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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문    |  지성래목사  | 설교문
한 신앙인의 기도(시86:11-17)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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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지성래
지성래
작성일 11-07-17 07:46 조회 20,671 댓글 0
 
가는 곳마다 제단을 쌓던 아브라함도 기도의 사람이요, 40년 내내 광야에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던 모세도 기도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성경, 구약의 인물 중에서 대표적인 기도의 사람이 바로 다윗이다. 시편에 소개된 다윗의 기도를 대하다 보면 얼마나 인간적으로 솔직하고 진솔하고 적나라한 기도의 사람이었는가를 알 수 있다. 사실 기도에 대하여 가르치는 기도학이라는 것이 있지만 기도는 기도지 따로 학문이 필요 없다. 지난 이천년 동안 기독교 역사에 전해져 오고 발전해 온 기도법의 다양한 분야가 소개되곤 한다. 우리말로 소위 관상기도라는 것 말이다. 그러나 그것도 기도의 한 유형일 뿐이지 기도의 전형은 아니다. 요즘 복음주의 계통의 신학자들과 목회자들이 그에 상응하는 복음적인 기도 운동을 펼쳐 보려고 하는 것도 바로 그와 같은 이유 중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물론 성악을 하거나 스피치 분야에서는 호흡법 중에서도 복식 호흡의 유익에 대하여 설명하지만 흉식 호흡이든 복식 호흡이든 생명을 유지하는 데는 호흡 그 자체가 축복인 것처럼 기도하는 그 자체가 유익이요 은총이요 축복인 것이다. 오늘의 본문인 시편 86편은 17절의 분량인데 절의 구분이 없이 단숨에 읽어 보면 이 시편의 기록자인 다윗 자신이 얼마나 어린 아이와 같은 마음으로 기도하고 있나를 보여 준다. 가령 1절을 보자. “여호와여 나는 가난하고 궁핍하오니 주의 귀를 기울여 내게 응답하소서.” 이와 같은 기도는 그 누구라도 할 수 있는 기도가 아니겠는가. 그렇다. 기도란 그런 것이다. 마치도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우는 행위 한 가지를 가지고 “배가 고파요, 오줌을 쌌어요, 아파요, 졸려요, 안아 줘요.”와 같은 다양한 의사 표현을 할 수 있고 엄마는 어린아들딸의 우는 것 그 하나를 갖고 대화가 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짧지 않은 시편 86편의 말씀 중에서 후반부에 있는 말씀을 중심으로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11절 이하의 본문에서도 크게 7가지의 기도 주제를 갖고 기도하였다. 차근차근 본문을 따라 묵상하며 은혜를 나누길 원한다.

주의 말씀을 내게 가르치소서.
다윗은 11절에서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라고 기도하고 있다. 다윗은 인생을 함부로 막 살려는 사람이 아니었다. 주의 도를 따라서 즉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살아가고자 하는 겸손함이 가득했다. 오늘 날의 학교 교육이나 시대적인 위기는 어린이나 청소년들에게 지식은 전달되는데 윤리나 도덕이나 사람됨을 가르치는 참 교육이 무너져 있는 현실에 대하여 너도 나도 안타까워하고 있다.  가정이나 나라가 잘 살고 번영하는 것 다 좋지만 제대로 살기 운동을 해야 할 것이다. 가정이 무너지면 나라가 무너지고 만다. 가정과 교회의 하나님 말씀 교육이 병들면 사회가 병들고 나라도 병들고 만다. 지난 이천년 동안에 구라파와 북미주와 아시아로 이어지는 기독교 국가의 번영의 바탕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귀하게 여기는 말씀 운동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령 일본에는 기독교인의 수가 많지 않다고 하지만 일단 복음을 받아들인 기독교인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일본 사람들의 모습과 많이 다르다.

1876년 미국 보스턴이 위치한 매사추세츠 주립 농과대학의 학장으로 있던 윌리엄 클라크 박사가 일본에 도착하였다. 그는 일본 정부는 북해도인 삿포로에 농업학교를 세우기로 결정하였다. 윌리엄 클라크 박사는 그 학교에서 에서 식물학과 농학을 가르칠 교수로 청빙되었다. 초청에 응한 그는 1876년 7월 초순에 조수 2명과 학생 11명을 데리고 미국을 떠나 일본 요코하마 항구에 도착했다. 그를 영접하기 위하여 일본 문무 성에서 장학관 한 사람을 내보냈다. 그는 그들 일행을 삿포로까지 안내하기로 되어 있다. 배가 막 요코하마 항구를 떠나려고 하는데 이 장학관이 클라크 교수일행의 짐 보따리를 보더니 대뜸 물었다. "교수님! 이게 무슨 박스입니까?" "이게 다 성경책입니다." 장학관은 갑자기 정색을 하더니 놀란 듯이 클라크 교수에게 정중하게 말했다. "교수님! 우리 일본 대제국에서는 아무도 학교에서 학생들에게 성경을 가르칠 수가 없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성경책은 가져가실 수가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장학관의 말을 듣던 클라크 교수는 비장한 각오를 한 듯 노기에 찬 언사로 대꾸를 했다. "그렇다면 뱃머리를 돌리시오 나는 미국으로 돌아가겠소." 장학관은 클라크 교수의 당당한 자세와 사명감에 넘치는 자신감 그리고 그의 확고부동한 태도에서 오히려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만 그에게 압도당하고 말았다. 그리고 엉겹결에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교수님! 가지고 가셔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강의 시간에는 절대로 가르치지 말고, 강의가 끝난 방과 후에는 가르치십시오. 장학관은 급한 김에 그만 성경교육을 허락하고 만 것이다.

마침내 클라크 교수 일행은 7월 말에 삿포로에 도착했고, 그 해 9월에 삿포로 농림학교는 개교되었다. 개교 후 일본 개척청의 한 관리가 삿포로 농림학교에 교칙을 만들어 가지고 교장을 찾아 왔다. 그때 클라크 교수는 빙그레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규칙으로는 인간을 만들 수 없습니다. 'Be gentleman!(신사가 되라!)' 으로 충분합니다." 그리고 그는 학교의 교칙을 아예 없애버렸다. 그리고 매일 학교 강의가 끝나면 학생들을 모아 놓고 성경을 가르쳤다. 그런 후 계약 기간이 끝나 미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 학교를 떠나기 전, 많은 교수들과 학생들을 모아 놓고 고별 연설을 하면서 남긴 마지막 말이, "Boys be ambitious!"(소년이여! 대망을 품어라!)였다. 그 후 삿포로 농림학교는 북해도 농과대학으로 발전했다. 클라크 교수는 학교를 떠났지만 그를 기념하기 위해 학교 측에선 학교 교정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 그리고 그의 동상 밑에다 그의 마지막 외침인 "Boys Be ambitious!" 라는 말을 새겨 놓았다.
당시 일본은 1868년에 일어난 명치유신 이후로 사회가 극도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국가의 기강이 뿌리째 흔들리던 일대 혼란기요 과도기였다. 당시 서구의 새로운 문화와 문명을 받아들임으로 말미암아 청소년들의 가치관이 송두리째 흔들리고 있었던 때였다. 그러한 때에 삿포로 농림학교 출신들은 졸업 후 사회 각 계층으로 배출되어 일본을 바로 이끌어 가는 정신적인 지도자들이 되었다.

일본의 간디라고 불리는 '우찌무라 간조'나 대석학 '니토베 이나조'가 바로 삿포로 농림학교 출신들이었다. 이들은 클라크 교수의 절대적인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다. '우찌무라 간조'는 1877년에 삿포로 농림학교에 입학하여, 클라크 박사에게 1878년에 전도를 받아 학교에서 세례를 받았다. '니토베 이나조'는 16살 때인 1878년에 입학해서 클라크 교수에게 직접 전도를 받고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는 일본의 민주주의 시대를 대표하는 자유주의 사상가요 농정 학자였다. 그는 그 후 미국 유학을 떠났고, 미국에서  다시 일본으로 귀국한 후에 삿포로 농림학교 교수 와 도쿄 제국 대학의 교수를 지냈다. 나중에는 도쿄 여자 대학 초대 학장을 지낸 후 유엔 사무국 차장을 역임하였다.

클라크 교수 한 사람의 성경 말씀을 가르친 기독교 교육의 힘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는 일본이 국가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교육자로서의 사명을 다할 뿐 아니라 복음 전도가 자유롭게 허락되지 아니한 나라에서 학생들에게 사명을 가지고 복음을 전했다. 또한 학생들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올바르게 교육하고 도전을 주고 비전을 제시하여 줌으로 복음으로 무장된 기독청년들을 양육해 낸 것이다. 그리고 올바른 신앙 정신과 가치관을 가진 제자들을 가르쳐서 사회로 배출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그에게서 배운 제자들이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혼란할  당시에 일본의 사회 각계  각층으로 흩어져서 헌신적인 봉사자요 희생적인 민족정신을 가진 정신적인 지도자로 일한 결과로 사회 각 계층에서 아름답고 풍성한 열매가 맺히기 시작한 것이다.

다윗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말씀은 삶의 전부였다. 그 유명한 시편 19편 7절에서 11절까지의 고백을 보라.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完全)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確實)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正直)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純潔)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精潔)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眞實)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많은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 꿀보다 더 달도다 또 주의 종이 이것으로 경고를 받고 이것을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

이 어찌 사람의 묵상과 생각으로 이와 같은 깊이 있는 고백이 가능할 것인가. 다윗처럼 “여호와여 주의 도를 내게 가르치소서” 이런 기도 가운데 살아가고 그와 같은 기도를 할 줄 아는 후세들을 키워 내는 그런 가정과 교회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왜, 하나님의 말씀인 주의 도를 가르쳐 달라고 기도하는 것일까. 처음에는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알고 깨닫기를 원하지만 나중에는 그 하나님의 말씀 자체가 인생을 이끌고 가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일심(一心)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敬畏)하게 하소서.
다윗은 가난과 궁핍과 환란을 경험하였던 하나님의 사람이었다. 소년의 때에 베들레헴의 고향 집을 떠난 이후로는 십대 후반과 이십대를 포함한 십년이 훨씬 넘는 세월을 광야와 동굴에서 지내며 하나님의 인도하심과 연단을 가슴으로 삭히며 살아갔던 하나님의 사람이요 기도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7절에 보면, “나의 환난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라고 했다, 뿐만 아니라 본문 11절 하반부에 보면, “내가 주의 진리에 행하오리니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게 하소서.”라고 고백하고 있다. 다윗은 환란과 가난과 궁핍을 경험한 광야와 들판의 사람으로 살았던 날들이 있었기에 더욱 더 처절하게 하나님의 말씀의 진리를 행하며 온 마음을 다해서 일심으로 주의 이름을 경외하며 살아가고 싶은 간절한 열망의 사람이었다. 다윗은 신명기 6장 5절의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슴에 품고 생활 속에 행하며 살아가고자 씨름했던 경건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하나님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 깃이 여미어 지는 그런 생활 말이다. 오늘 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살아계신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자기 배를 신처럼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가. 이러한 때일수록 더욱 더 일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잘 경외하며 살아가는 겸비한 믿음의 용사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다윗처럼 이런 기도를 계속하여 드리며 살아야 할 것이다.

내게로 돌이키사 내게 은혜(恩惠)를 베푸소서.
주의 종에게 힘을 주시고 종의 여종의 아들들을 구원(救援)하소서.
은총(恩寵)의 표적(表迹)을 내게 보이소서.
여호와여! 나를 도와주소서.

하나님의 은혜를 깨달아 알고 주께로부터 매 순간 능력과 힘주시기를 소원하며 주의 온전한 구원하심을 앙모하는 삶을 살아가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우냐. 시편 중의 그 많은 다윗의 고백에 보며 구구절절이 반복되는 고백이 바로 은혜에 대한 고백이다. 가령 시편 4편 1절에 보면, “내 의의 하나님이여 내가 부를 때에 응답하소서 곤란 중에 나를 너그럽게 하셨사오니 내게 은혜(恩惠)를 베푸사 나의 기도를 들으소서.”라고 했다. 시편 5편 12절에서는 “여호와여 주는 의인에게 복을 주시고 방패로 함 같이 은혜(恩惠)로 그를 호위하시리이다.”라고 했다. 또 시편 6편 2절에서는, “여호와여 내가 수척하였사오니 내게 은혜(恩惠)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의 뼈가 떨리오니 나를 고치소서.”라고 했다. 또 시편 9편 12절과 14절에서는, “여호와여 내게 은혜(恩惠)를 베푸소서 나를 사망의 문에서 일으키시는 주여 나를 미워하는 자에게서 받는 나의 고통을 보소서 그리하시면 내가 주의 찬송을 다 전할 것이요 딸 시온의 문에서 주의 구원을 기뻐하리이다.” 시편 30편 10절에서도, “여호와여 들으시고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 여호와여 나를 돕는 자가 되소서 하였나이다.” 

다윗은 계속하여 은혜와 힘과 능력과 구원과 표적이 있는 도우심을 간절히 간구하고 있다. 시편 22편 19절에도 보면, “여호와여 멀리하지 마옵소서 나의 힘이시여 속히 나를 도우소서,”라고 주께 힘이 되어 주시고 도와주시기를 간구하고 있다.

간절히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고 일심으로 온전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의지하며 살아가다가 보면 시시때때로 아버지 하나님께서 힘을 주시고 능력 주시고 구원해 주실 줄로 믿는다. 
 
<크리스천이 꼭 알아야 할 믿음의 사람들>이란 워렌 W. 위어스비의 책에 보면 예수원의 설립자인 대천덕 신부의 아버지인 루벤 아처 토레이 선교사의 생애를 일목요연하게 요약해 준 내용을 읽어 보게 된다. 미국 뉴저지의 유복한 은행가의 아들로 태어난 그의 가족들은 회중 교회의 교인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주일 날 겨우 예배에만 참석하는 정도의 형식적인 교인이었다. 진정한 신자라고 여겨지는 주인공은 그의 어머니뿐이었다. 루벤은 자라나면서 법률가가 되고 싶어 했지만 어머니는 아들이 복음 사역자가 되기를 늘 기도하고 있었다. 루벤 자신은 아직 하나님의 부르심이 불명확하였지만 어머니의 간절한 기도는 늘 그에게 거룩한 부담이 되고는 하였다. 어느 날 밤에 그는 어머니가 죽는 꿈을 꾸었다. 꿈에 나타난 어머니는 아들에게 주의 종이 될 것을 권했다. 꿈이었지만 어머니에게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고 꿈에서 깨어났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법학도의 꿈을 품고 1871년에 예일대학에 입학하였다. 그의 나이 15살 때의 일이었다. 아마 당시의 학제는 그러하였나 보다. 그의 주변 학생들 중에는 카드놀이와 음주와 흡연과 댄스 등으로 시간을 보내는 대학생들이 적지 않았다. 의무적으로 예배 시간에 참석하긴 했지만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구주시라는 체험은 아직 없었다. 그런 그가 대학 2학년 때에 극도의 절망과 낙담과 우울증이 찾아 와서 자기의 목숨을 끊으려는 극단적인 고민까지 하면 겨우 학교 공부를 따라 가고 있었다. 언제나 아들을 기억하면서 기도하시던 그의 어머니의 기도 덕분인지 하나님은 루벤을 위기에서 건져 주셨다. 그 때 그는 누가 시킨 것처럼 무릎을 꿇고 기도하였다. “하나님! 지금 제 마음을 누르고 있는 절망과 낙심되는 마음을 제거해 주신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설교자가 되겠습니다.” 그와 같은 기도 후에 그의 마음에는 평안으로 가득 찼고 거짓말처럼 새로운 모습이 되어 있었다. 그는 3년 후에 예일대학 신학부에 입학하였다. 그 다음 해에 부모님이 3주 간격으로 모두 갑자기 돌아가시는 큰 충격을 받았으나 절망하지 않고 하나님만 의지하며 신학 공부에 전념하였다. 졸업할 때 즈음 처음으로 만난 D. L. 무디는 그의 앞날을 존귀하게 예언해주었다. “여보게! 젊은 친구 자네는 주의 일을 하는 게 가장 좋을 것 같네.”1878년 뉴 헤이븐 집회에서 무디는 루벤 토레이에게 “자, 젊은이 그럼 이제부터 시작하게”하고 도전하였다. 그는 졸업 후 장로교회 계통인 오하이오의 한 회중교회 담임 목사를 시작으로 나중에는 뉴욕 부르클린의 큰 교회의 담임 초청을 뒤로 하고 미니애폴리스의 작은 교회에 부임해서 일대일 전도와 복음 선포와 양육이 힘쓴 결과로 그 곳 교회도 점점 믿는 사람들의 수를 더해 가기 시작하였다. 그는 야고보서 5장 14절과 15절에 나오는 ‘믿음의 기도’를 적극적으로 믿었고 개별적인 치유의 체험을 믿었다.  그는 환자들을 위해서 진심으로 기도했고 병 고침의 역사를 체험했다. 그는 늘 성령의 권능과 도우심을 강조했다. ‘위로부터 능력으로 입혀질 때까지’(눅24:49)그 이전에는 설교하지 않았다. 나중에 그는 무디 사역에 합류하여 ‘시카고복음전도협회’의 책임 사역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나중에 그 유명한 무디성경학교의 시작이 되었다. 그 몇 해 후에 담임한 시카고 에비뉴 교회(1894-1906)의 12년 담임 사역은 오늘날 무디 기념 교회의 전신이 되었다. 120년 전인 그 당시에 이미 2,200명이 동시에 예배하는 큰 예배당에는 주일이면 루벤 토레이 목사의 설교를 들고 예배드리려는 신도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저들에게는 회심과 변화가 일어났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도움의 손길을 요청하는 일들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교회와 성도들은 집중으로 기도하는 모임을 갖기 시작했다. 루벤 토레이는 호주 집회를 시작으로 일본, 중국, 호주, 뉴질랜드, 인도와 영국을 골고루 방문하면서 사역하기 시작했다. 무디 곁에는 생키라는 이름의 유명한 복음 성가 가수가 은혜를 더한 것처럼 루벤 토레이 목사의 곁에는 찰스 알렉산더라는 복음성가 가수가 그의 사역에 힘을 더했다. 그는 가는 곳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 모든 배후에는 다윗처럼 주께서 내려 주시는 은혜를 힘입고 그 성령의 능력 안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의 도우심을 간구하던 성도들과 그의 식지 않는 믿음의 역사가 있었다. 남녀노유 누구나가 일심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경외하며 살아가노라면 각 분야마다에서 존귀하게 붙들어 힘을 주시고 은혜 주실 것이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각 사람에게 언제나 새롭게 능력과 은총의 표적이 있는 인생으로 도와주실 줄로 믿고 살아가자.

나를 위로(慰勞) 하옵소서.
사람은 누구에겐가 위로를 받고 또한 그 누군가를 위로하며 살아야만 하는 존재다. 세상에 자기 혼자서 유아독존(唯我獨尊)할 수 있는 인생이란 없다. 물론 수행을 위해서 혼자 지내는 경우가 간혹 있지만 하나님의 창조섭리는 독거하는 것을 좋지 않게 보신 것이다. 그래서 아담의 곁에 하와를 아내로 세워 주신 것이다. 사람은 부부 혹은 부모 자녀 혹은 형제자매 이처럼 서로 서로 간에 위로하며 살고 성도들 간에 서로 서로 위로하며 때로는 위로 받으며 살아가는 공동체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가족들 간의 위로가 귀하고 교회나 세상에서 그 누군가로부터 받고 나누는 위로가 다 귀하고 필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위로는 하나님께서 나를 위로해 주시는 주님의 위로인 것이다. 다윗은 하나님께 은총으로 받는 표적으로서의 도우심과 위로를 구하고 있다. 왜냐면 다윗의 곁에는 너무나도 많은 대적자들이 있었다. 다윗이 하나님께 그렇게도 사랑을 받는 것이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다윗을 미워하고 대적하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그래서 이런 기도를 드리는 것이다.

“은총의 표적을 내게 보이소서 그러면 나를 미워하는 그들이 보고 부끄러워하오리니 여호와여 주는 나를 돕고 위로하시는 이시니이다.”(시86:17)

하나님의 은총과 도우심과 위로가 아니면 살아갈 수 없는 인생이 다윗이었다. 1절의 고백대로 다윗은 가난하고 궁핍했다. 그리고 환란도 끊임이 없었다. 다윗을 도울 자는 세상에 아무도 없었다. 세상은 여전히 임금 사울의 천하였고 다윗은 누울 곳도 피할 곳도 없었다. 그래서 기도하고 또 기도하는 것이다. 오늘 본문으로 택한 시편 86편의 앞부분인 6절과 7절에서도 “여호와여 나의 기도에 귀를 기울이시고 내가 간구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나의 환란 날에 내가 주께 부르짖으리니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리이다.” 이처럼 계속하여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도하고 주의 위로를 간구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누구나 주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이다.

‘은혜로다’라는 복음성가를 다 같이 찬송하자.

 “은혜로다 주와 함께 거함이 은혜로다. 은혜로다 주와 함께 거함이 은혜로다.
 주가 계신 지성소에서 주를 찬송함이 내 영혼에 부어 주신 주의 큰 은혜로다.”

다윗의 가슴 속에는 꽉 찬 주의 은혜가 있었다, 그 은혜의 힘을 의지해서 기도하고 또 기도한 것이다. 주께 기도하면 주의 힘이 도우심이 되고 위로가 되고 은총의 표적이 된 것이다. 14절의 말씀처럼 다윗의 곁에는 늘 다윗을 일어나 치려는 교만하고  다윗을 죽여 없애려고 다윗의 영혼을 찾는 포악한 자들의 무리가 넘쳐났다. 그래서 기도하고 또 기도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시시때때로 다윗을 대적자의 무덤과 같은 스올에서 크신 인자하심으로 건져 주시는 하나님이셨다.

가이드포스트 2011년 8월호에는 89살 된 주정빈 의사 선생님의 간증이 실렸다. 그의 두 아들이 다 의사다. 충남 광천 공수골의 시골 소년이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에 유학하고 연세세브란스의과대학을 졸업한 후에 평생 하나님을 잘 믿고 주의 사랑을 실천하는 의사로 오늘 날까지 살아 온 간증이다. 6남3녀의 장남인 그는 어려서는 동네 안에서 대나무 쥐고 흔들고 작두 타는 것을 보는 것이 영의 세계의 전부였는데 한번은 4학년 때에 광천 읍내에 나갔다가 누군가가 전도지를 나누어주면서 복음을 전하는 말을 들어 보았다. 허무맹랑한 말로 들렸다. 그런 그의 어머니가 친히 지어 주신 두루마기를 입고 개성까지 가서 송도학교에 시험치고 입학한 후에 매주 예배를 드리고 성경을 배웠다. 윤치호 선생께서 오셔서 감동적인 강연을 해 주시고는 했다. 독립정신을 고취하고 하나님 신앙을 가질 것을 전할 때에 그 한마디 한 마디가 가슴에 못처럼 박히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그런 그가 평생토록 환자를 돌보며 예수를 전하고 두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 실천인 의사 일을 승계하여 많은 이웃들의 건강과 영혼을 섬기고 있다. 지금도 89살 연세에 아들 병원에 나가서 매주 수요일마다 환자를 진료하고 있는데 지역 환자들에게 아들 의사들보다 인기와 신뢰가 더 많다고 한다.

우리 신학 동기 목사의 95세 모친상에 조문했다. 조카들 돌보며 개척한 서산시내의개척교회가 안정되고 부흥했다. 12년 전에 누울 곳조차 없던 환경에서 초중고를 다닌 남매가 훌륭하게 컸다. 7년 전에 그 작은 개척교회에서 목사의 아들과 또 다른 고등부 학생이 둘이서 서울대학교에 합격했다. 지금 그 아들이 군대 제대하고 대 기업의 인력개발팀에 합격해서 연수중이란다. 영어와 아랍어를 전공해서 앞으로 아랍 쪽 담당으로 일한 재원으로 회사에서 얼마나 귀하게 여기는지 모른다고 한다.

준비되면 쓰임 받는 것이다. 하나님은 살아계시다. 지금 다윗처럼 가난하고 궁핍하고 환란을 겪는 것은 과정이다. 하나님은 소년기의 다윗과 청년기의 다윗이 소망을 갖고 기도할 때에 가난과 궁핍과 환란 중에서도 존귀한 임금으로 40년을 다윗성 예루살렘에 거하는 겸손한 왕이 되게 하셨다. 누구나 마찬가지다. 지금의 환경에 주저앉지 말고 기도하면서 믿음과 실력과 능력을 키워 가며 주를 전적으로 의지하다 보면 분야마다에서 존귀하게 하시고 복되게 하실 것이다. 주님만 잘 의지하고 주의 도우심과 위로를 간구하며 은총의 표적을 구하는 하나님의 사람답게 살아가자. 그렇다. 하나님은 은총의 하나님이시다. 여기서 '은총'(恩寵)이란 ‘토브’(TOBE)라고 해서 ‘좋다. 선하다. 아름답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은총은 막연한 은총이 아니라 좋고 선하고 아름다운 표징과 표적들을 공급해 주어서 영과 혼과 육의 필요를 풍족하게 채우시는 공급자이시다. 이사야 55장 13절의 말씀처럼 가시나무나 찔레나무가 아니라 잣나무와 화석류 인생으로 대신하여 살아갈 수 있도록 여호와의 기념이 되며 표징이 되게 하시는 분이 우리의 좋으신 하나님 아버지이시다. 사울 임금의 창과 칼을 피하여 광야에 눕고 동굴로 피하던 다윗이 위대하고 존귀한 왕이 된 것처럼 주님의 도우심과 위로를 간절히 간구하며 살아가는 주의 백성들이 모두 다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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