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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모두 행하고 버리지 말라(말3:7-12, 마23:23-24) 20230108 청지기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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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3-01-09 23:22 조회 3,864 댓글 0
 

              모두 행하고 버리지 말라(말3:7-12, 마23:23-24)    2023. 1. 8 청지기 주일

 

새해 둘째 주일은 청지기 주일로 지킨다. 해마다 이 때가 되면 십일조 관련 설교를 해 오고 있다. 십일조 생활을 하는 이들은 부담이 없는 설교 시간일 것이다. 그러나 아직 십일조 생활을 못하는 이들은 매우 부담스러운 시간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십일조 관련 설교는 설교자의 생각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이 십일조에 대하여 무엇이라고 말씀하는가를 깨닫는 시간이다. 바라기는 어른과 청년 그리고 어린이에 이르기 까지 모든 성도들이 자신의 수입과 소득의 십일조 드리기를 생활화하는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한다. 

 

<십일조와 신앙 고백적 목적>

1.십일조 신앙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는 신앙이다. 

십일조 신앙은 자신의 건강과 생명과 산업과 가족과 삶의 모든 것이 여호와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라는 신앙이다.

 

2.십일조 신앙은 매일 매 순간의 삶이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고백이 담긴 신앙이다.

하나님의 보호와 사랑과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고 있다는 신앙의 고백을 담고 있는 신앙이 십일조 신앙이다. 

 

<십일조와 선교적 목적>

1. 십일조는 이 세상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선교 사역에 동참하는 신앙이다. 

2. 나눔과 돌봄과 섬김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 십일조 신앙이다. 

신명기 26장 12절에 보면 네 모든 소산물의 십일조를 모아서 “그것을 레위인과 객과 고아와 과부에게 주어 네 성읍 안에서 먹고 배부르게 하라.”라고 십일조 생활을 명령하셨다.

 

 

구약 시대의 십일조.

구약에서 십일조라는 말의 히브리어 ‘마아세르’는 십분의 일이라는 뜻이다. 신명기 14장 22절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너는 마땅히 매 년 토지 소산의 십일조를 드릴 것이며”라고 명하셨다. 

역대하 31장에 보면 히스기야 왕 때에 거국적인 십일조 생활에 대한 장면이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왕의 명령이 내리자 곧 이스라엘 자손이 곡식과 포도주와 기름과 꿀과 밭의 모든 소산의 첫 열매들을 풍성히 드렸고 또 모든 것의 십일조를 많이 가져왔으며 유다 여러 성읍에 사는 이스라엘과 유다 자손들도 소와 양의 십일조를 가져왔고 또 그들의 하나님 여호와께 구별하여 드릴 성물의 십일조를 가져왔으며 그것을 쌓아 여러 더미를 이루었는데 셋째 달에 그 더미들을 쌓기 시작하여 일곱째 달에 마친지라 히스기야와 방백들이 와서 쌓인 더미들을 보고 여호와를 송축하고 그의 백성 이스라엘을 위하여 축복하니라.”(대하31:5-8)

 

느헤미야 12장에 보면 총독 느헤미야는 예루살렘의 무너진 성곽을 52일만에 중건하는 역사적인 일을 성공적으로 마친 인물만이 아니다.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 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기 때문이라.”(느12:44) 라고 하였다.

 

창세기 14장 20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그돌라오멜 연합군과의 전쟁에 승리하고 돌아오던 길에 살렘 왕 멜기세덱 앞에서 전리품의 십일조를 드렸다. 창세기 14장 18절에 보면 “멜기세덱은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제사장이었더라”라고 했다. 

 

창세기 28장에 보면, 야곱은 아버지 이삭으로부터 축복기도를 받은 후에 형 에서의 추격을 피해서 외삼촌 라반의 집을 향해서 피신하게 되었다. 하룻 길을 가던 중에 밤을 맞았고 루스 광야에서 돌 베개를 베고 잠을 청해야 했다. 그 밤에 꿈에 하나님이 환상을 보여 주셨다. 사닥다리를 내리락 오르락 사는 천사의 임재를 체험하였다. 사닥다리 꼭대기에서 하나님이 야곱에게 말씀하셨다. 그 약속의 내용은 할아버지 아브라함과 아버지 이삭에게 늘 하시던 언약의 내용 그대로였다. 야곱은 그 날 밤에 일어나 베고 자던 돌베개를 세워 기둥 삼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창세기 28장 22절에 보면 “내가 기둥으로 세운 이 돌이 하나님의 집이 될 것이요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모든 것에서 십분의 일을 내가 반드시 하나님께 그리겠나이다.”라고 서원하였다.

 

출애굽한 백성들의 광야 생활의 중심에는 모세가 있었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말씀하시고 모세는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받아서 백성들에게 전하고는 하였다. 그 많고 많은 자세한 계명과 법도와 율례의 말씀들 중의 하나가 십일조 봉헌에 관한 말씀이시다. 신명기 26장 12절에 보면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서 백성들에게“모든 소산물의 십일조”를 드리도록 하라고 명하셨다. 부모가 십일조 신앙이 있는 가정은 어린 자녀들에게도 십일조 생활을 가르치는 것을 본다. 생일 축하금이나 구정 때의 세뱃돈이나 추석과 같은 명절 때에 집안 어른들에게서 받은 용돈을 구별해서 그 때 그 때마다 십일조 생활을 하는 교회학교 어린이나 청소년부 학생들의 헌금생활을 주목하게 된다. 

 

백만원을 벌어서 십만원을 십일조 드리는 것은 쉬울지 모른다. 그러나 일억원을 벌어서 천만원을 십일조 하기는 쉽지 않을 수도 있다. 물론 어린이들에게는 만원도 큰 돈이지만 말이다. 이는 어른들도 마찬가지이다. 적게 벌 때부터 십일조 신앙을 올바르게 실천해야 나중에 몫돈을 벌 때에도 마음 편안하게 십일조 생활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20여년 전, 이전에 사역하던 교회의 어느 권사가 직장 생활 30년을 퇴직하면서 3억의 퇴직금을 받았다. 어느 토요일 오후에 주일 준비를 하고 있는데 어느 권사 부부가 사무실에 찾아 왔다. 3천만원짜리 수표가 들어 있는 십일조 봉투를 탁자 위에 꺼내 놓고는 기도를 부탁하였다. 그가 하는 말이 “목사님 지난 삽십년 동안 건강하게 아프지 않고 그 긴긴 세월을 하루같이 출퇴근하고 퇴직하게 된 것이 너무나도 감사하고 하나님의 큰 은혜라고 여깁니다. 매달 몇 십만원씩의 십일조를 드리다가 이렇게 목돈의 십일조를 드릴 기회가 주어져서 너무나도 기쁘고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저희 부부의 앞날을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라고 말하며 얼굴이 상기되던 모습을 기억한다.

 

그렇다. 지난 주일 2부 예배 시간에 호산나 성가대가 부른 찬양의 제목 “은혜”와 그 가사처럼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가 아닌 것이 하나도 없다. 십일조 생활은 나의 날마다의 생활 중에 깨닫게 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신앙생활이 모습이다. 

 

그런데 구약 마지막 선지서의 기록자인 말라기 선지자 시대의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서 적지 않은 무리들은 십일조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한 때에 하나님은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서 말씀하신 내용이 오늘 본문으로 읽은 말라기 3장 7-12절까지의 말씀이시다. 말라기 3장 8절에 보면 “너희는 나의 것을 도둑질 하였느니라”라고 책망하셨다.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둑질 하였다는 말씀이신가요”라고 백성들이 반문하자 하나님은 “이는 곧 십일조와 봉헌물이라”라고 엄하게 지적하셨다.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 시대의 재앙의 원인을 “너희 곧 온 나라가 나의 것을 도둑질 하였으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3:9)라고 경고하셨다. 10절과 12절에 보면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받는 길, 모든 이방인들이 너희를 복되다 하는 길”은 온전한 십일조 신앙을 회복하는 길이 우선이라고 가르쳐 주신 말씀이 말라기 3장의 말씀이다. 말라기 3장에 보면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라고 분명하게 하나님 안에서 복되게 살아가는 인생의 길을 약속해 주셨다. 

 

 

예수께서 강조하신 십일조.

“예수님은 십일조 생활을 하셨을까 하지 않으셨을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다. 우리의 그러한 질문에 분명한 대답을 주는 말씀이 마태복음 23장 23절의 말씀이시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예수께서는 그 당시의 서기관들이나 바리새인들의 십일조 생활에 대하여 무엇을 문제삼으셨는가. 저들이 십일조 생활을 철저히 하는 것을 문제 삼으신 것이 아니다. 밀과 보리 농사 뿐만 아니라 포도, 감람, 무화과 농사 등의 과일 농사의 십일조도 철저하였다. 뿐만 아니라 양과 염소와 송아지와 약대를 키우는 육축의 번식으로 인한 십일조 생활도 철저하였다. 그러나 예수께서 “정의와 긍휼과 믿음”의 실천에 등한하였음을 지적하신 것이다. 

 

무슨 말씀인가. 오늘 날 십일조 생활을 제대로 하면서 신앙 생활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런데 예수께서 지적하고 문제 삼으신 것은 가정과 직장과 일터를 중심으로 세상 중에서 살아가면서 “정의의 편에 서고, 사랑과 자비와 긍휼을 실천하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세상에서도 믿음과 신뢰에 바탕을 둔 돈독한 인간 관계를 유지해 나가야 한다.”고 가르쳐 주시는 것이다. 

 

요즘처럼 정당 중심의 세 싸움을 하며 해괴한 논리로 사실을 왜곡하고 거짓과 불의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은 세상에서 뷰불이익을 당하더라도‘정의’의 편에 서는 ‘정의의 사도’가 되어야만 할 것이다. 현대인은 점점 서로 이기적으로 살아간다. 매사가 나 중심, 내 가족 중심일 뿐이다. 남들이야 굶든 말든, 춥던 말던 관심을 기울이려 하지 않는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예수께서 비유로 말씀하셨다. 여리고로 내려 가는 길에서 강도를 만난 이웃을 외면하고 지나가 버린 제사장이나 레위 사람처럼 살아서는 안된다고 교훈하셨다. 정성을 다해서 강도 만난 낯 설은 이웃을 밤을 새워가며 돌보아 준 사마리아 사람의 마음이 담긴 훈훈한 보살핌에 대하여 극찬하셨다. 어느 날 한 율법 교사가 예수를 찾아 와서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라고 질문하자 이 비유로 교훈하셨다. 그리고 맨 끝에 가서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라고 질문하셨다. 그 때에 율법 교사는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라고 가르쳐 주셨다.

 

그러므로 십일조 생활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첩경이요 신자가 신자답게 살아가는 시작인 것이다. 예수께서는 박하나 회향이나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는 철저한 십일조 생활도 강조하셨고 그 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면서 정의와 긍휼을 실천하고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가야 할 것을 촉구하셨다. 그 당시에 신앙 생활을 꽤나 잘하고 있다고 긍지를 가지고 있던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이런 말씀을 하시면서 십일조 잘하고, 주일 잘 지키는 것만 자랑하지 말고 정의와 긍휼을 실천하며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가라고 촉구하셨다. 이런 은혜가 우리 가운데 늘 넘쳐 나기를 축원한다. 

 

 

초대 교회의 십일조.

우리는 사도행전 2장 43절 이하에 소개된 성령 받은 초대 교회 성도들의 삶의 모습을 기억한다. 저들은 서로의 물건을 통용하였다. 통용하였다는 말은 ‘내것은 내 것이고 네 것은 네 것’이란 개념이 아니다. 내것 네것을 구분하지 않고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들을 서로 서로 나누며 살아가기 시작하였다.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생활하기 시작하였다.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다. 서로의 집에 방문할 때마다 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였다. 모일 때마다 하나님을 찬미하였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게 되었다.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셨다.”(행2:47)

 

성령 충만을 받은 초대교회 공동체는 십일조생활에 머문 것이 아니었다. 넉넉한 자와 부족한 자, 가진 자와 가지지 못한 자, 부자와 가난한 자, 건강한 자와 병든 자, 사회적인 신분이 높은 자와 그렇지 못한 자들이 서로 어울려서 서로의 소득과 소유를 공유하였다. 성령 받고 나니까 소유에 집착하지 않고 나누고 돌보고 섬기고 베푸는 삶이 일생 생활의 중심이 되었다. 

 

사도행전 4장에 보면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그 중에 가난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그들이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누어 줌이라.”(행4:32-35)

 

그 다음인 사도행전 4장 36절 이하에 기록된 주인공이 바나바이다. 구브로 섬에서 태어나 레위족 사람인 요셉은 별명이 바나바였다. ‘위로의 아들’이란 뜻이다. 바나바는 자기 소유의 밭을 팔아서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었다. 

 

그리고 사도행전 5장에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이다. 저들 부부는 재산을 모두 다 정리하였다. 소유를 다 팔아서 현금화하였다. 그런데 마음이 흔들리고 믿음이 약해지고 말았다. 부부가 마음을 같이 해서 그 판 값에서 얼마를 감추었다. 그리고 그 재산을 정리한 값의 일부를 들고 남편 아나니아가 베드로 사도 앞에 나아갔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는 저들 부부의 근황을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알게 해 주신 것이다. 베드로는 아나니나에를 책망하였다.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가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행5:3-4) 아나니아는 베드로를 통해서 이 말을 듣자 마자 그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저들 부부의 변심과 거짓과 위선이 드러나면서 나름대로 헌신했음에도 불구하고 부부가 차례대로 사도 베드로 앞에서 시체가 되어 들려 나가는 죽음을 맞고 말았다. 

 

남편이 죽은 줄도 모르고 세 시간 쯤 후에 도착해서 베드로 사도 앞에 나선 아내 삽비라에게 베드로 사도가 물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 뿐이냐 내게 말하라.”그 때에 아내 삽비라가 대답하였다. “예 이것 뿐입니다.”이런 거짓 대답을 들은 베드로는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 보라 네 남편을 장사하고 오는 사람들의 발이 문 앞에 이르렀으니 또 너를 메어 내가리라.”(행5:9)라고 엄히 말하였다. 그 순간 아내 삽비라는 베드로 사도의 발 앞에 엎드려져서 숨을 거두었다. 남편 아나니아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갔던 젊은 사람들이 들어 와서 아내 삽비라의 시신도 메어다가 부부를 장사지냈다. 사도행전 5장 11절은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라고 하였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십일조생활 정도가 아니라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바친 초대교회의 교인들이었다. 재산을 팔아 바칠 정도면 대단하지 않나. 그런데 무엇이 문제가 되었는가. 사도행전 5장 2절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라고 하였다. 3절의 베드로 사도의 책망에 보면,

 

성령 공동체였던 초대 교회 교인들이었던 저들 부부의 마음에 사탄이 가득했던 점, 그리고 성령을 속인 점이 화근이었다.

 

다시 예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화있을진저”라고 책망하셨던 그 당시의 저들의 십일조 생활에 대하여 생각해 보자. 저들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십일조 생활을 제대로 못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예수께서는 무엇을 문제 삼으셨나. 소득의 십일조, 수입의 십일조를 제대로 잘 드리는 것도 반드시 중요하지만 정의와 긍휼을 실천하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답게 살아가는 신앙의 근본 자세가 더욱 더 중요하다는 지적이셨다.

 

십일조 생활은 열 중에서 하나를 드리는 신앙이 아니다. 십일조 신앙이라 열 중에서 하나를 드림으로 나의 소유와 소득의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고 공급되고 있다는 믿음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숨을 멈추고 죽음 앞에 서는 순간 나그네 인생 길의 내 정든 그 모든 것들은 나와 아무 상관이 없게 되고 만다. 요즘은 ‘사망자 유물 정리’를 전문직으로 하는 직종도 생겨났다. 죽음이 찾아오는 순간 내 소유의 의복, 차량, 아파트를 비롯한 집과 부동산, 주식, 비트 코인, 현금, 금과 은과 진주를 비롯한 각종 보석, 보물, 값비싼 시계, 명품 가방, 값 나가는 악세사리, 내 손 때 뭍은 정든 생필품 하나 하나 모든 것이 나와 상관이 없어지고 말 것이다. 

 

십일조 신앙이란 그러므로 하루 하루, 한 주 한 주, 한달 한달, 한해 한해를 살아가는 나의 신앙의 고백이며 나의 신앙의 표현인 것이다. 그렇지 않나. 십일조 생활을 못하는 이들의 대개는 지나친 소유에 대한 집착과 불안 때문이 아닌가. 맞다.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해서 십일조 신앙이 무너져 가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이 약속에 말씀에 근거하여 분명한 재물관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서 이 세상을 넉넉히 이기며 살아가는 복된 은혜의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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