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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말하노니(고후13:11-13) 2022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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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2-07-31 17:06 조회 5,279 댓글 0
 

                   마지막으로 말하노니(고후13:11-13)         2022. 7. 31

 

 

고린도후서 13장은 13절 분량인데 오늘 이 시간에는 마지막 세 구절만 함께 읽었다. 13절은 우리에게 익숙한 요절과 같지 않나. 초대교회 이후 바울의 이러한 축복기도의 내용은 자연스럽게 통용되기 시작하였다. 예수님의 은혜, 하나님의 사랑, 성령의 교통하심을 비는 간구는 예배자들을 축복하는 기도 내용의 모든 것을 포함하고 있다. 왜 예수님을 먼저 언급했느냐에 대한 대답은 아마도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가 없이는 문제거리 투성이의 고린도교회를 건강한 교회로 세워 갈 수 없다고 판단했고 그 위에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십자가 사랑이 덧입혀지고 그 은혜와 사랑이 지속되고 구원을 완성하게 하는 성령의 도우심과 임재가 절실히 필요함을 깨달았기에 이렇게 기도하였을 것이라데 그 누구도 이견이 없다. 

 

우리는 이 마지막 축복기도에서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으로 구분하는 삼위일체의 모습을 그림처럼 대하게 된다. 

 

고린도후서 13장 1-10절까지에 있는 내용을 정리하면 죄의 문제를 덮어 두지 말고 하나님 앞과 회중 앞에서 해결 받으라는 권면을 하고 있다. 죄라는 것이 무엇인가. 죄가 숨겨져 있고 가리어져 있을 때에라면 몰라도 일단 죄가 죄로 드러나게 되면 무조건 죄 없다고 하기는 어려워진다. 더군다나 하나님 앞에서 숨길 수 있는 죄란 없다. 바울은 1절에서 “두세 증인의 입으로 말마다 확정하라”라고 했다. 

 

2절에서 언급한 “죄 지은 자들을 내가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라는 언급은 에베소에 머물던 사도 바울이 고린도교회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때에 교회를 어지럽히며 세속적인 죄된 것들이 교회 안에까지 들어와 있는 것을 목격하였다. 바울 사도는 엄중히 책망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달라진 것이 없는 이들에 대하여 여기서 다시 언급한 것이다. 앞으로 다시 방문할 기회를 가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라는 것은 목회적인 권징(勸懲)을 행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서 권징이란 신명기 19장 15절에 보면 두 세 증인이 있는 명백한 범죄의 경우에 그 죄와 악을 두 세 증인의 증언에 의하여 분명하게 다루라고 하였다. 마태복음 18장 16절에 보면 예수께서도 죄를 무조건 용서만 하지 말고 두 세 증인의 증언이 있는 경우에는 그 죄의 값을 묻도록 하라고 경고하셨다. 물론 죄인을 불쌍히 여기고 용서하여야 한다. 주님은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셨다. 그러나 무조건 용서만이 능사는 아닌 것이 분명하다. 그러면 2절에서 언급한 죄지은 자들의 죄란 무엇일까. 고린도후서 12장 20-21절에 보면 “다툼가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근거림과 거만함과 혼란과 더러움과 음란함과 호색함을 회개하지 아니한 자들”을 염두에 두고 한 말이다.

 

이런 여러 가지 죄의 문제에 연루된 이들이 회개하기는커녕 여전히 고린도 교회를 어지럽히고 병들어 가게 하고 있었다. 초대교회 때에는 이러한 자들에 대한 엄격한 권징과 출교가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은 정에 끌리고 사사로운 감정에 매여서 명확한 죄와 악임에도 불구하고 묵인하며 덮어 버리는 경우가 허다하다. 교회가 점점 병들어 가게 하는 어리석음이 아닐 수 없다. 

 

몸에 생긴 암은 제거 수술을 하고 방사선 치료를 하고 항암치료를 계속해야 한다. 암의 뿌리를 해결해야 사람이 살 수 있는 것처럼 교회 안에, 성도들 간에 들어와 있는 죄나 악도 쉬쉬하며 모른 척하고 덮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죄는 해결해야 하고 악은 척결해야 건강한 그리스도의 몸된 성도들의 연합인 교회다운 교회로 든든하게 세워져 갈 수 있는 것이다. 그 첩경이 회개(悔改)이다. 

 

그러면 회개의 길이 무엇인가. 5절에 보면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라고 분명하게 교훈해 주었다. 그러면 “내가 믿음 안에 있는가 그렇지 못한가”를 확증하는 길이 무엇일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라고 경고하였다. 

 

생각해 보라. 나는 예수와 더불어 살아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는데 정작은 예수께서 내 안에 계시지 않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나는 예수 믿으며 살고 예수 안에 사는 것으로 스스로 믿고 있는데 예수께서는 “내가 너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라고 나를 몰라 보신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내 안에 내 스스로의 종교적 아성을 쌓아 놓고 스스로 그 종교적인 성벽 안에 갇혀서 내가 예수 믿으며 사는 것처럼 스스로 착각하고 살면 안된단 말이다. 324장 찬송 <예수 나를 오라 하네>의 1절 가사를 보라.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예수 나를 오라 하네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주의 인도하심 따라 주의 인도하심 따라

어디든지 주를 따라 주와 같이 같이 가려네”

 

예수와 늘 함께 살아가는 임마누엘의 신앙이 되어야 한단 말이다. 그러하기 위해서는 “내가 지금 믿음 안에 있는가, 지금 내 안에 예수께서 계신가”라는 질문을 계속할 수 있어야만 한다. 

 

7절과 9절에 보면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죄와 악의 문제를 갖고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하고 있다. 7절에 “우리가 하나님께서 너희로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하시기를 구하노니”라고 하였다. 9절에도 보면 “...또 이것을 위하여 구하니”라고 하였다. 그러면 사도 바울의 기도의 내용이 무엇인가.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악을 조금도 행하지 않게 해 주세요. 

고린도교회의 성도들이 선을 행하는 자가 되게 해 주세요.

진리를 거슬리지 않고 진리를 위하는 자들이 되게 해 주세요.

저들이 온전하게 되게 해 주세요. 

죄로 인해 넘어지지 않고 주 안에 세움을 받는 자들이 되게 해 주세요.

 

이런 기도를 계속한 것이다. 그리고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으로 읽은 마지막 세 구절에서 ‘마지막으로 말하노니’라며 간절한 심정으로 몇 가지 교훈을 더 언급하고 그동안 몇 차례 계속해서 쓰고 또 썼던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을 위한 아버지의 사랑의 마음을 담은 편지를 마무리 하고 있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이 마지막으로 말한다고 한 그 내용이 과연 무엇인가. 

 

 

기뻐하라.

“형제들아 기뻐하라”라고 권면하였다. 사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죄와 악 투성이로 지내는 이들이 하도 많았던 고린도교회의 교인들에게 사도 바울이 하등에 ‘형제들아’이렇게 정중하게 표현할 이유가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바울은 끝까지 저들 고린도교회의 교인들 중에서 아직 죄로부터 손을 씻지 못하고 악으로부터 떠나지 못한 이들이 여전히 적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간절하고 따뜻한 마음으로 진정으로 회개하고 회복된 삶을 살기를 기대하며 “형제들아 기뻐하라”고 권면한 것이다. 사람이 죄에 빠지고 악의 습관에 젖어 살면 기쁨이 사라지고 만다. 그렇지 않나. 기쁨이란 것이 어린 아기가 평화롭게 엄마 품에 안길 때에 느끼는 감정이 아닌가. 기쁨이란 평안하고 편안하고 좋고 만족하고 고맙고 감사하고 행복하고 그럴 때 일어나는 감정의 상태가 아닌가.

 

여기서 교훈하는 ‘기뻐하라’는 것은 어쩌다 웃을 일이 있어서 잠시 웃는 것 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속상한 일이 있으면 속이 상하고 괴로운 일이 있으면 마음이 괴로워진다. 환난과 시련과 역경이 극심해서 헤쳐 나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암울한 환경 중에서 기쁨을 찾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 보면 불행한 일을 만날 때가 있다. 비참한 일을 겪을 때도 있다. 내 몸에 중병이 찾아오기도 한다. 사랑하는 가족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도 한다. 어떤 경우에는 사랑하는 자녀가 부모보다 앞서서 죽음을 맞기도 한다. 평생토록 연약한 가족의 질병이나 장애로 인해서 떨쳐 낼 수 없는 무거운 짐을 지고 사는 가정도 있다. 노년기의 병약헤 져 가는 부모님을 돌아보고 모시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열심히 살아 보려 발버둥치지만 새로운 일자리 찾기가 하늘의 별 따기이다. 밤낮없이 뛰고 달라며 살아 보려 하지만 한 달 수입이 팍팍해서 겨우겨우 버티며 서울 장안에서 살아간다. 어떤 가정은 십일조는커녕 열을 벌어 다 내 주머니에 넣고 살아도 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허덕이며 살기도 한다. 

 

내 자녀들 또래의 다른 가정 이야기를 들어 보면 쉽게 되는 것 같은데 우리 집 아이들 자라나는 것 보면 저렇게 커서 사회생활 적응하며 하려나 싶기도 하다. 이 일 하나 해결해서 좀 잠잠해 지나 했는데 더 큰 일이 터져서 집 안이 뒤숭숭해지기도 한다. 왜 내게 혹은 왜 우리 집에 이런 일이 생기나 하고 주님께 눈물 콧물 흘려가며 하소연해 보지만 주님은 한마디 대답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실 뿐이다.

 

참으로 울어도 안 되고 힘써도 안 되고 참아도 안 되는 것은 안 된다. 그래서 답답해하고 그래서 우울해하고 그래서 속이 상해하고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몰라 한다. 

어렸을 적에 어른들 따라서 부흥회에 가면 544장 찬송가 <울어도 못하네>를 그렇게 자주 많이 불렀던 기억이 분명하다. 

 

그 찬송가의 가사가 이렇다. “울어도 못하네 눈물 많이 흘려도...힘써도 못하네...참아도 못하네” 그런데 4절 가사에 가면 반전이 일어난다.

 

“믿으면 되겠네 주 예수만 믿어서 

그 은혜를 힘입고 오직 주께 나가면 

영원 삶을 얻네 

십자가에 달려서 예수 고난 당했네 

나를 구원하실이 예수 밖에 없네.”

 

자 그러면 사도 바울이 그렇게 책망의 많은 말을 하고 마지막까지도 죄를 회개하지 않고 죄와 악을 반복하는 자들로 인해서 마음이 상해 하고 “내가 세 번째 너희 곁에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라고 까지 격앙되고 흥분된 상태에서 편지를 쓰던 그가 어떻게 갑자기 편지를 마무리 하며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다고 하면서 “형제들아 기뻐하라”고 권면하는 것일까.

 

기뻐하려면 죄의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한다. 기쁜 일상을 살아가려면 죄의 문제를 용서 받아야 한다. 과거에 “어둠 속에 떨지 말고 자수하여 광명찾자”라는 반공 포스터가 있었다. 간첩은 자수하면 자유대한민국의 품에서 광명을 찾은 삶을 살 수 있다. 이처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죄 사함을 받고 거듭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서 진리를 행하는 자로 살아가기 시작하면 그 마음 속에 샘솟는 기쁨의 삶이 시작될 수 있다.

 

바울이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라고 하면서 “기뻐하라”는 교훈은 그런 것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기쁜 일이 뭐가 있나. 무엇 때문에 기쁘고 무엇 때문에 우울한가. 무엇 때문에 기뻐지고 무엇 때문에 마음이 상하게 되는가. 

 

성도의 기쁨이란 바울이 쓴 편지의 여기 저기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는 그 기쁨의 근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 

 

“예수가 함께 계시니 시험이 오나 겁없네 

기쁨의 근원 되시는 예수를 위해 삽시다

날마다 주를 섬기며 언제나 주를 기리고 

그 사랑 안에 살면서 딴 길로 가지 맙시다.”

 

우리가 부르는 찬송가 325장 <예수가 함께 계시니>의 1절 가사이다. 우리가 때로 <오 이 기쁨>이란 찬양을 부른다. 

 

“오 이 기쁨 주님 주신 것

오 이 기쁨 주님 주신 것

오 이 기쁨 주님 주신 것

주께 영광 할렐루야 

주만 찬양해”

 

이것은 설명으로 될 일이 아니다. 체험의 영역이고 은혜의 분량이고 믿음의 세계이다. 주님이 우리 각 사람에게 이런 기쁨을 주 안에서 누리도록 기쁨을 선물해 주시기를 축원한다.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라.

사도 바울은 9절과 11절에서 반복해서 ‘온전하게 되라’는 요청을 하였다. 우리 번역에는 ‘온전’이라고 했으나 그 원뜻은 ‘복원하다, 복구하다, 회복하다.’그런 의미이다. 원어에 더 가까운 뜻은 ‘수선하다’라는 뜻이다. 생활하다 보면 옷을 수선하고 구두를 수선한다. 자동차를 수리해서 사용한다. 건물도 다 헐고 새로 짓는 것이 아니라 건물의 외관과 배관과 내부를 수리하고 보수해서 사용한다. 그런 뜻이다. 바울은 죄와 악을 해결 받고 수선되고 수리된 하나님의 사람으로 서로를 위로하며 서로에게 위로를 받으며 살아가라고 권면하는 것이다. 영어 성경에서는 ‘restoration’이란 단어를 사용하였다. 이게 대단히 의미심장한 신학적인 용어이다. 이 단어 뒤에 ‘...ism’을 덧 붙이면 ‘restorationism’은 ‘만인구제설/만인구원설’이란 거창한 신학적 용어가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는 아파트 평균 수명이 35년 쯤이라고 한다. 그런데 우리가 살던 펜실베니아 벅스 카운티 벤살렘에서 이웃에 있는 브리스톨이란 곳에 한인들이 모여 살았다. 교우들 사는 ‘브리스톨 아파트’에 가 보면 100년이 훨씬 넘었다는데도 깨끗하다. 붉은 벽돌의 건물 외관이 고색창연하다. 내부는 늘 고치고 늘 수리하고 늘 새롭게 단장하고 늘 페인트 칠을 새로 하고 바닥에 카페트도 새로 깔고 해서 집안에 들어가 보면 100년 된 집이란 느낍이 전혀 없다. 

 

성도간에 그러해야 한다는 말이다. 서로 물고 뜯고 찢고 허물고 상처 주지 말고 서로서로 세워 주고 세움을 받고 고쳐 주고 고쳐 나가고 회복해야 한다는 교훈이다. 

 

성도는 하나님 안에서 영생하는 자녀들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부터 교회를 중심으로 서로를 잘 세워나가고 서로에게 용기를 주며 격려하고 위로를 주고받는 그런 공동체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이 주님이 뜻이다. 그것이 주 안에서 사도된 바울의 마지막 권면 중의 하나이다. 우리 성경에서는 위로라고 했지만 영어 성경에 보면‘encourage’라고 했다. 서로 격려하라는 말이다. 그렇지 않나. 우리는 주 안에서 서로서로 비난하고 판단하고 뭐라하는 것보다는 격려하고 위로하고 용기를 주고 힘이 되어 주어야 한다. 이런 은혜가 우리 서로 간에 점점 풍성해 져 가기를 축원한다.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하라.

우리가 그동안 고린도 전서와 후서를 골고루 대한대로 고린도교회는 문제 투성이의 교인들로 넘쳐 났다. 그 문제는 심각했다.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어떤 교회보다 애착을 갖고 눈물로편지를 쓸 정도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권면하는 또 하나의 권면은 제발 한 마음을 갖고 일치와 화합을 이루라는 권면이다. 그래야 평안하지 않겠나. 교회가 뒤숭숭해지면 어떤 정도로 심각해 지는지 경험해 본 분들은 알 것이다.

 

사탄은 언제나 마치도 굶주린 사자가 삼킬 먹을 거리를 찾듯이 달려 든다. 그러므로 교회로 교회되게 성도로 성도되게 건강한 성도의 연합을 이룬 공동체로 세워 가려면 서로가 마음을 같이해야 한다. 그래야 평안이 임한다. 그래야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라고 하였다. 죄와 악으로 인한 분열을 극복하고 치유 받는 길은 주 안에서 한 마음을 회복하는 길 밖에는 없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장 16절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의 교훈을 편지하였다. 

 

“서로 마음을 같이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있는체 하지 말라”

 

빌립보서 2장 2절에서는 “마음을 같이하여 같은 사랑을 가지고 뜻을 합하여 한 마음을 품어”라고 하였다.

 

사도 바울은 거룩한 입맞춤으로 문안하라고 하였다. 이는 동방 세계와 유대교에서 내려 오던 인사법이었다. 초대교회에는 성만찬 전에 행해지기도 하였다. 이성 간에는 금지되었고 동성 간에 나누는 인사법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그나마도 부작용이 많아서 13세기 이후로는 페지되었다. 

 

12절이 교훈하는 “모든 성도들 간의 문안”이란 골고루 문안하고 끼리 끼리만 문안하는 것을 넘어서라는 교훈이기도 하다.

 

우리가 잘 아는 오늘 날 예배의 마지막 순서인 목사의 축도가 여기에 나온다. 고린도후서 13장 13절이 오늘 날 교회 예배의 축도에서 인용되는 성경 구절이다.

 

그렇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고 성령이 모든 성도들에게 골고루 교통하시기를 바라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은혜와 사랑과 성령의 임재와 교통과 교제의 삶이 주 안에서 영원히 계속될 수 있기를 축원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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