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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참다운 지혜(욥15:1-16) 10. 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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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2-11-11 22:22 조회 23,964 댓글 0
 
인간은 누구나 가족들과 모든 사람들의 축복 속에 태어나서 평안하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길 원한다. 그러나 한 인간의 평생을 자기 마음대로 선택하여 편하고 좋은 길만 찾아 살수만은 없는 것이다.  최근에 시리즈로 묵상하는 욥기의 주인공이 그런 삶을 살아간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도 좋았고 세상 사람들도 모두가 다 그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인정하고 칭찬해 주었다. 그는 동방의 소문난 자타가 공인하는 가장 훌륭한 인물이었다.(욥1:30) 그는 “온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면 악에서 떠난 자였다.”(욥1:1) 그는 자녀 복과 재물 복과 건강의 복을 골고루 누리며 살던 주인공이었다. 남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지내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어느 날 갑자기 폭풍처럼 재앙이 덮치고 또 덮쳤다. 일곱 명의 아들과 세 명의 딸이 한 날 한 장소에서 다 죽었다. 큰 아들의 생일  잔치에 초대 받아 한 창 즐겁게 먹고 마시던 시간에 집이 폭삭 내려앉아서 다 한 자리에서 죽고 말았다. 믿어지지 않는 불행이 시작되었다. 11,500마리의 양과 소와 약대와 나귀도 다 죽고 다 불타고 다 빼앗기고 말았다. 그 많던 짐승들을 돌보던 종들도 다 죽었다. 설상가상으로 자기 몸에도 악한 피부병이 번져서 몸이 다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아내마저도 가정의 불행을 남편 탓으로 여기며 “하나님을 욕하고 죽으라.”(욥2:9)고 저주를 쏟아 부었다.

인간은 살아가면서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만날는지 아무도 모른다. 욥기의 주인공인 욥의 위대함은 그 같은 참담한 불행과 자기 질병 가운데서 하나님의 긍휼을 덧입고 재기하였다는 사실이다. 부모 앞에서 앞서 간 10남매의 죽음과 그 많던 재산이 강풍에 먼지가 쓸려 날아가듯이 다 날아가 버린 폐허 가운데 무기력하게 병들고 버려진 자기 절망의 수렁을 딛고 꿈틀거리며 재기한 무서우리만큼 다시 일어선 하나님의 사람이다.

올해 20살인 미국의 장애인 레슬러 더스틴 카터(Dustin Carter)는 5살 때에 ‘수막구균균혈증’이라는 병에 감염되어 양팔과 양다리를 팔꿈치와 무릎을 포함하여 사지를 모두 잃고 말았다. 그와 같은 불행과 좌절과 절망을 딛고 피 나는 도전과 훈련과 노력 끝에 상상을 초월하는 극한 훈련을 통해서 이미 고등학교 시절에 비장애인들과 겨루어서 46전 42승 4패의 놀라운 기록을 이룩한 미국과 세계가 주목하는 레슬러가 되었다.  그는 미국 상하원의 의회 초청을 받아 의원들 앞에서 연설하면서 “인생의 결과는 제 자신이 만드는 것입니다. 팔다리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기 때문에 저는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습니다.”는 말을 남겼다. 그에 관한 5분짜리 동영상을 보고 계속하여 말씀을  묵상하도록 하자.
불행은 누구에게라도 찾아 올 수 있고 언제라도 찾아 올수 있다. 문제는 자기에게 찾아온 불행과 역경과 장벽 앞에서 어떻게 반응하느냐는 자기 선택이다. 불행해졌으니까 불행해 하는 것은 누구나 하는 일이다. 가난해졌으니까 가난을 탓하거나 실패하였으니까 실패를 탓하거나 병들었으니까 병든 상태를 탓하는 것은  어느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불행이나 재앙이나 시련이나 고통 앞에서 그 현실을 극복해 나가는 자기 반응이 전혀 달랐던 인물들의 체험담이 우리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는 것이다.

욥은 이미 당한 엄청난 불행과 재난과 질병 앞에서 괴로워하고 고뇌하고 있었다. 14장 마지막 절인 22절에 보면, “다만 그의 살이 아프고 그의 영혼이 애곡할뿐이니다”고 욥은 자기 자신의 형편을 ‘살이 아프고 영혼이 애곡하는’ 처절한 형편의 주인공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런  욥의 대답과 기도가 끝나기가 무섭게 기다렸다는 듯이 첫 친구인 엘리바스가 다시 또 입을 열었다. 본문은 그의 친구 엘리바스의 두 번째 하는 말들을 모은 것이다. “지혜로운 자가 어찌 헛된 지식으로 대답하겠느냐”는 질문과 함께 쏟아 내는 엘리바스의 표현들 가운데 숨어 계신 하나님을 만나 보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 인간은 절대로 무한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한 사실은 욥도 알고 친구 엘리바스도 잘 아는 바이다. 그래서 엘리바스가 그런 말을 이어서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찌 사림이 동풍을 자신의 복부에 채울 수가 있겠느냐” 나약하고 유한하고 부족한 인간이지만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떤 지혜를 창조주 하나님께 구하며 살아가야 할까

하나님을 경외(敬畏)할 줄 아는 지혜
그렇다. 4절 말씀대로 인간이 지혜로운 인간답게 살아가려면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을 깨달아 알고 행해 나가야만 한다. 인간이 만일 하나님을 경외할 줄 모른다면 매사가 눈에 보이는 것 중심이 되고 만다. 헬라 문화와 히브리 문화의 큰 차이가 바로 그것이다. 헬라 문명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것 중심이었다. 그래서 화려하고 크고 웅장하고 값비싸고 좋고 아름답고 섬세하고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가지고 싶은 것" 중심이었다. 그러나 히브리 문화는 눈에 보이는 문화가 아니다. 출애굽한 히브리 백성들이 40년간의 광양 생활을 거치는 동안 저들이 광야에서 손에 소유하고 살 수 있는 것이란 거의 없었다. 하나님이 만나를 내려 주셔야 먹을 수 있었고 메추라기를 보내 주셔야 고기 구경을 할 수 있었다. 식수와 생활용수조차도 하나님이 반석에서 물이 나오도록 인도해 주셔야만 했다. 철저히 하나님 중심이요 모세 중심이요 시내 산 중심이요 성막 중심이요 법궤 중심이요 레위인 중심이요 아론과 그의 아들들을 중심으로 이어지는 제사장 중심이었다. 낮에는 구름 기둥으로 햇볕을 가리어 주시고 밤에는 불기둥으로 어둠을 밝혀 주시지 않으면 생존하기조차 어려운 것이 광야 생활이었다. 아브라함의 후손인 히브리 백성들은 광야 생활 40년 동안 처절하게 이 같은 하나님의 절대 은혜를 체험하며 연명하고 생존해 나갔다. 모세를 통해서 제정해 주신 유월절과 초실절과 장막절이란 것도 결국은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의 신앙을 강조하는 하나님의 절기 명령이요 삶의 방식이었다. 이는 나중에 요단강을 건너고 여리고 성과 아이 성을 공략한 후에 정착한 가나안 정착기와 사사기와 왕정기에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산다는 것은 결국은 보이는 물질문명의 세계보다 보이지 아니하시지만 보이는 세계를 지배하고 다스리시고 인도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 중심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욥의 위대함은 다 죽고 다 잃고 다 없어지고 다 사라지고 심지어는 자기 건강마저 강하게 부는 바람 앞에 깜빡거리는 촛불처럼 언제 꺼질지 모르는 극심한 질병으로 다 죽어가면서도 그의 신앙 중심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지혜”에서 벗어나지 않는 믿음이 있었다는 점이다. 물론 욥기를 대하다 보면 재앙과 질병 앞에서 번민하고 갈등하고 괴로워하고 탄식하는 욥의 인간적이고 진솔하고 처절한 장면들을 수 없이 대하게 된다. 그러나 그래서 욥이 더 위대한 것이다.

신앙 이란 무엇인가. 무슨 일을 만날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에서 벗어나지 않으려는 자기 씨름이 아닌가. 평소에 인생이 순탄하고 형통할 때에야 하나님 잘 못 믿는 신앙인이 그 어디에 있겠는가. 문제는 환란과 핍박이 왔을 때가 아니겠는가. 336장 찬송의 가사를 보라.

“환란과 핍박 중에도 성도는 신앙 지켰네
이 신앙 생각할 때에 기쁨이 충만 하도다
성도의 신앙 따라서 죽도록 충성하겠네”

이 찬송시는 1849년도에 페이버(F. W. Faber)라는 분이 작사한 찬송시이다. 지금부터 160년 전의 작품이다. 오늘 날 21세기의 최첨단 과학 문명의 각종 다양한 혜택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인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따르되 얼마나 철저하게 하나님을 경외하며 살아가는가.” 스스로 자문해 보아야만 할 것이다. 1517년에 마틴 루터가 당시의 기독교인 종교의 타락상으로 보며 95개 조항의 반박문을 비텐베르크 궁성 교회의 정문에 게시할 당시와 지금의 가톨릭은 별로 큰 변화가 없다. 그 한 예로 가톨릭의 성모 숭배는 점점 더 극심해 져만 가고 있다. 이 같은 한 가지만 보더라도 가톨릭이 얼마나 성경에서 멀어져 가고 있으며 하나님의 말씀과 복음에서 멀어져 가고 있는가를 단면이 아닐 수 없다.

1984년 3월 24일에 로마의 바티칸 대 성당의 대 광장에는 15만 명의 가톨릭 신도들에 세계에서 모여들었다. 10억 명 이상이 T. V 생중계를 시청하고 있었다. 당시의 교황이었던 요한 바오로 2세는 포르투갈에서 공수해 온 파티마의 마리아 동상으로 광장에 모셔 놓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성모 마리아를 숭배하는 특별 미사를 집전하고 있었다. 성경은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2:10)라고 말씀하였다. 그렇다. 이 세상의 모든 피조 인생들은 오직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만 무릎 꿇어야만 한다. 그 이외의 그 어떤 대상에라도 무릎을 꿇는 것은 우상숭배이다. 요한 계시록 21장 8절에 보면, “우상 숭배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던져지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언제나 하나님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만을 경외하는 지혜를 구하여야 할 것이다. 본문인 욥기 15장 8절에.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네가 들었느냐”고 하였다. 그렇다. 하나님의 오묘하심을 깨달아 알고 믿으며 하나님만 경외하는 신앙이야 말로 지혜로운 신앙인 것이다. 우주 삼라 만상과 이 세상의 하늘과 땅과 바다 가운데 충만하신 하나님의 오묘하심 앞에 하나님만 경외할 줄 아는 신앙이야 말로 참다운 지혜가 아니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위로(慰勞)를 깨닫고 감사하는 지혜
인간만이 감사를 안다. 가끔 씩 무슨 충견에 대한 일화를 듣긴 하지만 그건 주인에게 사랑을 받고 살아가던 충성스러운 개에 대한 희귀한 일화일 뿐이다.  인간은 그 누구라도 하나님의 위로가 없이는 이 험한 세상을 단 하루로도 견디며 살아갈 수가 없다. 인간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공급과 보살피심 가운데 매 순간을 살아가는 나약한 존재이다. 욥이 그동안 재난을 만나기 이전에 누리던 자녀들의 복과 재산의 복과 그 많던 짐승 떼가 번성하던 모든 복이 욥의 노력도 없지는 않았겠으나 하나님의 전적인 축복이요 은총이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은 부자가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셨다.(마19:23)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마19:24)고 선언하셨다. 이 같은 예수님의 선언 앞에 제자들조차도 큰 충격을 받았다. 그래서 몹시 놀란 제자들이 이렇게 질문하였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 예수께서 제자들을 바라보시며 대답하셨다.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그 때에 베드로가 여쭈었다.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이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마태복음19장 25절부터 28절까지에 나오는 대화이다.

부자이기 때문에 천국에 못 들어간 다는 말씀이 절대로 아니지 않는가. 여기서 부자란 재물에 대한 집착과 탐욕 속에 살아가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그의 마음에 없다. 즉 하나님이 없다. 재물만 보이는 것이다. 하나님께 “돈 잘 벌게 해 주세요. 재물 늘어나게 해 주세요. 사업 잘되게 해 주세요. 장사 잘되게 해 주세요. 좋은 학교 가게 해 주세요. 성공하게 해 주세요. 출세하게 해 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면서 계속해서 하나님께 나의 사업과 장사가 잘 되게 해 달라고 명령하듯이 기도해 놓고 잘 되고 돈이 벌리고 돈이 모아지기 시작하고 형통해지면 ‘돈! 돈! 돈! 돈!’ 하면서 돈만 사랑하고 재물에만 눈이 가리어져서 살아가는 사람은 겉으로는 하나님 신앙으로 살아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돈이 우상이고 재물이 우상이고 돈이 위로이고 재물이 위로인 것이다. 돈만 사랑하는 사람은 믿음에서 떠나게 되고 결국은 그 돈이라는 것이 많은 근심거리가 되어 자기를 찌른다고 했다.(딤전 6:10) 인생의 참다운 지혜는 하나님을 위로의 근원 삼는 신앙이다. 욥기 15장 11절에 “하나님의 위로와 은밀하게 하시는 말씀이 네게 작은 것이냐”고 반문하는 친구 엘리바스의 질문 안에 하나님의 하시려는 말씀이 담겨 있는 것이다. 요즘 같은 설교와 말씀의 홍수시대에 쉽게 접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흔하다고 해서 은밀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라도 작게  여기면 안 된다.

우주선을 쏘아 올리려면 15만개의 크고 작은 부속품이 제대로 잘 결합되어 각기 제 기능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한다. 이번에 2012년 10월 26일에 발사하려던 나로 호 3차 발사 시간을 연기한 것도 1단과 발사대의 연결부위인 헬륨가스 주입부에 이상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라고 발사 지연 이유를 발표하지 않았는가.

이 세상의 그 모든 일들은 하나님의 도우심과 지혜와 위로가 아니고는 할 수 있는 일도 없고 되는 일도 없다. 이는 한 생명의 잉태와 탄생과 성장과 평생을 살아가는 모든 삶이 매 순간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위로하심이 없이 존재할 수 있는 생명체란 이 세상 그 어디에도 없다. 공중에 날아다니는 참새 한 마리와 벌과 나비와 곤충 한 마리에 이르기 까지 모든 생명체 안에 하나님의 섬세하신 위로의 손길이 배어 있다. 땅에 기는 벌레 한 마리와 하루살이의 목숨으로부터 물속의 그 어느 작은 물고기 한 마리의 목숨이라도 모두가 다 하나님의 섬세하시고 오묘하시고 자상하신 손길 안에 있는 것이다.

송옥분은 1892년에 가난한 농촌에서 태어났다. 구한말인 1901년에 조선 땅에 대 기근이 있었다. 추위와 굶주림 가운데 그의 부모는 어린 딸 송옥분을 부잣집에 하녀로 팔아 버렸다. 성질 고약한 주인을 만난 송옥분은 제대로 얻어먹지도 못하고는 짐승처럼 일만 시키고 욕하고 매질하는 주인으로 인해서 병들고 약해져만 갔다. 어느 추운 겨울 날 앏은 옷을 입고 추위에 떨며 겨우내 일만 하던 그녀는 심각한 동상에 걸리고 말았다. 손발의 동상 부위가 썩어 들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런 상황에서 주인의 눈치를 보며 힘든  허드렛일을 계속해 보려고 했지만 나중에는 몸마저 마비가 되고 죽을 것만 같았다. 뒤 늦게 그런 사실을 알게 된 주인은 노비로 부리던 송옥분을 서울에 있는 선교사들의 선교 병원으로 보내버렸다. 동상으로 인한 상처가 너무나 심각해서 목숨을 건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주인은 떠나 버렸고  선교 병원에 홀로 남은 송옥분의 마음씨 좋은 선교사들의 사랑을 받으면서 8개월 정도의 치료 기간 동안 생사의 고비를 수 없이 넘겨야만 했다. 1906년 9월에 목숨은 건졌지만 결국은 동상 후유증을 견디지 못해서 양 손목과 한쪽 다리를 절단해야만 했다. 송옥분은 그런 모습으로 병원에서 년말을 맞았고 선교 병원 안에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장식되었다. 평생 처음 보는 크리스마스트리였다.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전혀 새로운 세상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그 성탄 절 즈음에 간호사이며 선교사인 미네르바 구타펠이 미국의 친구에게 성탄 카드를 쓰고 있었다. 그 장면을 지켜보던 송옥분은 “ ‘조선에서 가장 행복한 소녀가’ 라고 제 인사도 좀 적어 주세요.”라고 말을 건넸다. 그 때에 미네르바 구타펠 선교사는 이 가난하고 불쌍한 소녀를 가장 행복하게 한 힘이 무엇인지 물어 보았고 송옥분은 또박 또박 여섯 가지의 감사  내용을 대답하였다.

첫째, 선교 의사들의 손길에 의해서 자기 몸의 고통을 해결 받게 된 것
둘째, 병원에 들어 온 후로는 주인으로부터 더 이상 매를 맞지 않고 살수 있게 된 것
셋째, 병원에 온 후로 더 이상 굶지 않게 된 것
넷째, 이제는 자기를 종으로 부리던 무섭고 사나운 주인에게 다시 돌아가지 않을 수 있도록 선교 병원에 남아서 살게 된 것
다섯째, 병원에 온 후로 크리스마스트리의 아름답고 매혹적인 광경을 지켜보게 된 것
여섯째, 하나님을 알고 믿으며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깨닫게 된 것

그 후에 송옥분은 세례를 받았고 송안나(Anna Song)란 예쁜 새 이름도 갖게 되었다. 전혀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그 후로 동상으로 잘려 나간 손목에 연필을 붕대로 묶어서 글씨도 배우게 되었다. 영어도 배워서 곧 잘 하게 되었다. 미국으로 돌아간 선교 간호사들에게 영어로 감사 편지도 쓰게 되었다.  송안나는 병원 안에서 선교 활동을 하는 선교사와 의사와 간호사와 다른 환자 모두에게 깊은 감동을 주는 살아있는 천사였다.  그 후에 송안나는 병원에서 영어와 한국어 통역을 도 맡아서 섬기는 통역관이 되어서 수많은 환자들을 위로하며 희망을 나누어 주는 믿음의 여종이 되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겼다. “고통과 슬픔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마냥 나쁜 것만은 아니에요. 우리에게는 항상 희망이 기다리고 있잖아요.” 하나님의 위로 가운데 감사의 신비를 깨닫고 감사의 삶을 살아갔던 선교와 간증의 주인공 송안나 즉 송옥분은 당시의 조선 사람들뿐만 아니라 선교사들과 미국 사회에 까지 책으로 소개될 만큰 훈훈한 하나님의 위로를 전하는 복음 전파의 중심인물로 살다가 하나님 앞으로 돌아갔다. 개화 초기에 우리나라에 와서 선교한 미국 연합감리교회의 선교사요 간호사였던 미네르바 구타펠(Minerva L. Guthapfel)이 쓴 책, <The Happiest Girl In Korea>에는 그 책의 주인공인 송옥분 자매의 신앙을 이처럼 소개하였다. 이 책은 <조선의 소녀 옥분이: 선교사 구타벨이 만난 아름다운 영혼들>이란 제목의 우리말로도 번역되어 소개되었다.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만날 지라도 하나님께 대한 오해를 버리고 하나님의 끝이 없으신 위로를 믿고 의지하며 감사하는 참다운 신앙으로 살아가야 할 것이다.

하나님의 긍휼(矜恤)하심만을 의지하는 지혜
하나님은 그 어떤 인간의 거룩함도 믿지 아니하시는 분이라고 하였다. 그렇다. 인간에게는 거룩함이나 의로움이란 없다. 단지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해 주시는 칭의의 은총을 덧입는 것뿐이다.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이다. 욥기 15장 14절에서 욥의 친구 엘리바스가 말하는 “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 여인에게서 난 자가 어찌 의롭겠느냐”는 말은 영적으로 지극히 도전적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맑은 하늘이라도 부정하다고 하였다. 16절에 보면, 엘리바스는 인간을 “악을 저지르기를 물 마심같이 하는 가증하고 부패한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와 같은 욥의 친구 엘리바스의 말에 반격할 내용이 아무리 많더라도 인간은 인간일 뿐이다. 10절의 표현처럼 인간이 머 리가 희어지고 나이가 많아져서 연로해진다고 하여도 다 깨달아 온전히 터득할 수 없는 것이 하나님의 세계이다. 욥 자신도 재난과 슬픔과 육신의 심각한 질병으로 인한 고통 가운데서 의심 없이 분명하게 인정하는 부분이 있다. 욥기 14장 4절에 보면, “누가 깨끗한 것을 더러운 것 가운데서 낼 수 있으리이까 하나도 없나이다.”라고 고백하였다. 욥 자신이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와 긍휼하심이 없이는 이 세상의 그 어떤 인간이라도 존재 할 수 없다는 고백 신앙이 있었다. 인간은 끝이 없이 하나님이 불쌍히 여겨 주시고 긍휼하게 여기 주시는 은총에 의해서만 생명을 부지하며 살아 갈 수 있다. 하나님의 긍휼하심이 아니면 심장의 맥박과 폐의 깊은 호흡과 사지백체의 온갖 섬세한 모든 살아가는 기능들이 좀처럼 유지될 수가 없는 것이다. 우주선이 완벽한 기능을 다 갖추어야 공중에 쏘아 올려 질 수 있듯이 우리가 하루하루 이 험한 세상에서 이 정도의 건강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그 모든 것이 엄청난 하나님의 축복이여 크나큰 하나님의 선물이 아닐 수 없다. 지금의 내가 그러하듯이 천국 신앙 또한 하나님의 긍휼하심 가운데 주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은총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욥은 친구 엘리바스가 지적하는 것처럼 그렇게 교만한 인생이 결코 아니었다. 욥기 16장 19절과 20절의 욥의 고백을 보라. “지금 나의 증인이 하늘에 계시고 나의 중보자가  높은데 계시니라. 나의 친구는 나를 조롱하고 내 눈은 하나님을 향하여 눈물을 흘리니” 지난 날 내가 살아온 그 모든 날들과 지금과 나중을 다스리시고 지배하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 가운데서 인간의 참다운 지혜를 덧입고 살아가는 축복이 우리 각 사람 모두에게 임하길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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