늘 형통하고 평탄한 길만 살아 온 이들에게 있어서는 부르짖는 기도의 필요성이 거의 없을 것이다. 늘 잘 되어 왔고 늘 잘 살아 왔고 늘 안 되는 일 보다는 형통한 일이 훨씬 많았던 이들에게 있어서 부르짖는 기도란 별 의미가 없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항상 건강하고 경제적으로도 별 어려움이 없고 대인관계도 매끄럽고 어디에 가나 인정만 받고 대적을 만나 본 경험이 거의 없는 이들에게 있어서 부르짖는 기도의 필요성이란 거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에는 부르짖는 기도의 사람들의 이야기로 넘쳐난다. 아브라함이 그랬고 이삭과 야곱이 그러하였다. 저들이 믿음의 선조의 길을 걸어갔다고 하지만 결코 순탄치만은 않은 날들들 살아갔다. 그 배후에는 인생의 우여곡절 속에서 믿음을 견고하게 다듬어 가신 하나님의 섭리가 있으셨다. 모세의 때에 애굽에서 살아가던 백성들에게서는 그런 집단적이고 민족적인 부르짖음이 하나님께 상달되었다.
“여러 해 후에 애굽 왕은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탄식하며 부르짖으니 그 고된 노동으로 말미암아 부르짖는 소리가 하나님께 상달된지라”출2:23) 그 다음의 두 구절을 보면, 하나님은 그들의 고통소리를 들으시고 이스라엘 자손을 돌보셨다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은 부르짖으면 돌보아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요즘 겨울이 지나가고 해빙기가 되면서 산행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산에서 사고를 당하거나 응급 상황을 맞는 이들이 늘어나는 뉴스를 접한다. 산 속에서라도 도움을 청하는 119 연락을 하면 헬리콥터가 동원되고 재난 구조대원들이 아무리 깊은 계곡과 아무리 높은 산이라도 가까이 까지 찾아 나사고 쏜살같이 헬리콥터로 다가간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시다. 간절하게 기도하고 마음을 모아서 부르짖고 간구하면 귀를 기울여 들어 주시는 분이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출애굽 할 수 있었던 시작은 고생스러운 노예의 생활 현장에서 탄식하며 고통 중에 부르짖은 기도의 응답이다. 아기도 울면 배가 고픈지 뒤를 보았는지 어디가 불편하거나 어디가 아픈지 엄마가 금방 알아채고 도주는 것처럼 하나님 아버지께 부르짖으면 반드시 응답해 주시는 좋으신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시다. 부르짖는 기도의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모세이다. 출애굽기 15장 25절에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출애굽한 백성들이 수르 광야에 도착해서 삼일 길을 가는데 물을 얻지 못해서 기진 맥진하고 있었다. 그 곳은 물이 있기는 있었으나 사람이나 짐승이 먹을 수 없는 물이었다. 그래서 그 곳 지명을 쓴 물이란 뜻의 ‘마라’라고 부르는 곳이었다. 목이 마른 백성들이 모세를 원망하기 시작하였다. 그 때에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어 기도한 것이다. 그 때에 하나님은 한 나무를 가리켜 그 나무 가지를 물에 던지게 하셨다. 그 후에 그 물이 모두 마실 수 있는 단 물로 변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짐승들이 모두 다 해갈하고 힘을 얻게 되었다. 부르짖어 기도하였더니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신앙생활의 바탕은 기도요 기도생활의 기본은 부르짖는 기도이다. 출애굽기 22장 27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가난하고 헐벗은 인생을 향해서 “그가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들으리니 나는 자비로운 자임이니라.”고 말씀하셨다. 가난한 자가 부르짖으면 하나님이 들으시고 먹이시고 입히신다고 했다.
이발소에 갔더니 옆 의자에서 이발하시는 노인이 이발사와 우리나라 경제 발전에 대하여 말하고 있었다. 세계 그 많은 나라들 중에서 현대 역사에 우리 대한민국처럼 급속하게 발전한 나라가 없노라고 말하면서 경제학의 온갖 지식과 견해를 펼치시기에 나는 아무 응수도 하지 않고 가만히 그 노인의 하는 말을 들어 보았다. 결론은 우리나라처럼 축복을 많이 받고 급속하게 발전한 나라가 없다는 주장이었다.
그렇다. 일제의 식민지를 겪고 동족간의 전쟁인 6. 25를 겪은 우리나라가 보릿고개의 가난을 딛고 이렇게 눈이 부신 경제 발전을 가져 왔다. 물론 새마을 운동이나 중동과 독일에 취업을 하고 광부나 간호사로 취직을 하고 한 것을 시작으로 해서 이 같은 놀라운 발전과 부흥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과 축복이 있었던 것이다. 애국가 가사처럼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인 것이다.
오늘 우리는 시편 118편의 일부 말씀을 묵상하고 있다. 그러나 시편 115편에 보면 하나님을 경외하고 하나님을 도움과 방패로 삼으며 하나님만 의지하며 살아가는 인생과 가문과 나라와 민족에 하나님이 복을 주신다고 하였다.
“이스라엘아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아론의 집이여 여호와를 의지하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아 너희는 여호와를 의지하여라 그는 너희의 도움이시요 너희의 방패시로다 여호와께서 우리를 생각하사 복(福)을 주시되 이스라엘 집에도 복(福)을 주시고 아론의 집에도 복(福)을 주시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을 막론하고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들에게 복(福)을 주시리로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곧 너희와 너희의 자손을 더욱 번창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너희는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복(福)을 받는 자로다.”(시115:9-15)
이 길지 않은 본문에 다섯 번이나 복을 말씀하신다. 그렇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복을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시편 118편 기자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영원히 인자하심을 감사하면서 이러한 시를 고백한 것이다. 1절부터 4절까지 네 번이나 반복해서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자, 그러면 하나님의 무슨 인자하심이 영원하시기에 이처럼 찬양하고 부르짖어 기도하게 하는 것인가?
넓은 곳에 세우신다.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고통 중에 부르짖는 백성들의 간구를 들으시고 나중에 넓은 곳에 세워 주시는 것으로 응답하신다고 했다. 그렇다. 이것이 믿음의 공식이다. 여기 5절 말씀에 나오는 ‘고통'(苦痛)(mechar)이란 ‘좁은 곳’이란 뜻이다.
하나님의 섭리는 좁은 곳에서 시작하여 넓은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고통스러운 삶에서 시작해서 영광스럽고 존귀한 삶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어둡고 답답한 곳에서 시작하여 광명하고 시원한 곳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우울하고 병약한 곳에서 시작하여 기쁘고 강건한 치유의 땅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다. 지난 15개월 동안 넓고 아름답고 충분한 공간에서 신학대학교 시설 전체를 다 쓰 듯하며 주일을 맞던 우리들이 오늘 이런 비좁은 지하 공간에서 주일을 맞았다. 그러나 우리 모두 우울해 하지 말고 넘치는 소망을 갖자. 어제 저녁 늦게 이 십자가와 강대상을 배달해 준 성구사의 직원 집사께서 “저 십자가는 제 아이디어와 기도로 제작한 것입니다”하고 소개하였다. 크고 작은 교회 십자가를 다양하게 보았으나 배경의 조명 말고 중앙에 사방 십자가의 조명을 이런 원리로 디자인 한 것은 처음 보았다. “빛은 소망을 말하지 않습니까? 저 동방 박사들이 크고 새로운 별빛을 보고 베들레헴의 아기 예수님을 찾아 간 것처럼 이 십자가의 불빛이 소망의 빛이 되기를 원해서 기도하면서 지혜를 구하고 이렇게 디자인하여 만든 것입니다.”하고 기쁜 마음으로 소개하면서 건네주고 돌아 가셨다.
우리는 이제 이곳의 지하 예배처에서 다시 시작하여 참으로 기쁘고 감격스럽고 드러내어 놓고 간증할 만한 곳으로 인도하심을 받아야만 할 것이다. 그동안은 남들이 다 마련하고 설치한 넓고 좋은 공간에서 누리며 지내 왔다면 이제부터는 하나하나 모두 다 우리의 손길에 의하여 준비하고 마련하는 공간과 시설과 성물들과 집기들을 사용하면서 새 길을 가게 될 것이다.
이것인 성경의 원리요 신앙 선배들의 신앙생활 공식이다.
순종의 사람 노아와 그의 여덟 식구들은 좁고 답답한 방주에서 시작하여 무지개가 아름답게 하늘을 가리는 새로운 언약의 땅에서 마음껏 번성해 나아갔다.
하나님은 요셉을 광야의 고통스럽고 두렵고 무섭고 암담한 죽음의 그늘이 뒤덮인 깊은 구덩이와 애굽의 어두운 감옥에서 건져 내셔서 애굽 나라의 총리가 되게 하셨다. 좁고 답답하고 어두운 곳에서 출발해서 넓고 높고 존귀한 자리로 인도해 주신 것이다. 어디를 가든지 하나님과 동행한 요셉의 신앙 열매인 것이다.
사울 임금에게 쫓겨 다녀야 하고 피신 다녀야만 했던 다윗은 광야와 동굴 생활의 암담하고 장래를 보장 받을 수 없는 고통과 죽음의 고비 고비를 넘고 넘어서 나중 에 다윗 성의 영광으로 이어졌다. 십 수 년을 그런 고통의 세월을 지낸 다윗은 삼십에 임금이 되었다. 그리고 칠십 세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기까지 존귀하고 창성해가는 이스라엘의 임금의 존영을 누리며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의 모습으로 다듬어져갔다.
죽기를 각오하며 사자의 굴에 던져져도 두려워하지 않던 다니엘의 믿음을 보라. 다니엘은 오늘 말씀처럼 고통스런 중에 부르짖는 날마다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어놓고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다니엘은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기도를 통해서 장차 하나님이 그를 넓고 높은 곳에 세워 주시는 축복을 오래도록 누리고 또 누릴 수 있었다.
에스더도 왕이 부르시지 않을 때에 나가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을 알고도 삼일 간 금식하며 죽으면 죽으리라는 담대함으로 임금 앞에 나아갈 때에 몸과 마음에 큰 고통과 번민에 휩싸여 있던 에스더를 하나님이 넓고 높고 존귀한 왕후의 자리로 이끌어 가셨다.
밤새도록 수고하였지만 한 마리의 물고기도 잡지 못한 베드로의 마음에는 빈 그물을 씻는 부담과 고통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런 그를 제자로 부르신 예수님을 따라 나섰을 때에 삼년 후에 베드로는 성령을 받았다. 그리고 베드로는 수많은 기사와 표적의 중심에서 일정하게 부르짖고 기도하며 존귀하게 쓰임 받는 성령 충만한 사도가 되었다.
1977년도에 신학교에 들어갔을 때에 첫 학기에 필독서로 읽은 책 중의 하나가 빅터 프랭크의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라는 책이다. 그 책의 내용은 저자가 아우쉬비츠 수용소에서 기사회생한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빅터 프랭크 박사는 빈 의과 대학의 신경 정신과 의사였다. 그러나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수용소에 수감 되었다. 수많은 동료들이 죽어 가고 있었다. 절망과 낙담 속에 살다가 고압선에 몸을 던지거나 목을 매어 달아 자살 하는 이들도 속출하고 있었다. 그런 참담한 현장에서 스스로 살아남기 위하여 깨달은 진리가 ‘의미요법’(logotherapy)이란 것이다. 좌절감과 공허감과 고독감과 상실감이 전혀 없이 100%의 만족감 속에 살아가는 인생은 이 세상에 단 한 사람도 없을 것이다. 과거 마릴린 먼로나 엘비스 프레슬리 같은 이들의 죽음을 보라. 마릴린 먼로(1926-1962)는 빼어난 미모와 남의 시선을 끄는 선천적인 장점들을 한 몸에 인기로 몰고 다녔으나 첫 남편인 야구선수 조 디마지오, 둘째 남편이었던 극작가 아더 밀러와 헤어지며 세 번째 결혼 생활 중에 약물 중독과 의문의 자살로 37살에 길지 않은 생을 마치고 말았다. 영화배우요 가수요 로큰롤의 황제라는 별명이 따라 다니던 인기 절정의 엘비스 프레슬리(1935-1977)도 43살에 미국 테네시 멤피스에 있는 자기 집 욕조에 쓰러진 채 쓸쓸한 죽음을 맞고 말았다. 우리나라에도 일 년에도 몇 명씩 자살하는 유명 연예인들의 자살 사건을 보라.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고통스럽고 답답하고 우울한 환경 중에서라도 넓고 존귀하고 아름답고 영원한 길로 인도해 주신다.
하나님이 내 편이 되어 주신다.
나 자신이 하나님 편에 서서 살아가야 한다. 오늘 시편 기자는 6절과 7절에서 담대하게 자기 자신은 여호와께서 자신의 편을 들어 주시는 하나님이시라고 감히 담대하게 고백하고 있다. 이 얼마나 진실한 믿음으로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자 하는 신앙의 고백인가.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하랴”(시118:6) 이 얼마나 아름다운 믿음의 고백인가. 자기 자신이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기에 감히 여호와가 자기편을 들어 주시리라고 고백할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가정이든 개인이든 불안해하지 말고 하나님의 편에 서서 살아가면서 하나님도 시시때때로 나의 편이 되어 주시리라는 그런 담대한 믿음을 갖고 살아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시118:7)
“너는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 나를 도우셨도다.”(시118:13)
“여호와는 나의 능력과 찬송이시오 또 나의 구원이 되셨도다.”(시118:14)
이 모두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하고 복된 고백인가.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과 남북 전쟁 때의 일화가 있다. 아브라함 링컨이 대통령으로 있는 북군의 군목이 “하나님은 북쪽군대의 편이십니다.” "군목님 저는 그 반대로 생각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편이 되는 것이 중요하지 하나님이 반드시 북군의 편이시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렇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 자신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한 삶을 살아가고자 하는 겸비한 믿음을 갖고 살아가야만 할 것이다.
하나님은 에서의 편이 아니라 야곱의 편이셨다. 하나님은 롯의 아들들인 모압과 암몬의 편이 아니시라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편이셨다. 하나님은 엘리 제사장의 편이 아니라 어린 사무엘의 편이셨다. 하나님은 사울 임금의 편이 아니라 광야에서 숨고 사울 임금의 창과 화살을 피하여 다니던 다윗의 편이셨다. 하나님은 아합 임금의 편이 아니라 엘리야의 편이셨다. 하나님은 스승을 배반하고 팔아 버린 가롯 유다의 편이 아니라 아들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편이셨다. 이처럼 하나님이 누구의 편을 들어 주시느냐 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것이다.
우리가 비록 이렇게 비좁은 지하 예배처에서 다시 새롭게 시작하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편이신 줄로 굳게 믿는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인 6절과 7절의 말씀처럼 두려워하지 말자. 오히려 하나님의 정의와 공의와 선과 악을 보응하시는 심판과 상급을 보며 살자.
여호와께 피하는 지혜를 주신다.
8절과 9절에 보면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란 말씀이 나온다. 새를 사냥꾼의 올무에서 보호하시며 자유하게 하시는 분은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하나님 아버지는 택함 받은 백성들이 영원히 피할 바위이시다. 시편 18편 1절과 2절에 보면 다윗은,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라고 했다. 다윗은 그 어느 용맹한 장군이나 전략가를 찾아 도움을 청하려 하지 않고 만군의 주 여호와 하나님께 피하는 담대하고 겸손한 믿음이 있었다.
신명기 1장 31절에는 “사람이 자기의 아들을 안는 것 같이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걸어온 길에서 너희를 안으사 이곳까지 이르게 하셨느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그렇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은 천만인을 의지하는 것보다 현명하고 복된 것이다. 하나님이 위하시고 하나님이 보호 하시고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고 하면 인생들이 벌떼처럼 에워싸고 또한 밀쳐 넘어뜨리려고 한다고 하여도 두려워 할 것 없다. 시편 기자는 고백한다.
“너는 나를 밀쳐 넘어뜨리려 하였으나 여호와께서는 나를 도우셨도다.”(시118:13)
이 같은 하나님 아버지가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이신 줄로 믿는다. 우리 모두의 능력과 찬송과 구원이신 주님을 찬양하며 앞만 바라보고 정진하는 하나님의 사람이 되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