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항공사진으로 제공되는 사진을 확대해 보면 참으로 놀랍다. 이 같은 사진 자료들은 불과 몇 십 년 만 거슬러 올라가도 상상할 수조차 없던 일들이다. 우리가 사는 집의 앞 골목까지, 내가 사는 집과 혹은 아파트의 위치와 건물의 자세한 내용들이 마치도 건물 바로 앞에서 찍은 것처럼 선명하게 드러난다. 우주공학의 발달과 컴퓨터 공학의 발달과 광학의 발달로 인하여 주어진 최첨단의 과학 혜택인 것이다. 물론 군사학과 전쟁 무기의 발달에 기인한 것들이 적지 않겠지만 이제는 일정한 한 곳에서 세계의 곳곳을 한 눈에 속속들이 다 들여다보는 세상에서 살고 있다. 무서운 생각까지 든다.
인간은 이 같은 과학의 발전을 이루는데 꽤나 오랜 세월을 보내 왔다. 그러나 하나님의 창조 세계 가운데 운행하시는 그 놀라우신 섭리와 경륜은 가히 상상을 초월한다. 모세의 성막 시대에 시작해서 다윗 왕의 때까지 하나님의 법궤를 모신 곳은 성막이었다. 다윗은 늘 하나님의 법궤가 모셔져 있는 성막을 볼 때마다 하나님 앞에 죄송한 생각으로 기도하고는 하였다. 그 기도의 열매로 아들 임금 솔로몬의 때에 가서 다윗이 그렇게도 원하고 원하던 성전이 건축되었다. 감격스러운 날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솔로몬이 성전의 제단 앞에서 회중을 향하여 마주서서 하늘을 향해 두 손을 치켜들고 기도하고 있다. 오늘 본문은 그러한 기도 중의 일부이다.
우주 만물보다 크신 하나님.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솔로몬 임금은 아버지의 소원을 따라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식양과 규격대로 예루살렘 모리아 산언덕에 아름다운 성전을 지어 봉헌하며 이렇게 기도하고 있다. 하나님은 상천하지에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분이시다. 유대 사람들은 고대로부터 하늘을 셋으로 구분하였다. 마치도 고린도 후서 12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하는 대로 셋째 하늘로 구분되는 그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감히 하나님의 그 장엄하신 창조의 손길과 섭리를 감히 담을 수 없는 크고 크신 분이시다. 27절 본문을 해석한 맛소리 본문에 보면,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 당신을 담을 수 없습니다.” 이렇게 고백하고 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40평짜리 아파트 하나 마련하고 들어앉아서 응접실 밖으로 내다보이는 곳이 가린다고 조망권 운운하는 그런 답답하고 좁디좁은 하나님이 아니시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 아버지, 우리의 창조자이시며 대소사에 섭리자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솔로몬의 고백처럼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감히 용납할 수 없는 크고 높고 장대한 창조의 근원이시다. 그러므로 성도된 하나님의 사람들은 동서남북만 바라다보지 말고 고개를 들고 눈을 들어 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 위에 거처를 삼으시고 해와 달과 은하계의 그 수많은 별들과 우주 만물을 주관하시고 다스리시는 하나님을 바라다 볼 줄 알아야 한다.
우주의 크기가 얼마나 될까. 이런 생각 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 우주의 크기는 빛의 속도에 기초하여 계산한다. 가령 빛은 1초에 30만 킬로미터를 간다. 1시간이 3600초이니 하루는 86,400초이다. 그런 속도로 1년을 가는 것을 1광년이라고 한다. 빛의 속도로 10조 킬로미터를 가는 것인데 그런 속도로 150억 광년을 가야 우주의 이 끝에서 저 끝에 도달하게 된다는 계산이다. 그 어느 누구라도 상상으로 그 크기와 규모가 상상되질 않는다.
이 같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솔로몬은 이렇게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루살렘 언덕에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성전을 지어 봉헌하면서 “하나님이 참으로 땅에 거하시리이까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하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 그렇다. 우리가 믿고 사모하는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크고도 크신 하나님이시다.
다윗은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목자인 이새의 아들이었다. 아버지 이새나 아들 다윗이나 늘 베들레헴 언덕 저 높은 곳에 휘영청 밝은 달을 쳐다보며 밤하늘에 가득 찬 별들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며 양과 염소와 소와 나귀를 치는 목자였다.
그러나 솔로몬은 이스라엘의 임금이었던 다윗의 아들로 자라났다. 다윗의 성장기와 솔로몬이 자라나던 때의 환경은 이 쪽 끝에서 저쪽 끝과 같이 다르다. 다윗은 평범한 시골의 농촌에서 자라났고 솔로몬은 왕족과 고관대작들이 드나드는 왕궁에서 왕자로서의 성장기를 보냈다. 그러나 다윗과 솔로몬의 한결 같은 특징은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고 감히 용납할 수 없는 하나님 아버지를 잘 믿는 믿음 가운데 살아갔다.
그 솔로몬이 주전 966년에 임금이 되었다. 나이 20살에 임금이 된지 4년 후에 하나님께 예배할 성전을 짓기 시작하여 7년 만에 정성스레 성전을 완공하여 봉헌하며 이렇게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주의 앞에서 부르짖고 비는 종의 기도와 간구를
돌아보시고 들으시는 하나님.
기도는 가장 합리적인 것이다.
세상을 살면서도 권력자와 능력자에게 도움을 청하면 조금은 도움이 되는 것과 같다. 천지 만물의 창조자요 섭리자이신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고 빌며 기도하고 간구하면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은 어린 아이를 돌보는 어머니와 아버지의 손길처럼 돌보시고 들어 주신다. 이런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없는 것이다. 기도하면 들으신다는 믿음이 있어야 기도하게 되는 것이다.
성경은 철저히 기도의 책이다. 성경에 하나님이 쓰신 모든 사람들은 한 결 같이 기도의 사람들이다. 히브리서 11장에서 소개하는 믿음의 선진들의 특징은 한 결 같이 기도의 사람들이었다는 점이다. 하나님께 제사 드리던 아벨의 믿음이란 곧 기도하는 믿음이다. 가인과 아벨의 차이는 기도의 차이다. 가인이 왜 동생 아벨을 죽였는가. 기도하지 않는 사람의 소행이란 형제간이라도 그런 것이다. 하나님과 평생을 동행하던 에녹의 믿음이란 기도하는 믿음이다. 할아버지 무드셀라도 이해하지 못하던 방주 건설에 100년 세월을 묵묵히 투자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던 노아의 믿음은 기도의 힘에 기초한 것이다.
우리 교회가 성전을 건축하기 시작하며 새벽에도 물론 기도하지만 밤마다 기도하는 시간을 가지고 기도하려고 한다. 사도행전 3장에 이미 성령 충만하게 받았던 사도들인 베드로와 요한이었지만 정한 기도시간에 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 기도하는 일정한 기조의 습관에 붙들려 살아가던 어느 날 성전 미문 앞에 누군가가 데려다 놓은 앉은뱅이를 고친 것이 아닌가. 어디서 그런 능력이 나왔는가. 전적으로 기도의 힘이다.
하나님 앞에서 부르짖고 빌며 기도하면 주께서 들어 주신다. 돌아보실 뿐만 아니라 들어 주신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기도 비유에도 있지 않은가. 악한 재판장이라도 원수의 원한으로 인하여 억울한 일 당한 홀로 사는 여인이 날마다 길목을 막아서서 재판장에게 간청할 때에 그의 간청함으로 인하여 들어 주지 않겠느냐고 했다. 번거롭고 괴롭게 하니 들어 주는 법이 아니겠느냐는 것이다.
부르짖고 빌며 간절하게 기도하고 간구하면 인격적이신 하나님 아버지는 반드시 들어 주신다. 예레미야 33장 3절, “너는 내게 부르짖으라 내가 네게 응답하겠고 네가 알지 못하는 크고 비밀한 일을 네게 보이리라.”고 했다. 하나님이 친히 가르쳐 주신 기도의 방법이요 기도에 관한 비밀 응답의 교훈이다. 그 앞 절에 보면, “일을 행하시는 여호와, 그것을 만들며 성취하시는 여호와, 그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는 이가 이와 같이 이르시도다.”(렘33:2)고 했다. 그렇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는 그런 분이시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의 기도가 다 그런 기도였다. 아브라함이 나이 백세에 아들 이삭을 낳았다. 아니 하나님이 아들을 주신 것이다. 사실은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낳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그 아내 사라가 이미 경수가 끊긴지 오래지만 나이 구십에 아들을 잉태하도록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이나 사라가 낳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낳게 해 주신 것이다. 그런 일이 있기까지 아브라함은 늘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 앞에 단을 쌓으며 예배드리곤 했다. 단을 쌓았다는 말은 기도드렸다는 말이다. 하나님 앞에 부르짖고 빌고 기도하면 들으신다.
요즘 강남 엄마들 중에서 아들딸 논술 지도를 위해서 한 번 과외에 1,000만 원씩을 투자한다고 한다. 3개월 논술 지도 받는 특별 과외비로 1억을 투자한다고 한다. 뭐 돈 있고 그렇게 해서라도 좋은 결과를 맺을 수 있다면 자기 돈 들여 제 자식 가르치려 하는데 누가 말리겠는가. 그러나 강화도 섬에서, 시골에서 자라나면서 학원이 무언지 논술이 무언지 모르는 나로서는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들이다. 우리 두 아들들 모두 한국과 미국에서 초중고대학 졸업하도록 책상 한번 사주지 못하고 오직 주의 일에 힘쓰며 지냈어도 할 것 다 하던데 말이다. 데리고 마을 도서관에 다니고 심방 갈 때에 서점에 내려 놓고 몇 시간이라도 그 곳 안에서 책 보며 기다리게 한 것 밖에는 더 이상 해 준 것이 없는데도 에세이, 논문 쓸 것 다 쓰며 지내는데 말이다.
톨스토이나 도스토예프스키나 펄벅이나 헤밍웨이가 논술 과외 공부해서 그렇게 된 인물들일까. 김소월, 박두진, 박목월, 윤동주, 박경리 선생이나 박완서 선생이나 고훈 선생 같은 분들이 논술 과외 지도 받고 시작(詩作) 지도 받아서 그렇게 되었을까.
나는 우리의 후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고 빌고 기도하고 간구할 줄 아는 그런 지혜의 아들딸들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솔로몬이 그 많은 잠언과 지혜의 시와 전도서의 주옥같은 말씀들을 받아 기록 할 때에 왕궁에서 논술 지도 받아서 이룬 업적일까. 솔로몬은 기도의 사람이었다. 일천 번제을 드리며 하나님 앞에 지혜의 마음을 구하던 겸허한 기도의 사람이었다.
성전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
물론 언제나 기도할 수 있고 어디서나 기도할 수 있지만 방향을 정하고 기도하는 것은 대단히 성경적이다. 예수께서 태어나신 곳 베들레헴도 우연한 곳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언하셨고 정해 주신 곳이었다. 예루살렘 성은 그런 면에서 귀한 곳이다. 다윗은 예루살렘을 사랑한 임금이었다. 그래서 예루살렘 성을 다윗성이라고 할 정도이다. 다윗 성의 또 다른 이름은 시온 성이다. 시편 128편 5절과 6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너는 평생에 예루살렘의 번영을 보며 네 자식의 자식을 볼지어다. 이스라엘에게 평강이 있을지로다.”라고 했다. 그 예루살렘과 그 곳 저 언덕의 성전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어 주시리라는 것이다. 성전은 솔로몬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눈이 밤과 낮으로 보시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주의 종들이 성전을 향하여 비는 기도를 들어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열왕기상 9장에 보면 솔로몬이 성전을 짓는데 칠년, 왕궁을 짓는데 십 삼년이 걸렸다. 그 후에 하나님이 다시 솔로몬에게 나타나셔서 말씀하셨다. “네 기도와 네가 내 앞에서간구한 바를 내가 들었은즉 나는 네가 건축한 이 성전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내 이름을 영원히 그 곳에 두며 내 눈길과 내 마음이 항상 거기에 있으리니”(왕상9:3)라고 했다. 하나님은 성전에 하나님의 이름을 두시며 하나님의 눈길과 마음을 그 곳에 두시겠다고 약속해 주셨다.
군대에서 아침 점호 할 때에 보면 고향을 향하여 좌우 향 좌라고 명령하면 나름대로 부모님이 계신 고향이라고 여겨지는 방향으로 몸을 돌려서 묵념하는 시간을 날마다 갖는다. 기도가 그런 것이어야 한다. 마치도 이슬람교도들이 정한 기도의 시간만 되면 어디서든지 두 손을 땅에 대고 엎드려서 메카를 향하여 기도하는 것처럼 말이다.
앞을 못 보는 이 들이 예수께서 지나가시는 방향을 향하여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이렇게 소리를 지를 때에 눈을 떠서 새로운 광명을 보지 않았는가. 성전을 향하는 마음, 예수를 향하는 마음, 하나님을 바라보고 주님을 향하는 마음이란 간절한 마음이며, 사모하는 마음이며, 집중하는 마음인 것이다. E. M. 바운즈는 <기도의 심장>이란 그의 책에서 “하나님의 집에서는 기도가 주인이다”라고 말한다. 하나님을 집을 바라보고 사모하며 기도하면 그 기도에 능력이 임하고 응답 받게 되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하나님의 집이 다른 모든 면에서 부족한 점이 있다 할지라도 기도만 있으면 그 곳은 성소로 변한다. 기도 없는 교회는 영혼 없는 몸과 같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교회 안에 존재하신다. 기도가 익숙하지 않은 교회에는 하나님도 낯선 객에 되고 마신다.”고 했다.
그의 말처럼 교회의 생명과 능력과 영광은 곧 기도인 것이다. 교회 구성원들의 생명도 기도에 달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은 기도로 성스러워 지는 것이다. 하나님의 집은 기도로 지어지는 것이다. 기도가 없는 교회와 성도는 생명력과 능력을 잃어버리고 만다. 기도가 없으면 건물만 남게 되고 만다. 그러므로 기도만이 모든 것의 대답인 것이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 주신다고 했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면 당연히 말씀의 부흥 운동도 일어나게 되어 있다. 성전을 향하여 기도하고 말씀 묵상하고 말씀 붙들고 기도하기를 계속하면 기적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용서하시는 하나님.
기도하고 간구하고 부르짖으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온갖 죄와 악을 용서해 주신다. 30절 말씀처럼 임금이든 평민이든 하나님의 집을 향하여 간절한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면 하나님은 그 계신 곳 하늘에서 들으시고 용서해 주신다. 열왕기상 8장에서 솔로몬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늘에서 들으신다는 표현을 8번 반복하였다.(30, 32, 34, 36, 39, 43, 45, 49) 물론 우리가 성전을 바라보며 기도하고 십자가를 바라보며 기도하여야 하지만 하나님은 하늘에서 우리의 기도와 간구를 들어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이사야 58장 9절에 보면 하나님은, “네가 부를 때에는 나 여호와가 응답하겠고 네가 부르짖을 때에는 내가 여기 있다 하리라.”고 하셨다. 그렇다.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 돌아보아 보실 뿐만 아니라 용서하시는 아버지이시다. 예수께서도 그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는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시옵고.” 서로의 죄를 용서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용서를 받으며 누리며 죄 사함 받은 기쁨과 자유함 가운데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용서의 미학>(The Art of Forgiving)이란 책이 있다. 저자인 루이스 스미디스(Lewis B. Smedes)은 풀러 신학교의 유명한 교수였다. 네델란드에서 미국에 이민해서 칼빈 신학교에서 공부하고 교수가 되었다. 하나님의 용서를 체험한 그는 이렇게 용서의 가치를 설명해 준다. “용서할 때, 우리는 스스로에게 좋은 의사가 된다. 우리가 사용하는 치료제는 이 우주의 따뜻하게 고동치는 심장에서 스미어 나온 것이다.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의 치유하시는 능력으로 일을 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용서가 우선 우리 안에서 선하게 작용할 때에라야 만 우리한테 잘못을 한 사람에게도 역시 선하게 작용하게 되는 것이다.” 용서하고 용서 받으며 살아야 용서의 순환이 된다는 것이다. 용서하지 못하면 서로 지옥 속에서 겨우 목숨을 연명하는 결과가 되고 말 것이다.
하나님은 기도하고 간구하면 우리의 온갖 죄를 용서해 주시는 아버지이시다. 솔로몬에게는 그런 믿음이 있었다. 그래서 성전을 봉헌하며 두 손을 높이 치켜들고 그렇게 기도한 것이다.
요한복음 8장에 보면,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들려 나온 여인을 향하여 돌을 치켜들었던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을 향하여 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 바로 그러하시다. 땅에 엎드려 침묵하시며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시던 예수께서 아무 말씀이 없으셨던 긴 침묵 후에 일어나서 하신 말씀이 이것이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
그리고 다시 땅에 엎드려 몸을 굽혀 손가락으로 무엇인가를 쓰셨다. 양심의 가책을 받은 이들이 모두 다 그 현장을 떠나갔다. 이처럼 용서는 위대한 재창조의 새 출발을 가능하게 하는 능력이다.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이와 같은 엄청난 용서의 축복을 받은 주인공들이다. 죄와 악을 반복하던 우리를 하나님은 용서하시고 자녀 삼아 주신 것이다. 예수께서는 그 많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한 사람씩 분노와 심판의 돌을 내려놓고 그 현장을 떠난 후에 그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요8:11)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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