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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음을 품으라(빌2:5-11) 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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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03-27 07:24 조회 23,815 댓글 0
 
<영성수련>이란 책이 있다. 원 제목은 ‘Retreat'이다.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목사요 존경받는 감독을 지내고 은퇴한 루벤 좁(Rueben Philip Job)이 지은 영성수련을 위한 아주 귀한 책이다. 그는 내가 태어나던 해에 이미 목사 안수를 받은 한 세대 앞서 주님께 쓰임 받았던 목회자였다. 그 유명한 매일 묵상집인 다락방의 편집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그 책 중에 “네가 누구냐고 누군가가 물을 때”라는 제 2과의 묵상 내용이 시작되는 서론에서 독일의 그 유명한 순교자요 목사였던 디트리히 본회퍼(Dietrich Bonhoeffer)의 <옥중서간>에 수록된 시 중에 '나는 누구인가'라는 제목
의 시 한 편의 마지막 구절을 인용한다. 짧지 않기에 다 인용할 수는 없지만 마지막 문구는 이렇다.

“내가 누구이든지 오 하나님
당신은 내가 당신 것임을 아십니다.”


진심으로 자신의 마음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고백이 아닐 수 없다.

그 사람의 마음(mind)은 자기 자신의 생각과 인격과 꿈과 지정의를 담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이 마음으로 서로를 신뢰하기도 하고, 이 마음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믿고 의지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마음이 중요하다. 마음만 있으면 사막과 같은 길이라도 천리를 동행할 수 있다. 그러나 마음이 없으면 한두 시간도 누군가와 함께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친구가 무엇인가? 마음이 서로 맞아야 친구다. 부부란 무엇인가? 마음과 뜻과 생각이 서로 통해야 부부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스승과 제자란 무엇인가? 스승의 추구하는 바를 따르고 발전시키고 열매를 가꾸어 갈 수 있어야 바람직한 사제지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와 제자의 관계란 단순히 ‘랍비여!’ 하고 부르는 스승과 제자의 관계 그 이상이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예수님이 부르셨던 열두 명의 제자들이 예수님을 ‘랍비여’하고 부르며 따라 다녔다. 그러나 예수님과 제자들의 관계는 그 정도의 관계에 머물러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한번은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신 적이 있다. 마태복음 16장(막8:27-30, 눅 9:18-21)에 나오는 유명한 대화의 내용이다.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는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고 대답했다. 그 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 때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였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

이 대답이 예사로운 대답이 아니지 않은가. 여기서 시작해서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놀라운 축복의 말씀을 해 주셨다.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빌립보서 2장 5절의 말씀에 보면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라고 했다. 여기서 말씀하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란 무엇인가. 베드로의 신앙 고백처럼,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와 같은 깨달음과 지식과 믿음이 생겨야 한다.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
성도란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살아가는 자들이다. 세상에 나가서 공부하고 일하고 돈 벌고 사업하고 장사하고 끝이 없는 경쟁 사회 속에서 이리 부딪히고 저리 부딪치면서 날마다 돈...돈...돈... 하면서 돈 타령만 하는 것으로는 대답이 없다.

마음속에 품고 사는 것이 무엇인가. 젊은 아빠들은 세상에서 직장에서 자기 분야에서 성공하고 진급하는 것이 아닌가. 더 많은 연봉 받는 것이 아닌가. 젊은 엄마들은 우리 아들딸 공부 잘하도록 뒷바라지 하는 것 아닌가. 그래서 어린이집, 유치원, 초등학교, 중고등학교, 대학교- 계속하여 끝이 없는 경쟁 사회로 내어 몰아가는 것 아닌가. 아들딸의 성적표에 혈안이 되어 있지 않나. 시집가고 장가 간 후에도 부모의 자식을 향한 기대나 바람은 거기서 거기가 아닌가. 그러나 오늘 성경은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선언하고 있나.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그렇다.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이신지를 깨달아 알고 믿고 주를 따를만한 그런 마음가짐을 품고 살아가란 말이다. 기도도 그런 기도를 드리고, 찬송도 그런 찬송을 드리고, 예배도 그런 마음가짐으로 예배하고, 생각과 그런 생각 속에서 살아가란 말이다.

어느 교우가 저에게 그래요. “목사님은 너무 영적이십니다.” 아니 그러면 목사가 영적으로 생각하고 영적으로 기도하고 영적으로 꿈을 꾸고 영적으로 비전을 말하고 영적으로 무엇을 해 나가야지 매사가 범사가 육적이면 되겠어요.

육적인 것과 영적인 것의 차이가 무엇인가.

“아! 집사님 파마 어디서 했어... 예쁘다 파마 잘 나왔네...... 집사님 그 차 어디 딜러에서 샀어. 나도 그 차로 바꾸었으면 좋겠다.” 이건 육적인 대화다. “집사님 요즘 무슨 책 읽고 있어요." 이것은 지적인 대화다. 그러나 “집사님 요즘 무슨 기도 제목 가지고 기도하고 계세요. 저도 함께 중보하며 서로 같이 기도하면 안 될까요” 이것은 영적인 대화이다.

오늘 성경은 다시 말씀한다.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자, 그러면 그리스도 예수의 무슨 마음을 품고 살아가라는 선언인가.
하나님의 본체이신 예수 그리스도.(창조의 주님)
5절에 본체(本體), 8절에 형상(形象) 즉 모양이라고 했다. 예수님의 본체는 하나님이시다. 인간의 모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육신의 삶은 모양일 뿐이다. 그 분은 인간이셨지만 곧 하나님이셨다. 아니 어제도 오늘도 영원히 하나님이시다. 우리가 믿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이것을 깨닫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의 근본은 곧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하나님과 동등한 존재이시다. 하나님 안에 예수님이, 예수님 안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다. 예수님과 하나님, 하나님과 예수님은 본질상 한분이시다.

대통령이 어느 경우에는 짙은 청색 양복에 하늘 색 넥타이를 매고 외국 국빈을 맞이한다. 그러나 재난의 현장이나 시장의 한 가운데나 산업 현장을 시찰 할 때에는 작업복을 입고 나선다. 군대를 방문할 때에는 야전 지휘관들이 입는 군인의 야전잠바를 걸친다. 테니스를 할 때에는 간편한 운동복을 입는다. 그것은 모양일 뿐이다. 대통령의 본체는 무슨 옷을 입느냐의 문제가 아니지 않는가. 그렇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모양으로 이해하려 하면 안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 근본이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의 본체이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대화하던 의심 많은 제자 도마가 예수님의 부활하신 모습을 보며 놀라워하고 감격하며 “나의 주님이시오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라고 말했다. 그 때에 예수님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라고 하셨다.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본 것이라고 교훈해 주신 적도 있다. 그렇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깨달아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그 예수님은 요한 계시록 1장 8절에 보면 “전에도 계셨고 이제도 계시고 장차 오실이시라.”고 했다.

오늘 날의 우리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은 이천 년 전에 갈릴리와 유대 땅에 다녀가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오늘 날은 성령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다.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여 하나님의 보좌 우편에 앉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곧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으로 깨달아 알고 믿는 것은 매우 소중한 그리스도에 대한 발견의 시작이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주님의 자기 비하)
하나님이신 예수님은 하늘의 높고 높은 보좌에만 영원히 앉아 계신 분이 아니시다.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服從)하셨으니 곧 십자가(十字架)에 죽으심이라”(빌2:6-8)고 했다. 이 얼마나 놀라운 신분의 변화인가. 이것은 좀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하나님의 자기 비하(卑下)인 것이다. 하나님 자신이 자신을 인간의 신분으로 낮추셨다는 말이다. 스스로 낮추신 것이다. 인간은 자꾸만 높아가려고만 한다. 그러나 주님은 낮아지려고 오신 분이시다. 사순절은 하나님의 낮아지심을 묵상하고 닮아가는 절기이다. 요즘 새벽에 묵상하는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은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낮추시길 원하셨다. 인생이 자꾸만 높아지면 나중에는 바벨탑을 쌓으려고 한다.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고 만다. 자신의 경제력, 사회적인 신분과 권력과 명예와 여건들이 우상이 되어서 하나님이 잘 안 보이게 된다. 예수님이 별로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전에는 기도도 예배도 간절하던 사람이 사업이 잘 되고 장사도 잘 되고 세상적으로 너무 잘 나가고 출세하고 너무 성공 가도를 달리면 자기 자신의 본래의 모습을 잃어버리게 된다. 그 때에 조심해야 하는 것이다. 자기를 스스로 낮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번지 점프라는 것이 매우 스릴이 있다고 한다. 높은 꼭대기에서 생명줄을 허리에 차고 뛰어 내리는 체험이다. 올라가든지 내리 가든지 생명줄이란 것이 없으면 끝장이다. 군대에서 유격훈련하면서 그런 것들 해 보았다. 물속으로 뛰어 내리는 것도 해 보았다. 암벽에서 생명줄을 허리에 차고 수직으로 거꾸로 하강하는 훈련도 받아 보았다. 그 모든 것의 제 일 가는 수칙이 있다. 생명줄 즉 안전 로프를 잘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제대로 되지 않으면 언제 무슨 일을 당할는지 아무도 모른다.

하나님 아버지와의 신분의 관계를 유지하지 않은 상태에서는 높아지든지 낮아지는 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위대함은 하나님이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낮아지셨다는 점이다. 그분은 종이 아니시다. 종이 되실 수 있는 분이 아니시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런데 스스로 종의 형체를 갖고 사람의 모양으로 이 땅에 오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종이 무엇인가. 노예다. 머슴이다. 이리 오라 하면 이리 오고 저리 가라하면 저리 가는 것이 종이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안에서 스스로 낮아지신 종이요 인간의 모양으로 오신 하나님 자신이시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자신의 본체요 아버지이신 하나님 안에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이 은혜의 복음과 진리를 깨닫고 나면 우리의 신앙 고백과 찬송의 내용이 다르게 되어 있다.

“주 달려 죽은 십자가 우리가 생각 할 때에
세상에 속한 욕심을 헛된 줄 알고 버리네”(149장 찬송)

자기 자신을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고 이 땅에 오셔서 인간의 몸을 입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을 받으며 살아갈 때에 온전한 구원과 행복한 인생의 승리가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하나님이 높이셔서 뛰어 나게 하신 영광의 주님.(영광스러운 부활의 주님)
기독교 복음의 근본이 오늘 말씀 가운데 있다. 예수 그리스는 스스로 낮추어 종의 형체를 입고 인간으로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복종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그런데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 아들을 영광스럽고 존구하게 변화 시켜 주셨다.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빌2:9-11)

스스로 낮추면 주께서 높여 주신다. 이것이 신앙의 신비요 삶의 묘미인 것이다. 인간의 길흉화복과 흥망성쇠가 주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스스로 낮추며 겸손하게 살아가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그 모범을 따르며 살아가야 한다.

프랑스의 제 9대 대통령을 지낸 푸앵카레(Poincar&eacute;, Raymond, 1860~1934)대통령은 1913년부터 1920년까지 대통령이었다. 상하의원과 문교부 장관, 재무부 장관을 거쳐서 대통령이 된 인물이다. 한 번은 그가 졸업한 솔버 대학의 은사이신 라비스 박사께서 교수직 50주년 기념식을 가진다는 소식을 듣고 조용히 참석하였다. 많은 하객들이 노 교수를 축하하기 위해 참석하였다. 답사 순서가 되어서 단상에 올라선 라비스 박사는 그 많은 하객들 틈에 나라의 현직 대통령인 푸앵카레가 참석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답사 연설을 하기 전에 단상에서 내려가서 대통령인 제자에게 단상으로 올라올 것을 권했다. “아닙니다. 선생님 오늘 저는 대통령으로서 이 자리에 참석한 것이 아닙니다. 오늘의 제가 되도록 저를 가르쳐 주신 선생님의 은퇴식을 축하드리기 위해서 제자의 신분으로 참석한 것입니다.” 단상에 오른 라비스 박사는

“저렇게 겸손하고 훌륭한 제자를 대통령으로 배출한 것이 스승으로서 큰 기쁨입니다. 이 같은 대통령을 모신 우리 프랑스는 더욱 아름답게 발전해 나가는 문명국가가 될 것입니다.” 

그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다시 상원의원, 총리, 외무장관을 지내면 ,제 1차 세계 대전 후에 안정을 잃은 프랑스를 좋은 나라로 세워 보려고 혼신의 노력을 다한 유명한 정치인이다. 대통령에서 물러난 6년 후인 1926년에는 다시 거국 내각의 수반이 되어 재무장관을 겸하면서 국가적인 재정난을 해결하고 프랑스화의 평가절하를 성공시키므로 ‘푸앵카레 프랑’이란 이름으로 나라의 통화를 안정시키는데 크게 공헌한 뛰어난 인물이기도 하다.

어느 공동체에서나 어느 사회생활 중에서나 겸손해야 수명이 길게 되고 존경 받게 된다. 예수님은 스스로 종의 형체를 입고 인간의 몸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복종하심으로 나중 그 이름이 영광스러운 이름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이름을 지극히 높이셔서 뛰어난 이름이 되게 하셨다. 뿐만 아니라 하늘과 땅과 이 땅의 그 모든 자들로 하여금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셨다.(빌2:10) 또한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다.(빌2:11) 다시 정리하면 이렇다.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
천지 만물들이 무릎 꿇게 하신 이름
모든 입으로 주라고 시인하게 하신 이름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신 이름

오늘 날 우리 모두는 목소리를 합하여 그 이름 예수 그리스도로 인한 영원하신 하나님의 영광을 찬미하고 경배하고 찬송하고 드높이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그런 진실한 마음을 복음 성가를 부르도록 하자.

약한 나로 강하게 가난한 날 부하게
눈 먼 날 볼 수 있게 주 내게 행하셨네
호산나 호산나 죽임 당한 어린양
호산나 호산나 예수 다시 사셨네
내가 건너야 할 강 거기서 내 죄 씻겼네
이제 주의 사랑이 나를 향해 흐르네
깊은 강에서 주가 나를 일으키셨도다
구원의 노래 부르리 예수 자유 주셨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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