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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1-10) 20221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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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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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12-11 19:41 조회 4,624 댓글 0
 

                   이런 자는 복이 있도다(시146:1-10)        2022. 12. 11

 

 

시편 146편부터 시편 150편까지의 다섯 편을 할렐루야 시편이라고 한다. 각 시편의 시작과 끝이 ‘할렐루야’로 되어 있다. ‘할렐루야’는‘여호와를 찬양하라’는 뜻이다. 찬양이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은 유행가를 부른다. 가곡을 부르고 동요를 부르고 세상적인 노래 가사에 곡을 붙여서 부른다. 그 곡이 민요이든지 타령이든지 트로트이든지 재즈(jazz)이든 블루스(blues)이든 록(rock)이든 그 장르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노래의 가사이다. 

 

오늘의 본문으로 읽은 시편 146편의 5절 끝에 보면 “이런 자는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그러면 과연 누가 복이 있는 자일까. 한달전에 미국에서는 2조 7800억 파워볼 복권에 당첨되는 당첨자가 발표되었다. 그런 정도면 복이 있는 자인가. 전국민의 절반 이상의 지지를 받고 대통령에 당선되면 복이 있는 자인가. 절대적인 권력을 가지고 장기 집권에 성공하면 복이 있는 자인가. 수학능력 고사에서 만점을 맞으면 복이 있는 자인가. 월드컵 축구 16강 진입이 문제가 아니라 세계 1위팀으로 등극하면 복이 있는 자인가. 

 

물론 이러저러한 기준으로 복이 있다고 말할만한 사람들과 일들은 세상에 얼마든지 많다. 그러나 성경은 세상적은 그런 기준을 가지고 복이 있는 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면 과연 성경이 말씀하는 복이 있는 자는 어떤 자일까. 두 주일만 지나면 성탄절이다. 누가복음 1장에 보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잉태한 마리아가 두려움과 무서움에 휩싸여 급하게 산골 마을에 사는 친족인 대 제사장 사가랴의 집으로 피신하였다. 사가랴의 부인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문안을 환영하면서 큰 소리를 마리아와 그 태 중에 갓 잉태된 아기 예수를 축복하였다. 

 

“여자 중에 네가 복이 있으며 네 태 중의 아이도 복이 있도다.”(눅1:42)

 

“주께서 하신 말씀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은 그 여자에게 복이 있도다.”(눅1:45) 라고 말하였다.

 

자, 그러면 오늘 본문은 어떤 자가 복이 있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는가. 

 

여호와를 찬양하는 자.

우리는 이사야 43장 21절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안다.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를 찬송하게 하려 함이니라.”라고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이 하나님을 찬송하는 것이다. 돈 잘 벌라고 창조하신 것도 아니고 성공하고 출세하고 큰소리치고 떵떵거리며 교만하게 살라고 지으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을 찬송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의미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이렇게 주일 예배를 드릴때에 보면 얼마나 많은 찬송을 부르나. 우리가 왜 예배 시간에 찬송을 부르는 것인가. 찬송의 목적은 부르는 내가 즐겁기 위해서 부르는 것이 결코 아니다. 찬송이란 하나님을 높이고 경배하는 것이다. 교회와 성도들이 세상적으로 흘러가거나 세속화되어서는 안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하나님은 철저히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성도들이 계속하여 하나님을 찬송하기를 원하신다. 오늘 본문으로 읽은 시편 146편의 시편 기자는 1-2절에서 하나님께 어떻게 찬양하자고 제안하고 있는가.

 

“할렐루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찬양하라

나의 생전에 여호와를 찬양하며 

나의 평생에 내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라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은 목소리가 곱고 아름다워야만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농아인들처럼 목소리를 내서 찬양할 수 없는 장애 속에 살아도 자신의 영혼으로 주님을 찬양할 수 있는 것이다. 찬양이란 실로 영혼으로 찬양하는 것이다. 요즘 몸찬양이란 것을 한다. 그러나 그 몸 찬양이란 것도 자신의 영혼으로 하나님을 찬양할 마음이 없다면 어떻게 온 몸을 다해서 하나님께 경배하고 찬양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 않나. 블레셋에 빼앗겼던 성막의 법궤를 되찾아 올때에 다윗 왕은 덩실덩실 춤을 추며 여호와께 경배하고 찬양하였다. 다윗 왕은 이 일을 위하여 이스라엘 안에서 3만명을 따로 뽑아서 모았다. 다윗은 저들과 함께 ‘바알레유다’로 갔다. 여호와의 법궤를 모셔 오기 위해서였다. 다윗은 온 족속과 더불어 잣나무로 여러 악기를 만들게 하였다. 수금과 비파와 소고와 앙금과 제금으로 여호와 앞에서 연주하게 하였다. 아비나답의 아들 웃사는 죽었지만 오벧에돔의 온 집은 복을 받았다. 사무엘하 6장에 나오는 내용이다. 

감격한 다윗 왕은 오벧에돔의 집에서 다윗 성을 향하는 법궤를 멘 사람들이 여섯 걸음을 가자 멈추어 세우고 여호와 앞에서 제사를 드렸다. 소와 살진 송아지를 준비하여 제사하였다. 다윗은 그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다. 다윗의 베 에봇을 입고 맘껏 춤을 추며 경배하며 여호와께 찬양을 올려 드렸다. 다윗은 법궤 옮기는 일을 위해서 하나님께 번제와 화목제를 정성스럽게 드렸다. 다윗은 이날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들에게 남녀를 막론하고 떡 한 개와 고기 한 조각과 건포도 한 덩이씩을 골고루 나누어 주었다. 하나님은 삶으로 전심을 다하여 올려 드리는 그런 찬양을 받으시는 것이다. 다윗은 몸과 마음과 영혼을 다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찬양한 것이다. 

 

그날 다윗의 아내 미갈은 다윗 왕의 추는 춤을 업신여겼지만 하나님은 다윗이 몸으로 드리는 춤과 찬양을 받으셨다. 어찌된 연고인지 그 날 밤에 왕궁으로 돌아 온 다윗의 아내 미갈은 남편 다윗과 다투었다. 언쟁을 하였다. 사무엘하 6장 20절 이하에 나오는 내용이다. 하나님의 법궤를 되 찾아 다윗 성에 모셔 오는 거국적인 일을 마친 다윗이 그 날 밤 집으로 돌아왔다. 다윗은 가족들을 축복하고 싶었다. 그러나 부인 미갈의 반응은 싸늘하였다. 미갈이 누구인가. 사울 왕의 딸 공주이다. 미갈은 그 날 그렇게 크고 역사적인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 온 남편 다윗을 맞이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의 왕이 오늘 어떻게 영화로우신지 방탕한 자가 염치 없이 자기의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오늘 그의 신복의 계집종의 눈 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도다.”

 

이런 말을 들은 다윗의 대답과 반응은 분명하였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삼하6:21)라고 말하였다. 다윗은 앞으로 평생토록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뛰놀것이며 오늘보다 더 낮아지는 일이 있고 더 천하게 보이는 일이 있을지라도 여호와 하나님 앞에서 뛰놀며 찬양하며 살아가겠노라고 대답하였다. 악기를 연주하는가. 찬양을 맡아 하는가. 성실하여라. 책임감에 붙잡혀 살아가라. 영혼으로 찬양하여라. 왜냐하면 그런 일상을 주님은 주목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여호와를 찬양하고 여호와께 찬송하는 일은 생전에 할 일이며 평생에 할 일이다. 지난 11월 28일, 월요일 아침 고(故) 김선도(1930-2022) 감독 장례 예배에 참석하였다. 장례식 중에 그의 생애를 다룬 3-4분짜리 영상물이 소개되었다. 그 중에 짧게 최근에 그가 병상에서 부른 370장 <주 안에 있는 나에>란 찬송이 예배당 가득 울려 퍼졌다. 

“주 안에 있는 나에게 딴 근심 있으랴 

십자가 밑에 나아가 내 짐을 풀었네

 주님을 찬송하면서 할렐루야 할렐루야

 내 앞길 멀고 험해도 나 주님만 따라가리”

 

목소리는 떨렸고 목소리는 잔뜩 잠겼고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기진맥진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가 부르심을 받고 평생토록 영혼을 담아 부르는 생전의 찬양과 찬송을 받으셨다. 하나님의 그와 그의 가족과 그의 후손과 그의 사역에 복을 내리셨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날, 여호와의 법궤를 되찾아 오던 날 하나님 앞과 다윗 앞에서 미갈이 보인 반응과 말과 태도에 주목하셨다. 그 날 이후의 미갈의 여생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었더라.”

(삼하6:23)

 

하나님은 여호와 앞에서 찬양은커녕 교만하고 거만한 생을 마감한 사울과 여호와의 법궤를 되찾아 오던 날 보인 사울의 딸 미갈의 태도를 주목하셨다. 하나님은 미갈의 태를 닫으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불운한 역사의 한 생을 산 부끄러운 역사의 주인공인 밧세바의 몸에서 태어난 다윗의 아들 솔로몬을 택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솔로몬으로 하여금 아버지 다윗의 40년 왕정기를 잇는 이스라엘의 왕이 되게 하셨다. 지혜의 왕은 그렇게 역사에 등장하였다. 요즘 우리는 전도서의 말씀을 묵상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은 다윗과 젊은 날의 솔로몬을 통하여 영광을 받으셨다. 하나님은 다윗이 영혼으로 드리는 찬양과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리며 여호와의 기쁨이 되기를 원하던 젊은 날의 찬양과 경배를 받으셨다. 그리고 솔로몬에게 엄청난 지혜의 잠언과 전도서의 지혜의 말씀들을 허락하셨다. 솔로몬의 나중은 불행하였으나 그의 출발은 복되고 아름다웠다. 

 

송년의 때에 다시 또 맞이하는 성탄절에 즈음하여 오늘의 찬양, 지금의 찬송이 평생토록 생전에 변함이 없이 이어지는 복된 찬양의 주인공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축원한다. 

 

하나님을 찬양하되 영혼을 담아 찬양하고 평생토록 찬양하는 일은 존귀한 일이다. 찬양은 해도 그만이고 안해도 그만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라면 생전에 평생토록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하여 찬양하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우리 다 같이 338장 찬송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을 부르자. 

 

1. 내 주를 가까이 하게 함은

십자가 짐 같은 고생이나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2. 내 고생하는 것 옛 야곱이

돌베개 베고 잠 같습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3. 천성에 가는 길 험하여도

생명길 되나니 은혜로다

천사 날 부르니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4. 야곱이 잠 깨어 일어난 후

돌단을 쌓은 것 본받아서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 더 나가기 원합니다.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는 자.

5절에 보면 “야곱의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는 자가 복이 있도라”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렇지 않나. 세상 사람들은 젊음, 미모, 유산, 권력, 능력, 실력, 재주, 인기, 명예 등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며 살아간다. 그러나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은 그 삶의 태도가 달라야 한다. 민수기 6장 24-25절의 ‘아론의 축복’의 내용이 무엇인가.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리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의 얼굻을 네게 비추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라고 축복하였다. 그 다음 구절인 민수기 6장 27절에 보면 하나님은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라고 말씀하셨다.

 

맞다. 그렇다.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하나님이 지키시고, 하나님이 도와 주시고, 하나님이 은혜 주시고, 하나님이 평강을 주셔야 한다는 태도와 마음가짐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나의 삶의 도움의 근원이 세상에 보여지는 그 무엇이 아니라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라는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이다. 오는 금요일 밤 김재곤 장로의 간증 집회에서 그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체험하는 은혜의 밤이 되기를 기대한다.  

 

창세기의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요셉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무엇을 교훈하는가. 그 당시에 아브라함처럼 양과 염소와 소와 나귀와 약대를 목축하던 이들이 한 두 사람이었겠는가. 그러나 창세기는 12장부터 아브라함과 그의 후손들의 이야기로 일관하고 있다. 왜인가. 하나님은 하나님을 하나님을 자기의 도움으로 삼으려 하는 자를 주목하신다. 요셉이 어떻게 노예로 팔려간 땅 애굽에서 총리 대신이 될 수 있었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애굽의 감옥에 갇힌 요셉이 임금 바로 앞에 나설 수 있었겠나.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라면 어떻게 요셉이 애굽의 총리로 80년을 지낼 수 있었겠는가. 요셉은 노예 생활 13년을 뒤로 하고 그의 나이 30살에 애굽의 제 이인자가되었다. 그후로 하나님은 요셉이 110살에 하나님 앞으로 돌아가기 까지 그를 그 당시 최고의 나라였던 애굽의 제 이인자로 존귀하게 붙들어 쓰셨다. 그의 지난 날의 고통을 돌아 보신 므낫세의 하나님은 그의 앞날을 존귀하게 창성하게 하시는 에브라임의 하나님으로 늘 요셉 곁에 계셨다.

 

다윗의 시편인 시편 144편 15절에 보면 “여호와를 자기 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라고 하였다. 시편 118편 7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라는 고백이 나온다. 물론 내가 여호와의 편에 서서 살아가는 것이 소중하지만 내가 연약하고 내가 핍절하고 내가 곤고하고 내가 보잘 것 없을 때에라도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셔서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다면 무엇이 두렵고 무엇이 무섭고 무엇이 염려가 되겠는가. 이것이 사자 굴에 던져지던 다니엘이 믿음이 아니었는가. 이것이 풀무불 가운데 던져지던 사드락, 메삭, 아벳느고의 믿음이 아닌가. 이것이 “죽으면 죽으리다”하고 금식하던 에스더와 모르드개와 동족 이스라엘 백성들의 믿음이 아니었던가. 이것이 많은 매를 맞고 갇힌 빌립보 감옥에서도 밤새도록 찬송하던 사도 바울과 실라의 믿음의 아니었던가.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날 지라도 여호와 하나님을 나의 도움의 근원 삼고 살아가는 이런 은혜의 주인공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

5절에 다시 보시면 “여호와 자기 하나님에게 자기의 소망을 두는 자는 복이 있도다. ”라고 하였다. 여기 5절 말씀에 보면 ‘자기’라는 일인칭이 세 번 반복하여 나온다. 맞다. 신앙이란 일인칭이어야 한다.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모시고 나의 도움이 여호와 하나님께로부터 비롯되며 나의 소망은 오직 여호와 하나님 안에 있다고 고백하는 자를 하나님은 주목하신다. 

 

시편 18편에서 고백한 다윗의 고백을 보라.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시18:1-2)라고 고백하고 있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의인들을 사랑하시며 악인들의 길은 굽게 하신다. 하나님은 진실과 정의의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억눌린 자를 옳게 심판하시고, 주린 자를 먹이시고, 갇힌 자에게 자유를 주신다. 앞 못 보는 자의 눈을 열어 보게 하신다. 비굴한 자를 일으키신다. 나그네를 보호하신다. 고아와 홀로 된 여인들을 붙드시고 사랑하신다. 여호와 하나님은 영원히 다스리시고 대대로 통치하신다. 할렐루야. 여호와는 언제나 찬양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시다. 

 

그러므로 믿음의 사람은 귀인이라고 그를 의지하면 않된다. 인생은 호흡이 있는 동안에 잠시의 도움이 될 뿐이다. 그러므로 인생에게 줄 서고, 인생에게 비유 맞추고, 인생에게 편들려 하지 말고 영원한 도움의 근원이시고 영원한 소망의 근원이신 여호와 하나님께 소망을 두는 자를 주께서는 주목하신다.

 

누가복음 2장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간절히 기다리며 메시야를 보내실 여호와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던 두 사람의 이름이 등장한다. 한 사람의 이름은 시므온이고 다른 또 한 사람의 이름은 안나이다. 시므온은 아기 예수를 보고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눅2:32)라고 예수를 찬미하였다. 또한 백세가 넘은 나이 많은 여 선지자 안나는 예루살렘 성전을 떠나지 않고 늘 기도하며 감사하며 하나님의 아들의 오심을 기다렸다. 드디어 아기 예수를 영접하게 된 안나는 ‘이스라엘을 속량’(贖良)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예수의 탄생 소식을 알리는 주인공이 되었다. 

 

“여호와께 소망을 두는 자”란 어떤 자인가. 이스라엘 민족은 여호와를 향한 소망을 잃어버리지 않았던 민족이다. 그런 저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출애굽을 선물해 주셨다. 포로의 땅에서 되돌아 오게 해 주셨다. 남은 자를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해 주셨다. 

 

여호와께 소망을 두고, 예수 그리스도께 소망을 두는 자는 중풍병자 한 사람을 고치기 위하여 남의 집 지붕이라도 뚫는 자들이다. 더러운 귀신에 들린 어린 딸로 인해서 마음 앓이하던 수로보니게 여인은 여호와께 소망을 두고

예수를 찾아 나섰다. 두로 지방을 지나시던 예수를 수로보니게 여인은 만났다. 수로보니게 여자는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개 취급을 받아도 예수를 향한 소망을 버리지 않았다. 예수는 “돌아 가라 귀신이 네 딸에게서 나갔느니라”라고 그 여자에게 말했다. 집에 돌아가서 보니 딸 아이에게서 귀신이 떠나간 것을 알게 되었다. 

 

열두해 혈루병으로 고생하던 여인은 예수를 만나고 싶은 열망에 붙잡혀 살았다. 드디어 예수 만날 기회가 왔다. 그러나 사람이 너무나 많았다. 그녀는 예수의 뒤에서라도 예수의 옷자락을 붙잡고서라도 병 낫기를 소망할 때에 그녀의 몸에 치유의 은총이 임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새벽마다 484장 찬송을 즐겨 부르는 것이다.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1. 내 맘의 주여 소망되소서 주 없이 모든 일 헛되어라 

밤에나 낮에나 주님 생각 잘 때나 깰 때 함께 하소서 

 

2. 지혜의 주여 말씀으로서 언제나 내 안에 계십소서 

주는 내 아버지 나는 아들 주 안에 내가 늘 함께하네 

 

3. 세상의 영광 나 안보여도 언제나 주님은 나의 기업 

주님만 내 맘에 계시오니 영원한 주님 참 귀하셔라 

 

4. 영원한 주님 내 승리의 주 하늘의 기쁨을 주옵소서 

어떠한 고난이 닥쳐와도 만유의 주여 소망 되소서 아멘 

 

예수께서는 그를 반대하고 죽이려 하고 미워하고 대적하는 수 많은 무리들 앞에서 언제나 당당하셨다. 그는 십자가의 쓴 잔도 피하지 않으셨다. 예수의 소망은 분명하였다. 그에게 하라고 하신 분부와 사명을 온전히 이루어 인류를 죄에서 구원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 삼으시려는 것이었다. 

 

성탄절은 예수 그리스도를 참 나의 구주로 영접하는 절기이다. 예수 안에서  영원한 참 소망을 붙드는 신실한 믿음의 백성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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