치 비유에서 말씀하는 그런 잔치 자리가 교회 생활이어야 한다. 그런 교회로 세워가자. 이번 부활주일에 이웃과 가족을 정성스럽게 초청하자. 한 아기씩 낳아서 키우는 것처럼 우리는 한 사람씩 한 가정씩 그렇게 정성을 다하여 시내와 골목을 찾아 다니며 모셔다가 큰 잔치의 잔치상에 함께 앉아서 주인과 함께 풍성한 잔치 음식을 먹고 마시고 즐기고 기뻐할 자격과 권한을 부여 받은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들이다. 하나님의 아들딸들이다.
527장 찬송가 <어서 돌아오오>를 같이 부르자.
1.어서 돌아 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지은 죄가 아무리 무겁고 크기로
주 어찌 못 담당하고 못 받으시리요
우리 주의 넓은 가슴은 하늘보다 넓고 넓어
2.어서 돌아 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우리주는 날마다 기다리신다오
밤마다 문열어놓고 마음 졸이시며
나간자식 돌아고기만 뱀새 기다리신다오
3. 어서 돌아 오오 어서 돌아만 오오
채찍 맞아 아파도 주님의 손으로
때리시고 어루 만져 위로 해주시는
우리 주의 넓은 품으로 어서 돌아 오오 어서
이런 은혜와 성령이 우리 각 사람의 복음 전파 현장에 충만하기를 축원한다.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오라.
종은 부지런히 시내와 골목을 찾아다니며 사람들을 큰 잔치에 초청하였다. 그러나 워낙 풍성한 음식을 차려 놓은 큰 잔치에는 아직 빈 자리가 많았다. 종이 주인에게 말했다. “주인이여 명하신 대로 하였으나 아직도 빈 자리가 있나이다.” 그 때 주인이 종에게 말하였다.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14:23)
여기 비유에서 말씀하는 길과 산울타리 가란 이방인이 땅을 말씀한다. 그렇지 않나. 우리나라에 1985년 4월 5일 부활절 아침에 인천 제물포 항에 배를 타고 도착한 감리교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부부와 장로교의 호레스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의 첫 발은 내디딘 시작이 오늘 날 이처럼 거대한 겨자나무로 자라난 한국교회가 되었다. 저들을 비롯하여 미국, 캐나다, 호주, 영국 등등 세계 여러 나라에서 속속 입국한 선교사, 의사, 간호사 등의 선교에 힘 입어서 오늘 날 우리나라는 도시나 농촌이나 심지어는 섬 마을에 이르기까지 예배당이 없는 곳이 없다. 기독교인이 없는 곳이 없다. 그렇게 시작하여 도시와 농촌 그 어디에서나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한 이들에 의해서 오늘 날의 한국 교회가 된 것이다. 우리나라 선교사들의 선교 현장에 방문해 보면 하나님이 선교의 열정을 가진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무슨 일을 하시나를 금방 목격할 수 있다.
이제 실내 마스크 착용도 개인의 판단에 맡기는 때를 맞았다. 이렇게 코로나 19의 긴긴 터널도 끝을 보게 될 것이다. 봄이 다가오고 있다. 만물이 소생하듯이 신앙의 새 힘을 얻자.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과 같은 새 힘을 얻자. 주의 도우심과 성령의 도우심을 의지하며 내 주변 그 누군가를 강권하자. 주님의 집에 데리고 오자. 모셔 오자. 그리고 저들 한 사람 한 사람을 천국 백성이 되도록 이끌자. 이런 은혜가 우리 가운데 풍성하기를 축원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