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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의 의미(고전11:23-34) 2022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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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고관리자
최고관리자
작성일 22-10-02 00:42 조회 4,727 댓글 0
 

 성찬의 의미(고전11:23-34)            2022. 10. 2 세계성찬주일

 

천주교에서는 일곱가지 성례를 주장한다. 그 일곱 가지란 성찬, 세례, 개신교의 입교식에 해당하는 견신례, 고해성사, 종유(終油), 결혼성사, 임직을 위한 안수를 말한다. 그러나 프로테스탄트 즉 개신교에서는 두 가지만을 인정한다. 그 두 가지란 성만찬과 세례다. 마틴 루터는 “성만찬은 보여지는 하나님의 말씀이다”라는 정의를 내렸다. 사도행전의 초대교회로부터 교회는 모일때마다 성찬을 행하였다. 그 성찬이란 함께 음식을 집에서 가지고 예배당에 모여서 같이 먹는 애찬과 성찬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유월절을 기념하는 성찬의 의미로 해질 녘에 모여서 저녁 식사와 함께 애찬과 성찬을 병행하였다. 그러하다 보니 오늘 우리가 행하는 성찬식처럼 작은 잔에 담긴 포도주와 작게 마련한 빵 한 조각을 마시고 먹는 성찬이 아니었다. 빵도 마음껏 먹고 포도주도 마음껏 마시는 식이었다. 더군다나 애찬과 성찬을 함께 하다 보니 배 불리 먹고 마음껏 마시고는 포도주에 취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한 폐단과 오류를 막기 위해서 325년, 니케아 공의회((Councils of Nicaea)에서는 성찬의 방법을 제한하였다. 그런 근거에 의해서 오늘 날의 성찬으로 발전해 온 것이다. 화체설을 주장하고 믿으려 하는 천주교에서는 언제부터인가 포도주는 나누지 않고 떡만 나누어 준다. 그 이유는 예수의 피를 흘리거나 함부로 취급해서는 안된다는 이유에서이다. 그 전에도 화체설을 주장하고 믿는 천주교에서는 남은 포도주를 신부가 다 마시다 보니까 알콜에 중독되는 기현상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오늘 날 개신교회 중에서도 어떤 교회는 일년에 한 두 번 정도의 성찬식을 행하고 만다. 반면에 어떤 교회는 매달 첫째 주일에 성찬식을 행하기도 한다. 미국에서 벤살렘 교회의 미국 예배당을 주일 오후에 빌려 쓸 때에 보면 그들도 매달 첫째 주일 예배 시간에 성찬식을 행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초대교회 때에는 모일 때마다 성찬식을 행하였다. 사실 존 웨슬리 목사도 모일 때마다의 성찬을 강조하였다. 이처럼 지난 2천년 교회 역사 중에 성경을 강론하는 설교의 비중 이상으로 예배로 모일 때마다 성찬을 행하는 비중은 매우 컸다. 

 

오늘 우리는 매년 10월 첫째 주일에 행하는 ‘세계 성찬 주일’의 성찬에 참여 하기 전에 성찬에 관한 말씀을 먼저 묵상하려고 한다.

 

 

주께 받은 것을 전하라.

우리가 아는대로 ‘성찬’의 기원은 예수께서 붙잡혀 십자가 처형을 당하시기 전날 밤인 유월절 전날 밤에 열 두 제자들과 함께 저녁 식사를 하시던 그 자리에서 제정하신 것이다.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이 그 내용을 자세하게 다루고 있다. 물론 요한 복음은 그 밤에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 주신 것에 더욱 초점을 두고 기록을 남기고 있지만 말이다. 

 

자, 그러면 성찬이란 무엇인가

왜 성찬을 행해야 하는가. 

어떻게 성찬을 행해야 하는가.

누가 성찬에 참여할 수 있는가.

성찬은 언제 행하는 것인가.

이런 질문이 가능할 것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1장 23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바든 것이니”라고 교훈하고 있다. 그러면 우리는 여기서 질문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 체험 이후에 복음을 받아들인 자인데 어떻게 주께로부터 직접 성찬에 관하여 받은 바가 있다고 말하나”라고 말이다. 

 

사도 바울은 자신이 전하는 복음의 내용과 실제에 대하여 갈라디아 1장 12절에서 이런 내용을 전한 바 있다. “이는 내가 사람에게서 받은 것도 아니요 배운 것도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로 말미암은 것이라.”

 

이것이 무슨 의미인가. 유대 전통과 초대 교회 전통을 골고루 체험한 사도 바울에게 있어서 주님이 핍박자 사울을 변화 시켜 복음을 깨닫게 하신 후에 그 어떤 무엇인들 새롭게 계시로 알게 하지 않은 것이 그 무엇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왜 바울 사도가 23절에서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라고 교훈하느냐 하면 그 당시 고린도 교회의 교인들 가운데 성찬을 성찬답게 행하지 않는 이들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1장 17절부터 22절까지가 그런 내용을 담고 있다.

 

17-19절에 보면 고린도 교회의 애찬과 성찬은 칭찬할 수가 없었다. 애찬이나 성찬이 서로에게 유익이 되지 못했다. 도리어 해로웠다. 분쟁이 되고 파당이 되었다. 이것이 무슨 지적이냐고 하면 그 당시 애찬이란 오늘날처럼 예배당에서 누군가가 먼저 모여서 음식을 준비하고 그 준비된 음식을 나중에 서로 다 같이 먹는 식이 아니었다. 서로 집에서 음식을 가지고 와서 함께 나누어 먹었다. 그리하다 보니 시간 많고 돈 많은 부자들은 예배당에 좋은 음식을 가지고 먼저 와서 배불리 먹고 마셨다.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과 종들과 노예들은 주인을 위해서 주인이 맡긴 그 날의 일을 다 마치고 예배당에 뒤 늦게 도착하고는 했다. 가난하기 때문에 변변하게 풍성한 먹을 거리를 준비해 오지도 못했다. 헐레 벌떡 예배당에 모이다 보니 준비 해 오는 음식도 초라하고 소박했다. 종일 주인을 위해서 일하다가 늦게야 서둘러 예배처에 모이다 보니 마음에 여유도 없었다. 경제적으로 가난하고 시간에 늘 쫓기도 그러하다 보니 모일 때에 싸들고 오는 먹을거리도 변변치 못했다. 그래서 늘 저들 가난한 자들은 배도 고프고 몸도 지쳤다. 그러나 예배처에 도착해 보면 시간 많고 경제적으로 여유 있는 부자들이 먼저 모여서 맛있고 값비싼 음식들을 갖져다가 이미 배불리 먹고 마신 후였다. 뒤 늦게 도착한 가난하고 억눌린 계층으로 살던 종이나 노예들은 예배당에 모여서도 또 차별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20-21절이 그런 내용을 지적한 것이다. 함께 읽어 보자. 

 

“그런즉 너희가 함께 모여서 주의 만찬을 먹을 수 없으니 이는 먹을 때에 각각 자기의 만찬을 먼저 갖다 먹으므로 어떤 사람은 시장하고 어떤 사람은 취함이라.”

 

사도 바울 때의 고린도 교회란 예수께서 이 세상을 떠나 승천 하신지 불과 30여년 지난 후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행해지는 성찬이 가관이었다. 심각하였다. 예수께서 제정하신 성찬의 교훈과 정신과 의미에서 너무나도 멀리 멀리 빗나가고 있었다. 고린도교회의 그런 심각성을 전해 들은 사도 바울이 이 첫 편지에서 그 문제를 심각하게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22절을 또 읽자.

 

“너희가 먹고 마실 집이 없느냐 너희가 하나님의 교회를 업신여기고 빈궁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무슨 말을 하랴 너희를 칭찬하랴 이것으로 칭찬하지 않노라.”

 

그렇다. 세상은 끼리 끼리 어울리지만 교회는 그러면 안된다. 교회에서조차 부자와 가난한 자, 배운 자와 못 배운자, 권력 있는 자와 지배 받는 자,  능력 있는 자와 무능 한자, 역량 있는 자와 부족한 자가 끼리 끼리 편을 가르고 서로를 무시하거나 깔보거나 멀리하면 안 된단 말이다. 

 

예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제정하신 성찬의 의미와 제자들의 발을 일일이 씻어 주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요13:15)라는 교훈이 무엇인가. 

 

사도 바울이 왜 이처럼 흥분하고 안타까운 마음과 격앙된 심정으로 이런 편지를 썼을까.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성찬과 애찬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에서 너무나도 멀리 이탈한 심각성을 지적한 것처럼 이는 오늘 날의 우리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편지한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라고 말이다. 

 

서로의 형편과 처지에 대하여 마음을 담아 배려하는 교회다운 교회, 성도 다운 성도의 본분을 서로 잘 지켜 나가는 겸허하고 거룩한 공동체가 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주를 기념하라.

23절 하반절부터 26절까지에서 교훈하는 성찬의 교훈과 의미가 무엇인가. ‘기념하라’는 강조가 아닌가.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성도들에게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기념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고전11:24)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고전11:25)

예수께서는 친히 “기념하라”는 강조를 하고 또 하셨다. 누가복음 22장 19절에 보면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 너희가 이를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라고 예수께서 친히 강조하셨다. 

 

출애굽기 12장에 보면 430년 동안 애굽에서 노예 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을 명령하셨다. 그 출애굽의 밤이 유월절의 시작이다. 유월절을 무교절이라고도 하는 이유는 누룩이 들어가지 않은 빵을 먹었기 때문이다. 무교병과 쓴 나물을 준비하고 흠 없고 일년된 양이나 염소를 준비하였다. 출발하던 그 날 열흘에 준비하고 나흘 후에 잡았다. 피는 문설주와 인방에 발랐다. 머리와 다리와 내장을 불에 구워 먹었다. 삶아 먹거나 날로 먹지 말라고 하셨다.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잡고 급히 먹게 하셨다. 가족들이 다 모여서 그렇게 하였다. 남김 없이 먹고 다음 날 아침까지 남는 것이 있으면 모두 다 불태워 버리게 하였다. 출애굽기 12장 11절에 보면 “이것이 여호와의 유월절이니라”라고 하였다. 그 밤에 문설주와 인방에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의 가정에는 장자의 생명을 보존하였다. 그러나 그 밤에 하나님은 애굽 사람의 모든 가정의 장자를 치셨다. “내가 피를 볼 때에 너희를 넘어 가리라.”(출12:13)라고 약속하셨다. 이것이 출애굽의 밤, 이것이 유월절이다.

출애굽기 12장 14절에 보면 “너희는 이 날을 기념하여 여호와의 절기를 삼아 영원한 규례로 대대로 지킬지니라.”라고 천명하셨다. 여기에 보면 ‘기념하라’는 명령이 나온다. 맞다. 기념하는 것이다. 자자 손손 기념하는 것이다. 우리는 삼일절, 광복절, 6. 25 등을 다 경험한 세대가 아니지만 기념하지 않나. 왜 기념하는가. 그 정신, 그 역사적 교훈, 그 역사적 의미를 되새기고 기념하는 것 아닌가.

 

성찬식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유월절 전 날 밤에 떡과 포도주는 준비하여 나누게 하셨으나 그 날 밤에 양고기는 없었다. 왜냐하면 예수께서 친히 다음 날 유월절 어린 양으로 붙잡히셔서 골고다 언덕의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것을 예고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는 친히 떡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게 하시면서 그 다음 날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온 인류의 죄를 대속(代贖)하실 그 죽음을 미리 기념하게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찬을 경솔히 대해서는 안될 것이다. 습관으로만 대해서도 안될 것이다. 무의미 하게 대해서도 안될 것이다. 

 

 

합당하게 먹고 마시라

27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과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라고 경고하였다. 

 

여기서 언급하는 ‘합당하지 않게’라는 경고는,

첫째, 진정으로 회개 하지 않고 완악한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것

둘째, 가난한 자들이나 압제 받는 자들을 업신 여기는 마음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것

셋째, 주의 성찬이 나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사실을 믿는 믿음이 없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

넷째, 자기 성찰이 없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

다섯째, 주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대한 올바른 신앙적 이해와 깨달음과 믿음이 없이 성찬에 참여하는 것 등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교리적으로 제대로 모르는 몰이해와 윤리적으로 성찬에 참여하는 자 다운 합당한 일상 생활을 하지 못하며 세상의 악한 풍속을 따르는 자의 그 모든 것을 지적하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28절에서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라고 가르친 것이다. 이 말은 도덕적으로 무흠하고 윤리적으로 순결해야만 성찬에 참여할 수 있다는 말이 아니다. 이 세상에 그런 인생은 단 한 사람도 없다. 인간은 다 죄인이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각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말과 행실의 죄인됨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을 갖고 성찬에 참여해야만 할 것이다. 

 

27절 이하에 보면 ‘죄, 판단, 징계, 정죄’라는 단어가 반복된다. 성찬은 예수께서 이 땅에서 마지막 유월절 전날 만찬을 행하시면서 제정하신 거룩한 것인데 그 의미를 제대로 모르고 함부로 방자하게 먹고 마시고 취한다면 “죄를 짓는 것이고,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라고 경고하셨다. 

 

차라리 다른 형제자매들이 애찬에 함께할 시간을 기다리기 어렵고 시장하다면 집에서 미리 각자의 음식을 먹고 오라고 까지 가르쳤다. 

 

애찬과 성찬에 참여하는 기본적인 태도는 어떠해야 하나. 33절, “그런즉 내 형제들아 먹으러 모일 때에 서로 기다리라.”라고 하였다. 이는 21절에서 지적한 부자들이 먼저 먹고 마시고 취해 버린 후에 가난한 자들이 뒤 늦게 도착해서 마음에 상처를 받는 무질서한 애찬과 성찬의 변질을 막으려는 안타까운 사도 바울의 권면인 것이다. 오늘의 성찬이 서로의 관계와 은혜를 회복하는 성찬이 되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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