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라의 시대는 회복의 시대였다. 조상들의 때에 우상 숭배와 범죄로 인하여 흩어졌던 히브리 민족이 스룹바벨과 에스라와 느헤미야를 중심을 세 차례에 걸쳐서 유다 땅과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올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요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로 하면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된 광복절이 하나님의 선물이었던 것처럼 말이다. 6. 25를 거치고 전쟁 이후의 폐허와 가난을 딛고 오늘 날처럼 남한 만이라도 세계적인 강국으로 발전한 것은 물론 온 국민이 성실하게 열심히 나라를 발전 시켜온 공로도 크지만 그 배후에 하나님의 놀라운 축복이 있었던 것을 시인할 줄 알아야 한다. 장차 남북한의 평화로운 통일의 날도 하나님의 손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따라서 그렇게 주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예루살렘에 돌아간 에스라의 감격은 이루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그래서 그는 그러한 감격과 감사의 마음을 가슴 벅차게 가득 안고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빼앗겼던 땅에 나라가 다시 건국되는 상황이다. 하나님을 마음껏 섬길 수 있는 신정국가가 건설되는 시작이기에 감격하고 찬송하고 송축하는 것이다. 1948년에 우리나라와 이스라엘은 같은 해에 독립국가로 건국되었다. 이처럼 역사적으로 감격스러운 순간이 있지 않은가. 교회나 가정이나 개인도 마찬가지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만나서 가정을 이루는 날이 있다. 각자의 생애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날이다. 결혼한 가정에 아들딸이 태어나는 날도 역사적으로 중요한 날이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는 나이 백세에 구십 살이 된 아내 사라를 통하여 언약의 아들 이삭이 태어나던 순간 같은 그런 날 말이다.
이는 한 나라의 역사로 하면 더욱 더 그렇다. 한 나라의 흥망성쇠가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를 예로 들어 거슬러 올라가면 조선, 고려,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시대 등의 나라가 건국되고 무너지고 새로운 왕국이 생겨나고 하는 그 모든 역사가 마디마다 매우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 날 우리 교회의 설립이 이처럼 방해를 받고 있지만 때가 차면 반드시 이루어지리라고 믿는다. 이는 역사의 분명한 교훈이며 공식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가 새벽마다 에스라나 느헤미야서를 통해서 당시의 역사를 뒤돌아 본 것처럼 말이다. 한 나라가 무너지고 포로로 끌려가고 하는 참담하고 마음 아픈 역사가 있는가 하면 선조들의 땅으로 이처럼 돌아오고 회복되는 기쁨과 감격의 날도 다가오지 않는가.
지금 당대의 유명한 율법 학자인 에스라 제사장은 감격 속에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고 있다. 에스라가 이처럼 하나님을 찬송하고 송축한 내용이 무엇인가? 그는 하나님의 어떤 점을 인하여 이처럼 주를 찬송하고 경배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뜻을 깨달은 자의 찬송.
개인이든 민족이든 자신과 국가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찾고 깨닫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기독교 역사관으로 하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손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평생 그러한 생을 사시다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 하시고 승천하신 것이다. 제자들에게 가르쳐 주신 예수님의 기도 내용 중에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라고 기도하도록 교훈하지 않으셨나. 다윗의 시인 시편 40편 8절에 보면,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하고 고백한다. 그렇다. 신자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성도의 제 일 신조는 하나님의 뜻을 찾고 하나님의 뜻을 행하면서 살아가는 것이다. 미가서 4장 12절에 보면 이방 사람들의 특징을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자들이라고 지적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이방인들은 매사가 인간 중심이지 하나님 중심이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나라나 민족이나 개인이나 가정은 날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기도로 묻고 찾아가는 삶을 살아가게 되어 있다. 신앙생활이란 하나님의 뜻을 묻고 찾고 순종하며 사는 생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마태복음 7장 21절에 보면 예수께서 천국에 들어갈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을 설명해 주신 적이 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이는 예수께서 교훈하신 대단히 차원이 고상한 천국관이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자라야 천국 백성이 될 수 있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인간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란 무엇일까? 십자가 복음이다. 인간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뜻은 그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인간의 흥망성쇠(興亡盛衰)와 길흉화복(吉凶禍福)이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다. 신명기 30장 15절에 보면 “보라 내가 오늘 생명과 복과 사망과 화를 네 앞에 두었나니”라고 하셨다. 19절에서는 “생명과 사망과 복과 저주를 네 앞에 두었은즉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하여 생명을 택하고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고 그의 말씀을 청종하며 또 그를 의지하라.”
택하신 자녀들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물론 생명과 복이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에게서 마음을 돌이켜서 듣지 아니하고 유혹을 받아 다른 신들에게 절하고 우상을 섬기면 사망과 화와 저주를 내리시겠다고 경고하셨다.
오늘 본문에 보면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지어졌던 솔로몬 성전이 무너진 이후에 바벨론 포로 시대를 지내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시 선조들의 땅인 유다 땅과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게 하실 결심을 하셨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자비요 긍휼이요 용서요 전적인 은총이다. 뿐만 아니라 예루살렘에 하나님께 제사할 성전을 다시 지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셨다. 이것이 불가능하자 나중에 바사 나라의 고레스 임금과 아하수에로 임금과 아닥사스다 임금의 마음을 감동하여 그 일을 이루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 여호와의 성전을 아름답게 할 뜻을 두시고” 계셨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묻고 순종하는 것은 이처럼 귀한 것이다. 하나님은 예루살렘에 성전이 다시 지어지되 아름답게 지어질 것을 기대하셨고 그런 뜻을 갖고 계셨다.
요한복음 6장 38절에서 40절까지에 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자세하게 정리해서 교훈해 주신 적이 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예수님의 기도의 내용도 “나의 뜻대로 마옵시오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마26:39)하는 것이었다.
에스라는 지금 세월이 지나 하나님의 용서를 덧입고 선조들의 땅에 돌아오게 된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며 감사하고 감격해 하면서 하나님 여호와를 송축하고 있는 것이다. 범죄하고 우상 숭배하던 선조들이 포로의 땅에 끌려간 것도 하나님의 뜻이요 이방 땅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하고 다시 선조들의 땅 예루살렘에 되돌아와서 성전을 아름답게 재건하는 것도 하나님의 뜻이란 말이다.
하나님의 은혜(恩惠)를 덧입은 자의 찬송.
이 세상에 하나님의 은혜 없이 유지되고 보존될 수 있는 일이란 하나도 없다. 천지 만물의 모든 조화가 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도 많이 알려진 기독교 저술가인 존 비비어의 책, <은혜>에 보면 그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는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은혜다.” 그렇다. 하나님의 은혜 말고는 은혜에 대하여 달리 말할 방법이란 없다. 그의 도전은 분명하다.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거듭난 그리스도인이라면 세상의 돈과 명예와 권력과 재능을 발휘하는 것에 매여서 살아가는 것에 생의 목적을 두지는 않을 것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오늘날 나의 모습은 어떠한가? 여전히 그런 것들의 주변을 맴돌고 있지 않은가? 돈과 출세와 명예와 권력과 인기에 끌려 살아가고 있지 아니한가 말이다. 존 비비어가 정리하는 묵상은 분명하다. “은혜 안에 승리하는 삶의 비결이 있다. 은혜는 진리를 행하게 한다. 은혜는 마음의 변화를 가져온다. 은혜는 거룩한 삶을 가능하게 한다. 은혜는 믿음과 협력한다. 은혜는 하나님 나라를 진척시킨다.”는 주제의 묵상들은 읽는 독자들로 하여금 분명한 은혜의 길로 인도하는 가로등과 같다.
사람에 세상을 살아가면서 가장 크게 깨닫고 덧입는 하나님의 은혜는 물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십자가의 은총과 죄 사함과 구원과 영생이다. 그러나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크고 작은 일상생활 중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은혜는 주변의 환경과 사람들을 통하여 온다. 에스라는 그런 시대 속에 살았던 장본인이다. 그는 왕과 보좌관들과 왕 곁의 권세 있는 모든 방백들 앞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얻은 주인공이었다. 이것은 일이 이루어져 가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하는 것이다.
2011년 2월호 가이드포스트 잡지가 벌써 배달되었다. 이번 호에는 '나니아 연대기‘ 소설과 영화로 우리나라에도 많이 알려진 영국의 작가 C. S 루이스(Clive Staples Lewis, 1898-1963)에 관한 특집 기사가 실렸다. 제목은 “나의 아버지 루이스”다.
그의 양 아들인 더글러스 그래샴이 쓴 기사였다. 사실 C. S 루이스는 친자녀가 없다. 그러하다 보니 오늘 날 루이스의 모든 저작에 대한 권한을 그의 양자가 행사하고 있다. 이것이 성경에서 말하는 양자의 영을 입고 살아가는 자들이 덧입는 은혜다. 그는 50대 들어서 늦게 결혼하였으나 자녀가 없었다. 1952년 9월 루이스는 조이 데이빗먼(Joy Davidman)이라는 여성을 처음으로 만났다. 그녀는 젊은 시절에는 무신론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 조이는 미국의 소설가인 빌 그레셤(Bill Gresham)의 아내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였다. 시인이었던 조이의 결혼 생활은 이미 파경을 걷고 있었고, 부부는 잠정 별거에 합의한 상태였다. 두 사람의 교류가 시작된 것은 1950년에 조이가 루이스에게 편지를 쓰면서부터였다. 1956년에 조이는 골수암 판정을 받았다. 그 다음해에 루이스는 조이의 병실에서 성공회의 예식으로 결혼식을 올렸다. 루이스의 아내가 된 조이는 몇 년간 암과 씨름하며 투병생활을 계속하다가 1960년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 때에 양자였던 더글러스 그래샴은 15살이었다. 갑자기 친 어머니를 잃은 그는 양 아버지인 C. S 루이스의 곁에서 살아가야 했다. 이미 미국이 친 아버지와는 관계가 어색하고 소원해 진 후였다. 비록 양부였지만 어머니의 죽음은 루이스와 양 아들인 더글러스 그래샴 모두에게 큰 비탄에 빠져 우울한 날들을 지내야 했다. 임종 직전에 더글러스 그래샴의 어머니는 “하나님과 함께 있어서 평안해요.”라는 말이었다. C. S 루이스는 때로 알코올 중독 상태였고 늘 담배를 많이 피우며 살았다. 곁 보기에는 그의 삶에 대하여 실망스런 부분이 많았지만 그의 진면모를 발견하기 시작하면서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그가 양 아들과 함께 옥스퍼드의 저택 뒤 숲속을 산책할 때면 루이스는 나무며 야생동물들이며 정원을 무척 좋아하고 사랑했다. 그의 이야기를 듣다가 보면 마치도 나니아 연대기에 등장하는 파운(상반신은 사람이고 하반신은 염소의 모습을 한 상상의 생물)이나 센타우(인간과 말의 형상이 뒤 섞인 상상의 동물)를 금방 만날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킬 정도였다. 지난해 여름 어느 날 전화 통화 중이던 나의 큰 아들은 자기가 틈틈이 읽는 책 중에 루이스의 <순전한 기독교>(The Mere Christianity)를 소개하면서 나에게 읽어 본 적이 있느냐고 질문해 왔다.
그러면 오늘 날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알고 신자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송축하며 그 분의 은혜를 얻고 누리는 자의 찬송이란 무엇일까? 우리 각 사람의 마음 바탕에 그런 고백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은혜는 구하며 살아가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냥 덧입는 것이다. 우리가 잠을 자는 사이에 흰 눈이 내리듯이 그분에서 일방적으로 공급되는 것이다.
창세기 6장 8절에 보면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은 사람이었다.
창세기 18장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은 대낮에 지나가는 세 사람의 나그네에게 자신이 그들에게서부터 은혜 입기를 원한다고 청했다. 그렇게 맞아들인 나그네 세 사람을 위하여 송아지를 잡아 대접했고 그는 그들이 축복하는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일 년 후에 아들 이삭을 낳은 은혜를 입게 되었다. 그들은 그냥 길 가는 나그네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내신 세 천사들이었다.
창세기 43장 14절에 보면 가나안의 기근의 때에 아버지 야곱이 애굽에 동냥하러 내려가는 아들들에게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 원하다 고 말했다. 요셉은 평생 보고 싶던 동생 베냐민을 만난 후에 처음으로 해 준 축복의 말이 “하나님이 네게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노라”(창43:29)고 했다.
출애굽기 1장 20절에 보면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던 히브리 백성들 가운데 히브리 산파들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셨다고 했다. “하나님이 그 산파들에게 은혜를 베푸시니 그 백성은 번성하고 매우 강해지니라”고 했다.
잠언 3장 34절에 보면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라고 했다. 오늘 날 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의지하고 따르며 살아야 하는가? 그 분은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1장 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고 했다. 지금 에스라는 그런 은혜의 충만함을 깨닫고 나서 하나님을 송축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 안에서 힘을 얻은 자의 찬송.
우리가 자주 부르던 복음 성가 중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라는 찬송이 있지 않은가.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힘과 방패가 되시는 분이시기에 찬송하고 송축하는 것이다. 아무리 힘들고 아무리 병약하고 아무리 답답하고 아무리 앞길이 안 보여도 내 하나님 여호와의 손이 내 위에 있음을 믿고 하나님으로부터 힘을 얻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주를 믿는 신자의 모습이다.
“내 하나님 여호와의 선한 손이 내 위에 있으므로”
이 얼마나 인격적으로 하나님을 체험하는 이의 고백인가. 관찰해 보면 에스라 8장의 오늘 본문으로부터 9장까지의 내용에서 에스라는 자신을 일인칭으로 ‘나’라고 반복하여 표현하고 있다. 마치도 자서전을 쓰는 것과 같은 표현을 반복하고 있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는 날마다의 생활 중에 나에게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과 힘을 경험하고 고백할 수 있어야 하겠다. 대한민국이라는 이 좁은 땅이 중국과 러시아와 일본과 북한의 틈바구니에서 오늘 날의 안보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미국이라는 거대하고 강력한 이웃 나라의 군사적인 도움의 손길을 벗어나서는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한 그릇의 밥이 우리에게 한 나절의 힘이 되어 주듯이 하나님은 택함 받은 백성의 힘과 방패와 능력이 되시는 분이시다. 에스라는 입만 열면 하나님의 손길을 언급한다. 8장 22절에 “우리 하나님의 손은 자기를 찾는 모든 자에게 선을 베푸시고”, 8장 31절에 “첫째 달 십이일에 우리가 아하와 강을 떠나 예루살렘으로 갈새 우리 하나님의 손이 우리를 도우사 대적과 길에 매복한 자의 손에서 건지신지라”고 간증했다.
나의 장인은 평생 장로교 통합 측에서 목회하고 은퇴하셨다. 올해 연세가 팔십이시다. 육이오 전쟁 때에 구 남매 중에 본인만 홀로 전쟁 중인 국군 제 1사단의 한 대대장을 따라서 월남할 수 있었다고 간증하셨다. 죽을 고비도 넘겼지만 오늘 날까지 살려 주셨다고 간증하셨다. 이 모든 것이 주의 은혜요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이요 하나님이 붙들어 주신 힘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리 한번 이 찬송을 불러 보자.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합니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께 찬송과 경배를 올려 드리자. 그리고 주님의 도우시는 손길 안에서 새 힘을 얻자. “너는 알지 못하였느냐 듣지 못하였느냐 영원하신 하나님 여호와, 땅 끝까지 창조하신 이는 피곤하지 않으시며 곤비하지 않으시며 명철이 한이 없으시며
피곤한 자에게는 능력을 주시며 무능한 자에게는 힘을 더하시나니 소년이라도 피곤하며 곤비하며 장정이라도 넘어지며 쓰러지되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 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하지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하지 아니하리로다.”(사40:28-3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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