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받아 보는 조선일보와 국민일보에 양면 전면 기사로 대담 기사가 실렸다. 이어령 교수의 딸인 이민아 변호사와의 대담 내용이었다. 그녀는 최근에 신앙 간증집인 <땅 끝의 아이들>을 출간했다. 그녀는 이화여대 영문과를 3년 만에 졸업한 수재로 미국에 건너가서 L. A 지역의 검사가 되었다, 나중에는 변호사로 활동했고 지난 2009년에는 목사가 되었다. 10여년 검사 생활로 남을 정죄하고 죄목만을 찾아내던 직업이 자신의 성격도 그렇게 만들어 갔다. 아이 넷 수월하게 키워보려고 공무원인 검사를 10년 했는데 삶은 점점 힘들어졌다. 그 무렵 한인교회 목사로부터 급히 연락이 왔다. 갱단 범죄에 연루된 교포 아이가 종신형을 선고받을 것 같은데 그 아이 변호 좀 해달라는 안타까운 부탁을 받았다. 자기는 검사이지 변호사가 아니라고 대답했더니 지금부터 변호사 역할을 시작하면 되지 않느냐는 간청이었다. 그렇게 나선 변호사 생활로 사회의 어두운 면과 아픔과 절망과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세상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이혼과 둘째 아들의 자폐증세로 인한 긴긴 아픔의 세월을 보내야 했다. 받아 주는 학교가 쉽지 않아서 초등학교만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녀야 했다. 점점 몸과 마음은 지쳐갔고 아들이지만 미운 생각도 때로는 들었었다. 그런 그가 은혜를 체험한 후에 하와이의 어느 크리스천 학교에 자폐아들을 입학시켜 놓고 자신이 보조 교사 생활을 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다. 아들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해 달라고.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한번에 9개 씩의 알약을 떨어 넣어도 진전이 없던 아들의 자폐 증세가 봄 눈 녹듯이 사라져 가기 시작했다. 처음으로 사랑의 능력을 절절이 경험하게 된 것이다. 대학생이던 25살 난 잘난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도 겪어야 했다. 자신이 겪은 암과의 투병 생활과 자기에게 찾아 온 실명 위기의 역경 등을 긴긴 터널처럼 30여 년 동안 지내 오면서 기쁜 날 보다는 우울하고 견디기 참으로 힘겨운 마음 아프고 슬픈 나날을 지내 왔다. 그런 그는 지금 목사가 되어서 세계를 날아다니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이웃들을 섬기며 복음을 전하고 있다. 1992년에 세례를 받은 그는 17년 만인 2009년에 목사가 된 것이다. 아니 하나님이 그를 그런 길로 선택하여 부르셨고 몰아 가셨다고 했다. 그가 깨닫고 체험한 것은 끝이 없이 무한한 주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을 절절이 경험하게 된 것이다. 지내 놓고 보니 그 엄청난 시련과 고난들이 지금 다 하나님의 섭리와 축복으로 깨달아지고 다가오기 시작한 것이다.
오키타 치에의 <당신이 있어서 좋았어>라는 책이 있다. 일본에서 30년 이상 간호사로 활동하면서 1,000명이 넘는 임종 환자들을 돌본 간호사 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과 죽음을 다룬 11명의 삶을 다룬 책이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얼마나 오래 살았느냐 보다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는 것이다. 의식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어머니의 병실 침대에 끼어 함께 누워서 엄마가 듣든지 못 듣든지 “엄마가 아니었으면 나도 이 세상에 태어나지 못했겠지. 엄마! 엄마가 내 엄마인 것이 고마워” 그런 말을 두런두런 하고 있는데 의식이 없는 것 같던 어머니의 누워 있는 눈가에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이 책은 삶과 죽음이 얼마나 숭고한 것인지. 곁에 있는 사람과 잘 지내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 하루하루의 일상생활이 얼마나 축복된 것인지를 가르쳐 준다. 오늘 이란 시간은 어제 세상을 떠난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싶어 했던 내일이란 시간이기 때문이다.
정호승 산문집인 <내 인생의 힘이 되어준 한마디>에 나오는 잘 알려진 묵상이다. “오늘 내가 헛되이 보낸 하루는 어제 죽은 아가 그토록 살고 싶어 했던 내일입니다.”라는 표현 말이다. 그 묵상시에 보면 “돕는 다는 것은 우산을 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함께 비를 맞아 주는 것입니다.”라는 표현도 나온다. 오늘 본문은 앞뒤로 보면 고자(鼓子)된 인생이나 이방인에게 하는 말씀 같지만 사실은 나 자신을 향하여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다.
여호와와의 연합
물론 장수가 복이지만 중요한 것은 주 안에서 주님과 연합하여 살아가느냐는 것이다. 주 안에서 주님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증거 중의 하나는 하나님을 잘 섬기고 사랑하며 서로 섬기고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하나님이 누구이신지 모른 채 세상 적으로만 잘 되고 출세하고 소위 성공하여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 속에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자기 자신만 있을 뿐이다. 오늘 말씀에 보면 여호와와 연합한 생활에 대하여 말씀한다. 마치도 포도나무의 원 줄기이신 예수 그리스도께 연합하는 가지 인생의 풍요로움에 대하여 말씀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받고 인정받는 충성된 종으로 살아가며,
안식일(安息日)을 지키고 예배를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것이야 말로 여호와 하나님과 연합한 자의 모습이다.
또한 하나님의 언약(言約)을 굳게 지키는 자는 하나님을 모르던 이방인일지라도 복을 받게 된다.
“And foreigners who bind themselves to the LORD to serve him, to love the name of the LORD, and to worship him, all who keep the Sabbath without desecrating it and who hold fast to my covenant.”(사56:6)
신앙생활의 바탕과 출발은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시편 2편 11절에 보면,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섬기고 떨며 즐거워할지어다.”라고 했다. 시편 72편 11절에는, "모든 왕이 그의 앞에 부복하며 모든 민족이 다 그를 섬기리로다.”라고 했다. 우리가 잘 아는 시편 100편 2절에서는,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의 앞에 나아갈 지어다.”라고 했다.
또한 하나님을 사랑하는 증거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하나님도 외로운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덧입고 살고 하나님도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경배하는 섬김으로 만족을 누리시는 것이다. 경상남도 통영이 낳은 귀한 시인 김춘수 님의 ‘꽃’이라는 시처럼 말이다.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나는 너에게 너는 나에게 잊혀 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우리가 서로 간에도 상대방이 귀하고 사랑스럽고 존경스러우면 그 이름만 들어도 반갑고 귀하고 가슴이 설레는 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이다. 십계명 중의 제 삼 계명이 무엇인가.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함부로 부르지 말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는 마음으로 일컬으라는 강조가 아닌가. 인간관계에서도 서로의 아름다운 연합의 특징은 서로의 이름만 들어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나 서로의 관계가 소원해지면 상대방의 이름을 깎아 내리지 않는가.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의 이름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하게 여길 줄 아는 것이 신앙생활의 출발이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종으로서의 삶을 기쁘고 감사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한다.
종이나 노예라는 것이 이 세상의 역사로 하면 별로 전해 오는 어감이나 느낌이 좋지 않지만 성경적인 의미에서 하나님의 종이 되어야 한다. 주님의 종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축복이다. 여기에 심오한 신학이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모를 때에는 죄의 종으로 살던 인생들이다. 에베소서 2장의 말씀처럼 말이다. 전에는 본질상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던 불순종의 자식들이던 우리들을 하나님께서 은혜로 구원하셔서 복음의 종이요, 은혜의 종이요, 하나님의 종으로 삼아 주신 것이다. 이것은 놀라운 구속(救贖)의 축복이요 죄 사함의 영광인 것이다.
그리고 안식일 즉 주일을 잘 지키는 신앙이 중요하다.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아가는 증거가 무엇인가. 주일 신앙이다. 물론 새벽 기도도 중요하고 주중 예배가 다 소중하지만 주일 예배와 주일 신앙이 소중한 것이다. 주중에 세상에서 열심히 성실하고 진실하게 하나님의 자녀다운 삶을 살다가 주일이면 하나님께 나아와 예배드리는 그 생활이 소중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생활이다. 안식일 신앙 즉 주일 신앙으로 사는 이들은 일주일의 생활도 더럽혀서는 안 된다. 여기서 더럽힌다는 말은 하나님의 이름을 모독하거나 훼손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주일 날 예배는 잘 드리고 교회 밖에 나가서 가정이나 세상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가르거나 부끄럽게 행동하고 막 살면 안 된다는 말씀이다. 언행일치(言行一致), 지행일치(知行一致), 신행일치(信行一致)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다운 성도가 되어야 한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言約)을 굳게 지켜야 한다.
우리 신앙생활의 바탕은 누누이 강조하지만 언약 신앙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언약에 기초하는 것이다. 다윗이 축복을 받은 것은 하나님이 저에게 언약하셨기 때문이다. 교통 법규는 지킬 때에 서로 간에 복이 되는 것처럼 하나님의 언약은 지킬 때에 복이 되는 것이다. 창세기 17장의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하나님의 언약의 내용에 보면 9절에 지키라는 강조를 하였다. “그런즉 너는 내 언약을 지키고 네 후손도 대대로 지키라.”고 했다. 그렇다. 하나님의 언약은 지킬 때에 복과 은총이 되는 것이다. 언약이란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축복을 주시려고 제안하신 삶의 원리이다. 성경의 원리를 따라서 살면 그 어느 누구나 다 복을 받을 수 있다. 기독교인들은 복만 말한다고 무어라고 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면 이 세상의 그 어느 종교인들 복을 원하지 않는 종교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인생의 궁극적인 소원은 축복과 행복과 평안인 것이다.
자, 그러면 여호와 하나님과 연합하여 살아가면 어떤 은혜를 주신다고 하였는가.
하나님의 성산(聖山)으로 인도해 주신다.
성도된 우리들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마치도 포도나무 가지가 줄기에 붙어 있듯이 살아가면 하나님의 성산으로 인도해 주신다고 하였다. 노아 때에는 아라랏 산이 성산이요, 아브라함 때에는 모리아 산이 성산이요, 모세 때에는 호렙 산이 성산이었다. 엘리야 때에는 갈멜 산이 성산이요, 다윗과 솔로몬의 때에는 모리아 산인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기 원했고 아버지 다윗의 소원과 기도를 따라 성전을 지은 그 언덕이 성산이었다. 예수 그리스도 때에는 감람산과 골고다 산언덕이 인류 구속의 성업을 완성하신 거룩한 성산이었다. 신앙생활의 새로운 격변기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런 북한산 자락의 성산의 축복으로 인도해 주시기를 간절히 소망하자.
기도(祈禱) 하는 하나님의 집에서 기쁘게 해 주신다.
기도는 우리의 신앙생활의 과정이지 목적은 아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집을 기도하는 집으로 삼고 기도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집에서 기쁨을 주신다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의 집에 들며 날며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중에 그런 기쁨과 즐거움을 회복하여야만 할 것이다. ‘주의 날’이란 복음 성가가 있다.
“이 날은 이 날은 주의 지으신 주의날일세
기뻐하고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즐거워하세
이날은 주의 날일세 기뻐하고 즐거워하세
이날은 이 날은 주의 날일세”
하나님의 집에서 기도하고 예배드리면 그런 기쁨과 즐거움을 주실 줄로 믿는다.
번제(燔祭)와 희생(犧牲)을 하나님의 제단(祭壇)에서 기꺼이 받으신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렸으나 하나님이 받지 않으신다면 얼마나 당황스럽겠는가. 아담의 큰 아들 가인이 경험한 충격이 바로 그런 것이지 않았나. 번제보도 중요하고 희생보다 소중한 것이 제사를 드리고 예배를 드리는 예배자의 마음과 태도이다. 이사야 1장 12절 말씀에 보면 마음과 정성이 떠난 제사에 대하여 화가 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책망하시는 말씀이 나온다.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고 하셨다. 이 얼마나 충격적인 말씀인가. 우리가 만일 진심으로 예배하는 예배자의 태도에서 벗어난다고 하면 숫양과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라도 받지 않으시겠다고 하였다.(사1:11) 예배의 진정한 축복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우리의 예배를 받으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찬송하지 않는가.(631장)
“우리 기도를 주여 들어 주시고 주님의 평화를 내려 주소서. 아멘”
여기서 더할 것도 덜할 것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우리의 기도와 찬송과 예배를 받아 주신다면 이보다 더욱 더 큰 은총과 축복이 어디에 더 있단 말인가. 하나님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면 그 예배를 받으시고 응답하시고 축복하신다.
쫓겨난 백성들을 불러 모아 주신다.
내일, 2011년 8월 15일은 광복절 66주년이 되는 날이다. 1945년도에 일제의 식민지로부터 해방과 독립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삼년 후에 대한민국을 건국하기에 이르렀다. 이 얼마나 국가적으로 크나큰 하나님의 은총이요 축복인가. 이스라엘 나라 사람들은 바벨론의 포로에서 70년 말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 후에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고 에스라의 말씀 부흥 운동과 더불어 느헤미야의 성곽 중건의 대역사를 이루었다. 때가 차니 끌려가고 흩어졌던 포로의 땅에서 언약의 땅이요 다윗의 도성인 이스라엘과 예루살렘으로 되돌아 갈 수 있도록 불러 모아 주신 것이다. 진심으로 회개하고 돌이켜 하나님의 언약의 말씀 안에서 살기를 소원하면 흩어졌던 땅에서 약속의 땅으로 불러 모아 주신다. 이것이 신명기 30장에서 약속하신 언약의 말씀이시다. 이는 개인과 가정과 교회와 국가와 민족에 골고루 적용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면 불러 모으시고, 거역하고 불순종하면 이방 땅에 포로와 볼모로 잡혀 가도록 흩어 버리신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깨어 기도하면 포도나무 가지처럼 원 줄기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포도원의 농부이신 하나님께 연합한 성도다운 성도의 삶을 살아가자.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